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아아아, 누나 어때?"
"저 여자 또 취했네, 쯧."
"씨이 민윤기 닥치고! 우리 태태 누나 어때??"
"누나? 좋지."
"아아니 그거 말구우..! 우리 잘생긴 태형이느은 시집도 예쁜 여자한테 가야지!"
"올, 예쁜 여자 소개시켜주게?"
"아이 증말..! 내가 외롭다구 내가!!"
"아이 진작 말을 하지. 어디보자, 여기 없는 정국이는 소진이랑 행쇼할꺼니까 안되고. 우리 형님은.."
"미쳤나 이게."
"...농담이고. 아 그렇지, 호석이 어때? 여기서 유일한 솔로잖아!"
"..나 왜..?"
"...너 진짜 내 마음 안 받아 줄꺼야?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티를 내면서까지 고백하는데도?"
"미안해요. 절대 누나가 못생겨서 그러는건 아니야."
"장난할 기분 아니야. 너 얼굴 볼 때마다 고백했는데 어째 한 번을 안 받아주냐. 진짜 서럽게."
"그걸 빌미로 이렇게까지 찾아온거였냐. 너도 대단하다 참."
"그치? 천하의 무식이 민윤기도 내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아는데 김태형 너만 몰라 너만.
됐어 나 갈꺼야. 내가 너 고백 받아줄때까지 계속 할꺼야. 두고봐."
"어어 언니! 매니저라도 불러드려요? 위험한데.."
"됐어. 걸으면서 술도 깰 겸. 나 갈께, 또 봐."
"잘 가요 누나."
딸랑, 살짝 비틀거리는 가녀린 몸뚱이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요.
정국이와 소진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고요한 적막 속에 각자 술잔만 기울였죠.
아영언니 정도면 절대로 아까울것 하나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듣자하니 태형오빠와 언니는 어릴적부터 사장님과 함께 봐왔다는데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요?
생각해보니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네요.
"왜 안 받아주는거에요? 여배우 이미지에 영향 끼칠까봐?"
"연예인이건 말건 자기가 연애하겠다는데 누가 말려. 그리고 나 정도면 어디 내놓아도 안 꿀려."
"재수없는 놈."
"그냥 마음이 없을 뿐이야. 거기서 오히려 다가갔다간 상처만 주고 말지."
"평생 솔로로 살아야겠네. 굴러온 복을 제 발로 차고 말이야."
"이왕이면 희대의 독신주의자라고 해줘. 이만한 얼굴에 독신주의면 진짜 흔하지 않거든."
"허세부릴 시간에 튀어나가서 좋은말 할때 쟤 바래다 주고 와라.
저 주량에 이정도 마셨으면 바깥에서 깽판 콘서트 열 확률 백프로니까."
한쪽 구석에 종류별로 나열된 빈 술병들을 가리키며 사장님이 으르렁거렸어요.
저 중에 독한 술만 골라 마시던 아영언니가 생각나 저도 걱정이 조금은 되네요.
이름있는 여배우의 흑역사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는지 고민스러운 표정과 함께 미적거리던 태형오빠에요.
그와 동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호석오빠가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구요.
"..왜?"
"어디 가요?"
"술 들어가니까 알딸딸해서. 바람 좀 쐬려고."
"역시 의리로 하나되는 우리 호석이! 곤란에 처한 이 형님을 위해 장렬히 한 몸 바쳐 전쟁터로 나간다! 와!"
반쯤 떼놓은 엉덩이를 잽싸게 붙이고는 굉장히 자기 일 아니라는 듯이 얘기하네요.
상큼한 비웃음과 함께 가운뎃 손가락을 길게 뻗어 날려준 호석오빠가 금세 문 밖으로 사라졌어요.
"쟤 술 취하면 꽤 피곤한데."
"또 막 아무나 붙잡고 옛날얘기 하겠지. 난 바래다 준다에 한 표."
"무슨 근거로?"
"쟤 성격에 절대 지나칠 수 없을걸. 고생깨나 하겠네."
"아니, 그렇다 쳐도... 어디 있을줄 알고 걔를 찾아가 정호석이."
.
.
.
.
.
어디 있을 줄 알고 그 여자를 찾아.
정신 깰 정도의 바람만 쐬고 오자는 취지로 문을 열었건만 나를 반겨준 것은 상쾌한 밤공기가 아니요,
다름아닌 엄동설한에 얼굴을 조각조각 베어버릴 듯한 칼바람이었다.
목도리라도 챙겨서 나올걸, 후회를 해봤자 다시 들어가기도 뭣해 언 손만 비비다 자켓 주머니에 꽂아넣었다.
어디부터 가볼까? 그 여자가 비틀거리며 나간 지도 5분이 채 되지 않았건만 벌써 코빼기도 보이지....
...엄마! 깜짝이야,
".....뭐하세요?"
찾을 수도 없는 뒷골목에 들어가서는 비틀거리다 혹여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극단적인 막막함이 민망하게스리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후
시선을 내리면 동그란 머리통 하나가 발 밑에서 움츠린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저기요? 민아영씨?"
