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 거야.
Murakami Haruki - <Norwegian wood> 중에서
도도도-. 자잘한 걸음이 목적지를 향한다. 보폭을 크게 할수록 등딱지에 얹은 빈 백팩이 사방으로 방황했다. 그것은 ‘이럴 거면 왜 달고 다니냐’ 불만을 토로했다. 주인은 가방끈 양쪽을 한 손에 몰아 쥐고 등을 토닥거렸다. ‘얘야, 기숙사가 있어서 지금까지 네가 살아있는 거야’라고 위로하면서.
빠른 다리는 높은 계단을 올라 금세 문앞에 다다랐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아침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냄새를 찾는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는 의미였다.
- “밥 먹으러 학교 다니세요?”
- “많이 주세요. 고기. 고기.”
- “아주머니, 무서워하지 마세요. 위장이 두 개라서 그래요.”
- “김밥 꼬투리 버리실 거예요?”
벽면에 설치된 스캐너에 학생증을 찍는 순간부터 옆에서 지켜보던 승관이 혀를 찼다. 김여주, 내가 널 버리고 싶다. 오늘의 일미인 김밥 꼬투리를 몇 개 담느냐 설전을 벌이는 친구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제 학생증을 내 입에 물리며 방해하는 녀석이다. 어렵게 얻은 꼬투리 두 쪽마저 욱여 넣으며 앞질러 가는 붕 뜬 뒤통수, 그것은 쓸데없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오기를 자극했다.
- “승관아!”
- “뭔 수작이야.”
- “드디어 일주일 만에 머리를 감은 거야? 소개팅 있어서?”
- “……뭐래냐?”
- “그래, 너도 이제 새 출발 해야지.”
볼 가득 우물거리던 승관이 미간을 찌푸리다 순간 멍하니 내 옆을 향했다. 교양 시간마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마실 나오는 승관이 매력적이라며 호감을 나타내던 우리 과 동기가 있었다. 승관이 먼저 손을 흔든다. 당황하다 못해 엉겁결에 흔드는 것이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다. 동기는 어색함을 뒤로 한 채 유유히 스쳐 갔다. 그녀는 ‘드디어 일주일 만에’라는 문장에 치명타를 입은 듯했다.
- “……승관아.”
- “이름 부르지 마.”
- “고치돈 내가 쏜다.”
* 고치돈: ‘고구마 치즈 돈가스’의 줄임 말.
- “널 쏘기 전에 닥쳐.”
승관은 조용히 식당 구석에 앉아 미처 넘기지 못한 잔여물을 씹어 댔다. 비단 김밥만이 아니었다. 눈으로도 날 씹어 대는 것 같다. 마치 저 김밥이 꼭 내 모습 같달까. 밥 대신 승관의 눈치를 먹는다. 그러자 죽마고우는 내 마음을 헤아리듯 차분히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웃는 거라 믿고 싶다.
- “바지 입고 똥 싸게 해줘서 고마워.”
- “차라리 화를 내.”
- “울고 싶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밥알을 넘긴다. 날마다 본새로 먹고사는 녀석이, 그것도 본인에게 호감을 보이던 사람 앞에서 쪽을 당했으니 그 속은 알 만했다. 미안해 진짜로. 나 좀 봐봐.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얼굴을 확인하려 애를 쓰는 날 향해, 승관은 불쑥 고개를 들어 큰 눈으로 결정적인 한마디를 남겼다.
- “제육 안 먹을 거면 나 줘라.”
- “조금 전까지 슬퍼하던 애 어디 갔어?”
- “인생 뭐 별거 있냐. 먹고 행복하면 그걸로 됐지 싶다.”
친구야, 제육 존맛탱임. 승관의 붕 뜬 머리칼이 오늘 학식의 만족도를 대신했다. 이윽고 점심에 맞춰 시작된 교내 방송은 평소 승관이 좋아하는 곡으로 문을 열었다. 이제 기분 좋아. 바지 안 갈아입어도 된다. 매초 기분이 변하는 건 내가 아는 사람 중 이 녀석밖에 없으리라.
