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면을 계속 수정하고, 수정하다가 잠시 뒤로 밀렸던 Traveler.
내용이 전부 이어지니 번거로우시더라도 상편과 중편을 읽고 오시는 걸 추천해드립니다. 정말 너무 늦어버렸네요.
그래도, 꼭 끝을 내고 싶었던 이야기여서 온전하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무리 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나서 민윤기는 갑작스럽게 생긴 휴일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다시 날 바라보면서 은연중에 이유를 말할 것을 요구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 민윤기의 몸을 끌어안고만 있었다. 그런 내 반응에 민윤기도 포기했는지 그저 가만히 내 품에 안겨있다가 간혹 세탁기를 돌리거나, 조금 어질러진 집안을 치우는 정도로 움직였다. 아직 나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 상황 모든 것이. 민윤기의 움직임을 계속 눈으로 좇으면서 가끔 민윤기가 고개를 돌릴 때면 아이마냥 칭얼거리며 그 마른 몸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온기를 확인할 뿐이었다.
참, 지독한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네가 애냐."
"애면 계속 이렇게 있어도 돼요?"
"무슨 엄마닭 따라다니는 병아리도 아니고."
"뭣하면 옹알이 하면서 따라다닐게요. 아니면 병아리. 삐약?"
"야, 하지마. 하지마."
내 말에 민윤기는 어이가 없다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기야 평소 같은 집에 있어도 각자 할 일을 하면서 서로가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했던 다른 나날과 달리 오늘은 내가 내내 민윤기 뒤를 걸음으로, 혹은 시선으로 쫓아다니니 민윤기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나는 민윤기의 볼에 입을 맞췄다. 민윤기가 시간을 보더니 이제 진짜 마트 좀 가자면서, 내 손목을 잡아 일으켜세웠다. 불만인 내 얼굴을 봤는지 민윤기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짧은 한숨.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 이대로 그냥,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싶은 마음.
"도대체 뭘 보고 왔는데."
"…."
"말해. 말 안 하면 나 혼자 마트 다녀올거니까."
"형."
"말하라고. 어느 시간의 날 보고 왔길래, 이런 엉망인 얼굴을 하고 있냐고. 꼭 장난감 뺏길까봐 전전긍긍하는 어린애 마냥."
내가 민윤기만을 바라보고 있던 것처럼 민윤기도 날 보고 있었다. 정곡을 찔린터라 더 입술을 단단히 다물었다. 그저 하얗고 마른 손목을 손에 움켜쥔 채로 눈동자만 굴려대었다. 민윤기 주위 풍경이 어지럽게 시야를 지나갔다.
"말, 하고 싶지 않아요."
"오늘 하루만이라고 했지?"
"…."
"내가 하루만 네 옆에 꼭 달라붙어 있어야 되는 일이 뭐가 있을까. 같이 있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일이. 병? 아닐테고. 사고?"
민윤기 손목을 잡고 있던 내 손이 크게 움찔거렸다. 민윤기 입에서 나온 사고라는 말에 다시 눈 앞에 검은 아스팔트가 나타날 것 같은 불안함에 휩싸였다. 그 이상 말하지마요. 떠올리게 하지마. 그냥, 그냥 오늘은 마냥 내 곁에서 계속 살아만 있어줘요. 민윤기의 양쪽 어깨를 그러쥐었다가 고개를 떨궜다. 말랐지만 단단한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 익숙한 체향과 온기가 날 감싸안았다. 민윤기가 내 뒷머리를 헝클이듯 쓰다듬었다. 그리고 덤덤히, 말을 건네왔다.
"나 안 죽어."
"형. 윤기 형."
"지금 네 앞에 멀쩡히 살아있잖아. 나 안 죽어. 계속 네 옆에 있을거야. 너나 갑자기 어디로 떠나가지마."
"형. 정말 사랑해요. 진짜 사랑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진짜,"
"살아 있을거야. 네 곁에 있는다고."