어색한 티 팍팍 내는 호칭 민아영 씨. 말해놓고도 이상한 것 같아 헛기침을 몇 번 했지만 1도 듣고 있지 않는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어깨와 목을 감싼 목도리의 끝자락이 파르르 떨리는 듯도 한데 우는 걸까?
그것보다 더 의구심이 드는 사실은,
왜 저 여자는 굳이 내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걸까.
"저기, 안 추워요?"
"졸라 추워....흐어..."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는 뒤통수가 생각지 못하게 동정심을 유발했기에 목도리 얘기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울고 있는 어깨를 슬슬 흔드니 무릎에 가려 보이지 않던 얼굴이 공포스럽게도 올라간다.
"흐어엉..."
"아 얼굴....깜짝....여배우 아닌줄."
"뭐 임마! 말같이 생긴게! 야 임마, 너는 밥으로 당근 먹냐!!!어!!!!!"
"이 여자가...."
눈물범벅으로 전설의 고향에 나올법한 귀신같은 얼굴로 막말은 잘도 한다.
잠시나마 들었던 동정심은 추위와 함께 더 큰 짜증으로 변해버린지 오래이고.
두 어깨를 잡아서 올리니 별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텃밭의 채소마냥 쑤욱 뽑힌다.
뭐지 이 여자, 먹고 살긴 하는건가.
일단 일으켜 세웠긴 한데 이번엔 종잇장도 아닌 휴짓장마냥 펄럭여 자꾸만 귀찮게 만든다.
"이봐요, 여배우씨. 집이 어디...."
순간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간 생각 중 하나.
이대로 그녀의 집으로 택시를 타고 바래다준 후 안전하게 빠이빠이까지 했다고 가정하면?
분명히 그 집 근처 어딘가에 파파라치 한두 명쯤은 있을테고.
여배우의 집에 일반인이 곱게 들어가도 모자랄 판에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한 자세로 들고 들어갔다 치자.
다음날 포털사이트엔 이름난 여배우가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24시간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반 강제로 떠맡은 여자 억지로 데려다주는 것도 모자라 술 먹이고 집 데려가서 무슨짓을 저지른,
멋대로 펼친 대중들의 상상의 나래 속 미친놈이 되겠지.
급한대로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집 주소를 물어보니 자기가 바래다주긴 귀찮은 듯 도어락 비밀번호까지 알려주는 과한 친절을 베푼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지만 걷기에도 애매하고 차를 타기에도 아까운 그런 거리에 택시를 타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야, 말! 나 태워줘-"
"걸을 수 있겠어요?"
"태워줘! 나 태워줘! 집으로 가자아!!!!!"
목청 하고는. 이대로 가만히 놔두었다간 주변 아파트에서 고성방가로 민원이라도 들어올것 같아 급히 입을 막았다.
진짜로 태워주지 않으면 저 정신나간 비명도 계속되겠거니 싶다. 입을 막은 손가락 사이로 괴성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쯤 되면 거의 벌칙 수준이다. 술 마신 여배우가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아! 태워줄테니까 조용히 해요 좀!"
"꺄하~ 진짜지??"
"자, 업혀요."
엉거주춤, 대충 허리를 굽혀 자세를 잡으니 기다렸다는듯이 폴짝 뛰어올라 등판에 착, 달라붙는다.
아까도 느꼈지만 정말 가볍다. 진짜로 밥은 먹고 다니는 걸까.
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가벼움에 쉽게 자세를 고쳐잡고 본격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늦은 밤 인적 하나 없는 어두운 골목길을 비추는 낡은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걸었다.
가로등 하나를 지나 다른 가로등이 나오기까지 잠깐의 어두운 거리가 나올때마다 무서움을 느끼는지 목덜미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도 얼핏 들었다.
숨을 들이쉴때마다 차가운 공기와 함께 술냄새가 섞인 향수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향수샤워 진짜 싫어하는데. 직업 때문인지 항상 만날때마다 그녀에게선 진한 향기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 오늘은 술 때문인지 날이 추워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여튼 그녀의 향기는 맞는데 좀 옅은 느낌?
여지껏 맡아왔던 향수와는 다른 조금 독특한 냄새였다.
화장품 냄새가 진하게 배인 그런 인조적인 냄새가 아닌.
소나무 향인가? 알싸하게 코 끝을 건드리는 향기가 나쁘지만은 않은 듯 했다.
"야...말..."
"말 아니고 정호석이거든요."
"뭐래...말이 말을 한다....됐고, 내 얘기좀 들어줄래?"
"아니요."
"배우란게 말이야, 이게 진-짜 힘들어. 완전 극한직업이야!"
아버지뻘 되는 윗사람들 비위 맞춰야 하지, 뭘 해도 사람들한테 욕 먹어야 하지.
어린 나이에 발 들여놨을땐 뭣도 모르고 유명해졌으면. 하는 막, 막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무조건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져야 좋은건줄 알았거든 이게?