식사를 마친 학생들이 하나둘 자리를 정리할 때였다. 방송 스피커 볼륨이 서서히 작아지며 고요한 침묵을 만든다. 이내 그 정적을 깨는 달달한 목소리에 승관의 눈이 번쩍 뜨인다. 야, 이거 뭐냐. 캠퍼스 전체에 울리는 목소리에 먹다 남은 제육을 떨어트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 “안녕하세요. 건축학과 17학번 이지훈입니다.”
언젠가 그와 함께 라디오 방송을 하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오늘, 그 꿈의 반절을 이룬 셈이었다.
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Chapter 14. <삐빅-, 정상입니다>
04.
새파란 하늘에 빛이 내립니다. 올 한해도 이렇게 시작 되는데요. 지난날의 고됨과 아픔이 있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젊고 드넓습니다. 새로이 시작하는 한 해, 선배님과 동기들 그리고 제게도 좋은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꿈을 펼칠 수 있는 장소, 이곳은 A대입니다. 이지훈이었습니다.
A대 방송국은 학기가 시작되면 무작위로 신입생을 선출해 멘트를 건네는 소소한 전통이 있었다. 예상하다시피 올해 주인공은 바로 이지훈이었다. 실제 목소리, 통화 음성과는 또 다른 느낌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아, 마이크 버전으로 들어도 멋있구나. 승관이가 말한 ‘대학을 멋짐으로 조진다’는 건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걸까.
‘이지훈 대박’을 외치던 승관은 ‘미친, 오후 수업 까먹었다’라는 설렘을 안고 언덕 위로 사라졌다. 캠퍼스 가로수를 따라 길게 늘어진 동아리 부스를 거닌다. 다음 수업은 세 시, 여유롭게 대학 낭만을 즐기며 그의 음성을 되감고 있던 참이었다. 방송 때문이었는지 소리샘으로 흘러갔던 그의 휴대폰이 어느새 내 화면을 밝힌다.
- “이 앵커, 방송 잘 들었습니다.”
- “인문관 지나는데 너 어디야.”
- “동아리 부스 앞인데 여기서 기다릴까? 그리고 너 왜 말 돌려어-.”
- “좀만 더 내려가면 된다.”
사람 진짜 많다. 너 못 찾겠는데. 그가 내 말을 요리조리 피하며 장난을 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현재 A대는 ‘월리를 찾아라’ 실사판이었다. 호기심 어린 새내기는 물론, 동아리 멤버를 찾아 열을 띠는 학번들이 모여든 까닭이었다. 거대한 군중 사이, 둥근 머리를 찾아 뒤꿈치를 들었다.
지훈이다. 지훈이. 언덕 위 작은 얼굴로 주변을 훑는 귀여움이 여기까지 흘러온다. 이봐, 너는 못 찾아도 난 찾을 수 있다니까. 참을성 없는 사람은 굳이 언덕을 올라 말갛게 웃는 그를 보며 배시시 입꼬리를 올렸다. 점퍼가 유독 잘 어울리는 날이었다. 일주일 중 7일 정도 어울리는 날이 있었는데 아마 그날이 오늘인가 봐.
- “앵커님 퇴근 하셨어요?”
- “그냥 목소리 몇 초 나온 거 가지고 뭘 그렇게.”
- “멋있었다는 말이야.”
부끄러운 듯 귀 끝을 만지작거리며 살짝 눈을 맞춘다. 어디 갈까. 습관처럼 자연스레 내 손을 잡는다. 밥 먹고 들어가자. 달콤한 제안에 볼록 튀어나온 배에 힘을 주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많이 먹을게. 먹고 더 시켜. 가게를 아예 먹어 버릴게. 진짜 먹진 말고. 그가 흥분에 부푼 내 볼을 가볍게 잡는다. 그러나 행복함도 잠시,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에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약한 심보를 가진 얼굴이 능글맞게 웃는다. 순간 이동이 필요했다.
- “맥주 두 잔을 여기서 다 본다?”
- “……안녕하세요.”
- “우리 동아리 들어. 가입은 열린 문.”
- “아니요. 진짜 괜찮아요.”
