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해보인다고 멀쩡한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자신이 제일 잘 아는 분야에서 놓친게 있었다. 바로 민규였다. 매일 밝아보인다고 괜찮을거라고, 아니 적어도 자신이 돌아왔으니 이제부터 잘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여주는 민규의 울음을 본 순간 그런 자신이 끔찍이도 싫었다.
지훈) ...여주는?
석민) 김민규랑 나감.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여주와 민규가 외출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원우와 외출이 잦던 여주는, 원우와 나갈 때 민규를 데려간다거나, 원우와 나갔으면 그 주에 민규와 꼭 또 외출을 하곤 했다.
석민의 대답에 지훈도 어느덧 익숙해진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부엌으로 향했고, 무료하게 티비를 돌리던 석민이는 앉아있던 몸을 완전히 눕혔다. 그리고 채널을 한군데에 멈추더니 티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참 집중해서 보고 있었을까, 민현이 방에 나와 소파에 앉으며 티비 옆에 붙은 달력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민현) 벌써 한 해가 다갔네.
석민) ...그러게.
민현) 왜이렇게 1년이 빠른지, 1월이 언제 됐다고 벌써 12월이야.
석민) 그니까. 연말되면 항상 나 올해는 뭘 한걸까? 싶고 그래.
민현) 맞아. 근데 아마 다들 그러지 않을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와 뭐했다고 12월이야. 이런거잖아 ㅋㅋㅋㅋㅋ
석민) 그치 ㅋㅋㅋㅋㅋ 사실 모두들 잘해왔는데 그런 말 하는 걸 수도.. 또 나만 진심이었지..
민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민현) ....유치원은 다닐만 해?
석민) ....그럼.
민현) ...안다니려다가 다니려니까 힘든가 싶어서.
여주 없을 동안 쉬었잖아.
석민) ...아냐, 좋아. 애기들도 좋고, 여주 와서 좋고.. 돈도 버니까 좋고..
민현) 그럼 다행이지. 서운한 건 없고?
석민) 뭐가?
민현) 여주한테.
민현의 질문이 어떤 걸 묻는지 석민도 잘 알았다. 민규처럼 약 복용은 하지 않았어도, 일상 생활이 잘 되지 않아 일도 못다닌 채 집에만 박혀있던 건 민규 뿐만 아니라 석민도 마찬가지 였으니. 며칠 전 그걸 지수가 여주가 야기 했던 거고, 민규도 그와 동시에 터뜨린 것이었는데, 그 이후로 자주 놀러 나가는 둘이 서운하지 않냐는 민현의 질문이었다.
석민) 글쎄, 별로. 민규가 나보다 아팠던 건 사실이기도 하고, 여주가 나가기 전에 내가 어디가냐고 물어보면 같이 갈래? 하고 되물어주기도 하니까 딱히 서운하진 않지.
민현) .............
석민) 그리고 여주가 없던 동안 나도 일 못다녔던거 말하고 싶지도 않아. 민규 하나로 족하겠지.
민현) 그렇겠지.
둘의 대화가 끝나고 티비 소리가 둘 사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민현이 이내 마음에 걸린 석민과의 대화를 끝내니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어낸 듯 옅게 웃어보였다.
새해가 찾아왔다.
올해는 네가 떠나지 않고, 우리 곁을 머물 수 있을까.
승관) 다들 언제 갈거임?
순영) 난 설 전 날.
승철) 오 나랑 같이 가자.
찬) 나도 전 날!
설날이 다가오고, 아침 식사를 하는 아이들의 대화 주제는 언제 본가에 내려가냐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같은 곳에서 나온 만큼, 서로의 본가가 가까웠기 때문에 내려가는 날짜가 겹치는 아이들끼리 같이 가자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석민) 울엄마 딸래미 들어와서 엄청 좋아하시겠네~
여주) ..됐거든 ㅋㅋㅋㅋㅋ
석민) 언제 내려갈건데?
여주) 설 연휴에 바로 내려가야지. 넌?
석민) 너 그 때 가면 같이 가야지. 딸 왔는데 아들 안오면 이상하잖아.
민규) 그럼 나도 바로 내려 가야겠다. 야 너네 우리집 들릴 거지?
석민) 아 가야지~ 너희 어머니 동그랑 땡 얼마나 맛있는데~
민규) 난 많이 먹어서 질린다... 손도 커가지고 너무 많아.
석민) 그거 우리가 다 먹어드림~
여주) 오랜만에 민규 어머니 음식 먹겠네. 완전 맛있는데.
명절의 이야기가 산뜻하게 오갈 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지훈) 너 어디 가냐?
민현) ..나? 난 할아버지한테만 갔다가 금방 오지.
