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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박지민] 불나비 04 | 인스티즈




자우림 - 6월 이야기

반복재생 부탁드립니다.




불나비

04




 쓸쓸함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잘게 부서진 모래와도 같은 저의 마음에 검은 흔적을 드리우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전신이 썰물에 휘말려 들었다. 가늠할 수 없는 수심. 발버둥 칠수록 멀어지는 육지. 수포처럼 떠오르는 무력감. 그럼에도 발버둥을 멈추지 않을 것을. 이제는 안다. 제가 도착할 곳이 육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끝없는 투쟁은 계속될 것을. 죽음은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고.


 “연화. 이것 좀 먹어봐요.”

 “이게 뭐야?”

 “차예요. 얼마 전에 옥경이랑 중국 다녀왔거든요. 제가 예전에 많이 가던 찻집인데, 딱 그날이 마침 개점 20주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차를 시음해 보라는데, 연화 생각이 나더라구요. 맛있어요.”


 이른 아침부터 연화의 문 앞을 찾아온 예양이 손에 들린 붉은 상자를 불쑥 들이밀었다. 받아들자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예양은 해맑게 미소 짓고 있었다. 눈가가 옅게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 달이 지났음에도 멍이 남아있는 까닭은 그녀의 살성이 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벼운 화장으로 가려질 정도였다. 예양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찻집 주인이 어떤 농담을 했는지, 언제부터 자주 가던 가게였는지까지 줄줄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고마워. 잘 마실게.”

 “어땠는지도 알려주세요, 연화.”

 “알겠어, 그럴게. 당장 이틀 후니까 예양은 얼굴에도 약 잘 바르고. 당일에는 대마 피우지 말고. 잘 알고 있지?”

 “그럼요. 얼른 일 보러 가셔도 돼요.”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연화는 예양에게 습관처럼 당부의 말을 하곤 했다. 연화가 손을 뻗어 예양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예양이 제 두 손을 배에 얹더니 그대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예양을 닮은 인사였다. 고개를 끄덕인 연화가 다시 방문을 열었다. 상자를 놓기 위함이었다.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 전신거울 옆에 상자를 두었다. 문득 금고가 눈에 띄었다. 금고 앞으로 걸어가 허리를 숙였다. 다이얼을 돌려 문을 열자 경매 이후 자신이 정리해 놓은 그대로였다. 그대로 거래 장부를 꺼내어 들었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책상 서랍을 열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장부와 바꾸었다. 간혹 연화는 그랬다. 제일 중요한 걸 금고에 두지 않고, 필요 없는 것을 금고에 둔다든지. 중요한 물건을 쓰레기처럼 버려 놓는다든지. 금고의 장부와 거짓 장부를 바꿔 치는 동안 지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민은 그런 연화의 버릇을 알았다. 그런 연화의 모습을 보며 입을 뗐다.


 “연화.”

 “이틀 후에나 돌아오는 거지?”


 사실 연화는 당장 코앞에 닥친 바쁜 일은 없었다. 그저 지민을 배웅하기 위해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지민은 임무를 받았고, 거래 당일에나 돌아올 것이다. 지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작 이틀이 뭐라고. 당일 새벽에 돌아올 것이니 48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연화에게는 그 고작이 크게 다가왔다. 공백이 컸다. 지민은 옅게 웃었다. 


 지민은 웃고 있으면서도 입안이 썼다. 연화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도, 제 눈에 오래 담아두려 시선을 떼지 않아도. 눈만 감아도 그려지는 연화의 얼굴이 언젠가 갑자기 그려지지 않을까봐 그랬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그랬다. 조금이라도 다정하지 않았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터인데. 아니, 사실 다정하지 않았더라도 제게는 예고되지 않은 숙명이었다. 달아오르다 못해 절절 끓고야 마는 제 마음은.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는 발버둥을 치는 이유였다. 연화 그 자체로도 저 자신의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잡은 손끝이 영원히 붙들려 있었으면 했다. 가슴이 먹먹해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그녀를 아무리 불러도 끝이 없었다. 한 번이라도 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제 이름이 듣고 싶었다.