학회장이었다. 동아리 홍보용 플랜카드를 흔들며 [연수동 불가사리]를 외쳤다. 이름 멋있지. 멋지네요. 가입해. 등산 가입하려고요. 썩 유쾌하지 않은 대화였다. 동아리 강제 가입에 실패한 ‘개’범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굉장히 처음 뵙겠습니다. 지훈이 학회장의 손을 쳐낸다. 차갑고도 그지없었다.
- “아직도 싹퉁머리가 없구요.”
- “예.”
- “명찰.”
- “졸업하고 팔아먹었는데요.”
광장시장. 헐값에. 그가 조심히 내 눈치를 보며 웃는다. 뭔데 이렇게 익숙하지. 기억이 없는데 익숙하다. 가자미 눈으로 그를 추궁하지만, 그는 가뿐히 무시한 채 학회장과 가벼운 포옹을 했다.
형은 여기서 뭐 하는데. 자리 있는데 들어오십시다. 시간 없어요. 시간 좀 내십시다. 그들의 대화는 얼추 서로를 아는 느낌이었다. 학회장의 시선이 곧 내게 닿는다. 그에게 귀엣말을 건네면서도 눈을 날 향했다.
- “여자친구 노래 잘하지?”
- “확신에 찬 그 대답은 뭐야.”
- “네가 노래를 잘하니까.”
- “논리가 대단해.”
귀엣말이 다 들린다는 게 비록 함정이었지만. 동생한테 얘기 많이 들었다. 맥주 두 잔, 그날 화난 거 아니지? 얼떨결에 받아 든 악수가 어색하다. 고등학교 다닐 때 과외 해준 형. 그의 손가락이 학회장을 가리킨다. 나도 자주 만지지 못하는 그의 어깨를 친근히 감싸는 학회장의 손이 부럽다. 동그란 안경을 코끝까지 올리고 시원스레 웃는 오늘의 승리자. 인정하고 싶지 않아.
- “신환회 오기 전부터 널 이미 알고 있었지.”
- “……설마 고의적 두 잔?”
- “네 남친이 하도 갈구니까.”
- “안녕히 계세요.”
부러 놀림을 당했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배고파, 빨리 가자. 입 밖으로 허기를 말하며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경계하는 내가 퍽 웃겼는지 학회장은 즐겁게 손을 흔들었다. 지훈아, 자리 남겨둘 테니까 연락해. 검지와 새끼손가락으로 전화 거는 시늉을 한다. 그도 짧게 손을 흔들었다.
- “네가 뭘 어떻게 갈궜길래 저래?”
- “김여주 술 주지 말라고.”
- “그래서 두 잔을 줬구나.”
- “그저께 내가 다섯 잔 먹였어. 복수.”
- “진짜? 같이 술 마셨어? 나도 부르지.”
- “넌 선배들이랑 마시고 있었잖아.”
연락이라도 제때 받으시던가요. 말에 은근한 뼈가 있다. 점퍼 끝을 잡아당기는 내게 그가 묻는다. 왜, 할 말 있으면 해. 맞잡은 손을 흔들며 차분한 표정으로 물음을 기다린다. 지훈아, 이건 그냥 추측일 뿐인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야. 절대 촉이 와서 그런 건 아니고.
- “설마 삐쳤어?”
- “내가 삐쳤다고?”
- “전화 안 받아서.”
-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
그럼 됐어.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그러나 왠지 폼이 삐껴도 한참을 삐껴 있다. 걸음걸이가 정확히 17도 삐뚤어져 있어. 각도기로 안 재도 무조건 저 각이야. 무심히 돌아보던 그가 눈짓한다. 빨리 와. 그 모습에 쉽사리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실은 조금 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으니.
- “지훈아, 오후에 수업 끝나고 애들이랑 선배들 같이 술 마신대.”
- “그래서 뭐.”
- “아니, 다 같이 가는 거니까 나도 갔다 온다고.”
- “맘대로 해.”
눈길도 주지 않고 갈 길 가는 파워 워킹의 선두자. 그의 둥근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플랜 카드가 걸린다.
