하루 아침에 배우 된 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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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감독님의 컷 소리에 나는 분주하게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세트장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세트장 안에 흩뿌려진 먼지를 표현하기 위한 가루들과 가짜 핏자국을 치우기 시작했고
감독님과 배우들은 방금 찍은 장면을 모니터로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는 영화 스탭이다.
01
내가 제작부 막내로 참여하고 있는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대박이다. 왜 대박이냐면...
한 명 모시기도 어려운 대배우들이 총출동한, 그야말로 초!초!초!!!! 대박 캐스팅이기 때문이다!
이정재, 정우성, 하정우, 주지훈 그리고 김혜수, 전지현까지.
거기에다 하는 작품마다 성공하는 메이저 감독님도 함께 한다.
영화과를 졸업하고 처음 참여했던 작품이 중간에 엎어지는 바람에 급하게 촬영 중인 현장에 며칠 전부터 출근하게 됐다.
어쩌다 보니 제대로 참여하게 된 작품이 이 작품이 돼버렸다.
이 작품은 '여름 밤' 이라는 제목으로 뭐.. 6명의 범죄조직원들이 벌인 화려한 한 탕이 한 여름 밤의 꿈처럼 흘러간다.....라는 내용인데
시나리오만 봤을 때는 잘 모르겠는데 촬영을 한창 진행하고 있는 지금은 대박이 날 것 같은 예감이 샘솟는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작품에 참여하게 된 것이 아주 기뻤고 열심히 해야겠다!!!.....마음을 먹었지만.....
세트장을 혼자 치우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은 조금 민망하고 뻘쭘하다...
"뭐? 교통사고가 났으면 그렇다고 미리 연락을 해줬으면 벌써 바꿨을 거 아니야!!!!
이제 29씬 찍어야 하는데 걔 하나 때문에 미룬다는게 말이 돼??? 이틀 전에 다친 걸 이제와서 얘기하는 이유가 뭔데!!! "
"감독님..... 조금만 진정하시고..... 캐스팅 매니저한테 연락 넣었으니 금방 대체할 애 데리고 올 겁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대체할 애???? 내가 걔 하나 뽑으려고 일주일 동안 몇 명을 본 줄 알고 하는 말이야??? 하.... 일단 캐스팅 매니저 빨리 오라고 해."
지금 이 상황은.... 범죄조직원 6명 중 하정우에게 인질로 잡히는 여학생 역할에 캐스팅 된 배우가 이틀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그걸 이제와서 얘기를 하는 바람에 그 역할이 빵꾸가 났다.
아무래도 그 쪽에서는 이틀이면 멀쩡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본데 마음대로 안 된 것 같다.
방금까지 하하호호 화기애애 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얼어 붙었고 괜시리 세트장 안에 혼자 있는 나는 눈치만 살피게 됐다.
"아오... 이건 왜 이렇게 안 지워지는 거야......"
"......"
분명히 분장팀에서 잘 지워지는 피라고 했는데 세트 바닥 재질 때문인지 자국이 잘 지워지지 않는다.
온갖 약품을 다 들고와 핏자국과 씨름을 하고 있는 중 갑자기 느껴지는 눈길에 고개를 들었더니.....
언제 세트장 안으로 들어왔는지 하정우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 경찰들과 싸우는 장면을 찍어서인지 얼굴에 상처 분장을 하고서 소품용 총을 들고 쳐다보고 있으니 괜히 무서운 마음에 눈이 마주치자 마자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 사이 캐스팅 매니저가 도착했는지 감독님은 큰소리로 화를 낸다.
"너 내가 이나 역할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아, 몰라. 결국 이나에 맞는 사람 못 구해서 분량 줄이긴 했지만 그래도 얘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데 관리를 이따위로 해????"
"죄송합니다 감독님... 저희도 교통사고 났었다는 걸 전달 못 받아서.... 이틀이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언제 활동 가능한지 알아보고, 그 다음..."