 “지민아.”

 “연화.”

 “응.”

 “내가 돌아올 때까지, 조심하고 있어. 다치지 마.”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이 매번 당부하는 말이었다. 하지를 앞두고 옷차림이 얇아졌다. 말없이 제 얼굴을 쓰다듬는 지민의 손을 잡았다. 나비가 자리 잡고 있을 자리를 매만졌다.


 “자리 비워서 미안해.”


 지민이 말했다. 음절의 끝이 갈라져 연화를 찔렀다. 매일 있던 일상임에도 지민은 그렇게 말했다. 연화는 그저 웃었다. 그의 눈동자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민이 짧게 숨을 뱉었다. 미안할 사정은 없었다. 그가 자리를 비워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연화는 굳이 무언가를 덧붙이지 않았다. 지민의 얼굴이 그대로 연화와 가까워졌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지민은 꽤나 오랫동안이나 연화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 뇌리에 박을 것처럼. 그렇게 입을 맞췄다.


 차에 탄 지민은 자꾸만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조수석이 비어있는 것이 못내 헛헛했다. 연화의 향수 냄새가 코끝에 남아 있었다. 제 선택을 후회할 일조차도 없을 테지만, 선택이 아닌 자신을 후회하는 일은 제 일상이었다. 한숨 소리가 낮게 흩어졌다. 시동을 껐다.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익숙한 공기였다. 차가 정차하자 건물에서 나오는 한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지민은 그를 보며 차 문을 열고 발을 바깥으로 내디뎠다. 문을 닫자 그의 형체가 가까워졌다. 지민은 가까워지는 그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게 네 결정이야?”

 “…허튼 짓 하지 마.”


 지민이 말했다. 그가 지민을 스쳐 지나갔다. 지민이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지민이 숨을 한 번 참았다. 내쉬는 숨이 거칠었다.


 “나는 분명 말했어. 허튼 짓 하지 말라고.”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민이 빠른 걸음으로 단숨에 그의 코앞까지 걸어갔다. 맞부딪힌 눈길이 뜨거웠다. 그가 지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민이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대로 그의 옷깃을 잡아챘다. 그가 지민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지민의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무리 너라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래, 알겠어. 나도 네 결정 충분히 동의하니까.”

 “…뭐?”


 지민의 손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그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지민이 할 말을 잃고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이 그대로 먼저 그를 지나쳤다. 이제는 그가 지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민이 지금 당장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임무 중에 닥치는 위험 따위, 저의 안위는 조금도 걱정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아직도 생생한 연화의 얼굴을 그렸다. 제 머릿속에 떠오르기만 한다면 저는 다 좋았다.


 “디아바이오….”


 지민이 없는 사이 연화는 다른 일정에 몰두해야만 했다. 곧 거래가 이루어질 것이고, 또 이어서 자선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 자선 행사에는 저와 지민 말고도 옥경과 예양이 참석한다. 둘은 모녀의 역할을 해낼 것이다. 자연스럽게 행사에 참여해서 다른 기업의 상황을 파악하고, 때론 리안화의 거짓 정보도 흘리고. 그들은 리안화의 이름이 아니라 계열사 중 호텔 경영을 담당하는 LB 호텔의 이름으로 참석할 것이다. 때로는 예양의 결혼 상대를 찾는 것처럼 혼담이 오가는 사이 정보를 빼오기도 했다.


