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 … 너 아침부터 어디가?
창균) 여주 감기 기운 있는 것 같길래 약받으러
정한) 여주 아파?
창균) 아니, 아직.
정한) ..? 아직?
창균) 어제 여주 일찍 잤잖아. 근데 자면서 기침 하더라.
아침일찍 창균이 나갈 채비를 하자 소파에 누워있던 정한이 창균을 향해 물었고, 창균은 여주 얘기를 하며 신던 신발을 마저 신었다.
정한) 그게 1층까지 들렸어?
창균) 아니 ㅋㅋㅋㅋㅋ 3층 잠깐 갔다가 들었어.
나 다녀올게.
정한) ……….
창균이 집을 빠져나가고, 정한은 눈을 꿈뻑거리며 생각했다.
창균이가 미국에서 여주를 얼마나 챙겼을지 안봐도 비디오라고.
창균) 점심 먹고 이거 먹어.
여주) ..뭐야? 웬 약? 나 안아픈데?
창균) 너 잘 때 기침해서 아침에 받아왔어. 또 된 통 아프지 말고 미리 먹어
여주) 잘 때 기침했어 나?
창균) 응. 너 꼭 잘 때 기침하면 감기 오더라?
여주) ..그니까. 별거 아닐 법도 한데..
점심을 먹으려는 아이들이 식탁에 모이고, 창균은 눈을 비비적 거리며 제 자리에 앉는 여주에게 약을 건넸다. 그러자 여전히 졸린듯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던 민규가 눈을 팍 뜨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창균을 향해 물었다.
민규) ...형이 여주 잘 때 기침하면 감기걸리는 걸 어떻게 알아?
석민) ...그러게. 같이 살던 나도 모르는 걸.
창균) ...아 그ㄱ,
여주) 나 잘 때 기침하는 거 자주 들어서 그래...
민규) ...아니 그니까-
너 잠버릇 같은 걸 형이 왜 아냐고.
여전히 졸린 듯 여주가 창균을 대신해 답하자 민규와 석민의 시선이 창균에서 여주로 향하고, 식탁에 앉은 아이들도 의아한 눈치로 둘을 살폈다.
여주) 우리집에서 자주 자고 가고 그랬어. 그니까 알지.
민규) 형이 니네집을 왜 갔는데?
여주) ...야 뭘 그런 걸 묻냐? 그냥 아나보다 하면 되지.
민규) 야.
석민) 야 뭘 아나보다야 잠버릇을 아는뎈ㅋㅋㅋ
정한) 그래. 좀 궁금하네. 잠버릇을 어떻게 알아?
지훈) ...우리도 1년을 살았는데 몰랐던걸.
여주) 그 땐 내가 잘 때 기침을 안했나보지.
민규) 야. 너 진짜.. 형이 말해봐 그럼. 얘 잠버릇을 형이 어떻게 알아?
창균) ...아니 그게,
여주) 뭘 자꾸 물어! 그냥 밥 먹어!
민규) 왜 성질이야! 너 진짜 이럴래!
여주) 말 안하는데엔 이유가 다 있는거야!
민규) 그니까 무슨 이유!
석민) 이런 식이면 서운해 여주야! 우리사이에 어?!
창균) ...아니 저 그게 얘들아,
여주) 우리 사이니까 그렇지!
민규) 그니까! 우리 사이면 말해주고도 남아야지! 뭔데!
석민) 왜 이렇게 더 감추는데!
지훈) 야 너네 진정해.
여주) 말 안할 만 하니까 그런거라고!
정한) 여주야 일단 앉고, 야 너네도-,
민규) 뭔데! 그게 도대체 뭐냐고! 둘이 뭐라도 있었어?! 어!? 아님 지금도 그런거야!?
여주) ................
민규) 도대체 뭔데 말을 안해주는데!
여주) 아팠다!!!!
석민) ..뭐?
밥상머리에 앉자마자 젓가락은 들지도 않고 대화만 점점 격해지더니 민규와 석민이는 셋이 일어나 서로를 쳐다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셋이 티키타카로 싸운 적이 손에 꼽을 수준이라 이 상황이 낯설던 아이들은 고개를 올려 셋을 바라보며 종종 말릴 뿐이었고, 그건 가운데에서 창균도 똑같았다. 둘이 뭐라도 있던 거냐는 민규의 말에 여주는 결국 짜증난 듯 소리쳤다.