[기.분.매.우.별.로.임]
……삐낀 것이 틀림없다.
05.
학기 초 신환회를 시작으로 선배들은 친목과 화합을 핑계로 몇 새내기를 술자리에 불러냈다. 쉽게 말해, 그들은 맘에 드는 뉴페이스들을 골라내 술을 즐겼다. 낯가림이라면 탑을 찍고도 남는 내가 불려가는 족족 빠짐없이 나간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족보였다. 그들은 그것을 빌미로 희생양을 꾀어냈다.
명문대에 족보가 웬 말이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명문대일수록 족보는 활개를 쳤다. 특히 호경과는 시험 분량이 많기로 유명한 학과였고 대부분 과목이 서술형이라는 장애물을 안고 있었기에 정보 싸움은 알게 모르게 판을 쳤다. 문제를 재탕하는 교수와 눈치껏 답안을 모아온 지난 학번들의 얄팍한 노력이 모여 이뤄진 족보는 첫 시험을 치르는 새내기에게 매우 중요했다. 썩은 동아줄을 잘라 내기엔 우리는 현실에 눈을 떠야 했다. 그렇기에 양심의 눈을 감았다. 정말 미안하게도.
낮이고 밤이고 기숙사 통금 전까지 휴대폰만 울리면 5분 대기조처럼 튀어나갔다. 팁이라도 얻을까, 복사본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시작된 이 짓의 끝엔, 거나하게 취해 해롱거리는 내가 있었다. 물론 휴대폰이 울려도 받지 못했다. 이미 취할 대로 취해 있었으니. 그와 반대로 맨정신에 새벽까지 깨어 있던 지훈이는…….
- “날 미워했을까.”
- “드럽게 미워했겠지.”
- “야, 진지하게 들어 보라니까.”
- “황금 같은 자유 시간에 도대체 무슨 짓이냐.”
- “감히 나랑 있는 걸 감사하게 여겨.”
점심과는 달리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승관은 새로 산 운동화 끈을 조이며 큰 눈을 굴렸다. 동아리 면접 있어. 요점만 빨리 말해. 녀석은 벤치에 앉아 한쪽 다리를 꼰 채 발을 까딱거렸다. 언제나 그랬듯, 새것이 맘에 든 모양이었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긱사 통금 때문에 술만 마시고 빨리 들어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냐는 말이야.”
- “입장 좀 바꿔서 생각해라. 너는 이쥰이 술 마시러 간다고 밤까지 전화 안 받으면 좋냐?”
- “그건 내가 잘못한 건 아는데…….”
- “알아줘서 고맙다 야.”
나가기만 하면 연락이 안 되잖냐. 넌 그게 문제야. 바지 끝에 달라붙은 먼지를 떼어 내 가디건에 묻히는 승관을 타박할 겨를이 없다. 지난날의 나를 되짚기에도 정신이 없어 손바닥으로 두 볼을 꾹 쥐어짰다. 그래도 긱사 들어가서 연락했었다고. 내 몸 하나 가누기도 어려울 판에 전화를 붙잡고 있는 건 불가능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잠들기 직전 연락하는 게 내게 있어 최선이었다. 그 최선이 상대방에게도 최선이라 비쳤는지 잘 모르겠지만.
- “걔가 한 번이라도 연락 때문에 화낸 적 있냐.”
- “…….”
- "새벽에 술 취해서 전화하는데도 귀찮아 한 적 있냐고.”
- “…….”
- “이지훈은 널 배려하다 못해 챙겨주고 있는데 넌 뭐하세요.”
굳게 다문 입술이 쓰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별일 아니라 가볍게 넘겼던 나를 탓한다. 승관은 자세를 고쳐 벤치에 팔을 얹었다. 해가 기울었다.
- “휴대폰 별로 만지지도 않는 놈이 문자 쓰고 지우고 몇 번을 그렇게 하더라.”
- “…….”
- “발신자가 너야. 볼 때마다 그래.”
- “…….”
- “연락이나 잘 받아.”