지훈) 저녁만 먹고 오는거야?
민현) 응. 넌?
지훈) 나야 뭐.. 집 지켜야지. 내가 어딜 가겠냐. 연락 다 끊고 사는데.
민현) 넌?
정한) 난 집에 갔다가 하루면 와.
지훈) 야 창균아 너도 어디 가냐?
창균) ..나? 갈 곳 없는데?
민현) 야 그래도 다행이네. 둘이 집에 같이 있으면 되겠다.
지훈) 올해는 그나마 덜 심심하겠네.
민현) 집에 또 찾아오시진 않겠지?
창균) ...장담은 못하겠는데.
지훈) 문 안열으면 되잖아.
정한) 단순한 놈ㅋㅋㅋㅋㅋㅋㅋ
민현) 그래, 편한대로 해.
함께라는 것에 익숙하고, 그걸 좋아하는 아이들이 집을 비우는 순간은 이런 명절 뿐이었다. 웬만해서 하숙집에 찾아오지 않는 적막감이었는데, 지훈은 그 적막감이 참 싫다고 생각했다.
공허한 거실을 둘러보던 지훈은 창균의 방문을 열었다.
지훈) 밥먹자.
창균) ..뭐먹을래? 그냥 라면이나 끓여먹을까?
지훈) 그래.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둘은 부엌으로 자리를 옮기고, 서랍장을 열어 라면을 집은 창균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자 지훈이 왜? 하고 물었고, 둘은 라면 봉지 위에 붙인 쪽지를 바라봤다.
'라면 먹지 말고 적어도 맛있는 밥 시켜 먹기. 명절이잖아.'
여주의 글씨체였다. 그 쪽지를 내려다보던 창균과 지훈은 입맛을 다시며 라면을 내려놓고, 지훈은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들으며 라면을 다시 집어 넣는 창균을 향해 물었다. 뭐 시켜 먹을까?
창균) 밥 시켜 먹자.
지훈) 감자탕 어때
창균) 좋아.
주문을 빠르게 마친 지훈은 여주의 쪽지가 아른 거리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창균도 그 웃음의 의미가 뭔지 안다는 듯 웃었다.
창균) 미국에서도 한국 명절이면 잘 먹지도 않던 밥을 나랑 꼭 먹으러 먼저 찾아오고 그랬어.
지훈) ...여주는 자길 위해서 그런게 아니야. 모든 행동들이 웬만해선 다 우릴 위한거야.
창균) 그니까. 솔직히 혼자 있었더라면 평소처럼 안먹을 애가, 나 때문에 먼저 먹자고 연락하고..
지훈) 그래도 저렇게 챙겨주니까 고맙지. 집에 안가고 남은 우리 생각해주는게.
솔직히 여주 없을 동안 애들 다 집으로 내려갔을 때, 이 큰 집에 혼자 있는게 진짜 꽤 별로였거든. 물론 민현이나 정한이가 금방 오긴했어도, 그 찰나가 싫어서 계속 잠만 잤었어.
그래도 올해는 여주가 이렇게 챙겨주기도 하고, 너랑 같이 있으니까 위안이 좀 된다.
할아버지와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민현이 들어왔다. 셋 밖에 없는 만큼, 셋은 웬만하면 자신의 방에 있지 않고 거실에 맴돌았다. 잘 보지도 않는 티비를 켜둔 채.
웃음 소리가 가득한 티비를 멍하니 셋이 바라보고 있을 때 즈음 현관문 소리가 들리고, 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아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현관을 향했다.
민현) ...너 왜 벌써 와?
석민) 아- 우린 명절 연휴에 바로 내려갔잖아. 당일 아침에 떡국까지 먹었으니까 됐지 뭐-
민현) ..아니 그래도.
석민) 그리고 여주가 꼭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형들 셋밖에 없으니까.
명절 날 명절 음식 먹어야지! 내가 싸왔어.
석민이 해사하게 웃으며 제 손에 들린 명절 음식을 흔들어 보이고, 소파 앞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놨다.
민현) 그럼 여주는? 너희집에 있는거야?
석민) 아닐 걸? 여주는 오늘 점심 먹고 원우 형 네 갔어.
지훈) 전원우 네를 왜 가?
석민) 몰라, 약속한 게 있다나..
민현) 민규는?
석민) 민규는 자기 집에 있다가 올거야. 여주랑 같이 올라오려나.
모르겠네.