여주) 내가! 내 정신이 너무 아파서 연락도 안받고 내 몸에 상처만 내면! 그 때마다 와서 나봐주느라 자주 자고 갔다고! 그래서 아는거라고!
민규) ................
석민) ................
창균) ...여주야,
여주의 외침 후 찾아온 정적, 아이들은 놀란 듯 여주를 바라봤다. 여주는 어지러운 듯 제 이마를 짚곤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고, 식탁에 앉은 다섯명 중 여주가 처음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여주) ...밥 먹어, 빨리.
창균) ...괜찮아?
여주) 괜찮아. 야, 너네. 앉으라고.
민규) .............
석민) .............
여주가 석민과 민규를 향해 말하자 석민이 먼저 앉아 민규의 팔을 끌어내려 민규를 앉혔다. 둘의 시선은 묵묵히 밥을 먹는 여주를 향해있었다.
석민) ....여주야. 미안해.. 우리는 그냥..
여주) 뭔 말인지 알아.
민규) ...미안.
여주) 뭐가 미안해, 됐어.
어색한 공기가 밥상 주위를 맴돌고, 아이들이 느릿하게 밥먹는 소리만 가득했다. 그러다 지수가 느지막이 내려오더니 물을 마시고 식탁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수) ...분위기가 왜이래?
정한) 셋이 싸웠어.
지수) ...이렇게 셋이?
석민) 아이, 안싸웠어!
민규) ..그래! 싸운게 아니라 격렬한 대화였지 대화!
여주) ..맞아. 우리 싸운 적 없어.
지훈) 그럼 그게 싸운게 아니라 뭐야?
민규) 대화였다니까 대화? 그치?
석민) 맞아! 그치?
여주) 그럼.
정한) 그럼 악수해.
여주) ..뭐?
민규) 뭔소리야!
정한) 빨리 악수하고 서로 소리쳐서 미안하다고 안아줘-
석민) 아 그게 뭔데~
정한) 빨리-
...자, 미안해.
나도 미안해.
나도..
정한의 말에 아이들은 입안에 밥을 오물오물 거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안으며 사과했다. 지수는 그 모습을 보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시끌벅적한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낮잠을 잔 원우가 제 뒷머리를 박박 긁으며 방을 나오더니 소파에 앉아있는 정한을 향해 물었다.
원우) 밥 먹었어?
정한) ..지금 세시야. 당연히 먹었지.
원우) 안먹은 애들 있나.
정한) 지수? 지수 안먹었을걸.
원우) ..근데 왜이렇게 조용해?
정한) 애들 나갔어. 민규랑 석민이랑 여주랑.
원우) 셋이 어디 갔는데?
정한) 치즈케이크 먹으러.
정한의 대답에 원우가 작게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곧 지수의 방으로 향해 올라갔다.
'내가! 내 정신이 너무 아파서 연락도 안받고 내 몸에 상처만 내면! 그 때마다 와서 나봐주느라 자주 자고 갔다고! 그래서 아는거라고!'
"................"
정한은 셋이 나간 걸 생각하다 여주의 말을 떠올리고, 곧 옅게 웃었던 입꼬리를 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제 속을 털어내기까지 얼마나 함들었을까 생각하면 영 마음이 불편한게 아니었다. 정한은 아무런 말 없이 눈을 깜박거리다가 제 휴대폰을 들어 연락처를 훑었다. 정신과 정선생님.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정신과 의사의 연락처를 멍하니 바라보던 정한은 곧 휴대폰을 거뒀다.
...물어봐야하나.
민현) 하이-
창균) 어, 늦었네.
민현이 터덜터덜 부엌으로 걸어들어오더니 물을 마셨고, 창균은 그런 민현을 바라봤다가 벽에 걸려있는 시각을 확인하며 답했다. 정확시 오후 10시를 가리키는 시각이었다.
민현) 난 세상에서 야근이 제일 싫다. 아 물론 출근은 당연하고.
창균) 그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냐.
민현은 물 겁을 내려놓으며 창균 앞에 힘없이 앉으며 말했고, 창균은 케이크를 한입 먹더니 한 쪽에 놓여있던 상자를 민현의 앞에 놓아주었다.