"걔 잘라. 스케줄 이 따위로 가볍게 생각하는 애 필요 없으니까. 걔도 썩 마음에 든 거 아니야. 그나마 비슷해서 뽑은 거지. 하....."
"아... 그럼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한 번만 더 설명해주시면 제가 진짜 책임지고 내일 안으로 데려오겠습니다 감독님.... "
어휴... 저 사람도 고생이 많다. 하지만 일적으로는 저 분이 관리를 잘못한 건 맞으니까...
그래도 스탭들 배우들 다 보는 앞에서 꼭 저렇게 해야 하나?
아 물론 윤 감독님은 원래 다혈질이라고 했으니까....
나는 모르겠고 내 일이나 열심히 해야겠다.
"키는 160 넘으면 안 되고"
"아...팔 빠지겠네, 진짜.."
"아담해야 해, 체구가"
"얘 왜 이렇게 안 지워져... 바닥에 스며든 거 아니야?"
"피부는 흰 편이어야 하고 딱 봐도 동정심이 생기는 얼굴에"
"스며들었으면 진짜 나 나가 죽을거야.....ㅠㅠ 세트팀 막내가 누구더라....."
"전체적으로 유하게 생겼는데 뭔가 사연 있어 보이고"
"아... 제발..... 치약까지 안 되면 나 울 거야.....ㅠㅠㅠㅠ 제발....."
"나이는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 정도."
"지워지나..? 아.. 치약은 다 된다던데.....ㅠㅠㅠ 어.. 좀 지워진 거 같기도 하고... 아닌가?"
"....."
가짜 피가 바닥에 조금 스며들었는지 잘 지워지지 않아 치약까지 동원해 바닥을 벅벅 닦고 있는데 내 앞으로 먼지가 잔뜩 묻은 구두가 멈춰선다.
쭈그리고 앉은 채로 고개만 들어 쳐다보면....
하정우다.
"....? 아..... 혹시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잠시 일어나 볼래요?"
난 막내이기 때문에 보통 다른 사람들의 심부름을 하는 경우가 많아 이번에도 시킬 일이 있나 싶어 벌떡 일어났더니
하정우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위 아래로 훑어보기도 하고 가만히 쳐다보기도 하고....
뭐 하는 거지?
"혹시... 물 필요하세요? 아니면 뭐... 물티슈...?
"....."
아무 말도 않던 하정우가 갑자기 내 손목을 잡고 번쩍 들더니 카메라 감독님을 향해 소리친다.
"정감독! 이 친구 좀 찍어봐요. 모니터도 연결해주고."
"네? 저를요? ...아, 잠시.. 잠시만요... 어..."
그렇게 소리치더니 나를 세트장 한 가운데에 세워두고 모니터 쪽으로 향한다.
곧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모니터 앞으로 배우들과 스탭들, 감독님이 모여든다.
자기들끼리 뭐라고 얘기하는데 모니터와 거리가 있어 잘 들리지 않아 뻘쭘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항상 카메라 뒤에 있던 나는 이렇게 카메라 앞에 서는 상황이 민망하고 어쩔 줄 모르겠다.
"갑자기 미안한데, 고개 좀 들어 볼래요?"
"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하정우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고
"옳지. 그대로 카메라 한 번만 쳐다볼까? 어.. 카메라 렌즈 말고 렌즈 조금 위에, 어, 거기. 거기 쳐다보면 돼."
"......"
쳐다보라고 하니 쳐다보긴 하겠는데...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고 눈동자만 이리 저리 굴리고 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괜찮은데... 연기를 할 줄 알아야지... 이미지는 딱이긴 한데." - 윤감독
"연기야 뭐... 상황이 만들어주는 건데. 기다려 봐요."
감독님과 얘기를 나누던 하정우가 다시 내 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온다.
여전히 카메라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내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돌리더니...