 연화는 거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오전 5시, 위치는 인천 북성포구 폐창고 주차장이었다. 화물차 4대가 동행할 것이다. 화물차는 거래 차량의 양옆에 정차하고, 그 사이에서 단시간 내에 거래가 이루어질 것이다. 예양이 다시 한번 품질을 검사하고 수량 확인 후 약속된 금액을 건네어 준다. 화물차에는 조직원 열 명 남짓하게 탑승하여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다. 연화가 한숨을 내뱉는다. 오전 5시까지, 네 시간 남짓 남았다. 곧 지민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 지민이 없는 사이 연화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비어있을 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민의 방문을 두드렸다. 열고 들어갈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가 안에 있다고 생각해야 위안이 되었다. 그가 제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시 지민이다. 연화의 고개가 돌아갔다. 불쾌하게 부유하던 마음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연화가 문을 열었다. 이틀 전 제 앞을 나설 때보다 더 가벼운 옷차림의 그가 서 있었다. 연화는 무작정 손을 잡았다. 제가 아끼던 나비 타투, 그것을 매만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옅게 웃었다. 방안에 전등 하나만 켜둔 채라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그가 자주 착용하던 은빛의 피어싱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잠깐, 갈 데가 있어.”


 연화의 한 마디에 도착한 곳은 리안화 갤러리였다. 지하 2층 경매장, 경매가 열리지 않는 날이면 연화는 그곳에 있기를 좋아했다. 연화가 먼저 발걸음을 내딛자 그가 뒤를 따랐다. 연화가 익숙한 향수 냄새에 눈을 감았다. 경매가 없었으므로 바닥의 조명과 주황빛의 샹들리에가 점화되었다. 연화가 등을 돌렸다. 초록빛의 물살이 그대로 연화의 얼굴에 비쳐 아른거렸다. 그가 가만히 연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민아.”

 “보고 싶었어.”


 연화의 앞으로 걸어온 그가 양손으로 연화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숨이 고르지 않았다. 얼굴을 잡고 있는 손이 잘게 떨렸다. 연화가 그 떨림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이나. 연화가 웃어 보였다. 그가 짧은 숨을 한 번 내쉬더니 그대로 옅은 미소를 띠었다. 연화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래, 나도.”


 그의 숨이 짧게 멈추었다. 입꼬리를 더 끌어올린 그가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익숙하게 그의 손을 매만진 연화가 고개를 기울였다.


 “지민이, 염색했구나?”


 더 멀리서 보려는 것처럼 연화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머리칼을 한 번 건드렸다. 연화가 좋아하던 그 색이었다. 색이 빠져가던 짙은 분홍색에서 처음 염색을 했던 그때처럼 붉은빛까지도 돌았다. 연화가 조금 더 좋아했던 색. 연화는 앞으로 있을 일의 절차나 걱정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네, 맞아요. 바로 알아보네?”

 “그럼, 당연하지. 내가 좋아하던 색이잖아.”


 말을 마친 연화가 그대로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헤엄치지는 못하는 잉어를, 떠다니면서도 호흡하지 못하는 연꽃을 바라보며. 곧장 걸었다. 부러 보폭을 일정하게 일직선으로 걸었다. 가끔 경매장에 들어오면 보이는 연화의 버릇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는 연화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천천히, 속도를 맞춰서.


 “그래도 네가 다쳐온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멀쩡해. 지민이 네가 그러라고 해서.”


 연화가 다시 등을 돌렸다. 네 발자국 앞에 그가 서 있었다. 잠기지 않은 셔츠 사이로 나비 펜던트가 비쳤다. 그의 시선이 낮아졌다. 연화가 숨을 내뱉는 간격이 길어졌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흘러나와야 마땅할 클래식도 없었다. 연화는 불과 몇 시간 전과 비교해도 기분이 나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눈에 띄는 상처가 없어 보여서 다행이었다. 간혹 지민은 얼굴에도 상처를 만들어 오기 일쑤였다. 단순한 지시 하달과 수행에 그치지 않고 따로 지민을 부르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민이 제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시점에는 그것이 참 걱정되었다. 제 앞에서는 괜찮다고 웃어 보일 지민을 알았다. 


