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 거야.
Murakami Haruki - 〈Norwegian wood> 중에서
스튜디오 핀 조명이 무대를 밝히고 수많은 카메라 앵글이 세 사람의 피사체를 담는다. 그중 메인 카메라가 그들을 스크린에 박제할 때, 관객석은 FD 진행에 따라 열렬히 환호했다. 사회자는 나비넥타이를 조이며 곧바로 마이크를 들었다.
- ‘드디어 최종 결선에 오른 후보자들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과연 제17대 [나는 대학인이다] 퀴즈왕이 탄생할 것인지에 대한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데요.’
사회자의 멘트에 이어 웅장한 멜로디가 끓는다. 세 사람의 손바닥이 버저(Buzzer) 주변을 기웃거린다. 사회자의 질문을 기다렸다가 아차 싶으면 바로 누를 셈이었다. 고3 현역보다 더한 긴장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속이 타는 것이 벌써 물을 두 병이나 비워냈다. 녹화 도중에 화장실 못 간다고 그랬는데 젠장.
- ‘문제는 총 세 문제입니다. 다들 준비되셨죠?’
……
- ‘그럼 첫 번째 문제 드리겠습니다.’
……
- ‘건강을 축내는 학과는?’
아아, 제발 아는 것만 나와라 속으로 기도하길 여러 번, 사회자의 급작스런 첫 질문에 보기 좋게 패배한 나는 엎드려 통곡했다. 빠앙-, 맛깔스럽게 울리는 버저를 보아라. 역시나 스피드의 왕, 그의 것이었다. 족구 드리블 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 ‘이지훈 학생이 조금 더 빨랐는데요. 자, 정답은요?”
- ‘건축학과.’
- ‘네, 정답입니다!’
밤낮없는 마감에 흔히들 ‘잠은 죽어서 자는 거다’라는 말이 도는 학과로 유명하죠. 어쨌든 이지훈 학생이 먼저 3점을 획득합니다! 사회자는 사족을 덧붙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기세를 업은 그가 여유롭게 손을 흔든다. 뽀얀 분홍색을 머금은 손가락에 시선을 뺏긴다. 진짜 장담하는데 나만 그런 건 아닐 거야. 저 손에 깍지를 끼고 싶다 던지, 볼에 대고 막…… 집중해.
- ‘두 번째 문제입니다. 취업 깡패라 불리며 이과생들의 자부심을 드높이는 학과는요?’
- ‘저요 저요 저요!’
- ‘버저를 누르셔야…….’
- ‘마음으로 눌렀어요! 기계공학과!’
네! 부승관 학생이 두 번째로 3점을 가져갑니다! 사회자가 진행대를 마구 쳐 대며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역시나 흥이 많은 승관이 토끼 춤을 시작한다.
야야, 김여주 봤냐 봤냐? 내 유식함을 보았냐? 현란한 스텝으로 관객을 압도하며 입방정을 떨어댔다. 그래, 승관아. 몸부림 잘 봤고 이제 난 틀렸어. 멀찌감치 떨어져 멍한 눈빛으로 관객석을 훑자, 그들은 FD의 손짓으로 계산된 아쉬움을 표현했다.
참내, 지금 내 점수 보고 비웃은 사람 똑똑히 기억할 거다. 내 기억력 태평양 앞바다 돌고래랑 똑같거든. 검지와 중지로 ‘난 너를 보고 있다’ 협박하는 제스처에 관객석 앞줄이 웃음을 토한다. 진정하라는 사회자의 말에 앞으로 쏠린 머리칼을 가볍게 뒤로 넘기며 후-, 한숨을 뱉어내는 나였다.
- ‘김여주 학생은 조금 더 분발하셔야 합니다.’
- ‘됐고 문제요.’
- ‘이번에는 꼭 맞추시길 바라겠…….’
- ‘암 어 임페이션트 펄슨이요.’
제 인생에 ‘인내심’이란 단어를 배워 본 적이 없어요. 알겠죠. 낮은 점수에 분이 폭발했다. 껄렁한 자세로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는 양아치를 보며 지훈과 승관은 각각 한마디를 건넸다. 이를테면 이렇게.
- ‘김여주 인성 봐라. 오백 원 뽑기랑 바꿔 먹지도 못한다 아님?’
- ‘쟤 지금 화났어.’
- ‘대한민국 주입식으로 그렇게 가르쳤건만 왜 맞추지를 못해?’
- ‘그럼 네가 방송 끝나고 나머지 수업해주던가.’
……뒷담도 아니고 실시간 앞담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마치 상쾌하고 더럽고 즐겁고 열이 받는구나. 누구보다 삐딱하게 반응하고 싶은데 무엇을 하면 좋을까. 버저 주위를 맴도는 불안한 가운뎃손가락이 당당히 카메라를 향할 때, 목덜미를 죄어버리는 사회자의 마지막 문제에 흠칫 놀라 눈을 피했다. 와, 이건 솔직히 반칙이잖아.
