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것(變わらない物)(Inst.ver) 시간을 달리는 소녀 OST
[방탄소년단/랩슈] 얼굴 위 감정 上
일반 사람들은 미간을 구김으로써 불쾌함이나 언짢음을, 입꼬리를 올리면서 기쁨을, 눈꼬리가 처지고 눈썹이 내려가며 슬픔을 표현한다. 그러니까, 얼굴의 근육들을 이용해 표정을 만들고 그 표정 위로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고 읽어낸다. 일반 사람들은 그렇다. 문제는,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윤기야, 다음 조모임 이번 주 수요일에 하려는데 너 시간 괜찮아?"
"응."
"아, 그럼 2시 괜찮아? 점심 먹고 모이자."
"…."
"뭐 화난 거 아니지?"
"…?"
"아니야. 그, 아무 표정도 없어가지고. 화난 거 아니라면 됐어. 그럼 내일 봐."
이런 오해는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 당황스럽지도 않다고 하면 누가 웃어나줄까?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마저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나왔다. 주위에서 흔하게 인사를 하는 동기나 후배들 정도는 있지만 그게 날 향한 것은 아니라 조용히 복작거리는 복도를 빠져나왔다. 주위에서 내가 무섭다며 수근대는 소리도 익숙해졌다. 나라고 내내 무표정으로 있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도 속으로는 모든 희노애락을 다 느끼고 산다, 이 말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근육이 안 움직이는 걸 어쩌라고.'
얼굴 근육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근육이 잘 움직이지 않으니 표정이 잘 지어질리가 없고, 표정이 지어지지 않으니 남들에게 내 감정을 전하는 것 또한 못 한다. 병은 아니라고 하니 당연히 치료법이 있을리가 없고, 치료법이 없으니 고쳐질리도 없다. 나름 노력한다고 손으로 열심히 얼굴 마사지도 해봤고, 여러모로 말도 많이 하고 표정도 지으려 노력을 해봤지만 결국 헛수고. 어머니는 거울을 보며 얼굴을 주무르던 날 보고 한 마디 하신 적도 있다.
'아들. 그렇게 해도 안 돼.'
도대체 내 조상님들은 무엇을 하셨길래 이런 굳은 얼굴근육을 후손들에게 물려준단말인가. 우리 가족에서는 나만 그러지만 친척들을 통틀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종종 있다. DNA를 조작해야 고쳐지는건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다가 나는 익숙하게 걸음을 틀어 연결통로를 지나 예술관으로 향했다. 큰 강당 뒷편에 위치한 예술관은 언제나 야작이나 작품을 하는 학생들로 군데군데 채워졌지만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소수의 동아리부가 쓰는 작업실로 나뉘어지면서 인파도 확 줄어든다. 천장에 일정하게 박혀있는 형광등만이 밝혀주는, 너무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이 곳에서 나는 가장 온전한 형태의 안정을 찾곤했다.
일직선으로 걷다가 양 쪽으로 나뉘어진 곳에서 왼쪽으로. 반 정도 걷다가 가장 작은 작업실로 들어오면, 내가 소속된 유령회원이 대부분인 미술연구동아리의 부실이자 작업실의 모습이 드러났다. 내가 학교를 오는 이유 중 하나이자 제일 좋아하는 장소였다. 언제나 조용하고, 찾아오는 이도 없으니까. 아주 가끔, 얼굴도 모르는 유령 회원이 와서 그림을 조금 그리거나 무언가 찾고 나갈 뿐. 그렇기에 이곳은 되려 나의 최적의 작업실이 되어주었다. 음침하게 닫혀있던 커튼을 조심히 걷어내자 뽀얀 먼지가 살짝 일었다. 창문을 열자 운동장의 소란스러움과 더불어 더운 바람이 훅 들어왔다. 조금만 환기를 해야겠다. 어차피 진행중인 작품이라고는 내 것 하나 밖에 없으니 상관 없겠지. 목재건물이 주는 낡은 고풍스러움은 아늑함을 주기 마련이었다. 절로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있다.'
큰 천이 덮여진 캔버스가 보이자 나는 남들이 볼 때는 느릿하고 정적일지는 몰라도 나름 급하게 가방을 내려놓고 화구만을 따로 빼내어 작업을 할 준비를 했다. 입고온 얇은 반팔티 소매 아래로 드러난 희멀건 팔을 작업용 토시로 가리고 품에 화구들을 챙겼다. 이젤 위에 걸려진 캔버스에는 어느 한 남자의 상체까지의 모습이 그려져있었다. 아직 이목구비가 조금 흐릿하게 잡혀있고, 선도 정리를 안 해 지저분한 상태였지만 아마 이 사람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충분히 알아볼 만큼의 진행은 되어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조악하지만 앉기에 썩 나쁘지 않은 낡은 등받이 없는 의자를 끌어와 앉고 가져온 화구들은 옆에 내려놓고 미술용 연필을 쥐어잡았다. 그리고 오늘도 조용하게 혼자만의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표정이 제일 중요한데 그 생생함을 나는 아직 담을 수 없어. 아쉽다. 관찰이 더 필요한가. 이왕이면 웃는 모습을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지. 그렇다고 다른 곳부터 그리자니 내가 좀 어색해. 입매가 어떻게 움직였더라. 이렇게였나?'