민현) 이건 뭐야?
창균) 아까 여주랑 석민이랑 민규랑 카페갔다가 사왔어. 남은 거 네거.
민현) 넌 지금 먹는거야?
창균) 응. 내일 먹으려 그랬는데 여주가 오늘 먹는게 맛있대서.
창균의 말에 민현도 자연스레 상자를 열었고, 민현이 좋아하는 녹차 케잌에 옅게 웃었다.
민현) 여주는 초능력이 있나.
창균) 응?
민현) 한 번 말하는 건 잘 안잊는 것 같아서.
창균)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민현) 오늘 뭐했어? 난 집에 오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 야근이 뭐냐 야근이.
세상 사람들 야근 좋아하는 사람 없겠지만, 우리 회사에서 누구보다 집에 가고싶은 건 나일 걸?
창균) ..그래보여.
오늘 점심에 여주랑 석민이랑 민규랑 다툼 아닌 다툼이 좀 있었어.
민현) ...셋이? 왜?
창균) 아침 먹고 오전에 여주가 자면서 기침하길래 내가 약 받아왔거든.
아침에 자신이 약을 받으러 간 것부터 싸우게 된 그 순간까지 천천히 민현에게 전하는 창균이었고, 민현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민현) 그래서 셋이 외출했구나
창균) 그랬던 것 같아.
민현) ...애들 싸움은 칼로 물베기지.
창균) 그치.
민현) 근데, 숨기고 숨기려던 여주가 그렇게 터뜨린게 마음이 아프면서도 한 편으론 좀 좋아.
창균) ....왜?
민현) 워낙 아픈 걸 숨기려하는 애라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미국에선 얼마나 힘들었는지 왜 힘들었는지, 사실 그게 듣고싶고 알고싶었거든. 그래야 좀 더 우리가 여주를 위해서 뭘 할 수 있는지가 명확해지니까.
창균) ...............
민현) ...............
창균) 그럴 필요 없어.
민현) 뭐가?
창균) 여주를 위해서 뭘 하고 있는지 생각 할 필요 없다고.
민현) 왜?
창균) 여주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너희가 없고, 한국도 아니었던 미국에서 지낸 그 시간이었을거야.
그니까 너희가 있는 것만으로도 여주는... 그것만으로도, 그게 치료일거야. 내가 알아.
창균이 쓴 웃음을 지은 채 민현의 말에 답했고, 민현은 그런 창균을 바라보다 여주가 사온 녹차케이크를 한 조각 쪼개 입에 넣었다.
적잖은 공백을 먼저 깬 건 민현이의 음성이었다.
민현) 고마워.
창균) ...............
민현) 그 힘들었던 시기에, 여주 옆에 있어줘서.
창균) ...나도 여주한테 고마운게 많았는데 뭐. 같이 견딘거지.
창균이 말하자 민현이 고개를 숙인 창균을 바라보고, 민현이 그런 창균을 향해 말했다.
민현) ...여주가 빨리 그 속에서 벗어나서 우리처럼 평범하게, 그냥 그렇게 지냈으면 좋겠어.
창균) ................
민현) ...그리고,
너도.
최승철 파이팅!!!
승철) .............
조촐한 시합 아닌 시합이었다. 크게 열린 경기도 아니었을 뿐더러 딱히 중요하지도 않았던. 그랬기 때문에 아이들한텐 말도 한 적 없었는데, 제 방에 있던 달력을 본건지 여주가 경기장을 찾았다.
2층 펜스에 기댄 채 승철을 향해 소리치는 여주를 본 승철이 놀란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삐익-!
심판에 호각 소리가 경기장을 채우고,
결과는 당연히 승철의 승이었다.
승철) 어떻게 왔어?
여주) 그냥 오빠 방 갔다가 달력에 적힌 거 봤어.
승철) ...별로 중요한 경기도 아니었어. 그래서 그냥 말도 안했던건데.
여주) 그래도. 그래도 누가 응원해주면 좋잖아, 힘도 나고. 그리고 예상치 못했을 때 받으면 더 크게 와닿지 않나?
승철) 그렇네. 덕분에 이긴 것 같은데?
여주) 그럴리가. 다 오빠가 평소에 잘 해놔서 이긴거지.
승철) 애들은?