- ‘십 초 드리겠습니다! 호구들이 경영하는 학과는?’
- ‘……몰라요.’
- ‘김여주 학생, 정답은요?’
- ‘기억이 안 나요.’
재벌 기업인이 검찰에 출두할 때 흔히 쓰는 문장이 이러한 적재적소에 쓰이다니. 모른 척, 아닌 척하는 것이 얼마나 땀이 나고 두근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멀리서 불구경을 지켜보는 지훈과 승관의 눈빛엔 귀찮음이 가득하다.
- “김여주, 끝나고 치킨.”
- “야야, 이쥰이 교촌 사준대.”
- “그건 네가 좋아하는 거고.”
- “이런 젠장, 눈치 겁나 빨라.”
내게 회유를 건네다 또 싸움 길로 트는 녀석들이다. 사회자는 목청껏 수를 셌다. 카운트 다운이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숨을 죽인 관객석 뒤에서 빨리 답하라 압력을 가하는 피디가 보였다. 돌돌 만 A4용지로 오른쪽에 찬 시계를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린다. 아, 빼도 박도 못한다. 어쩔 수가 없다. 동기들과 선배님들을 비롯한 존경하는 교수님들, 부디 절 용서하세요.
- ‘……호텔경영학과.’
환호의 박수가 쏟아진다. 메인 세트장에 제17대 [나는 대학인이다] 현수막이 펄럭거렸다. 꽃가루로 뒤덮이는 세트장이 무너져 내린다. 모두가 떠나가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무심코 떠오른 교촌 신메뉴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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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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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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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여주!”
- “……어?!”
- “이 와중에 꿈까지 꾸셨어?”
- “……뭐야, 꿈이야?”
입맛을 다시며 턱 주변을 닦아내는 날 보며 동기는 혀를 찼다. 네 얼굴에 테이블 무늬 박혔어. 그녀가 옆 볼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흘긋댄다. 휴대폰 카메라를 거울삼아 확인하자, 누구보다 선명하고 정확하게 묻은 발간 꽃잎이 날 반긴다. 이거 우리 할머니 장식장에 있는 무늬랑 똑같네. 울퉁불퉁한 피부를 만지작대며 방긋대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물컵을 건넸다.
맹물이 달다. 역시 물이 최고다. 대각선 자리 동기의 물까지 받아 마시고 나서야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정신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까 그게 꿈이었단 말이지. 완전 생생했는데. 아니 호구 과가 뭐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테이블에 비비적대며 잠을 잔 터라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내리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공간을 뒤흔드는 하나의 목소리들.
- “우리는!”
- “세계로!”
- “세계는!”
- “A대로부터!”
학교 근처 주점에 놓인 긴 테이블을 꽉 메운 학생들이 목청을 높인다. 가게 간판 위, [2017학년도 호텔경영학과 신입생 환영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저녁 바람에 흔들린다.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잔을 기울일 때, 정 중앙에서 500cc 맥주잔을 하늘 위로 올리며 이미 꼬일 대로 꼬인 혀로 구호를 외치고는 입안으로 알콜을 털어 넣는 고삐 풀린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 “A대! A대로부터!”
아아, 내가 말을 안 했구나.
-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아-.”
그 강아지가 바로 나야.
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Chapter 13. 〈사랑은 유리창 너머로 하는 거예요>
01.
자자, 여기 주목! 우렁찬 목소리로 맥주병을 가볍게 두드리는 근원지를 찾아 한 공간에 엉켜 있는 미래의 일꾼들이 고개를 돌린다.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한 술을 재빠르게 털어 넣고 눈가를 비볐다. 미친 듯이 졸리다. 너무 졸려. 환영회는커녕 집 나간 정신 마중도 힘들다. 완전 글러 먹었다는 뜻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졸음 때문에 책상에 코를 박고 자도 이상할 게 없는 이 시점, 옆자리에 앉은 동기가 슬쩍 눈치를 보낸다.
야, 학회장이 계속 너만 봐.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면 성질 한번 고약한 뿔테 안경이 보인다. 신환회의 주최자인 이름하야 학회장이 동글뱅이 안경을 콧대 끝까지 올린다. 미간에 딱 달라붙은 안경을 애써 무시하며 웃음을 참았다. 실룩대는 입꼬리를 잠재우기엔 조금 역부족이었지만.
- “어느 정도 시간 된 것 같으니까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소개 해볼게요.”
- “저, 선배님…….”
- “빼는 건 고스톱 밑 장밖에 없어요. 자기가 고스톱이다 하는 분은 묵비권 행사해도 됩니다.”
누군가의 볼멘소리를 단칼에 내치는 목소리에 약속이라도 한 듯 저마다 시선을 피했다. 아직 이름은 모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말한다. ‘침 꼴깍거리는 소리 안 들리게 하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대학 와서도 빌어먹을 자기소개 하네’ 뭐 이런 것들 말이다.