원우네에 갔다는 여주의 소식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석민이 보따리를 풀자 창균은 젓가락을 들고 소파에 다시 앉았다. 석민 하나로 분위기가 금새 바뀐 듯 시끄러운 소리가 하숙집을 채우고, 명절음식의 힘 덕인지, 꽤나 명절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어제 민규네에 놀러가 밥 먹은 것부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석민을 셋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바라보고, 석민은 있었던 일을 술술 말했다. 민규가 요리를 잘하는 건 다 어머니 덕이라는 둥, 민규가 뭘 해도 맛있는데 어머니 건 더 맛있는 것 같다는 둥..
집과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 아이들에게 따듯한 명절이 되어주고 싶었던 여주의 계획은, 역시나 성공적이었다.
epilogue
원우) ...안까먹고 와줘서 고마워.
여주) ..당연히 안까먹지.
버스를 타고 하숙집으로 향하는 둘이었고, 옆자리에 앉은 원우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여주에게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여주가 미국 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그러니까 원우의 아버지가 하숙집을 찾았던 그 날, 자신의 와이프가 음식을 잘한다며 설에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말을 여주는 기억하고 있었다.
원우) 사실 아버지가 흘리듯이 한 말일 줄 알았는데, 그 해 명절에 정말 물어보더라고. 같이 안왔냐고.
여주) ....아.
원우) ...우리 집 그렇게 밝은 분위기였던 거 처음이야.
..덕분에 이런 명절도 보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여주) 에이. 뭘.. 그냥 가서 난 음식만 맛있게 먹은 것 밖에 없는데.
원우) ..그래도. 너 낯선거 싫어하고 불편해 하는 거 다 아는데.. 그거 다 감수하고 있어준거잖아.
여주) 아냐. 나도 좋았어. 민규네 집이랑 우리집이랑은 또다른 느낌..? 우리 두 집은 둘 다 시끌벅적한데 오빠네는 차분하면서 따듯해서 나도 재밌었어.
아, 다음엔 오빠도 민규네 놀러와. 민규네는 명절마다 사람이 엄청 많이 모여서 재밌거든. 아마 어머니도 엄청 좋아하실걸?
epilogue 2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 하숙집에 아이들이 전부 돌아왔고, 그래도 다같이 명절을 보내면 재밌지 않겠냐는 승관의 말에 아이들은 마지막까지 명절 분위기를 빼먹지 않았다.
순영) 낙낙낙낙낙낙!!
찬) 아 형!
승철) 아 미안 미안 ㅋㅋㅋㅋㅋ 힘 조절이 안돼 ㅋㅋㅋㅋㅋ
승관) 자 이제 우리 차례지~?
순영) 승관아 가즈아~!!
민규) 야 이거 업어야돼 안업으면 끝나!
석민) 야 아냐 업지말고 하나만 일단 빼자
민규) 아냐 업어야돼 안그럼 우리 꼴이야!
승관) 자 던집니다~
윷나와라 윷!
지훈) 개나왔엌ㅋㅋㅋㅋㅋ
민규) 이 상황에서 개를 던지냐!
승관) 아니 이게 내 잘못..?
지수) 야 우리 차례야.
정한) 막 던져도 돼. 어차피 일등이야.
아이들이 각기 집에서 가져온 명절음식을 먹은 뒤 생긴 설거지 가지고 내기를 건 판이었다. 일등은 역시 정한이 속한 팀이 달리고 있었고, 꼴찌는 순영 팀과 찬이가 속한 팀이 가리고 있었다.
순영) .............
정한) 자 설거지 깨끗하게 하시고~
지훈) 야 윷놀이 잘 정리해서 넣어둬.
민규) 우리 다음엔 이렇게 넷이 하지 말자.
승관) 그게 맘대로 돼? 어차피 데덴찌로 정한건데..
석민) 우리 넷은 좀 갈라설 필요가 있어. 이렇게 팀먹으면 맨날 지잖아!
순영) 야 일단 치우자.
어차피 꼴찌는 순영팀..
**
벌써 세때홍클도 1n회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번엔 진짜 길게 쓰고싶은 욕심이 가득가득...
너무 늦게와서 아무도 안보시면 어쩌나 걱정이 많지만 그래두 올리고 갑니다. 사실 요즘 걱정이 많아서 그런지 글이 잘 안써져서요ㅠㅠ
어느덧 6월 중순이네요. 올 한 해도 이렇게 가나 싶고.. 세때홍클 속 아이들 처럼 저 또한 올해 뭐했나 싶기도 하고 ㅋㅋㅋㅋㅋ
벌써부터 덥던데, 여러분 올 여름도 잘 견뎌봐요:)
전 여름이 제일 싫거든요..ㅎㅎ
+제가 언제 또 들어올지 몰라서, 이번 회차에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잠시 암호닉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신청하실 분들은 이 10회 댓글에 남겨주시면 됩니다. 다음주도 잘 지내봐요, 안녕! 💛
넉점반의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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