 연화는 문득 제 기억 속의 지민을 떠올렸다. 십 년도 더 되었다. 연화는 지민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지민은 제 이름을 궁금해했을까? 연화는 그것이 궁금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표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이 들다 못해 검게 물들어 있던 그의 손을 기억한다. 흘리던 땀방울까지도. 연화는 아직도 왜 그의 모습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곧 죽어도 그곳에서 죽을 것처럼 굴었다. 간혹 마주치던 눈빛. 그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 일이 있기 1년 전. 아마 제가 열일곱, 지민이 열넷 무렵일 것이다. 사실 연화는 알고 있다. 이제는 제가 먼저 고개를 돌려도 지민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는 것을.


 “…정말 다행이야.”

 “응. 아, 시간 다 됐다. 가자, 지민아.”

 “네, 가요.”


 그의 시선이 연화의 장갑으로 향했다. 옷차림처럼 얇아진 자수가 놓인 장갑 위로 시계가 둘려 있었다. 연화가 짐짓 웃으며 시계가 있는 손목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지민이 있을 때면 항상 그가 채워주던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오기 전에 직접 채웠다. 그의 손길을 받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제가 직접 하려니 자꾸만 손길이 어긋났다. 그의 손길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네가 채워줄 땐 몰랐는데, 혼자 하려니까 시간 좀 들었어.”


 연화의 말에 그가 어리숙하게 웃었다. 언제나 그랬듯 연화가 먼저 앞장을 섰다. 그는 연화의 좌측에서 조금 떨어져 걸어올 뿐이었다. 걸을 때마다 두 사람의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연화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근데, 다시 염색하려고.”

 “무슨 색으로?”

 “검정색.”


 먼저 정적을 깬 것은 그였다. 차로 향하던 연화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고개를 잠깐 돌려 그의 머리칼을 확인했다. 주변이 어두운 탓에 색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가 먼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연화가 자연스럽게 먼저 올라타고 그가 반대편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그가 손을 뻗어 연화의 안전벨트를 죽 잡아당겼다. 


 “검정색도 예쁠 테지만. 왜?”

 “그냥. 지금은 너무 튀는 것 같기도 하고.”


 안전벨트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화가 가까워진 그의 머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또 한 번 더 안전벨트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차가 출발했다. 앞으로 한 시간가량 걸릴 예정이었다. 창밖으로 가로등이 스쳐 지나갔다. 시트에 등을 기댄 연화가 그것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비치는 창문으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나도 가끔 머리색을 바꾸고 싶더라.”

 “연화.”

 “응?”

 “예양 말인데.”


 연화가 다시금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틀 동안 무언가를 더 알아낸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연화는 그에게서 무슨 말이 들려올지 알 수 없었으나 입을 가만 다물었다.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일을 하나 더해준 격이니. 연화는 시기가 참으로 아쉬웠다. 경호 문제이기도 했고, 단순히 제가 알아보기에는 눈에 띌까 싶어 그랬는데도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연화는 침을 한 번 삼켰다. 뒤따라오는 차에는 예양이 타고 있었다.


 “대마를 넘기고 신종 합성 마약을 받았던 모양이야.”

 “어디에서.”

 “아마, 중국. 크라톰 같은 걸 말이야. 거래에 문제가 있어서 그들이 한국으로 넘어왔고.”

 “예양을 찾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둔기로 맞은 듯한 예양의 상처가 눈앞에 떠올랐다. 연화는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을 아꼈다. 대마초라면 예양이 거래하는 루트가 따로 있었다. 그렇다면 당장 있을 거래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을 테고. 대마초를 얻는 정도의 개인행동이라면 연화가 모르는 척 넘어가도 상관은 없었다만 저번처럼 쫓기는 등의 행위는 불필요했다. 연화가 도와 당장 예양의 문제를 해결하든, 예양이 제 일을 끝맺음하든. 무언가 대안이 필요하긴 했다. 그러나 연화는 가만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 굳이 연화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예양의 일이라지만 연화는 자신이 일을 도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크라톰?”

 “크라톰 티. 보통 차랑 마시는 거야. 불안 진정 효과가 있다고 하지.”