강제 눈치 게임 속에서 모두가 타이밍을 엿볼 때, 맞은편 구석에서 조용히 손을 드는 신입생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시선을 압도했다. 코끝에 걸친 안경을 벗어 입바람으로 먼지를 날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장기자랑 먼저 해도 됩니까. 상대방의 당찬 질문에 학회장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빙빙 돌리며 코웃음 쳤다.
- “잠시만 일어나겠습…….”
- “장기 꺼내 놓는 척 우어어-, 설마 이건 아니겠죠.”
- “촉이 굉장히 좋으십니다.”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구석에 서서 웃는 모양이 꼭 해바라기 같다. 쨍한 햇살을 따라 웃는 꽃 말이다. 학회장은 가볍게 조소하다 턱 끝으로 신입 해바라기의 신상을 물었다.
- “너부터 시작하자. 이름이 뭐지?”
- “이석민입니다. 클 석(碩)에 옥돌 민(珉)을 써서 세상에 큰 재목이 되어…….”
- “그래 석민아, 너부터 시작이고 소개 끝나면 앞에 있는 잔 비우는 거야.”
신입들 틈에 앉아있던 선배들은 작전 수행이라도 하듯 주방에서 노란색 트레이 두 짝과 맥주 피처를 양손에 각각 들고 직접 서빙을 시작했다. 보아라, 이것이 소맥의 향연이다. 거품이 끓어오르는 잔이 말을 한다. 점점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속을 게워내고 싶었다.
- “우리 해산 언제 해?”
- “학회장 원할 때.”
- “우리 두 시간 전부터 있었잖아.”
-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신입이 끝낼 권리는 없어.”
계속 주변 눈치를 보던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 학회장 호경에서 엄청 유명해. 한번 물면 절대 안 주는 개. 응, 15학번 미친개. 이름은 계범주. 근데 선배들은 미친 ‘개’를 따서 ‘개’범주라고 부른대. 이만하면 뭔 뜻인지 알잖아.
대충 학과 분위기를 알 수 있다던 OT에 참석하지 않았던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참석을 했어야 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남기지 않고 술을 배분하는 상아탑의 지식인을 진작에 알아보았더라면, 승관이가 말한 재수행 KTX를 1초 정도 고민해 보기라도 했을 텐데 말이지.
각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어디 빠트린 잔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던 ‘개’선배는 상대적으로 거품이 많은 내 맥주잔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곧 거품이 가라앉자 빈틈없이 남은 맥주를 쏟아부었다. 꼭꼭 씹어 먹어야 소화가 잘 됩니다. 시비를 트고 싶은 건지 고까운 눈빛이 달갑지 않다.
그럼 ‘옥돌 민’부터 콜. 학회장이 신입 해바라기에게 손짓했다. 머뭇거리며 일어나는 해바라기를 기점으로 자기소개라 쓰고 본격적인 술 파티라 읽는 환영회가 열렸다. A대의 희망과 꿈들이 잔을 기울인다. 쓰디쓴 알코올을 넘기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열매들은 곤욕을 치르는 중이었다.
- “17학번 이.석.민. 입니다. 호텔 경영학과의 무궁한 영광과 발전이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누가 교수님 불렀어.”
- “말투가 원래 이렇습니다.”
- “누가 말대답하냐.”
선배들의 조소에 석민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500cc 잔을 움켜잡고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해바라기…… 아니, 석민아. 정말 미안한데 나는 봤다. 약 1.5초 동안 여길 박차고 나갈까, 아니면 순응할까 갈등하는 너의 흔들리는 눈빛을. 조심스레 자리에 앉아 멍한 눈빛으로 물을 갈구하는 석민이 첫 타자를 끊자, 신입생들은 차례대로 자신을 알렸다. 그리고 그런 신입 중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게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 “김여주라고 합니다. A대 호경의 자랑스러운 선배님들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들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나는 내 앞으로 슬쩍 밀어지는 또 다른 맥주잔 하나. 학회장은 너그럽게 웃으며 그 잔은 네 것이니 빨리 마시도록 하여라 압박을 주고 있었다. 뭐야, 왜 나만 두 잔인데. 생전 처음 보는 동기들과 눈짓을 주고받을 무렵, 학회장은 팔짱을 끼고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 “그래서?”
- “……네?”
- “명성을 떨쳤는데 뭐 어쩌라고.”
- “그러니까…… 저도 언젠가 선배님들의 발자취를 따라 같이 걸어가고 싶습니다.”
당황하다 못해 뭉뚱그리며 헛소리를 하는 꼴이 안타까워 손을 꼭 쥐었다. 식은땀이 난다. 바이킹 맨 뒷자리에서 타는 것보다 아찔했다.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멍청하게 웃는 나를 보며 학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아, 후배님 말은 우리가 힘들게 개척한 길을 날로 먹겠다?”
