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06.
w.규닝
06. 길들여진 여우의 병
남자의 이름은 아마도 김명수였던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그것은 성규에게서 직접 전해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였다. 말끝마다 김명수, 김명수. 그동안은 몰랐는데ㅡ남자를 대면한 이후로 계속해서 우현의 귓가에는 같은 이름이 수도 없이 반복해 꽂히고 있었다. 바닥에서 뒹구는 옷을 집어들면 '명수꺼야, 만지지 마.'한다든가. 우현은 그렇게 성규의 입에서 버릇처럼 되풀이되는 이름에 알게 모르게 삐뚤어져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명수'라는 이름에 우현이 꼼짝없이 굳어버리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성규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김명수라는 남자의 잔상에 질투가 나 세면대 위에 버젓이 올라와 있던 파란색 칫솔을 숨겨버린 직후였다. 시치미를 뚝 떼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있던 우현의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온 성규가 평소 제게 말하던 어투와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로,
"칫솔 내놔."
"무슨 칫솔?"
"이런 장난 싫어해. 진짜로 죽여버리기 전에 내놔."
그 남자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은.
답지 않게 불안한 눈을 하고 있었다. 칫솔을 숨긴 우현에게 위협적으로 몰아붙이려고 하는 것 같으면서도 화가 난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림을 가지고 있었다. 우현이 짐짓 진지한 눈으로 성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알고 싶다. 왜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명수의 흔적을 곁에 두려 애쓰는 모습이, 그 남자가 김성규에게 무슨 존재인건지를 알고싶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천사를 이토록 안달나게 만드는건지를, 물론 정확히 알진 못해도 그 사람이ㅡ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적어도, 하룻밤 상대 정도는 아닐 것이라는 직감은 충분히 오고 있었지만서도.
그래서 우현은 하나의 제안을 내걸었다. 너 집에 안가냐?, 하지 말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넣던 우현의 손이 퉁명스러운 성규의 목소리에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좀 가. 무감각한 눈을 하고서는 묘하게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그렇잖아도 뒤틀려있던 우현의 심기를 더욱 비틀어대는 작용을 했다. 싫은데. 여기 있다 죽어서 지박령도 될건데. 우현이 일부러 펜을 쥔 손에 힘을 줘 찌익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동그라미를 그렸다.
"내가 여기 있는 게 맘에 안들어?"
"어."
"난 맘에 드는데."
우현이 이미 그려 넣은 동그라미 옆에 같은 크기로 다른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 방 빼고 여기로 들어올까봐."
"누가 허락해준대?"
"너는 방에서 자고, 난 뭐ㅡ소파에서 자면 되겠다. 같은 침대도 쓰고 싶은데, 그건 니가 불편해하니까."
"난 니 존재 자체가 불편해. 그래서 집에 언제 갈거냐고."
"맨날 왔다갔다할 필요도 없이 여기서 눈을 뜨고, 아침거리도 재깍재깍 사다 놓고."
"야. 벌써 아홉시야."
"나는 만화 안 좋아하지만 그래도 니가 틀어놓은 채널이라면 옆에 앉아서 같이 봐주기도 하고."
"……."
"주말이면,"
그 남자가 오는 주말이면.
"실컷 둘이, 늘어지게 자다가 오후쯤에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고."
저번주처럼 내가 쫓겨나듯이 옥탑방에서 내려가지 않아도 되고.
서로 다른 말로 꿋꿋이 이어가던 대화는 어느새 일방적인 우현의 독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 진짜 너랑 같이 살까? 어느새 완성된 두개의 동그라미를 쳐다보던 우현이 한 발자국 쯤 물러서 뿌듯하게 웃었다. 작은 네모칸 안에 들어있는 두개의 동그라미. 같은 크기. 같은 색깔. 같은 날.
"지랄."