 연화는 문득 예양이 자신에게 내밀었던 찻잎을 떠올렸다. 얼마 전 옥경과 다녀온 중국에서 사왔다는 찻잎. 자신이 자주 가던 찻집에서 사왔다고 했다. 그것과 관련이 있을까? 알아볼 필요성은 있었다. 연화는 옆에 앉은 그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제게 말하는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연화는 지민에게 남은 일을 부탁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에게는 앞으로도 몇 가지 일이 더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제가 받은 찻잎에 크라톰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지, 예양이 자주 가는 찻집에서 마약 거래가 이루어진 것이 맞는지. 또, 옥경은 그것을 알고 있는지.


 “알아봐줘서 고마워.”


 낮이 길다는 하지가 가까워진 것이 맞는지, 점차 하늘이 옅게 물들고 있었다. 연화가 타고 있는 차를 둘러싸고 화물차가 정차했다. 그 뒤로 예양이 탄 차가 따라 들어왔다. 연화가 제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바라보았다. 4시 50분, 약속된 시간까지 10분 남았다. 몰려드는 생각에 연화는 눈을 감았다. 연화가 입술을 씹었다. 예양이 중국 마약 딜러와 접촉한 것은 언제부터였더라. 제 예상에서 벗어난 일은. 제가 다 알고 있어야 했던 것이 맞나? 두통이 밀려왔다. 잠에 들고 싶었다. 저 몰래 일을 벌이고 들켜버린 예양에게 어떤 지시를 내려야 할지 몰랐다. 정확히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유일하게 연화와 잦은 접촉을 이어가는 이들이었다.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모든 일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연화는 알고 있다. 모든 일에는 해명이 필요하다. 저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다면 연화는 넘어갈 수 있다. 모르는 척, 없던 척. 연화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제 선에서 모든 일을 묻어버리고 말 생각이었다. 그 시작은 중요하지 않았다. 연화는 종착점이 자신이라면 기꺼이 눈 감을 수 있었다.


 “연화. 내려야 할 시간이야.”


 연화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가 문을 열고 서 있었다. 저 자신만 빼고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짜인 각본처럼 익숙하게 제 자리를 찾아 서 있는 이들. 연화가 발을 내디뎠다. 상대는 여섯 명 남짓이었다. 리안화와 제휴를 맺은 약품 제조 기업이 양산한 마약 조직이었다. 그들이 연화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연화와 그의 곁으로 네 명의 경호원, 뒤로는 예양이 따라붙었다. 연화가 걸음을 멈추자 예양이 그대로 전진했다. 열린 트렁크 사이로 여행용 가방 여럿이 보였다. 열린 가방 새로는 ‘아이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정적이 감돌았다. 그 누구도 나서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경호원은 모두 언제라도 사격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양의 손 위로 고체의 아이스가 떨어졌다. 그녀가 그것을 왼손 검지로 눌러 보였다. 약한 힘에도 잘게 부서져 손 위에서 가루로 남았다. 숨을 한 번 내쉰 연화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예양이 입을 열고 혓바닥을 내밀었다. 붉은 혓바닥 아래로 흰 가루가 달라붙었다. 입을 다문 예양이 한동안이나 입안에서 혓바닥을 굴렸다. 제 손 남아있는 가루의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다시 손가락으로 눌러보기도 했다. 상대도 그런 예양의 모습을 긴장한 티가 역력한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도 소문을 들어 알았을 것이다. 아마 오 개월 전쯤, 불순물이 섞인 암페타민을 신종 아이스라는 이름으로 거래를 시도하려다 조직에 돌아오게 된 것은 조직원이 아닌, 피가 섞인 불순물뿐이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순간, 예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래 물품이 맞다는 수신호였다.


 “액수 확인하시죠.”


 연화의 말이 전해진 순간 예양이 연화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조직원 세 명이 현금이 담긴 가방을 열었다. 연화가 팔짱을 꼈다. 하늘이 더욱 밝아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저쪽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돈이 담긴 가방과 아이스가 담긴 가방이 동시에 오갔다. 연화는 상대 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연화가 움직이지 않으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못했다. 검은색 벤이 화물차가 만들어 낸 사각지대를 빠져나갔다. 연화가 손을 한 번 휘젓자 리안화의 모든 이들이 제 자리를 찾아갔다. 