- “아니, 그게 아니라…….”
- “벌써부터 약은 후배는 보기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너는 특별히 두 잔. 학회장은 다른 한 손에 무거운 맥주잔을 쥐여 주며 크게 손뼉을 쳤다. 선배를 따라 박수 릴레이가 펼쳐진다. 어떻게든 두 번 먹이려는 하이에나였다. 거품이 가라앉은 맥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면 그 속에 그려지는 죽마고우의 얼굴.
- ‘김여주, 술은 새내기 때 많이 먹어 둬야 후회가 없대. 아무튼 주는 대로 다 마셔 버려.’
-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해?’
- ‘우리 친척 형. 삼수해서 새내기 전문이야. 그러니까 믿어도 돼.’
- ‘……너 지금 뭐해.’
- ‘야, 멋지지 않냐. 이게 바로 더기다.’
신환회 때 뽐낼 요상한 춤을 거울 앞에서 연습하던 승관이 그립다. 같이 있으면 그 무엇도 두려웠던 죽마고우여, 오늘따라 볼록 튀어나온 두 볼이 보고 싶다. 건조한 입술을 깨물며 회상에서 벗어나자 학회장은 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 까짓것 마셔준다. 솔직히 연속 두 잔은 껌이지. 죽마고우의 허세를 빌려 잠시 자신감을 가진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가장 보고 싶은 얼굴.
- ‘남이 주는 술 다 받아먹기만 해봐.’
신환회 전날 소맥을 부르짖는 내 뒤통수에 다짐을 받아내려던 지훈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절 못 하면 좋아하는 거고 뭐고 없어. 알아서 해. 벚꽃 잎을 손에 쥐려 하늘로 뜀박질을 하던 나는 배시시 웃으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어쨌거나 지금 주어진 과제는 맥주 두 잔이니 빨리 클리어하고 바통을 넘길게. 지훈아, 내 마음 알겠지. 이 자리에 없는 그를 머릿속으로 소환하며 어쩔 수 없음을 강조한다. 어느새 비워진 잔을 높이 들어 머리 아래로 과감히 터는 이 시대의 지식인을 보며 모두가 박수갈채를 보냈다.
- “화장실은 저쪽에.”
- “괜찮아요.”
- “그럼 한잔 더?”
- “화장실이 어디라고요?”
학회장의 말을 받아치며 코를 찡긋거렸다. 속에서 용이 기어오른다. 필히 막아야 했다. 앞에 있는 물컵을 단박에 들이켰고 그것이 곧 소주였음을 눈치챘을 때, 순간 가게 문이 열렸고 또래로 보이는 무리가 쏟아졌다. 금세 가게 안은 북적였다. 눈으로 얼추 세어보니 족히 2층 테이블을 차지하고도 남을 숫자였으니까. 그 낯선 무리에 속해 있던 어느 학우는 소주병을 흔들던 학회장의 어깨를 때리며 눈썹을 구겼다.
- “현수막 왜 가려?”
- “가린 게 아니라 얹은 겁니다.”
- “일부러 우리 현수막 가렸지.”
- “진짜 아니야. 걸어 놓을 때가 없었다니까.”
학회장은 볼을 꼬집히면서도 상대방에게 쩔쩔맸다. 상황을 들어보니 간단했다. 사정상 같은 술집을 예약한 다른 과가 있었는데, 이미 설치된 타 과의 현수막을 덮어버린 건 다름 아닌 학회장이었다. 호텔 경영이 제일 잘났다던 자랑스러운 학회장은 멀리 여행을 떠났는지, 이 자리에 남은 건 상대방에게 벌게진 볼을 잡히고도 실실 웃는 곰이었다. 둘은 캠퍼스커플, 일명 ‘CC’였다. 어쩐지 눈에서 하트가 나온다 싶었다.
- “와, 이번에 건축학과 진짜 많네.”
- “그러게요 진짜 많…… 네?!”
- “앞에 있는 애 봐봐, 진심 귀엽게 생겼다.”
소주잔에 빨대를 꽂아 마시던 선배는 오징어를 씹으며 손가락으로 무리를 가리켰다. 쟤 괜찮지 않아? 검은색 후드 쓴 애. 귀여운데 까리해. 지금 나 보고 있는 것 같다. 진짜로. 좀 보라니까. 손바닥으로 얼큰하게 취한 두 볼을 감싸며 내게 눈짓을 보낸다.
아니요 선배님, 저는 괜찮습니다. 아까 눈 마주쳤어요. 충분해요. 그리고 선배님이 아니라 절 보고 있는 걸요. 애매하게 비껴간 시선이 벽에 달라붙는다. 손님들이 남긴 포스트잇을 하나씩 정독하며 현실을 회피할 때, 얼굴을 부여잡던 선배는 내 팔을 콕콕 찌르며 한 방을 날렸다.
- “뭐야, 쟤 지금 너 보고 있는 것 같은데?”