우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흘러나오던 티비 안의 소음이 도망치듯이 바뀌어 들렸다. 방금까지도 투니버스 채널에서 눈도 떼고 있지 못했던 주제에 우현의 정곡에 변명이라도 하듯 아닌 척 바뀌어버린 채널. 살짝 돌아선 우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소파가 아닌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드러누운 성규가 뭘 보냐는 듯한 눈으로 우현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무심한 시선을 다큐멘터리에 고정했다. 취향도 아닌 주제에 왠 다큐멘터리. 슬쩍 쳐다본 티비 화면에선 병상에 누운 사람과 우울한 목소리의 나레이션이 뒤섞여 나오고 있었다. 우현이 들고 있던 싸인펜을 내려놓고 식탁에 올려진 귤을 두세개 집어들었다.
"아픈 사람 나오는 프로 싫어하면서?"
바닥에 볼을 대고 멍하니 티비를 보고 있는 성규의 머리맡에 따라서 주저 앉은 우현이 말했다. 남이사. 눌려있는 한쪽 볼 때문에 어그러지는 발음으로 대답한 성규의 목소리에 픽 웃은 우현이 리모컨을 집어들어 다른 채널을 틀어놓았다.
"예능. 이렇게 밝은 거 봐."
"……."
"아님 투니버스 볼래?"
"됐어."
"왜. 좋아하잖아."
"니가 무시하니까."
너랑은 보기 싫어. 볼 안쪽이 씹히기라도 하는 듯 이상한 발음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맨날 쎈 척은 혼자 다하면서 정신연령은 한참 어리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만큼은 완전 인정. 우현이 귤을 까다가 제 무릎 언저리에 널브러져 있는 갈색 머리통을 내려다보면서 웃었다.
"안 무시해. 나도 보노보노 좋아해."
"거짓말."
"진짠데. 니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진건데. 우현이 귤 한 개를 떼어내 성규의 머리통 앞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과일을 통 안 먹는 것 같아서 한아름 사 놓았음에도 먹기 귀찮아 손도 대지 않는 성규를 위해 친히 깐 귤이었다. 받으라며 내민 손을 성규의 얼굴 앞에서 살살 흔들어댔다. 그러기를 잠시, 성규의 환심을 사려 보노보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던 우현이 지나치게 화들짝 놀라버린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좆까."
평소처럼 욕지거리를 내뱉은 성규가 받아먹은 귤을 오물오물 씹었다. 좆까라며 하품을 하려 하는 성규와는 다르게,
"야 너,"
우현의 얼굴이 터질듯이 달아올랐다. 귤을 주면 적어도 손으로 건네 받을 줄 알았던 성규가 그대로 머리통을 일으켜 우현의 손에 들린 귤을 받아먹은 탓이었다. 아,하고 벌린 입으로 귤이 쏙 들어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ㅡ덩달아 저의 손가락까지.
"짜."
손 먹었잖아.
당황한 사람이 누군데, 되려 인상을 구기며 퉤,하는 시늉을 한 성규가 다시금 입 안에 든 귤을 오물거리며 하품을 했다.
우현의 머릿속에서 보노보노에 대한 고찰은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성규의 입이 닿았던 손을 화들짝 놀라 거둬들인 우현이 당황한 입가를 가렸다. 와 씨, 깜짝이야. 손 끝에 느껴졌던 묘한 감촉에 심장 한 켠이 조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뛰어오는 것을 느껴 한껏 커진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또 줘. 입 안에 있는 귤을 다 먹었는지 나른함에 늘어진 목소리가 칭얼대듯이 들려왔다. 우현이 당황감에 입가로 가져갔던 손을 내려 반사적으로 다시 귤을 뜯었다. 그렇게 줄줄이 성규의 입 속으로 넣어주면서 입술에 살짝 스치는 손끝을 신경쓰며 심호흡을 했다. 정말로 모르겠는 건, 수도 없이 헤픈 키스를 하며 살아왔건만 왜 이토록 민감하게 가슴이 놀라오는지였다. 덕분에 저 혼자 어색해져서 말을 잃은 우현이 성규가 입을 크게 벌릴 때쯤이면 기계처럼 귤을 넣어주는 것만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거실은 조용했다. 둘 중 어느 누구의 취향에도 맞지 않던 다큐멘터리가 내고 있는 소음을 제외하면. 그렇게 잠시 후, 슬금슬금 리모컨 쪽으로 팔을 뻗던 성규가 다시금 만화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돌렸을 때였다.