이지훈이 너 때문에 술을 다 배운다. 승관이 작게 중얼거린다. 벤치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어 낸 녀석은 가방에서 초록색 병을 꺼냈다. 미친놈이 이젠 가방에 소주병을 안고 다니냐 잔소리를 시작하자, 승관은 숙취 해소제라며 한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 “아무튼 작작 마셔. 난 면접 간다.”
- “무슨 동아리?”
- “밴드.”
- “설마 불가사리?”
- “음치가 별걸 다 아는 구나.”
직접 ‘개’범주의 소굴로 들어가는 희생양 한 마리가 손을 흔든다. 벤치에 덩그러니 놓인 병에 노란 포스트잇은 녀석의 걱정을 담는다.
‘속이라도 젊어야죠 ^ ^’ 이따위 멘트는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06.
공학관 ‘Room 512’ 하얀색 팻말이 바람에 흔들린다. 오후 수업이 파한 강의실 밖 창문으로 안을 확인했다. 분명히 여기 맞는데……. 사람은커녕 이지훈 머리칼 코빼기도 안 보인다. 결국 까치발을 들어 도록 눈을 굴린다. 맨 마지막 줄에 앉아 랩 탑을 건드리는 검은 모자에 헤픈 웃음을 짓는 나다. 지훈이다. 너야 너.
단숨에 넓은 등을 안는다. 안는 것보다 안겼다는 말이 맞겠다. 지훈아 뭐해.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그의 향을 맡는다. 코끝에 스치는 알싸한 담배 향에 잠시 넋을……. 잠깐만, 담배 향이 여기서 왜 나와.
- “……지훈아, 담배 펴?”
- “지훈이는…….”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몸뚱어리가 벽에 달라붙는다. 누구세요. 제가 묻고 싶은데요. 절 아세요? 처음 봐요. 눈만 껌뻑거리는 붕어가 숨을 잊는다. 지훈이 친구예요? 몇 살? 신입생? 우리 과? 새터에서 본 것 같은데? 우리 본 적 있죠? 상대방의 폭격기 질문에도 멍을 때렸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가 생글거린다.
불안한 느낌과 가까워질 무렵, 정확히 두 번 울리는 노크 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줄을 잡았다. 뭐해 지금. 노크의 주인공은 이 상황이 어지간히 맘에 안 든 이지훈이었다.
- “나와.”
- “그런 거 아니야.”
- “뭐가 아닌데.”
- “난 너 하나야.”
단단히 얼이 빠진 모양이었다. 그가 작게 한숨을 쉰다. 손에 들린 캔 커피를 공중으로 던지다 바로 낚아채 낯선 사람 앞에 강렬히 꽂는다. 강한 마찰음이 강의실 전체에 울렸다. 얘랑 뭐 있어? 질문은 낯선 이에게, 시선은 올 곧 내게 향한다. 붕어는 또 숨을 잊는다.
- “뭣도 없는데 애를 왜 그렇게 봐.”
- “아니, 나는 새터에서…….”
- “새터 안 갔어. 파일 정리 끝났으면 가.”
- “……아, 그래?”
낯선 이는 머뭇거리다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휑한 강의실에 툰드라가 밀려온다. 인간 툰드라는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말이다. 벽에 바싹 붙어 공학관의 벽 냄새를 맡는다. 이과의 냄새가 난다. 리미트가 무한대로 갈 때, 그 냄새가 난다고. 정신이 나간, 완벽한 미친 애였다.
- “얼굴도 안 보고 안기는 사람이 여기 있네.”
- “언제부터 있었어?”
- “지훈아 뭐해 할 때부터.”
- “……아, 씨.”
볼이 화끈하다. 멍청하게 안기는 순간부터 놀라는 것까지 다 보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내 어깨가 더 넓어. 맞아 네가 더 넓어. 눈 피하지 마. 내가 언제. 반질거리는 이마에 땀을 닦아내며 비로소 숨을 쉰다.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보다 급히 손을 잡는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생채기 난 집게손가락이 눈물을 흘린다. 어쩐지 따끔거린다 싶었다.
- “아까 놀라면서 다쳤나 보다.”
- “아 좀…….”