"29씬 내용 알죠? 내가 지금 그 쪽을 인질로 삼을 거예요. 그 쪽은 후미진 골목 편의점에서 일하는 야간 알바생이고. 아, 부모님은 없었나, 그랬던 거 같은데. 아무튼..
인질로 삼을 때 목 이렇게 잡는 거 알죠? 내가 그 쪽을 그렇게 잡을거야. 나는 지금 총을 들고 있어요. 아아, 왜 잡혔냐면..
재활용 쓰레기 버리러 뒷골목으로 왔다가 경찰과 대치 중인 나를 만난 거지. 이해하겠어요?"
"네..네네... 이해는 했는데... 이게 무슨.."
"오케이. 대사는 살려주세요, 하나야. 이해했으면... 액션"
액션 하는 소리와 함께 단 번에 내 뒤로 와 목을 붙잡고 카메라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모형총을 든다.
촬영장 내에 있는 모든 스탭과 배우들이 쳐다보고 있는 이 상황과 모형총임을 알고 있지만 실감나는 총 모양에 저절로 몸을 떨게 만든다.
"자꾸 쫓아오면 이 년 죽는 거야. 경찰의 미흡한 대처로 인해 선량한 시민 사망. 청장님이 아주 좋아하겠어. 어?"
"....사...살려주세요...."
내 앞에는 우리 쪽을 쳐다보는 수많은 눈들이 보여 너무 무서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고 사람들의 시선을 못 버티겠어서 눈을 질끈 감았고....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목을 조이고 있는 하정우의 팔을 잡았고 나도 모르게 살려달라고 말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너무 무서워요..
"....컷! 잠시 쉬었다가 가자." - 윤감독
감독님의 말에 다들 수근수근 거리며 촬영장에서 벗어났고 그제서야 내 목을 잡고 있던 팔을 풀어주는 하정우에 아직도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벅벅 닦았다.
하정우는 눈물을 닦는 내 등을 살짝 토닥여주었고 어느 새 제 쪽으로 다가온 감독님은 반짝이는 눈으로 휴지를 건넸다.
"어... 얼굴이 좀 낯선데.. 혹시 어디 팀이야?" - 윤감독
"아... 제작부.. 제작부 막내입니다..."
"아, 어제부터 출근했다는 막내구나. 잠시 얘기 좀 할까? 야! 현수야!" - 윤감독
얘기 좀 하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니 감독님이 조연출을 불렀다. 아직도 떨리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는 기분이다.
옆에 서있는 하정우를 힐끔 쳐다봤더니 작게 웃으며 방금 전 목을 부여잡는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준다. 이 와중에 심쿵....ㅠ
감독님의 호출에 뛰어온 조연출에게 감독님은 주연 배우들과 카메라, 조명 감독님을 대기실로 다 부르라고 하곤 나와 하정우를 대기실로 데리고 간다.
진짜 이게 다 무슨 일이야.... ㅠㅠㅠㅠㅠㅠ
한 10분 쯤 지났을까 주연 배우 6명과 카메라, 조명 감독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TV나 영화관에서나 보던 배우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게 되니... 저절로 긴장이 된다ㅠㅠ 살려줘 제발....
아무리 같은 작품을 하고 있다고 해도 배우들은 대부분 감독님들과만 얘기를 하기 때문에 나 같은 막내 스탭들은 배우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경우는 거의 없다.
"예전에 내가 초고라고 보내줬던 시나리오 기억나? 거기에 나오는 이나 역. 어때?" - 윤감독
"이 친구?"
"어. 우리 제작부 막내래. 이름이..." - 윤감독
"아..아... 은솔...유은솔입니다."
"어, 그래 은솔이. 은솔이는 어떻게 생각해? 연기 나쁘지 않던데 아까 보니까. 음... 우리 영화에 출연할 생각 있어?" - 윤감독
"....출연이요....? 저..저는... 연기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소릴까...? 단 한 번도 연기 해본 적도 없고 해볼 생각도 없었는데...