울지마, 임마. 다 큰 녀석이 왜 이렇게 마음이 여려. 민윤기의 손이 넓게 퍼져 항상 나를 달래왔듯이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트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같이 물이라도 사러 가자는 민윤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옆에 붙어있는다면, 그렇다면 괜찮겠지. 민윤기가 말했다.
살아있다고.
"물이랑 내일 아침에 먹을 것 정도 사오자. 우리 집 냉장고 심각하게 빈 거 아냐?"
"아무것도 없긴 했어요."
"너 내일 몇 시 퇴근이야? 일찍 오면 저녁 같이 먹자고."
"어, 괜찮을 것 같아요."
평소 밖에서는 낯간지럽다며 스킨십을 잘 하지 않은 민윤기가 먼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왔다. 큰 것을 움켜쥐듯이 우왁스럽게 내 손을 잡는 모양새가 너무나 민윤기다워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살짝 그 손을 풀어내고 깍지를 꼈다. 민윤기가 힐끗 손을 내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잠시 머뭇거리면서도 풀지 않는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걸음걸이는 망설임이 없었다.
4월 30일 오후 10시를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이제 오늘 하루도 2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편의점과 집의 거리는 끽해야 걸어서 5분 정도였으니 무슨 사고가 날 염려도 없었다. 민윤기 옆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큰 편의점 안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골라내어 계산했다.
"야, 저기 조심해라."
민윤기가 눈짓으로 힐끗 가리킨 곳에는 헬멧도 쓰지 않은 커플과 다른 몇 명의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끌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혹시나 싶은 생각에 민윤기를 인도 안 쪽으로 서게 한 뒤 다시 깍지를 잡았다.
"이렇게 잡으면 내가 너무 불편하잖아."
내 움직임에 민윤기가 잠시 손을 풀고는 편의점 로고가 박힌 비밀봉지를 다른 손으로 옮겨 잡았다. 나는 손을 뻗어서 내게 내밀어진 민윤기의 손을 잡았다. 정확히는, 잡으려고 했다.
"야…!"
요란한 소리에 눈가를 찡그리며 뒤를 돌아볼 찰나에 갑자기 가슴팍과 어깨부근이 꾹 눌려진 기분이 들었다. 둔탁한 소리, 비명소리. 무언가, 무언가 정신이 없는 소리. 어느새 나는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건 어두운 색의 벽돌이었다. 갑자기 넘어진터라 머리가 멍했다. 고개를 들어 민윤기를 찾았다. 본능적으로.
"윤기 형?"
인도를 이루고 있는 벽돌 위로 검은색 아스팔트가 겹쳐졌다. 그리고, 길에 잔뜩 나뒹구는 방금 전 샀던 물건들, 구겨진 물통 하나, 무질서하게 흩어진 길 위 한 켠에 자리한, 쓰러져있는 민윤기.
"괜찮으세요?"
편의점 직원이 내게 다가와 날 부축하기 시작했다. 멍한 얼굴로 비척비척 일어나 밀쳐졌을 때 어디 부딪치기라도 한건지 욱신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고 민윤기에게 다가갔다. 이미 민윤기 주위는 지나가던 다른 사람들이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왜, 왜. 도대체 왜.
"형."
왜, 민윤기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건데.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옆으로 쓰러진 오토바이와 같이 날라갔는지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운전자가 있었다. 민윤기에게 기듯이 다가갔다. 가벼운 찰과상이나, 가벼운 뇌진탕이겠지. 그렇지? 형. 병원가면 살 수 있지? 그런거지? 또, 또 내 눈 앞에서, 왜. 이 멍청한 사람. 차라리 날 방패로 썼어야지, 왜, 날 밀고 형이 사고를 당해.
손을 뻗어 민윤기의 손을 잡았다. 아직 따듯했다. 민윤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정사정없이 찡그려진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타고 피가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점점 손이 차가워졌다. 안 돼. 윤기 형. 형. 제발. 멍청한 입은 형, 이라는 소리밖에 뱉어내질 못 했다. 시야가 어지러워지다못해 내가 보고 있는 민윤기의 모습 한 구석부터 점점 검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지금 이러지 마. 윤기 형 사는 것 까지. 차라리 병원이라도 같이 가서, 치료 받는 것까지 보고. 그러고나서. 제발. 안 죽었을거야.