'여기 어깨 삐뚤어졌네. 목도 조금 수정해야겠고.'
'역시 실물을 직접 가까이서 봐야….'
생각이 물처럼 빠르게 머릿속을 유영하며 흘러갈 즈음 쿵,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작업실의 문이 열렸다. 큰 소리에 약한 나는 그대로 연필을 떨구었고, 오랫동안 해왔지만 아직 덜 익숙해진 칼놀림으로 심혈을 기울여 깎아놨던 내 연필심은 그대로 아작이 났다. 떨어진 연필을 뚫어져라 보다가 허리를 숙여 연필을 주었다.
"어? 저, 혹시, 그, 민윤기 선배?"
날 알아? 연필을 잡아 올리다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발바닥 끝까지 심장이 철렁이는 기분을 느끼며 얼른 내려놨던 천을 들어 다시 캔버스를 덮었다. 펄럭이는 요란한 소리가 멈추고 나는 긴장감에 쥐고 있는 연필을 내려놓을 생각도 못 하고 꾹 쥔 채 몸만 돌려 이 작업실에 절대로 올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인물 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아, 저기. 저 모르세요? 하기야, 모르시려나. 같은 과도 아니니까. 저 경영학과 16학번 김남준이라고 합니다."
"…."
누누히 말했지만 나는 얼굴 근육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니 저 자에게 내가 얼마나 놀랐고 아직도 심장이 크게 뛰고 있어서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는 하나도 전달이 안 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읊고 있는 훤칠한 남자 후배, 김남준을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남준이 안절부절하는 것이 보였다. 또 화났다고 오해를 받은건가 싶었지만 딱히 변명할 생각도 없이 나도 시선을 내렸다.
"왜요?"
아,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있지 않나. 최대한 살갑게 말을 건네본다고 했지만 내 귓가에도 내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딱딱하고 어떠한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굳이 감정을 찾는다면 뜻밖의 불청객을 향한 불쾌함이 담긴 듯한 경직정도였다. 이렇게 생각한 건 나 하나가 아니었는지 눈 앞의 김남준이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군대까지 다녀와 3학년이라는 나름 고학번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난 후배를 대하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그게 모두와 거리를 둔다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만들어준 것 같지만 버릇이 버릇이라 쉽게 고쳐질 생각은 안 했다. 근데 지금은 제발 좀 고쳐줬으면 싶었다.
"아, 친구가 놀러오라고 해가지고 왔는데 친구는 없네요. 근데 친구는 조소과인데 애가 그림도 그리나?"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 어린애마냥 순진무구했다. 어색함을 깨려 길게 말을 이어하던 김남준이 핸드폰을 꺼내 분주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마 친구에게 연락을 취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알아서 가겠지. 그래도 오늘은 이야기까지 했다. 표정도 가까이서 봤고. 이정도면 그림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이거 선배가 그리고 계신 거예요? 선배 혹시 미술 그쪽 과세요?"
내 얼굴과 이름은 알면서 과는 모르나? 아, 하기야 같은 교양에 우연히 출석을 부르다가 내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까지 부르는 건 아니니 모를만도 했다. 그렇게 스스로의 결론을 내리고 나도 모르게 빤히 올려보고 있던 김남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언제보아도 참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입술도, 눈가도 휘어지는 각도가 크고 부드러워서 그만큼의 친절한 감정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 부드러운 얼굴이 내 앞에서는 긴장인지 경직인지 하여튼 딱딱하게 굳은 게 마음에 안 들지만.
"저, 조금 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말도 없이 대뜸 캔버스를 덮은 천 아래를 살짝 잡은 김남준의 손목을 억세게 붙잡았다. 김남준이 놀라서 손을 떼고 날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나는 내가 한 짓을 알고 얼른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지만 이미 어색한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김남준은 어색한 얼굴로 손목을 살짝 매만지다가 나에게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아니, 사과는 내가 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네가 마음대로 봐서 화난 것도 아니라 당황했을 뿐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아…."
"야, 김남준! 너 여깄냐?"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김남준의 친구로 보이는, 몇 번 봤을 때 아마 내 반대편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조소과 남자애가 서 있다가 날 보고 꾸벅 인사를 해왔다. 같이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하는데 김남준이 친구 쪽으로 걸어갔다. 아, 나 아직, 사과 못했는데. 손목 아프지 않냐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죄송했습니다."
"너 뭐 잘못했냐?"
"어, 조금. 실례…."
문이 다시 닫혀 그 뒤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서서 김남준이 친구와 사라진 문쪽을 바라보다가 털썩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손에는 땀으로 가득 차 축축했다. 사교성이 뒤떨어지고, 소심하고, 멍청하고, 제 감정 하나 말 할줄 모르는 것이 이렇게 한심하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긴장감에 하도 세게 쥐고 있던 주먹을 펴자 심이 부러진 연필이 보였다. 주먹을 너무 세게 쥐고 있어서 손가락이 뻐근했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바지에 손바닥을 부벼 땀을 지웠다.