"좋아."
왼쪽 볼이 바닥에 눌린 성규가 잔잔한 목소리를 내었다.
"나 원래 과일 안먹어."
"……."
"귀찮아서."
"알아. 그래 보여."
"근데 내가 지금 귤 먹고 있잖아."
화면에선 아까 우현이 말했던 보노보노가 마악 등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좋아."
"……."
"우리 집에 눌러 사는 건 반대."
그래도 이렇게, 가끔 오는 건 허락할래.
그러니까 맨날 밥 해. 그건 좋아. 성규가 우현이 까 놓은 마지막 귤조각을 입에 쏙 넣으면서 말했다.
처음 들어섰던 것과는 다르게 옥탑방 내부는 따뜻했다. 며칠을 건너 뛰어 오늘 아침 즈음에서야 소복히 내리기 시작했던 눈이 어느새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새하얗게 창문 밖을 가리고 있었다. 내부와는 다른 바깥 공기 탓에 하얗게 서리가 낀 창문으로 괜한 눈동자를 돌리고 있을 때였다. 좋다는 말로 운을 뗐던 성규의 목소리가 아까는 정말이지 조곤조곤하고 간지러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만화가 만들어내는 소리만이 거실 안에 맴돌았다. 따뜻한 바닥에 볼을 대고 엎어졌던 성규가 끄응,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 덕에 잔뜩 헝클어졌던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 엉망으로 엉켰다. 느닷없는 성규의 움직임에, 어딘가 모르게 감동하려던 우현이 지나치게 큰 동작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깜빡거리며 눈을 비비던 성규가 홱, 고개를 젖혀 우현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밥 할거야!"
"밥?"
"뭐 먹을래? 김치볶음밥? 계란말이? 미역국?"
"이 시간에 무슨 밥이야?"
성규가 인상을 찡그렸다.
"칭찬해주니까 오버하기는."
퉁명스러운 말과는 다르게, 처음이었다. 비록 피식 웃은 것에 불과하지만ㅡ이만큼 경계가 무너진 천사의 표정은.
밥을 차려주는 것이 명수를 뛰어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말마다 온다고 했던 남자의 존재. 이미 굴 속에서 남자의 발걸음 소리에 익숙해져버린 여우를 내가 다른 방법으로 길들여버리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되어버렸다. 우현은 옥탑방의 부엌을 사랑했다. 저가 부엌 쪽에 발걸음을 옮길 때면 김성규는 언제나 묘한 눈으로 거실에 앉아 저의 동선을 눈으로 좇곤 했으니까. 그리고 가끔, 제 기분이 내키면 우현의 뒤꽁무니를 따라 쪼르르 옮겨다니기도 했다.
밥을 줬더니 얼떨결에 천사의 환심을 사버렸다. 처음에 저에게 뜬금없이 떡볶이를 만들어줬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나보다. 우현이 며칠 전, 귤을 건네주던 손가락 끝에 맞닿았던 성규의 입술을 떠올리다가 웃었다.
"왜 웃어?"
성규가 식탁 의자에 앉아 우현이 사다 놓은 토마토를 굴리다가 물었다.
"그냥."
그 입술이 좋았다고 말해봤자 모르잖아. 우현이 심심하게 대답하면서 성규에게 들키지 않으려 올라간 입꼬리를 손으로 감췄다.
* * * * *
"왜 이새끼 집은 먹을 게 없어."
성열이 탁,하고 소리나게 냉장고 문을 닫았다. 어떻게 있는 게 김치랑 참치캔밖에 없냐. 투덜거리면서 뒤를 돌아다 본 성열이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호원을 돌아보면서 고갯짓을 했다. 야, 가자.
"또 어딜 처 간건지. 집에도 없네."
"아 귀찮아. 밥 훔쳐먹고 가게. 뭐 먹을 거 없어?"
"없어. 냉장고 텅텅 비었다. 원래 이새끼 요리같은 거 안하잖아."