"안 죽는다고 했잖아."
시야가 또 한 번 까맣게 점멸했다. 시간을 여행하는 것이 아닌, 지독한 악몽을 연이어 꾸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의 인생 중 가장 지독하고, 현실적인 악몽을.
"…."
"일어났어?"
"…."
"나 오늘 오전 근무가 갑자기 잡혀서 회사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퇴근 할 때 연락할게."
"…."
"왜 그래. 또 악몽이야?"
"아…."
"너, 왜, 울어?"
눈을 뜬 내 옆에는 출근 준비를 하는 민윤기가 보였다. 민윤기를 보자마자 나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내게 다가와 눈가를 손으로 문질러주는 민윤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형…, 형. 오늘, 오늘."
"오늘 4월 30일. 김남준. 남준아. 야. 야. 너 왜 그래."
4월 30일.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내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움켜쥔 채 오열했다. 민윤기가 놀라 날 일으켜세워 끌어안았다. 울지 말라며 머리를 쓰다듬는 그 손길조차 너무 슬퍼서 나는 바스라질 것 같은 민윤기를 끌어안은 채 쉽게 울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나에게 왜 이러는 거야. 기어코 또 민윤기가 죽는 날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유가 뭐야. 대체, 왜. 내게 왜 이런 짓을 해.
"울지마."
민윤기는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꿈 같았다. 살아있는 민윤기조차 악몽으로 보였다. 민윤기는 내가 막지 않아도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며 회사에 연차를 냈다. 오늘 밖으로 나가면 민윤기는 죽는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민윤기를 내 시선, 내 시야 안에 두는 것 뿐이었다. 나가지 않고, 오로지 집에서만. 민윤기를 살려야했다.
"진짜 몸 괜찮은거 맞아? 좀 더 자."
"아니에요.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 좀 악몽을 심한 걸로 꿔서 그래요."
민윤기가 살아있는 지금이 현실이니까. 비록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현실이라고 해도 나는 절박하게 붙잡아야 한다. 이번의 4월 30일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멍청하게 안심했다. 자만했다. 민윤기를 살렸다고.
[민윤기 씨 보호자분 맞으시죠? 여기 A 병원인데 민윤기 씨가 사고를 당하셔서 현재 저희 병원에….]
휴대폰을 툭 떨구었다. 옆에서 괜찮냐고 말을 걸어오는 회사 동기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대로 회사를 박차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그러다 점점 걸음이 늦추어졌다. 가봤자 뭐해. 이미, 이미 민윤기는, 아냐, 날이 늦추어졌고 민윤기는 그때의 그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면 살아 있을지도. 그렇지만, 설마, 또, 제발. 차오르는 숨을 뱉어내지도 않고 달리다가 다시 까맣게 점멸하는 시야를 느꼈다. 나를 제외한 온 세상이 민윤기를 내게 앗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일어났어?"
정말이지 끔찍한 악몽, 악순환이었다. 민윤기는 이제 4월 30일에 죽지 않았다. 다만, 그 다음 5월 1일에. 5월 1일에도 죽지 않았다면 5월 2일에. 아니면 그 다음 날에. 또 그 다음 날에 죽어갔다. 이쯤되면 나는 민윤기를 살리기 위해 시간의 틈을 벌리는 것이 아니라 민윤기를 죽이기 위해 시간을 오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횟수가 5번이 넘어가자 이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민윤기를 살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민윤기를, 내 곁에 영원히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을까. 오로지 내가 파고드는 것은 그것 하나였다.
민윤기가 내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면 나는 기겁을 하며 그를 잡아세웠고. 나가자고 하면 나 혼자 나갈테니 제발 안에 있으라고 다그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민윤기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살아달라고 빌기도 했었다. 그렇게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아, 아…. 또, 이렇게…."