그래도, 같은 교양이라고 해서 기대도 안했는데,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것도 그 날 이후 처음이었다. 비록 그 대화가 스스로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자책과 설렘이 뒤죽박죽 섞여 입꼬리 끝이 살짝 떨렸다.
'들킬 뻔 했네.'
똑같이 떨리는 손 끝으로 캔버스를 덮은 천을 끌어내렸다. 캔버스에는 부드럽게 웃고 있는 김남준이 가득했다. 그리고, 김남준을 향한 내 짝사랑도 가득했다.
'상경대 건물이 뭐 이따구지?"
군대를 다녀온 뒤 애매한 날짜에 제대한 만큼 머리카락 충분히 기르고 재사회화까지 완벽하게 한 뒤 복학을 했었던 3학년 초입. 3월. 자주 수업을 들으러 다니는 본관과 예술관 쪽과 정 반대쪽의 상경대에서 하는 교양을 신청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던 일이다. 시간보고 학점보고 때려넣었던 2학점짜리가 날 이렇게 뛰게 만들줄은 몰랐다. 게다가 상경대건물 안이 처음이라 헤맨 것도 한 몫했다. 분명 여기 방금 전까지 B112였잖아. 그럼 그 다음이 B113이 있어야지 왜 갑자기 B115가 있어?
'어차피 변경기간인데 그냥 취소하고 다른 거 들을까.'
취소 이유. 강의실을 못 찾겠다. 고개를 저으며 칙칙한 표정대신 한없이 밝은 색의 머리를 헝클였다. 그리고 뒤를 도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과 부딪혀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올리자, 똑같이 당황한 얼굴의 나보다 키가 큰 남자가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급하게 가다보니까."
입술을 벙긋거려 괜찮다고 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입술을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이자 그걸로 뜻은 전해졌는지 남자가 씩 웃었다. 그러면서 혹시 선배님이냐고 하길래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 봐도 얼굴에 어린티가 아직 남아있는 것이 새내기이거나 많이 봐줘도 2학년. 내 위로 봐주기는 힘들었다. 몇 학년이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는 삼학년, 그나마도 숫자 삼만을 이야기했는데 어디 가냐고 또 묻는다. 그건 또 왜 묻나 싶어 버릇마냥 빤히 의중을 알아차리려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더니 멋쩍은 듯이 씩 웃었다.
"아, 사실 제가 강의실을 못 찾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는 분이 선배님밖에 없으셔서요."
"…."
"B113호에 어떻게 가야하는지 하나요?"
"미안. 몰라요."
"네?"
"나 여기 과가 아니여서요. 처음."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사람에 대한 면역은 내게 체력 다음으로 없는 것이다. 더듬거리지 않고 말하긴 했으나 당황함을 그대로 담아낸터라 존댓말과 반말이 뒤죽박죽이었다. 남자는 그런 것은 크게 개의치 않고 혼자 얼추 이해를 한 듯 보였다. 근데 나도 B113호 가야하는데. 남자는 잠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남자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고, 남자는 전화를 받았다. 야, 너 어디야? 아, 몰라. 상경대 건물 겁나 복잡한 거 알잖아. 편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그만큼 편하게 풀어지는 표정이 신기했다. 곧 남자는 B113호를 어떻게 가는지 알았는지 전화를 끊고 내게 인사를 했다. 얼결에 같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나도 강의를 들으러 가긴 해야했으므로 그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남자는 걷다가 뒤를 홱 돌아보았다. 놀라서 걸음을 멈춘 사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씩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뭐랄까, 환한 감정이 가득차 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선배도 B113호 찾고 계셨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잘됐다며 같이 가자고 하더니 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표정을 닮은 부드러우면서 시원한 향이 코 끝을 맴돌았다. B113호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알고보니 내가 헤맨 곳은 B113호 강의실의 뒷문쪽이라 빙글 돌아 앞문을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혼자 바보짓하고 있었네.'
"저기요."
남자를 따라 무사히 강의실에 입성해 자리를 잡고 앉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오티에 참가하지도 않고, 이제는 복학생이라는 타이틀까지 달았으니 내게 말을 걸 사람은 없을터인데, 유독 오늘은 면역이 잘 되지 않는 날이다, 싶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 남자가 환한 웃음을 지은 채 음료수 캔을 건넸다.
"…?"
"드리고 싶어서요."
남자는 예의바르게 고개를 슬쩍 숙여 인사를 한 뒤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등을 바라보다가 손에 쥔 차가운 음료수 캔을 내려보았다. 그 뒤로는 내가 처음 경험하는 일들이었다. 교수가 부르는 출석에 유독 예민하게 귀를 세우고 있던 것도. 김남준, 이라는 이름에 대답하는 그 남자를 보고 한 번에 이름을 외운 것도. 그리고, 가슴이 묘하게 간질거리는 것도. 그게 나 혼자 기억하고 있을 김남준과의 첫만남이었고, 내 짝사랑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