악착같이 살아서 겨우 이렇게 올라왔는데 막상 어, 그.. 명함? 명왕성?
명성이요.
그래. 명성이를 얻으니까 사람들이, 대중들이 나를 바라보는데. 이게 말이야 진짜 무서운게
뭘 해도 다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그러더라고.
분명히 이게 밑에서 올려다봤을땐 안그랬거든? 막 사람들이 박수쳐주고 막 잘한다 멋있다 예쁘다 좋은말만 듣고 그럴줄 알았는데
올라와 보니까 다 껍질뿐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게?
어쨌는데요?
어쩌긴 뭘 어째, 그냥 그렇게 살아야지. 간지나게 '나 개썅마이웨이가요~'하고 남들 거슬러 올라가는건 드라마 얘기고.
여긴 그럴수밖에 없더라. 그래도 나 왕따야 거기서. 친구 없어. 말, 너가 내 친구야.
말 아닌데.
시끄러, 말.
뒷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술과 잠이 섞여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주다 보니 어느새 사장님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걸어가면 분명 먼 거리였는데. 이렇게 빨랐나?
그래도 아직 마음을 놓기엔 이른듯하여 집 앞으로 낑낑 올라가 기억을 더듬어 도어락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니 다행히 열렸다.
대충 소파로 추정되는 가구 위에 풀썩 던지니 또 칭얼대기 시작한다.
"태형아아....우리 태태야...가지마..."
이젠 나를 태형이 형으로 착각까지 한다. 기껏 내려놨더니 소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방금까지 말과 친구먹으면서 고민상담한 여자 맞나?
술이란게 역시 무서워, 중요한 깨달음을 곱씹으며 잡힌 소매를 풀어보려 애를 쓰지만 젠장.
술기운 때문인지 이 여자가 힘이 센건지 뜻대로 되질 않는다.
"김태형 너 가면 내가 가만 안둘꺼야!! 후회하게 만들어 줄꺼야!!"
또 고함 쩌렁쩌렁. 아예 귓전에 대고 복창하는 그녀의 입을 또다시 틀어막았지만 역부족이다.
아까 걸을때 술 다 깬줄 알았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가!지!마! 태형아!!!!누나 두고 어디 가???"
"아 안 가요! 안가!!!"
아예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드는 손을 잡아다가 급하게 외치니 우뚝 깽판을 멈추고는 풀린 눈으로 이쪽을 본다.
"..나도 사랑해 태형아."
"뭔 헛소리...."
턱, 막을 새도 없이 두 손으로 목을 낚아채 입술을 부딪힌다. 훅 끼친 그녀의 소나무 향이 후각을 강타했다.
당황함에 커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지만 이미 초점이 없는 눈은 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목을 감싼 두 손을 풀어보려 애를 쓰지만 젠장하게도 안 풀린다. 이 여자 힘 겁나 쎄잖아??
"하아....사랑해...."
"아니 난 김태형이...읍!"
또다시 돌진하는 입술에 이젠 힘이 빠질 지경이다. 글쎄 너님이 찾는 김태형은 가게에서 안주 집어먹고 있다니까?!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면 풀어주기는 커녕 혀까지 집어넣는다.
술이 문제야 술이. 바람쐬고 오겠다는 미친 소리를 한 과거의 나 자신을 백만번 원망하며 젖 먹던 힘까지 짜내보았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달고는 애절하게 옭아매는 혀가 내가 아닌 남의 것이라는 생각에 죄책감까지 막 드는 듯 싶었다.
내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지는 정말 네버 모르겠다만...
없는 힘 짜내며 끌어모아 딱 떼어내니 그제서야 순순히 떨어져나간다.
할 거 다 하고 끝낸다 이거지.
그러고는 뭐라 입을 열 새도 없이 픽 쓰러져 잔다.
"...."
한바탕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듯 멘탈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술기운은 점점 달아나는것 같은데 왜 터질듯한 얼굴은 가라앉지를 않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다 칭얼거리는 그녀의 잠꼬대에 화들짝 놀라 도망치듯이 집을 빠져나왔다.
바깥에 나오니 그 추웠던 공기가 오히려 후텁지근하게 느껴진다.
지끈한 머리를 붙잡고 천천히 걸으며 방금 10분이라는 짧디짧은 시간 안에 겪은 인생의 큰 사건을 곱씹어 보았다.
술, 향수, 키스, 목도리
아, 목도리.
정신이 없는 나머지 그녀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돌려받을 생각조차 못했다. 그렇다고 다시 들어가서 가져오거나 그런 미친 짓은 절대로 못 하겠다.
지금도 세상 편히 자고있을 그 집에 들어갔다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예상도 못 할것 같았다.
술 깨면 얼굴 어떻게 보지. 스멀스멀 느껴지는 현실자각에 한숨을 푹 쉬고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길어질 것만 같았다.
-
글이 길어서 놀랐죠?
시점을 어떻게 써야할지 감이 안잡혀서 그만....(도망)
얍 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