이게 몇 번째의 여행이더라. 약해지고 있는 내 능력은 길고도 얇게 폭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내 앞에서 괴한에게 묻지마 살인을 당한 민윤기가 깨끗한 천에 둘러쌓인 채 누워있었다. 정신병자가, 근처를 배회하다가, 나와 같이 있던 민윤기를 찌르고 도망을 갔다. 오늘은 5월 5일. 예전부터 이 휴일에는 꼭 같이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는 민윤기와 같이 밖을 나온 터였다. 어차피 집에 있다고 해도 갑자기 가스가 터지던지, 민윤기가 베란다에 이불을 널다가 떨어지던지 했을 거다. 그러니까, 이 무능력한 여행자는 그저 미쳐가는 수 밖에 없는거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슬픔보다 분노가, 분노를 넘어 허탈함과 아득한 두려움이 더 컸다. 의사가 덮어준 흰 천을 내리고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기어코 참지 못 하고 무릎을 꿇은 채 민윤기의 두 손을 잡아 기도를 올리듯, 애원을 했다. 제발 그만해달라고. 내가 정착하길 바래서 이런 벌을 내리는 거라면 아예 민윤기를 만나기 전으로 돌려보내달라고. 민윤기가 살아만 있으면 되니까. 제발. 그게 안 된다면. 차라리 나를 같이 죽여달라고. 제발, 이제 그만 민윤기를 앗아가달라고.
이번에는 시야가 까맣게 점멸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민윤기의 장례식까지 모두 지켜보았다. 설마 이번이 내 마지막 시간여행이었던가. 그러면 이제, 민윤기를 되살리는 것도, 민윤기가 죽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는 것도 끝난걸까. 아쉬움과 안도감의 경계에서 나는 민윤기의 장례식을 끝냈다. 내가 흘리지 못한 눈물은 민윤기의 지인들이 모두 흘려주었으리라.
"형. 형이 그랬잖아요. 시간을 여행하는 게 멋있다고. 근데, 윤기 형. 아닌 것 같아요. 전혀, 멋있지도, 대단하지도 않아."
수많은 시간들을 여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누구보다 박식해지고, 그 누구보다 의연해진다고 무슨 소용이었을까.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하고 능력에 휩쓸리는 여행자일 뿐인데. 아무리 괴로워해도 나는 삶에 대한 집착이 있기라도 했는지 딱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든 시대에서, 힘든 일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끝날 것을 알기에 버텨내었다. 그렇지만, 이젠 더 이상 난 어떤 것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죽을 생각을 했다. 어떻게 죽어야 이 능력이 또 멋대로 날뛰기 전에 죽을 수 있을까. 그 생각만 머릿속을 채웠다. 내 안의 능력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마치 능력이 모두 태워지고 난 뒤 잿덩어리만 잘게 남아있는 것 마냥, 그 희미함만 느껴졌다. 우선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민윤기가 죽고 난 뒤 어떠한 것도 건들이지 않아 그대로였다. 이대로, 민윤기가 소파에 앉아 내게 왔냐며 손을 흔들 것 같은데.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못한 몸이 한계를 외치며 나를 뒤흔들었다. 어지러운 시야 사이로 민윤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죽을 수는 있나, 나란 인간이."
죽으면 내 시체는 어떻게 될까. 그건 일반사람처럼 이 자리에 남아 썩어들어갈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이상하게 죽음을 결심했으면서 나는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다. 길게 숨을 내쉬고 날카롭게 간 칼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시야가 까맣게 점멸되기 시작했다. 한 번에 덮쳐왔던 것이 스멀스멀, 약해진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느리게 나를 덮쳐왔다. 안 돼. 왜 하필 지금인데. 왜. 또, 내게 어떤 악몽을 보여주려고.
온전하게 시야가 점멸했다.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이 것이 내 마지막 여행이라고.
"…?"