여주) 글쎄, 집에서 뭐하려나 모르겠네.
승철) 점심이라도 사가자.
여주) 그래, 내가 전화해볼게
여주가 체육관 벤치에 앉아있자 금새 씻고나온 승철이 여주의 옆에 앉았고, 여주는 곧 전화기를 들어 집에 있을 창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에 승철과 동기였던 선수 한 명이 다가와 승철 옆에 앉았고, 여주는 슬쩍 쳐다봤다가 곧 들려오는 창균의 음성에 시선을 거뒀다.
여주) 어 오빠, 집이야?
'응. 지금 오려고?'
여주) 응. 근데 점심 사가려는데, 뭐 먹었나 해서..
"..누구냐? 너 여사친도 있었냐?"
승철) 있었다. 야 너 근데 좀 밀리더라?
"밀리긴 누가? 웃기네 얘?"
승철) 연습 좀 해라 연습 좀
"꺼져 너나 해. 너 오늘 같이 경기한 애가 1학년이었다며?"
승철) 걘 진짜 타고난 타입이더라.
'뭐 안먹었어. 애들 다. 막 먹으려 했는데.'
여주) 그래? 그럼 지금 사갈게.
'알았어. 조심히 와.'
여주) 응.
승철) 뭐래?
여주) 점심 안먹었대. 햄버거 사갈까?
승철) 그래, 그럼. 야 간다.
"어 야 가라-"
여주) ..............
여주는 승철의 친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곤 승철의 보폭을 맞춰 걸었다.
여주) 친구야?
승철) 응. 오늘 경기 겹쳐가지고.
여주) 으음-
승철) 집에 누구누구 있대?
여주) 뭐.. 민규랑, 창균오빠랑, 원우오빠 밖에 없을 걸?
승철) 오늘 왜이렇게 없어?
여주) 몰라. 지훈오빠 일 때문에 나가고, 지수오빠도 일 때문에 나가고.. 그래서 그럴 걸?
승철) 넌 게시물에 붙이고왔어? 나온다고?
여주) 응. 같이 오고싶긴 했는데, 애들 다 자길래 나 혼자 왔어. 어제 저녁에 미리말한다는 걸 까먹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승철) ㅋㅋㅋㅋㅋㅋㅋ그래도 와줘서 고마워.
여주) 에이 뭘. 가끔 이렇게 올게.
승철) 안그래도 돼.
여주) 아냐. 내가 재밌어서 그래. 오빠 응원하는 재미도 있고.
승철) ...대신 집에가서 선물줄게.
여주) 선물? 뭔 선물?
아! 설마 그 모자?
승철) 맞아. 다 떠서 이제 써도 될 것 같아.
여주) 난 찬이랑 오빠 때문에 더 겨울을 따듯하게 보내는 것 같아.
내 겨울 책임자들이야, 아주.
승철과 집으로 돌아온 여주는 점심을 먹곤 산책 좀 다녀오겠다며 혼자 집을 나섰다. 같이 가겠다는 아이들에게 적잖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홀로 그냥 걷다가 오고 싶다고.
".............."
정말 별 이유는 없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걷고 싶었던게 정말 다였다. 그렇게 집 주변을 빠져나와 동네를 거닐던 여주였고, 한참을 걸었을까, 한국에 잠깐 왔을 때 민현을 만났던 카페를 지나고, 엊그제 민규와 석민이랑 치즈케이크를 먹으러 갔던 카페까지 지나 안좋은 기억이 가득한 카페 앞에 도착했다.
"................"
제 친모에게 더이상 자신에게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건넸던 그 커피숍이었다. 여주는 그 커피숍 안에 앉았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숨이 가빠지는 듯 호흡을 크게 했다. 그러다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떨궜다.
이젠 정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역시, 과거는 여전히 마주하기 싫다.
"아가씨."
"................"
대뜸 앙칼진 목소리에 여주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놀란 듯 고개를 뒤로 획 돌렸고, 온 몸에 명품으로 도배된 여자가 여주를 빤히 쳐다봤다. 식은땀을 흘리는 여주를 보던 여자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여주를 위아래로 훑더니 말했다.
"...뭐야 기분나쁘게. 귀신 봤어?"
"....누구,"
"창균이 엄마."
".............."