- “……아니요.”
- “얼굴 괜찮아? 타겠는데?”
- “그럴 리가요.”
- “에이, 나 보는 줄 알고 괜히 설렜네.”
얼굴이 미친 듯이 뜨겁다. 이건 술기운이 아니다. 누군가 뚫어지게 쳐다볼 때 느껴지는 그 기분이란 말이다. 선배는 아쉬움을 남긴 채 잠시 자리를 떠났다. 읽히지도 않는 포스트잇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슬쩍 앞을 내다보는 나였다. 지훈아, 안녕. 오늘도 멋지게 입었구나. 술 취한 로봇이 그에게 어색함을 건넨다. 그러자 그가 예쁜 입술로 신호를 보낸다. 수줍은 마음을 담아 그의 입 모양을 따라 움직였다. 밤에 보면 더 귀여운 얼굴로 암호를 보내는 비밀 요원의 메시지는…….
- “미…… 쳤어……?”
……
- “뭘 봐……? 뭘 보냐고?”
그가 허공에 술잔을 기울이다 이내 검지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저건 끝이라는 얘기다. 유독 깊게 들어간 보조개가 거침없는 분노를 표했다. 사랑의 암호 발신자는 끝내 2층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자리에서 일어나 몰래 2층을 엿보면, 눈웃음으로 뭇사람들을 학살하는 이지훈, 그가 있었다.
……누가 저렇게 웃어. 왜 웃는 거야. 웃는 건 도대체 누가 만든 거야. 헛소리만 잔뜩 내뱉을 만큼 신경질이 났다. 덕분에 동기들의 자기소개도, 왁자지껄한 선배들의 농담도, 부어라 마셔라 달리는 모두의 즐거움에 나만 쏙 빠져 있다.
내 죽마고우는 이렇게 말했다. 이지훈 눈웃음에 여러 명 반하겠다고. 나도 그에게 말했다. 나한테만 예뻐야 한다고. 그런데…… 그런데 있잖아.
- “아까 후드 쓴 남자애 신입인가? 작년에 못 본 거 같지 않아?”
-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우리 과 애들도 다 기억 못 해.”
- “여친 있냐고 물어볼까?”
- “왜, 있으면 뺏기라도 하게?”
동기인지 선배인지 맞은편에 앉은 여우들은 서로 술잔을 건네며 A대 뉴페이스에 관심을 기울였다. 속이 타들어 간다. 관심 갖지 말아 주세요. 아니 진짜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고. 심통 난 얼굴로 소주를 기울이던 내게, 옆 동기는 자작하면 평생 연인 하나 없다 구박하며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한쪽 손에 턱을 괴고 투명한 잔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타이밍 좋게 울린 휴대폰 문자의 주인공은 역시 양반이 아니었다.
- [너 말아먹었지]
- [ㅅㅔㅇ각하고 있었는데 너도ㅜ 얒반이 아니냐]
- [얼마나 마셨어]
- [너 근데 이시니가 양바ㅣㄴㅇ이지]
‘양반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넌 이(李)씨니까 일단 양반이 아니더냐.’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뿐이었다. 여하튼 지훈아, 나는 지금 숨을 쉬며 잘 살아있다. 그거면 된 거 아니겠니. 내가 왜 학문과 진리를 탐구하는 상아탑의 이름으로 전공 책이 아닌 소맥을 넘기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것도 과정 중의 하나라면 기꺼이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하면…….
[지훙나 ㅓㅇ제 끝나]
[너 끝나면]
[어ㅏㅔ제그 ㅌ나는머라]
[일단 알겠어]
저 딱딱한 문자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하트라도 하나 보내주지. ‘히읗’이라도 하나 남겨주지. 문자 할 때는 그렇게나 잘 보내더만 오늘은 왜 이렇게 차갑기가 그지없을까. 내 마음이 그지 같아 지기 전에 빨리 말해 봐. 말해보라고.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붙잡고 말을 건다. 술을 기울이던 동기는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내 잔을 대신 비웠다.
- “……어, 지훈이다.”
- “지훈이는 또 누구야?”
- “지훈이다…….”
그라운드 구석 테이블에 뻗어 있던 신입 해바라기, 그러니까 석민이 2층을 향해 올라갔다. 두 발인지 네 발인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계단을 내려오던 지훈이 석민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그와 동시에 내 필름도 막을 내렸다.
02.
테이블에 쓰러진 새내기들을 붙잡고 학교 기숙사로 향하는 선배들의 숨소리가 거칠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선배 등에 엎어진 동기의 코골이가 들린다. 그 옆에서 비틀대며 걷고 있던 나는 밤공기에 몸을 떨었다. 아직 겨울이 남아 있는 3월의 날씨가 점퍼 속 온기를 앗아간다. 지훈이가 머플러 꼭 챙기라고 그랬는데. 목에 꼭 두르라고 했는데. 코를 훌쩍이며 붉은 보도블록을 따라 걷는다. 얼마 가지 않아 뜀박질이 시작되리라는 것도 모른 채.
