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축제가 끝이 났다.
첫째 날과 같이 많은 사람들 덕에 쉴 시간도 없이 일을 했고, 다들 새벽 5시가 되어서야 가게를 정리하고 편하게 쇼파에 몸을 눕힐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엔 임영민이 앉아있다.
어제 낮에 그렇게 얘기를 한 뒤로 서로 바빠 딱히 마주칠 일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우연인지, 아님 우연을 가장한 고의인지 딱 제 맞은 편에 앉아있는 임영민이 지금 그 누구보다 너무 불편했다.
“ 다들 진짜 고생 많았다. ”
“ 선배도요. ”
다들 고생했다며 서로를 위해주는 훈훈한 분위기 속 하나 둘씩 집으로 갈 준비를 하는 건지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모습에 저도 자리에서 일어나 제 짐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도 5시가 넘어 첫차를 타고 가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가방을 들고 주점 입구 쪽으로 향하자 저를 부르는 박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같이 가자고 부르는 거겠지.
야, 가기 전에 아침이나 먹고 들어가자.
짐을 챙겨 제 옆에 선 박우진에게 말을 꺼내자 피곤한지 하품을 한 번 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시간에 연 식당이 어디 있지. 맥도날드?
“ 먼저 갈게요. 내일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봐요. ”
“ 어, 잘 들어가라. ”
“ 안녕히 가세요. ”
박우진과 먼저 가겠다며 꾸벅 인사를 하자 피곤한 선배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제일 막내들이라 고생한 후배들의 모습도 안쓰러워 보여 손을 몇 번 흔들어주곤 찌뿌둥한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축제 주점 진짜 사람이 하면 안 되는 짓이구나.
“ 야, 박우진. 뭐 먹을래. ”
“ 글쎄. 너네 집 근처에 24시 순댓국집 있지 않냐? ”
“ 아, 맞아. 거기 갈까? ”
“ 너 데려다주면서 거기서 먹고 가면 되겠네. ”
“ 나 데려다주려고? ”
“ 원래 이른 아침도 위험하다. ”
오… 어쩐 일로 멋있는 척이냐, 박우진.
다시 봤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기며 박우진을 쳐다보자 괜히 민망한지 아무렇지 않은 척 딴 곳을 쳐다보는데 귀가 빨갰다.
거짓말 못 하는 거 이런 부분에서 티가 난다니까.
그 모습이 나름 귀여워보여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자 박우진이 기겁을 하며 제 팔을 쳐냈다.
나름 좀 꾸민다고 자기 스타일 건드는 건 엄청 민감하게 군다.
“ 축제 진짜 너무 피곤하다, 그치. ”
“ 그러게. 김여주 저질체력에 어떻게 용케 버티긴 버텼다. ”
“ 야, 나 저질체력 아니거든. ”
“ 아니긴 개뿔. ”
저를 놀리는 듯한 말투에 얄미워져 팔을 한 번 때리자 아프다며 과장되게 엄살을 부리는 박우진의 모습이 웃겨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 저를 빤히 바라보던 박우진이 얼굴에 웃음기를 없애곤 약간은 머뭇거리며 꽤 진지한 목소리로 저를 불러왔다.
아, 얘가 이렇게 분위기 잡으면 뭔가 무서운데.
“ 나 뭐 좀 물어봐도 되냐. ”
“ 언제는 허락 받고 물어봤어? 뭔데 그래. ”
“ 사실 아까, 그… 영민선배랑 너랑 얘기하는 거 들었어. ”
“ 아… ”
“ …혹시 흔들려? ”
“ …… ”
흔들리냐고? 내가 어떻게 다짐을 했는데 흔들려. 아니, 안 흔들려. 절대 흔들리는 거 아니야.
저를 빤히 바라보는 박우진에게 대답을 해주려 입을 열었지만 말이 턱 목구멍에서 막힌 것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너한테도 얘기 계속 했잖아. 나 영민선배 잊는다니까. 진짜 안 흔들려, 진짜로. 정말 안 흔들린다고 말해야 되는데…
왜 말로 나오지 않는 걸까.
계속 목에서만 맴도는 말들을 애써 삼키며 차마 박우진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까, 너한테는.
“ …흔들리는구나. ”
제 기분 탓인지 뭔가 씁쓸하게 들리는 박우진의 목소리에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서있는 제 발끝만 바라보았다.
이렇게 임영민 얘기만 나와도 가던 길을 멈추고 제 기분 하나 마음대로 컨트롤 못 하는데.
사실 흔들리고 있는 거 맞잖아.
임영민과 방 안에서 얘기할 때도 사실은 나도 보고 싶었다고, 왜 이제서야 후회를 하냐고 말하고 싶었으면서.
하지만 다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임영민은 권태기가 온 게 맞았고, 저와 헤어짐으로써 권태기를 끝냈다. 그리고 익숙했던 제가 없으니 다시 그리웠겠지.