"아들이 도통 그 집에서 나오질 않으니, 초인종 몇 번을 눌러도 싹을 잘라버리듯 안 열어주고 말이야."
"..............."
"내가 보기엔 이 문제에 아가씨랑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얘기 좀 하지?
창균의 어머니는 여주가 바라보고 있던 카페로 먼저 발걸음을 옮기고, 여주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어머니? 야. 현실 부정하지마. 니 엄마는-!'
“................"
...싫어.
'....허,'
"......아냐,"
'이게 어디서 소리를 질러!!!!'
"...싫어, 싫어.."
싫어..
카페에서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여주는 연신 고개를 젓고 환청이 들리는 듯 제 귀를 막았다. 그리고 곧 여주가 뒤쫓아 들어오지 않자 되돌아 나온 창균의 어머니였고, 그 얼굴을 본 여주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자신이 천천히 걸어왔던 길을 급히 뛰어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과 제 귓가에 맴도는 음성이 겹쳐져 여주를 괴롭혔다.
승철) ...뭔 일 있었어?
여주) 응? 아니? 왜?
승철) ...아니, 표정이 별로 안좋은 것 같아서.
여주) 좀 걷다 왔더니 지쳤나. 워낙 저질 체력이라.
승철) 그럼 다행이고. 난 또 밖에서 뭔 일 있었나 했지.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있던 아이들의 눈동자가 여주를 향하고, 대문 앞에서 주저 앉아 식은땀을 닦고 눈물을 기필코 참은 덕이었을까, 아이들은 금새 티비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여주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곧 제 방으로 올라갔다.
시간이 지나 어느새 저녁대가 되었고, 출근한 아이들이 하나 둘 퇴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삼 오오 모여 저녁식사도 했지만 여주는 속이 좋지 않다며 낮에 먹은 햄버거를 먹고 체한 것 같다고 저녁을 먹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민현까지 퇴근을 했다.
민현) ...뭐해?
민규) ..어, 여주 체한 것 같아서 죽이라도 끓여 먹이려고.
퇴근을 하자마자 답답한 듯 목까지 잠근 와이셔츠 단추를 풀며 부엌에 들어오던 민현은 민규를 보며 물었고, 민규는 담담히 답했다. 그러자 민현은 물컵에 물을 따르며 민규를 향해 물었다.
민현) 뭐 먹고 체했는데?
민규) 낮에 햄버거 먹었는데 그거 때문인가봐.
민현) ...그래? 약은?
민규) 약은 먹었어.
민현) 죽은 내일 먹이려고?
민규) 응.
민현) ..그래. 너도 빨리 자. 피곤할텐데.
민규) ...그 얼굴로 하루종일 집에 있던 나한테 말하는거야?
형이나 자. 겁나 피곤해 보여.
민현) 뭐 넌 집에만 있다고 안피곤하냐. 사람 다 똑같지.
잘자-.
아침에 여주를 깨웠을 때, 좀 더 자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여주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주가 자신을 깨워주는 석민이를 향해 좀 더 자겠다고 말했고, 석민은 당황하며 어, 어.. 거리더니 여주 방을 빠져나와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전했다.
아이들은 떨떠름한 듯 그래..? 하더니 곧 수긍을 했다.
결국 여주는 민규의 죽을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즈음에 먹을 수 있었다.
이 이후에도 아침 먹고 독서를 하든 뭘 하든지 깨어있던 여주였는데, 식사 시간 이후로 깨어있는 걸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주는 계속 잠을 잤다. 이에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품었다.
민규) 말이 안돼. 김여주가 이렇게 잠이 많았다고?
석민) ...좀 이상하지?
정한) ...왜 저렇게 잠이 많아졌지? 평일에 집에서 뭔 일 있었어? 엄청 평일에 피곤했나?
민규) 평일에도 똑같았는데? 계속 우리랑 집에 같이 있었는데 다른 거 없었어.
석민) 맞아. 그냥 아니 한 수요일인가 여주 체해서 저녁 못먹은 날 그 다음 날 부터 저랬나?
정한) ..그래? 수요일? 수요일에 집에 누구누구 있었는데?
민규) ..나랑 창균이 형이랑 원우형.
정한) 셋이랑 여주?
민규) ..아 여주 그 승철이 형 경기보고 같이 왔다. 승철이 형까지 다섯 명.