- “얘들아 그거 아니. 자정까지 입실 못 하면 긱사 문 닫힌다.”
* 긱사: 기숙사
- “이미 알고 있으니까 말하지 마. 숨 차.”
- “여자 긱사 맨 꼭대기니까 참고해.”
- “아오 씨, 같이 가!”
선배들은 날다람쥐마냥 빠른 속도로 언덕을 올랐다. 잠에 빠진 후배를 업고 아찔한 밤 산책에 정신없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다 나 또한 속력을 냈다. 강제 외박이라는 큰 혜택은 아직 받고 싶지 않아. 이 3월을 봐, 겁나게 춥다고. 그러나 의지와 달리 가빠오는 숨에 곧장 허리를 숙였다.
내가 한 번만 더 술을 마시면 개다, 부승관의 개다, 이지훈을 주인으로 모시겠다 따위의 다짐을 해본다. 점점 강제 외박과 가까워지는 운명에 기뻐하며 숙였던 몸을 들어 올리자, 곧바로 옆에서 작게 숨을 몰아쉬는 누군가가 내 가방끈을 쥐었다.
- “죄송한데, 저 남자 친구 있어요.”
- “그 남자친구 지금 어디 있는데요.”
- “……이지훈?”
- “다음부터 술 먹기만 해.”
달려온 티를 내는 갈라진 앞머리로 뾰족 화를 낸다. 새하얀 입김이 나는 밤, 그 한가운데 그가 손을 내민다. 내 것보다 한 뼘이나 더 큰 손마디가 새벽을 맞는다. 검지로 그의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스킨십을 피하자, 그는 술기운에 벌게진 내 볼을 살짝 건드리며 말을 건넸다.
- “휴대폰 어디다 팔아먹었어.”
- “광장 시장에.”
- “일부러 안 받았네.”
- “큰 맘 먹고 헐값에 팔았어.”
- “변명하지 말고.”
- “갑자기 ‘일부러’가 왜 ‘일부러’인지 궁금해.”
- “……뭘 얼마나 마신 거야.”
깊은 한숨과 함께 후드 모자를 벗은 그가 앞머리를 뒤로 쓸어내린다. 춥게 입고 다니는 거 습관이야 뭐야. 훤히 열린 점퍼 자크를 목 끝까지 올리며 슬쩍 내 얼굴을 훑더니, 이내 주머니에서 하얀 것을 꺼내 내 목에 돌돌 감는다. 이거 내 머플러잖아. 그치.
- “어제 네가 놓고 갔어 칠칠아.”
- “너 준거야.”
- “내 스타일 아니야.”
- “넌 내 스타일이야.”
- “……그런 거 하지 마.”
그가 밑도 끝도 없는 고백에 두 눈을 감고 웃는다. 이럴 때면 꼭 이모티콘 같다. 깜찍하게 웃는 거 있잖아. 응, 그거. 입김으로 언 손마디를 녹여주는 여전히 변함없는 그를 보며 내 마음은 한여름 땡볕에 사라지는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들고 있었다.
- “아까 누가 그렇게 불안하게 술 마시래. 눈 다 풀려서는.”
- “갑자기 너 봐서.”
- “장난 아니야. 긱사까지 혼자 어떻게 가려고 전화도 안 받고.”
- “너는 환영회 다 끝나고 나온 거야?”
- “중간에 나왔어. 이유는 너도 알겠지.”
그는 중간중간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기숙사 사는 사람은 분명 나이건만, 내가 제시간에 들어가지 못할까 자취하는 그가 더 걱정하고 있었다. 이건 필히 기회나 다름 없었다. 빨리 걸어야 한다는 상대방의 말을 곱게 말아 먹으며 학교 정문 앞에 우뚝 멈춰 섰다.
- “지훈아, 나도 성인이다.”
- “그래서.”
- “그러니까 오늘은 네 방에서…….”
- “안 돼.”
- “이번엔 또 왜? 새끼 고양이 저녁 밥?”
진즉 기숙사에 머무는 나와 달리, 그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싫다며 자취방을 얻어 생활했다. 학기 전부터 놀러 가도 되냐는 제안을 완강히 거부한 채 철통같이 자신의 현관문을 지켰던 그였다.
핑계는 참으로 다양했다. 가구가 들어오지 않아서, 컴퓨터가 연결되지 않아서, 또 어제는 새끼 고양이를 만났는데 밥을 주고 싶으니 혼자 있고 싶다는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나를 막았다. 학교 정문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자와 끝까지 꿈쩍하지 않으려는 자의 갈등이 깊어진다. 오늘은 꼭 진짜 이유를 듣고 싶었다.
- “너는 나랑 있는 게 싫어?”
- “……네가 뭘 알아.”