처음 보는 건물, 처음 보는 길거리.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어느 건물 옆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내 옷을 바라보니 항상 이동한 시간대에 가장 걸맞는 옷차림으로 변해있었던 것과 달리 장례식에 입었던 검은색 양복차림 그대로였다. 설마, 또 4월 30일로? 이상하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나는 급하게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나 핸드폰도, 지갑도. 어느 것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여행이라고 이렇게 대뜸 떨궈놓으면 어쩌자는건지. 어딘가에 또 민윤기가 살아있는 건 아닌지. 마음은 급해졌으나 몸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어디 아파요?"
고개를 푹 숙인 채 벽에 기대어있자니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익숙한 일 중 하나였기에 고개를 올려 아니라고 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어린 아이를 보고 답을 하지는 못했다. 되려 숨만 들이삼켰다.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나는 조심히 물었다.
"몇 살이야?"
"저 9살이요."
"그래? 그렇구나. 이름은, 민윤기 맞지?"
"저 아세요?"
아, 나는 20년을 건너왔구나. 과거로. 헛웃음이 나와 비틀거리며 기어코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어린 민윤기가 내게 다가와 괜찮냐고 묻는 것이 들렸다.
"오늘, 며칠인지 알아?"
"4월 30일이요."
이 능력은 끝까지 날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지금 이 아이에게 나는 뭐라고 말해야할까. 시야가 다시 천천히 깜박였다. 20년 뒤 오늘, 넌 죽는다고? 아니면 나중에 김남준이라는 남자를 만나면 절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사랑을 하지 말라고? 마지막 여행. 민윤기와의, 마지막. 나는 지금 무슨 말을 남겨야 할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윤기 형. 미안해요."
그래. 나는 민윤기에게 이 말을 가장 하고 싶었다.
"내가, 정말 미안해."
"형?"
그 다음은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낯간지럽게 무슨 소리냐며 웃는 한 남자의 얼굴이 어린 아이의 얼굴 위로 겹쳐보였다. 시야가 여전히 깜박였다. 주위부터 느릿하게, 검은 무언가가 아니라 하얀 무언가가 덮쳐오고 있었다.
"왜 울고 있어요? 많이 아파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새어나왔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특유의 손길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손길이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난 결국 형을 살리지 못 했어. 욕심을 부리다가 내가 형을 죽게 만들었어. 몇 번이고, 계속. 얼마나 아팠을까. 죽는 그 순간에 얼마나 무서웠을까. 되살리겠다는 그 욕심 하나에 나는 형을 몇 번이나 괴롭게 만들걸까. 정말 미안해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숨이 넘어갈 듯이 눈물을 흘리자 내 앞의 어린아이가 놀라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어린 민윤기는 끝까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달랬다. 마치, 며칠 전의 민윤기처럼.
"괜찮아. 괜찮아. 울지마세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눈물 젖은 얼굴로 웃는 게 좋은 광경은 아닐텐데, 민윤기는 끝까지 내 곁을 지키려고 했다. 계속 내게 무언가 묻던 어린 민윤기는 어른을 불러오면 되냐고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다고 하자 어린 민윤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울고 있지 말라며. 끝까지 날 위로하고 곧장 어디론가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나는 끝까지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민윤기가 엄마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야가 점점 하얗게 번져 물들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차마 나는, 민윤기에게 후에 날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건네지 못했다. 끝까지 이기적이어서 미안해요. 사랑해서 미안해. 시야가 온전하게 하얗게 변했다.
내 시간 여행은 이제 끝이 났다.
"윤기야, 아무도 없는데?"
"어, 분명.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아픈 형은 없고 왜 이상한 하얀 가루만 남아있을까요, 엄마?
"다른 누가 발견해서 병원에 데려갔나보다. 그 형이 많이 아파보였니?"
"아프다기 보다는, 슬퍼보였어요 엄마."
사실 나도 같이 울 뻔했어요. 그 형이, 너무 슬프게 울어버려서.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어린 날 보고 형이라고 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나보고 미안하다고 했어요. 그 형이 다른 형한테 잘못을 했나봐요. 그 형이 아픈 게 다 나으면, 그래서 잘못했다고 사과하면 다른 형이 그 형을 용서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 형이 웃었으면 좋겠어요, 엄마.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방금 전의 그 형은, 너무 슬퍼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