그 권태기를 겪는 과정 속에서 제가 받았던 상처들을 떠올리면 다시 눈물부터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또 반복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 김여주, 나 할말 있다. ”
“ …뭔데. ”
“ 듣고 욕해도 좋으니까 도망가지만 마라. ”
“ …뭐냐니까. ”
“ 내가 어제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지. ”
“ 어. ”
“ 그거 사실은… ”
이 타이밍에, 이런 멘트면 정말 지나가던 개도 알 수 있을 거다.
아, 고백하는구나.
“ 너야. ”
꽤나 충격적인 박우진의 고백을 듣고 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대체 왜, 였다.
대체 왜 니가 날? 왜? 뭐 때문에? 언제부터?
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박우진의 고백이 좋아서? 아님 너무 놀라서? 충격적이여서? 이유가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난 항상 널 친구로 대했는데 너한텐 내가 친구가 아니였구나.
“ 지금 고백하는 거 존나 찌질하게 보일 것 같아서 참으려고 했는데. ”
“ …… ”
“ 그러다 진짜 니가 다시 영민선배한테 갈까봐, 그게 좀… ”
“ …… ”
“ 무섭다. ”
“ …… ”
“ 솔직히 나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이 들어. ”
“ …… ”
“ 내가 이기적이지만. ”
이제까지 온통 임영민으로 가득 차있던 뇌가 반으로 갈라져 새롭게 박우진이 들어왔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술도 안 마셨는데 술마신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고 핑핑 도는 기분이였다.
아깐 호기롭게 고백해놓고 이제는 제 앞에 서서 제 눈치만 보고 있는 박우진이 새삼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근데 우진아, 나는 한 번도 너를 남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
“ 우진아. ”
“ 어. ”
“ 너한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
“ 미안해. 나 때문에 더 혼란스럽지. ”
“ …… ”
“ 대답 들으려고 말한 거 아니야. 그냥… ”
“ …… ”
“ 여기 나도 있다고 너한테 알려주고 싶어서. ”
오늘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자긴 글렀구나 싶은 생각에 절로 한숨부터 나왔다.
머리에선 임영민과 박우진이 뒤엉켜 제 온 세상을 들쑤시고 다녔다. 구남친과 남사친.
항상 이렇게 문제는 한 번에 몰려온다.
“ 너 전화 오는 것 같은데. ”
멍하니 서있는 제 손을 가르키며 박우진이 말하는 걸 듣고 서야 제 손에서 진동이 울리는 걸 느꼈다.
손을 들어 번쩍거리는 화면을 쳐다보자 액정에 떠있는 건.
임영민.
서로 이름을 확인하고선 둘 사이엔 어색한 정적만 숨막히게 흘렀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전화는 끊기고 상단바에 부재중 전화가 하나 찍혀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울리는 카톡에 누가 보냈는지 알 것 같아 그냥 확인하지도 않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 가자, 배고프겠다. ”
제 행동에 대해서 딱히 묻지 않은 채 제 팔을 잡아 다시 걷기 시작하는 박우진을 따라 힘없이 걷기 시작했다.
아마 이번 축제는 정말 살면서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저보다 조금 앞서 걷고 있는 박우진의 뒷모습을 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동안 얼마나 짜증나고 답답했을까.
“ 조심해서 들어가. ”
“ 응, 너도. ”
이미 서로 밥 생각이 다 떨어진 탓에 아침은 생략하고 박우진이 절 데려다주는 것으로 끝을 냈다.
평소와는 다른 공기에 어색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 절 느꼈는지 박우진이 두 발짝 제 곁에서 떨어져 저를 쳐다보았다.
“ 나 피하라고 고백한 거 아니야. ”
“ …… ”
“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
“ …… ”
“ 내일은 웃는 얼굴로 봤으면 좋겠다. ”
제게 손을 흔들고는 등을 돌려 다시 왔던 길을 걸어가는 박우진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너무 신경 안 써도 된다니, 잔뜩 신경이 쓰이게 만들어 놓고선.
작게 한숨을 내쉬고 집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아까 왔던 카톡이 생각나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역시나 임영민에게서 온 카톡.
14 임영민 선배
잠깐만 얼굴 좀 보자
7시까지 너네 집 앞으로 갈게 오전 5:21
대체 이 남자들은 왜 번갈아서 나를 괴롭히는 걸까.
박우진이 사라지자 이번엔 임영민이 나타났다.
지금 시각은 6시 40분. 임영민이 오겠다고 한 시간까지 20분이 남아있었다.
집 앞에 가만히 서서 핸드폰만 붙잡고 채팅방에 메세지를 썼다 지웠다 10번쯤 반복했을까, 귀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여주야. ”
임영민이다.
깜짝 놀라 뒤를 돌자 방금 온 건지 머리가 바람에 날려 살짝 헝클어진 상태였다.
이렇게 자꾸 얼굴 마주치면 마음이 약해지는데.
“ 방금 온 거야? ”
“ 네. ”
“ 우진이가 데려다줬어? ”
“ …… ”
“ 우진이랑 같이 나가길래. ”
“ 네. ”
“ 그렇구나. ”
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임영민이 제 눈치를 슬쩍 보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마 계속 단답인 제가 적응이 안 되겠지. 선배한테 이랬던 적 한 번도 없으니까.