 “예양.”


 그러나 연화의 부름에 예양은 그러지 못했다. 그가 연화의 옆에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예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화가 예양의 앞으로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예양은 코앞에 있는 연화를 바라보았다. 예양이 잔잔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키가 비슷했음은 물론이고 같은 높이의 구두를 신고 있었던 탓에 눈높이가 같았다. 예양은 연화의 눈빛에 한 번 몸을 잘게 떨었다. 예양은 연화가 먼저 말을 시작하기 전까지 입을 뗄 수 없었다. 연화가 예양을 향해 던지는 시선이 그렇게 만들었다.


 “지민아.”

 “네, 연화.”

 “먼저 들어가 있을래?”


 예양은 그 말에 잠시 숨을 참았다. 연화에게서 느껴지는 압도감 때문이었다. 연화의 말을 들은 그가 예양에게 잠시 시선을 던지더니 연화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예양은 멀어지는 발소리에도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옥경에게 들었던 연화의 과거가 갑자기 왜 떠오르는지 예양은 알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들어 그랬는지, 평소 연화가 제게 다정하게 굴어 그랬는지 공포심이 배로 늘어났다. 연화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예양은 입안이 바싹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예양.”

 “…….”

 “예양.”


 그녀가 대답이 없자 연화는 재촉하듯 그 이름을 다시 불렀다. 예양은 침을 삼키려고 했지만 입안이 꺼끌꺼끌하게 메말라 따가울 뿐이었다.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따가움에 예양은 헛기침이 나올 뻔 했지만 그것을 다시 삼켜내었다. 연화는 차분히 예양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머릿속을 범람하는 상념이 정리가 되지 않아 그랬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제게 말하는 어조, 음절, 무엇이든. 저는 수용해볼 심산이었다.


 “네, 연화.”


 그와 같은 대답이었지만, 예양의 대답은 또 다른 울림이 있었다. 연화는 예양의 목소리에 대해 설명하던 옥경의 말을 떠올렸다. 가녀리고, 떨림을 가진 목소리.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만 같은. 이제야 연화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딱 그랬다. 옥경이 설명한 것처럼. 연화는 고개를 돌려 그가 있을 차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차에 등을 기대고 서 있을 뿐이었다. 연화는 그게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임을 알았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제 앞에서 눈을 깜작이는 그녀가 있었다. 피곤함이 제 어깨를 짓눌렀다.


 “무엇이 되었든. 내게 그 일을 납득시켜야 할 거야.”

 “…알겠어요, 연화.”

 “그게 안 되면 날 설득하기라도 해.”


 연화는 그대로 예양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로 등을 돌렸다. 만약 예양이 자신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런 상황이 닥치면 연화는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무턱대고 예양을 믿는다는 것은 우스운 소리였다. 다만, 믿고 싶었다. 제가 옥경과 같이 예양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예양이 제게 있어 지민과도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러고 싶었다. 제가 등을 돌리는 것은 리안화가 등을 돌리는 것과도 같았다. 마음이 얼얼했다.


 물속에서 소리친대도 누구 하나 목소리 들을 이 없다. 차라리 아무도 모르게 두는 것이 이로울지도 모른다. 제가 절망에 잠식되어 가는 것을 모르는 편이. 잡아먹히겠다 다짐하고 이를 두려워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위한 침묵인가. 정말로 그이는 나의 침묵을 달가워할까.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면 그저 절망의 먹잇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수면 위로 떠오를 그 찰나에 목을 찢어 소리를 지를 때, 지금이 아닌가.



202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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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81.56
ㅠㅠ브금부터 내용, 분위기가 최고네요 작가님 오래오래 글 써주세요
3년 전
소슬
감사합니다! :)
3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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