그리고 아까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 무서워서.. 그래서 그런건데....ㅠㅠ
"진짜? 한 번도 안 해봤어? 되게 자연스럽던데"
"..네... 저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처음이고....."
"카메라 빨 잘 받던데? 애기라서 그런가 조명을 안 켜도 피부가 뽀얗더라"
"...아....감사합니다아...."
여신 같은 전지현 언니가 내 칭찬을 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ㅠㅠㅠㅠ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면서 감사 인사를 했더니 주변에선 웃음이 터졌다.
카메라 감독님과 조명 감독님은 윤감독님만 괜찮다면 오케이라며 장비 정리하러 먼저 가보겠다고 나갔다.
그리고 난.... 이정재, 정우성, 하정우, 주지훈, 김혜수, 전지현... 이 여섯 사이에서 진땀을 빼고 있다.
"아가, 몇 살이야?"
"저.. 저어는... 아가는 아니고.. 스물 여섯 살입니다아..."
"스물 여섯이면 아가지"
ㅠㅠ
"근데 진짜 연기 처음이에요? 몰입을 엄청 잘 하던데. 나 놀랬잖아~"
"그쵸, 언니. 나도 놀랬어. 그리고 이나 역이 중요한 역할이라 나도 첫 시나리오 읽을 때 집중해서 봤는데... 이게 웬일이야, 내가 상상했던 이나 그대로라서 놀랬어."
"..아니... 그건.... 하정우...어... 하정우...선배님이... 설명을 막 해주시고... 그리고 카메라가 무서워서...."
"어우, 그만 좀 해요, 애 울겠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지훈 덕분에 그제서야 질문 공세가 끝났고 조금씩 진정되는 듯 했다...^^...
".....은솔이 생각은 어때?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래, 지금 시나리오도 좋긴 한데, 처음 받았던 시나리오가 훨씬 좋았거든. 이나가 범죄를 멈추게 하는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고
이나가 있어서 더 설득력이 있거든. 그리고 은솔이 네가 감독님이, 그리고 우리가 생각했던 이나 그대로이기도 하고"
"......"
"은솔이 네가 한다고 하면 첫 시나리오로 다시 수정할까 해. 수정이 많이 들어가야 해서 촬영이 좀 밀릴 것 같긴 한데. 그 정도로 난 네가 간절하다는 뜻이야. 어때?" - 윤감독
"......"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상상도 물론 해본 적이 없다.
화려한 배우의 삶이 부러웠던 적은 있지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너무 당황스러운 마음에 대답을 못 하고 있자 김혜수 언니가 내 옆자리로 와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뭘 걱정하는 지도 알고 뭐가 무서운 지도 알아. 지금 당장 대답 안 해도 되니까 충분히 생각해보고 그때 결정해도 돼"
"그래, 지금 당장 대답 안 해도 되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 윤감독
"오, 그럼 오늘 촬영 여기서 끝?"
내 결정에 따라 시나리오를 수정하냐, 마냐가 결정되는 거라 오늘 촬영은 무의미하다고 느꼈는지 감독님이 오케이 하셨다.
하.... 그냥 한다고 했어야 했나ㅠㅠ
입술을 꾹 다물고 울상을 짓고 있으니 하정우가 다가와 말을 건다.
"너 때문에 촬영 접는 거 아니야. 걔 누구야, 지....뭐랬는데, 암튼 오늘 안 온 걔 때문이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래~ 은솔이 때문 아니니까 걱정 말고 밥 안 먹었지? 밥 먹으러 가자"
"..밥이요..? ...같이 먹어요..?"
"그럼 혼자 밥 먹으라고 보낼까 봐?"
"우리 아가는 뭘 좋아하나~"
하....저 체할 것 같은데.... 그냥 따로 먹으면 안 되나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