“ 어디 카페에 들어가서 잠깐 얘기 좀 하자. ”
“ …카페 말고 여기서 해요. ”
“ …… ”
“ 별로 할 얘기 많지도 않은데. ”
“ 그래, 그러자. ”
제 말에 임영민이 멋쩍게 웃고는 한 손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헝클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거 긴장할 때 나오는 버릇인데.
어쩐지 제 앞에서 긴장한 임영민이 연애 초 자신의 앞에서 잘 보이려 행동하던 그때의 모습과 겹쳐보여 기분이 좀 뒤숭숭했다.
“ 어제 주점에서 말했던 거, 내 마음은 그때랑 같아. ”
“ …… ”
“ 연락하고 지냈으면 좋겠어. ”
“ …… ”
“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서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뭐 이런 거 있잖아. ”
“ …… ”
“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지금 내 상황이 그런 것 같아. ”
“ …… ”
“ 그냥 잠깐의 권태였는데 그걸 못 참은 내 탓이라고 생각해. ”
“ …… ”
뭐가 그렇게 떨리는지 손은 바르르 떨며 애써 괜찮은 척 제게 담담히 말하는 임영민의 모습에 마음 한 구석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금방 후회할 짓을 왜 했냐고, 바보야.
제가 말없이 가만히 듣기만 하며 서있자 제 쪽으로 한 발짝 다가와 제 손목을 살며시 잡아왔다.
“ 기다릴 수 있어. ”
“ …… ”
“ 니가 나한테 받았던 상처들 나한테 다시 다 돌려줘도 되니까, ”
“ …… ”
“ 그냥 돌아오기만 해. ”
“ …… ”
“ 너 다른 남자들이랑 있는 거 볼 때마다 진짜 피가 거꾸로 솟더라. ”
“ …… ”
“ 주점 앞에서 번호 따일 때도 그랬고, 박우진이랑 같이 다니는 것도 그렇고. ”
그냥 얼굴도 보고, 이 말도 해주고 싶어서 온 거야.
잡았던 제 손목을 놓고 들어가라며 손짓하는 임영민을 한 번 쳐다보고는 뒤를 돌아 아파트 현관문 앞으로 걸어갔다.
나도 인사를 해줘야하나.
아파트 현관문 유리에 비친 임영민은 계속 저를 보고 있는 모습이였다.
인사를 해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뒤에서 다시 저를 부르는 임영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 여주야. ”
“ 네? ”
“ 내일 점심 나랑 먹자. ”
“ …… ”
“ 시간 비워놓을게. ”
제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제게 손을 흔들고는 뒤를 돌아 걸어가는 임영민을 빤히 쳐다보다 아파트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쿨하게 헤어지니까 뭔가 좀 이상하네.
옛날에 헤어질 때에는 서로 1초라도 더 못 봐서 안달이였는데.
다시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나자 저도 모르게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을 발견하곤 다시 얼굴을 굳혔다.
아직은 안 돼, 마음 약해지지 말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카톡이 온 듯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임영민인가 싶어 확인하자,
15 박우진
잘 들어갔냐
나 지금 집 도착했다
푹 쉬어 오전 7:09
아 그리고
내일 점심 같이 먹자
내일 봐 오전 7:10
한숨부터 절로 나오는 카톡 내용에 인상을 찡그린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왜 갑자기 둘 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거야.
무조건 한 명은 거절을 해야 하는데.
아, 뭐 셋이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그건 셋 다 각자에게 안 좋을 것 같고.
오후 수업 가기 전까지 절대 잠에 못 들 것 같은 기분에 기분이 축축 쳐졌다.
구남친과 남사친 사이,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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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씨씨입니다 ^.^
뭔가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다들 잘 지내셨나요?
지난 편 댓글을 써주신 모든 독자분들과 추천을 눌러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정말 깊이 감사드립니다 ㅠ.ㅠ
제 글솜씨에 벅차게 받고 있는 많은 사랑 덕분에 글쓸 힘이 많이 나서 항상 행복해요!
이번 편은 좀 진지하게 오래 끌었습니다.
그냥 대놓고 삼각관계를 선포한 편이죠.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막 쓰다보니 자꾸 산으로 가는 것 같고 이래서 스토리를 자꾸 원래대로 끌어내리느라 글을 쓰는데 힘이 많이 듭니다...
그리고 지난번 암호닉 신청해주신 거 다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딱 거기까지만 받고 암호닉은 더이상 글에서 받지 않고, 앞으로는 따로 공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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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암호닉 명단입니다, 암호닉 신청하신 분들은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나중에 암호닉분들께 따로 외전이나 특별편 같은 감사의 선물을 드릴 예정이라서 암호닉 명단 관리를 할 예정입니다 :-)
제 글에 관심과 사랑을 남겨주시는 분들을 위한 선물이라서 암호닉만 신청을 하시고 따로 댓글을 달지 않으시는 분들은 한 번에 싹 정리할 생각입니다.
정이 없다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 그래야 제 글을 사랑해주시는 분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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