승철) 뭐가 나까지 다섯이야?
식탁에 앉아 간식을 먹던 아이들 사이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승철이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며 묻고, 자연스레 정한의 옆에 앉아 아이스 크림 봉투를 뜯었다.
정한) 너 수요일에 여주랑 어디 갔다왔어?
승철) ..수요일? 아 나 경기 있었는데 여주가 경기 보러 왔었어. 왜?
정한) 그 날 뭐 없었어?
승철) 뭐가?
정한) 여주 햄버거 먹고 뭐했어?
승철) ...뭐했더라. 아 산책 간다고 혼자 나갔을 걸?
민규) 맞아. 같이 가자니까 그냥 혼자 돌고온다그래서 혼자 산책 갔다왔어.
정한) ...갔다와서는?
승철) 갔다 와서 방에 있었겠지?
민규) 그러다가 저녁 먹자고 방에 가니까 속 안좋다고 햄버거 먹고 체한 것 같다고 그래서 저녁 안먹고 약먹고 잤어.
정한) ...혼자 있던 거.
민규) ................
정한) ...거기 말곤 다 우리가 있었잖아.
그 때 뭔 일 있던 거 아냐?
민규) ...근데 그냥 피곤해서 잠이 많아진 걸 수도 있지.
정한) ...그럴 수도 있지.
근데 갑자기 잠이 많아지는 건 사실 현실도피 가능성이 커서 그래.
...우울증인 사람들이 과수면을 하면서 현실도피하려는 증상이 있거든.
지수) 여주야 눈 뜨고 먹어 ㅋㅋㅋㅋㅋㅋ
여주) 아, 졸려.
민규) ...또 먹고 자겠네.
여주) ...졸려서 그래.
여주가 유일하게 깨어있는 식사 시간, 이야기를 전해 들은 민현은 여주를 주의깊게 보고, 민규는 정한의 말에 걱정된다는 듯 바로 옆에서 흘끗흘끗 여주를 살폈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가 오가고, 하나 둘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느린 속도에 비해 민규가 밥을 많이 준 탓에 가장 더디게 먹은 여주가 겨우 밥그릇을 다 비워갔을 때, 밥을 다 먹었음에도 일어나지 않던 민현이 여주에게 물었다. 여주야.
여주) ..응?
민현) ...수요일에 체했었다며.
여주) ...아, 응.
민현) 이제 괜찮아?
여주) 응. 이제 밥 먹잖아.
민현) ...그 날 왜 체했지? 급하게 먹었나?
여주) ...그랬나.
민현) ..여주야.
여주) 응?
민현) ...평일엔 내가 너무 바빠서, 우리 얼굴도 잘 못봤잖아.
여주) 응. 오빠 요즘 야근 맨날 하잖아.
민현) 근데 토요일인 오늘도, 네 얼굴 지금 두 번 밖에 못봤어.
여주) ..............
민현) ...너 계속 자서.
여주) ..............
얘기 좀 하자.
민현) ................
여주) ................
민현의 방, 민현은 책상 의자에, 여주는 침대에 걸터 앉아있었고, 여주는 여전히 느리게 눈을 꿈뻑거렸다. 민현은 그런 여주를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민현) ...수요일에 무슨 일 있었어?
여주) ...수요일?
민현) 너 승철이 경기 보러 갔던 날.
여주) .......아.
민현) .............
여주) ...별 일 없었는데.
민현) ...그 날 뭐했는데?
여주) ..승철오빠 경기보러 갔다가 와서 햄버거 먹고,
민현) 그리고,
여주) ...산책 갔다가 집에와서 약먹고 잤어.
민현) ...산책 혼자 갔어?
여주) 응.
민현) ...어디 갔는데?
여주) ..그냥 근처까지 돌다가 들어왔어.
민현) .............
여주) ......왜?
민현) ...그게 다야?
여주) .............
민현) ...얘기 해줄 게, 정말 그게 다야?
여주) .............
그게 정말 다냐며 재차 묻는 민현에, 둘의 시선이 맞물렸다. 잠들어있던 여주의 눈동자가 적잖게 맑아진 순간이었다.