- “난 너랑 있을 때 제일 좋은데.”
- “그게 좋은 걸로만 안 끝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
- “무슨 말이야.”
- “빨리 가자.”
급급해 보이는 얼굴로 가끔 한숨을 내쉬는 그가 쓸데없는 오기를 자극한다. 이런 건 꼭 밝히고 싶다. 고로 기숙사 현관 앞 벤치에 엉덩이를 붙이고 떼를 쓰는 것이라. 막무가내여도 상관없다. 안달 난 사람은 나임에도 왜 그가 더 급박해 보이는지 모를 일에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일어났으니까.
- “여기서 약속 하나 해.”
- “자정 거의 다 됐어. 지금 안 들어가면 아침까지 여기 있어야 돼.”
- “고양이 밥 주고 나면 나도 줘.”
- “……뭐?”
- “나도 네가 주는 밥 먹고 싶다는 말이야.”
그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린다. 내 앞에 쪼그려 앉은 그가 무릎에 팔을 얹는다. 이윽고 그 위에 예쁜 얼굴이 오롯이 떠올랐을 때, 난 허리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술 취한 김에 감히 맨정신에 못할 말이라도 해볼 참이었다. 이를테면 아까 가게에서 본 여우들을 겨냥한 말이었다.
- “다른 여우들 보지 말고 나만 보라고.”
- “김여주 진짜 취했어.”
- “또 막…… 이렇게 웃지 마. 예쁘게 웃는 거 어디서 배웠어?”
- “진짜 미치겠네.”
- “보조개 이거 어디 독방에라도 숨겨 놓자.”
- “너 줄까.”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보조개를 가리키며 수줍게 웃는 그다. 아아, 심장이 떨어진다. 별 무리 박힌 그의 눈 속으로 떨어진다. 이지훈. 지훈아. 이리도 예쁜 이름이 다 있을까. 급작스럽게 찾아온 취기에 고개를 푹 숙였다. 땅바닥이 흐느적거린다. 점점 맛이 가기 시작했다. 동그란 달이 지점토처럼 올록볼록 뭉개지다 그를 닮은 어엿한 모양이 떠오르지 않을까 궁금한 밤이었다.
- “네 옆에 오징어가 사는 것 같아.”
- “내일 후회하지 마.”
- “지금 달 봐봐. 너처럼 예뻐?”
이번엔 말랑한 그의 입술이 내게 닿는다. 아랫입술을 감쳐 무는 아찔함에 질끈 눈을 감았다. 깊게 들어올수록 내 두 손을 꼭 쥐는 그였다. 귀여웠다. 긴장한 게 이리도 티가 난다. 서로의 숨결 사이, 내가 먼저 작게 웃음을 틔우자 빨개진 귓바퀴를 감싸며 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살포시 고개를 들어 내게 입을 맞추던 그 입술로 대답했다.
- “지금 달.”
- “…….”
- “너처럼 예뻐.”
자정 직전, 기숙사 안으로 날 떠밀며 그가 안녕을 고한다. 떠나 보내기 아쉬워 현관문 유리에 입김을 불어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리고 살짝 입을 맞추자, 그도 다가와 내 것과 겹치듯 작은 하트를 그렸다. 누가 이지훈 아니랄까 봐 하트도 귀엽다. 엄지에 입술 도장까지 찍어 유리문에 새긴 그가 손을 흔들며 멀어진다.
- ‘잘 자.’
03.
솔직히 아침 여덟 시 수업 에바야. 아침형 인간은 전 세계적으로 소수에 불과해. 내 말 무슨 말인지 해리포터는 이해할걸. 모처럼 일찍 마실 나온 승관은 강의실 책상에 엎어져 불만을 토로했다. 편의점에서 사 온 김밥과 데자와로 아침을 달래는 죽마고우의 눈은 졸음으로 가득하다. 스무 살을 멋짐으로 조지겠다는 패기 넘치던 아이는, 평소 집에서 입던 파란색 츄리닝과 헝클어진 머리를 달고 쉼 없이 조잘거렸다.
- “수강 신청 컴플 어디에 거냐. 시간표 다시 짤 거니까 말리지 마.”
- “고3 현역 때는 새벽 여섯 시에 기상 했어.”
- “매점 피자 빵 빨리 먹고 싶어서 그런 거지. 늦게 가면 얄짤도 없어요.”
- “뭐래, 넌 맨날 지각했잖아.”
- “와, 진짜 일주일에 딱 세 번씩만 그런 거야.”
- “스승의 날에 학교 가서 학주 좀 안아 줘라. 너 때문에 대나무 검 박살 났잖아.”
- “안 그래도 할인가로 찾아보고 있잖냐.”