- “별거 아니야.”
- “이게 별거 아니면 뭐야.”
하얀 셔츠에 아무렇지 않게 내 혈을 닦아낸다. 다치지 좀 마. 셔츠에 얼룩이 많아질수록 그의 걱정이 늘어간다. 나 진짜 괜찮아. 정말이야. 잡힌 손을 빼 뒤로 숨기는 날 바보 같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지금 표정이 말해주고 있거든.
- “쟤 조심해.”
- “아까 검은 모자?”
- “그냥 아예 여길 오지 마.”
- “뭐야, 섭섭하게.”
비죽 튀어나온 아랫입술이 현 심정을 말한다. 곰곰이 생각에 잠길 때 쏙 잠기는 그의 보조개가 눈을 간지럽힌다. 그냥 다른 데서 만나. 여기 공기도 안 좋고. 마침내 그가 합의점을 찾아 제안한다. 공기가 좋지 않다는 허무맹랑한 말에 집중할 때가 아니다. 뭐가 됐든 아무 부정 없이 동의하고 싶었다.
대답 대신 꽃받침으로 입술을 쭉 내민다. 나는 지훈이 꽃. 불행히도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가 얄밉지 않다. 다른 사람은 그를 매몰찬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난 봤다. 확실히.
- “너 웃었다 방금.”
- “……아니.”
- “이거 입꼬리 뭐야. 올라갔어.”
- “재채기 날 것 같아서.”
변명도 딱 이지훈 같다. 그래서 재채기 언제 나와? 은근 골리는 질문에 그가 두 볼을 길게 잡아당긴다. 고양이처럼 그르릉거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애교부리는 것도 아닌데 애교 같아. 반달 눈에 딱 어울리는 목소리야.
- “지훈아, 건물 말고 내 인생을 설계 해 주는 건 어때?”
- “네 인생을 뭘 어떻게.”
- “내 인생의 주춧돌이 되어줄래?”
- “견적이 조금…….”
이럴 때 쓰는 비속어가 있다. 겁나게 얼탱이가 없다고. 내 견적이 왜! 뭐가 어때서! 두 주먹으로 그를 가격한다. 농담이야, 진짜. 말은 저리 하면서도 두 눈을 찡긋거린다. 굉장히 신나 보인다. 놀릴 때만 저래 꼭.
이리 와. 그가 한 품으로 와락 안는다. 비누 향이다. 내가 찾던 그 냄새. 쿵쿵쿵 심장이 요동친다. 너 감기 걸릴까 봐. 달콤한 핑계에 마음이 퐁당거린다. 살짝 벌어진 간격으로 작은 얼굴이 내게 다가온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쭉 내밀어 신호를 기다렸다. 이즘이면 촉촉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감각이 없다. 작게 웃는 목소리에 슬쩍 한쪽 눈을 뜨자, 그는 보란 듯이 장난을 걸었다.
- “얼굴에 점 생겼네.”
- “넌 꼭 쓸데없는 데 관심 두더라.”
- “중요한 정보지. 여기에 점이 생겼는데.”
- “나 그냥 갈래.”
당했다. 민망해 미치겠다. 촛불처럼 꺼지고 싶다. 급히 출구를 찾는 붕어는 방향 감각까지 상실해 길을 잃었다. 쪽-, 볼에 닿은 촉감에 정신까지 혼미하다. 원인은 이지훈, 내 얼굴을 돌려 다른 볼에도 입을 맞춘다. 입맞춤 하나로 나른 해지는 기분을 무어라 설명해야 무릎을 딱 치고…….
- “솜사탕 같다.”
……
- “볼이 분홍색이야.”
종종 꿈에 떠다니는 분홍색 솜사탕을 현실에서 본 적 있는지 묻는다면, 난 수줍게도 지금이라 말하고 싶었다. 내 분홍색 솜사탕은 지훈이 너야. 직접 이런 고백도 하면서.
알맞게 익었는지 한 입 베어 문 그가 달콤함에 빠져든다. 나는 그런 그에게 빠지고.
07.