성열이 어깨를 으쓱하자 피곤한 몸을 바닥에 늘어뜨렸던 호원이 작게 툴툴댔다. 맞다. 그랬지 씹새끼. 호원이 우현의 집에 침범하자마자 뉘였던 상체를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갈 곳이 없어 우현의 집에 좀 와 본 건데, 요즘따라 바깥으로 나돈다던 우현은 역시나 집을 비운 모양이었다. 성열이 호원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또 저만 솔로다. 이번 겨울도. 그렇게 집마저 비워두고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것 같은 남우현마저 성열을 배신한 겨울 끝자락이었다. 성열은 벌써 2주일 째로 접어드는 편의점 알바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자정 즈음이면 나타나 잔뜩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가는 진상 손님도. 커플 모자에 커플 목도리를 칭칭 두른 커플들이 따뜻한 음료를 계산해 나갈 때도ㅡ 저는 한낱 편의점 알바생이라는 사실에 자잘한 짜증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잔돈 됐어요."
며칠 전부터 눈에 거슬리는 이 남자가 제일 씨발이다.
"정말요?"
"안 받아요. 동전 갖기 싫어서."
성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방금 계산한 봉지를 낚아 들고 고개를 꾸벅,했다. 자,잠깐만요! 그대로 돌아서려던 남자를 불러세운 성열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5600원이나 되는데요…?"
우물쭈물, 기어들어가는 성열의 목소리에 눈썹을 구긴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 쪽 팁이나 해요."
남자가 몸을 돌려 카운터를 벗어나려 했다. 저,저기 이거 진짜. 성열이 급기야는 남자의 옷소매를 잡아채며 말을 더듬었다. 이번에 남자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틀었다.
"아,씨발 진짜. 줘도 못 받고 지랄이네."
…지랄? 거침없이 들려오는 남자의 욕지거리에 깜짝 놀란 눈을 빠르게 깜빡인 성열이 지랄,이라는 욕을 되풀이하며 생각했다. 방금 지랄이라 했어? 그러는 새에 당황한 눈이 카운터 옆 플라스틱 통에서 100원짜리 소시지를 한 움큼 쥐어가는 남자의 손을 포착했다.
"이걸로 퉁쳐요. 그래도 남으면 그건 제발 그 쪽 좀 가지고."
두 눈은 쫙 찢어져서, 생긴 건 순박함의 완전체 정도로 생겨가지고 성격 한 번 좆같다,라고 생각했다. 편의점 문이 딸랑,하는 소리를 내며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분노의 발길질을 한 성열이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어딜가나 내가 봉이다. 심지어 이렇게 경우없는 손님새끼한테까지도. 특히나 전부터 밤이면 꼬박꼬박 편의점에 들르는 저 남자는 최근에 겪고 있는 스트레스 중에 최고치를 달려 준다 할 수 있겠다.
"소시지, 씨발…."
폐점을 하고 나서 집으로 가는 골목 길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을 때였다. 편의점 문 앞 두세칸의 계단 쪽에 버린듯이 떨어져 있는 소시지들이 성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잔돈 허세로 제 속을 뒤집어 놓았던 남자가 한움큼 쥐고 나갔던 소시지들임에 분명했다. 엉망으로 까진 소시지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으며 그 주위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고양이들이 정신없이 그것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 싸가지 없는 행동도 짜증나지만 이것도 짜증난다. 고양이 새끼들이나 처먹을 소시지를 살 줄 알았으면 그냥 잔돈, 내가 가질걸.
묘하게 비참해지는 밤이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칭칭 두른 목도리를 눈 밑까지 끌어당긴 성열이 쓸쓸한 골목길로 걸음을 옮겼다.
올해 첫화 |
안녕 2012년..넌 참 좋은 년이었어 그대들도 안녕! 이제 바쁜 일도 지났어요 완전 잉여 끝판왕입니다 놀고 놀고 또 놀고 놀고 놀고^^!!!!!!!!!!!,..... ..네 놀기는 무슨 폭연할게요, 그동안 늦ㅇㅓ서 너므 미안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