옅은 정적이 꽤 길게 자리했다. 그게 정말 다냐고 묻는 물음에 공백이 이리 길다는 건, 여주도 본의아니게 아니라고 답한 거나 다름 없다는 걸 여주도 모르지 않았다. 결국 여주가 먼저 시선을 떨구고, 입술을 살짝씩 깨물며 미간을 작게 구겼다. 잊고 싶었던 기억이 다시금, 그 자국이 다시금 제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민현) 여주야.
여주) 친모 만나서 다신 나 찾아오지 말라고,
민현) ..............
여주) 말했던 그 사거리 커피숍까지 갔었어.
의도하고 간 건 아니었어. 의도하고 갔다면 거긴 안갔겠지. 내 상처를 뭐하러 내가 봐. 그냥 안온지 꽤 돼서, 그 사거리에 그 카페가 아직도 있는지도 몰랐고, 거기 있던 거 기억도 못하고 있었어. 그냥 진짜 산책이었거든.
그냥 진짜 점심 먹은거 소화시키고 싶어서 나간거였어. 나 생각 많아져서 걸으려고 나갔던 거 진짜 아니었어.
근데 가다가 그 커피숍 보니까 아직도 숨이 막히더라고. 그래서 그 카페 안을 보고 있었단 말이야. 근데 그 때 기억이 나서, 그게 너무 싫어서 다시 집으로 빨리 돌아오려 했어.
여주) ...근데 뒤에서 누가 날 부르는거야.
민현) ............
여주) 창균오빠 엄마라고. 자기 아들이 부모를 안보려는데 그 이유가 나한테도 있는 것 같으니까 이야기 좀 하자고.
민현) .............
그러면서 그 카페로 들어가는데, 그 뒷모습이, 말투가, 시선이 다 내 친모랑 너무 똑같아서, 그 공기가 너무 숨막혀서, 소름돋고 그래서..
그냥 뛰어왔어. 뒤도 안돌아보고, 너무 무서워서 숨 차는지도 모르고 그냥 계속 뛰었어.
....근데 또 그렇게 그냥 집에 들어가면 걱정할까봐 대문 앞에서 계속 진정시키다가 들어갔어.
여주) ..이게 다야. 별 일 없었어. 그래서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민현) ..............
민현은 무슨 말을 건네야 할 지 생각 하는 듯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틈이 길어지기 전 허공을 바라보던 여주가 씁씁히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여주) .....내가 왜 창균오빠 아버지 앞에서 무릎꿇고 울었는 줄 알아?
민현) ..............
여주) 그건 단지 오빠를 위해서 부탁했던 것 만은 아니야.
오빠네 부모님이 창균오빠를 갉아먹는게 나한테 했던 거랑 똑같아서.
민현) ...............
여주) 근데 오빠도 나처럼 갉아먹히고 있어서.
내가 그 모습을 어떻게 그냥 지켜봐.
그래서 그랬어. 오빠를 지키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 얘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날 위해서 애써줬던 석민이랑 민규가 뭐가 돼.
....그 때랑 똑같은 나이긴 너무 싫었어.
'...그만해요, 제발. 숨 좀 쉬게 냅둬주세요.'
숨 좀 쉬게 냅둬달라는 말은 창균의 부모님에게 뱉은 말이었지만, 여주의 시야엔 창균의 아버지가 제 부모와 겹쳐 보인 순간이었다.
한마디도 못했던 여주는, 그 그늘 밑에서 벗어난지 10년이 넘고서야 겨우 울면서,
숨 좀 쉬게 냅둬 달란 말을 겨우 그제서야 뱉을 수 있었다.
**
**
사실 이렇게 울적한 회차로 올 생각은 아니었는데, 뭔가 필요한 감정선들이었던 것 같아 다시 갈아엎고 쓰려다 그냥 가져왔어요.
그래도 여주가 민규와 석민이의 말에 버럭 화를 내면서 제 감정을 전한 건 나쁜게 아니라 좋은 징조입미ㄷㅑ..
제 감정을 이야기 한거니까요.
그리고 또 민현이에게도 터놓고 말 해버린 것도, (물론 지금은 또 과수면을 하지만) 그래도 조금 나아진 상태라고 볼 수 있어요 허허
아니 그냥 제 말은 햎피엔딩일거니까 걱정 마시라…ㅎㅎㅎㅎㅎ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넉점반의 봄 눈 같은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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