독촉 문자가 귀를 괴롭힌다. 김여주를 찾는 답답한 문장들이 등을 떠민다. 가게 앞에서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 지금 포차 앞인데 이따가 전화 할게. 아니야, 늦어도 연락할게. 그에게 약속하듯 다짐하는 나였다.
실내 흡연 금지 구역임에도 구덕한 담배 향이 몰려온다. 시간에 엉켜 쌓이고 쌓인 꿉꿉한 냄새였다. 김여주, 여기야. 이미 취한 동기가 자리를 재촉했다. 가벼운 묵례 후 엉덩이를 붙였다. 그들은 저마다 술잔을 건넸다. 역한 알코올이 목구멍에서 역류한다. 속으로 눌러 내리는 게 고통스러워 인상을 구겼다.
마시기 싫으면 가. 담배를 빨아들이던 선배 중 한 명이 나를 타깃으로 잡는다. 슬며시 웃으며 남은 잔을 다 비우자, 그제야 재를 덜어내는 그녀였다. 곧 벌게진 눈으로 내 옆에 앉아 술을 기울인다. 은근한 터치를 하는 복학생부터 몸을 가누지 못해 내 어깨에 기대는 동기까지, 모두가 술에 절어 있었다.
- “족보는 너희들만 예뻐서 주는 거야. 알지.”
- “야, 진짜 한 건 했다.”
- “다른 새끼들은 좀생이라 돈 받고 공유해.”
- “앞으로 자주 보자.”
간단히 말하고 싶다. 기분이 더러웠다. 또한 간단히 깨달았다. 이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동기들은 분위기에 취해 잔을 털었다. 절대 그들을 욕하고 싶지 않았다. 성적에 목맨 아이들 또한 잘못이 없었다. 다만 썩은 동아줄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윗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한참이나 잘못됐다. 당당치 못한 나는 고개를 숙인다. 부끄러웠다.
- “여주야, 표정 뭐야? 싫어?”
- “저는 그냥 저대로 할게요.”
- “얘 뭐래? 너 취했어?”
- “이제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속을 게워내고 싶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 향한다. 내 팔목을 잡고 전전긍긍하는 동기들이 보인다. 역시 그들은 잘못이 없다.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겁이 많은 것뿐이었다. 나도 그랬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 “웬만하면 족보는 돈 받고 파세요.”
- “뭐?”
- “애들 술병 나요.”
등을 돌리는 내게 그들은 욕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건, 적어도 내 선택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이젠 억지로 눈을 감지 않아도 된다. 숨길 필요도 없다.
지훈아 뭐해. 옅게 번지는 입김을 모아 깊게 내쉰다. 통화 속 그는 바로 내 행선지부터 물었다. 그럼 난 장난스레 ‘지훈이 집’이라 대답한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그는 말이 없었다. 도보에 앉아 취기를 달래며 발간 얼굴을 식힌다.
- “잘못된 걸 아는데 외면하는 사람들도, 그걸 악용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아.”
- “…….”
- “쪽팔리게 살기 싫어서 나왔는데 나중에 후회하면 어떡해.”
학점 망해서 울어도 그땐 소용없겠지. 술기운을 빌려 속마음을 토로한다. 아마 그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이니 궁금증은 배가 됐겠고.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시끄러운 도심에 덩그러니 남은 나를 위로한다. 한결같은 목소리에 눈물을 삼킨다. 이유 따위 묻지 않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위로였다.
- “그래도 네 선택이 맞을 거야.”
- “…….”
- “믿어. 여태까지 그래 왔잖아.”
그는 날 믿는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랬고 내게 고백했던 그 날도 그랬다. 흔히들 상대방에게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것처럼, 나도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나여야만 하는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냥 좋아해서, 첫눈에 반했다는 당찬 대답도 좋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 특별했다.
- ‘그냥 뭘 하든 믿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
- ‘그게 너였고.’
지훈이에게 ‘믿음’은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이었다. 굳이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마음같은 것, 지훈이만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함이었다. 어느 순간 그 마음에 익숙해진 나는 불행히도 무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한다 말했다.
나는 널 믿어.
단 한 문장으로.