승관은 다 먹은 빵 봉지를 반듯하게 접어 쪽지 모양을 만들어 내게 건넸다. 손 좀 내밀어 줄래. 자, 이거. 그리고는 반대편으로 누워 못다 한 잠을 청하는 녀석이다. 본새 작살인 아디다스 로고에 어젯밤 다 먹지 못한 치킨 양념을 묻힌 바보 같은 녀석. 안타까움에 까치집 지은 머리칼을 꾹꾹 누르며 자장가를 불렀다. 노래 교실 좀 다니라는 망언이 그 뒤를 잇는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 “설마 지금 내가 보는 사람이 이지훈은 아니겠지.”
- “어디?”
- “창문에 붙어있는 애.”
공부하는 척이라도 해볼까 프린트 위로 그림을 그리던 내게 승관은 손가락을 들어 복도 창문을 가리켰다. ‘이지훈’이라는 마법 같은 단어에 곧장 고개를 들자 무심히 손을 흔들며 지나치는 그다. 순식간이었는데 완전 슬로우모션이었어. 뭔가 드라마 같았는데.
- “이지훈 진심 웃긴다.”
- “나 방금 좀 떨었는데 티 났지.”
- “너 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우연인 척 지나가네. 연기 많이 늘었어 아주.”
- “봤으면 진작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 “누구 좋으라고?”
- “넌 잠이나 자.”
네 져지에 양념 묻은 거 평생 얘기 안 해줄 거야. 승관은 대놓고 자신을 엿먹이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강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훌렁 벗어 젖힌 져지를 보아 분명 화장실을 가는 것이다. 교수와 마주치건 말건 승관에게는 오직 져지가 인생의 전부였다. 리미티드 에디션인가 뭔가 아무튼 소중한 아이템이라 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물론 교수까지 승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 “출석 불렀냐.”
- “너 설사 있다고 했더니 봐 주셨어.”
- “미친,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
- “또 불려가고 싶으면 더 떠들어.”
수업 중간 부리나케 달려온 승관이 젖은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욕을 퍼부었다. 내가 멋짐으로 대학 생활 조진다고 했잖아. 똥쟁이 되면 다 너 때문이다. 어찌나 큰 눈으로 죽일 듯 쏘아 대는지 사진으로 박제하고 싶을 정도였다. 심지어 쉬는 시간에는 이랬다.
- “아악! 김여주 때문에 다 망했어!”
- “뭘 또 망해. 팀플이나 잘해.”
- “아까 애들이 즐똥했냐고 물어봤다고!”
- “그래서, 즐똥 했어?”
승관이는 가끔 분노를 삼키지 못할 때마다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건 바로 ‘책상에 엎드려서 얼굴 보여주지 않기’였는데, 지금도 두 주먹으로 책상을 쾅쾅 두드리다 분을 이기지 못해 엎드려 씩씩거렸다. 져지에 묻은 희미한 양념이 승관의 마음을 대변한다.
- “괜찮아, 넌 턱선이 죽이잖아.”
- “턱선으로 조지기 전에 조용히 해.”
- “오늘 야식 내가 쏘려고 했는데 기분 별로면 다음에 먹을까?”
- “보족.”
- “……응?”
- “보족 세트.”
승관은 입으로 딱-, 소리를 내며 있지도 않은 소주잔을 들이켰다. 예쁜 누나, 막국수는 서비스겠죠. 어쩐 일로 삐돌이가 삐침을 단박에 풀었을까 고민하면, 예전부터 기숙사 꼭대기에서 보쌈과 족발을 안주로 술을 먹는 게 소박한 꿈이라 말하던 승관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떠올랐다. 역시 목적 하나는 확실한 녀석이다.
- “뿌, 미안한데 오늘은 돼지고기 김치찜 먹을 건데 괜찮아?”
- “……뭐라고?”
- “지훈이가 먹고 싶대서 만나기로 했는데 너도 껴도 돼.”
- “진짜 서러워.”
커플 다 망해라. 아침형 인간으로 다 변해 버려. 필기 없이 깔끔한 프린트에 ‘커플’로 휘갈긴 글씨 위로 진한 엑스를 그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지훈의 손가락이 보인다. 하트 두 개를 그려 넣고 재빨리 손 인사 하며 멀어지는 그였다. 지루한 연강 속 쉬는 시간이 이리도 행복하다. 그래서 난 결심했어. 오늘은 꼭.
- “무조건 돼지 김치찜이다.”
- “동족을 먹다니 비열해.”
- “너도 먹잖아.”
- “말 걸지 마라.”
토라진 승관을 뒤로 하고 수업 중간마다 쉼 없이 문자를 했다. 발신자는 [우리 지훈이], 시답잖은 주제로 우린 늘 시시콜콜 떠들었다. 커피를 마셨는데도 졸리다, 교수님이 지각했다, 강의실 빔 프로젝터가 고장 나 결국 보강으로 넘겼다 하는 이런 것들로. 그리고 그는 사진 하나로 내게 말했다.
- [하트]
……
- [그냥 너 주는 거]
햇살이 밝다.
마치 그가 내게 주는 선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