Epilogue.
야, 무슨 문자를 보내다 말다 그러냐. 24/7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던 승관이 고민하는 지훈을 닦달했다. 뭔지는 몰라도 좀 보내라. 답답해. 그러자 주야장천 휴대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지훈을 눈이 승관을 향한다. 호경 족보가 그렇게 중요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승관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물음표를 띄웠다. 그게 너한테 왜 중요한데? 승관의 역질문에 지훈은 더욱더 복잡해져 갔다.
- ‘저번에 김여주 취해서 편의점 앞에 누워있었던 거 기억해?’
- ‘야, 그걸 어떻게 잊냐. 대대손손 물려주고 싶어서 영상까지 찍었는데.’
- ‘좋게 말할 때 지워.’
- ‘뭐 이렇게 살벌해.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지훈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그는 승관이 영상 삭제 확인 사살까지 시켜주고 나서야 한숨을 뱉었다. 그때 지나가는 말로 족보 때문에 술 먹는 게 너무 싫다고 그랬어. 근데 그게 아직도 마음에 걸려서. 지훈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휴대폰을 쥐었다. 물어보고 싶은데 뭐라고 해. 그는 테이블에 조막만 한 얼굴을 얹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 ‘그러니까 네 말은 그쪽 선배들이 족보로 김여주 꾀어낸다는 거냐?’
- ‘대충 추측하면.’
- ‘그럼 족보는 핑계고 김여주랑 술 먹고 싶은 학우들이 나대는 거네.’
- ‘엄밀히 말하면.’
밤늦도록 울리지 않는 휴대폰에 지훈의 걱정이 늘어간다. 연락 또 안 받아. 지훈의 손 끝이 테이블을 두드린다. 템포가 빠르다. 신경질이 난다는 뜻이었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승관이 지훈의 휴대폰을 빼앗는다. 메시지 함에는 차마 보내지 못한 문자가 대기를 탔다. 발신자는 [내 꺼], 여주였다.
- ‘어디야는 무슨, 당장 튀어 오라 그래.’
- ‘방정 떨지 말고 내놔.’
- ‘방정은 방정식 동생이냐? 기다리는 게 힘들면 전화를 하던가!’
- ‘이미 했어.’
- ‘참나, 두 통은 어디 코에 붙이는지?’
불어나는 걱정과 반 비례하는 연락 횟수를 보라. 오후 열한 시에 한 번, 그리고 열두시에 한 번. 승관에게 있어 지훈은 소심하기 그 자체였다. 너무 많이 하면 부담스러우니까. 지극히 이지훈 같은 답이었다. 승관은 지훈의 품에 휴대폰을 던져 놓고 자리를 털었다. 그리고 강력한 경고가 그 뒤를 이었다.
- ‘어디 가서 내 죽부인이라고 하지 마.’
- ‘죽마고우.’
- ‘그래 죽마고우.’
- ‘……그냥 가.’
승관은 지훈의 손짓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겉옷을 챙겨 들었다. 마음 싱송생송하면 너도 동아리 면접이나 봐. 밴드부 어때. 너도 노래 잘하니까. 숨은 쉬는지 테이블에 얼굴을 박은 죽부인의 생사가 궁금해 급히 꺼내든 제안이었다. 지훈은 손사래를 치며 승관을 거부했다. ‘개’범주가 생각난 것이라.
- ‘밴드부 이름이 왜 연수동 불가사리인 줄 아냐.’
- ‘그야 뭐, 별이 되고 싶어서?’
- ‘불가사리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 ‘……불가사의 아니냐.’
- ‘거기 사람들 언어가 그래.’
- ‘미친놈들이 많다는 얘기구나.’
승관은 다짐이라도 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불가사리 탑이 되고 싶어. 미친놈아. 넌 김여주한테 전화나 해라. 너나 잘해. 지훈은 자신의 만류에도 더욱 열정이 불타오르는 승관을 막을 방법 따위 없는 걸 이미 알고 있기에 멀찍이 토끼 뜀을 뛰는 녀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24시 카페처럼 지훈의 생각도 멈출 줄을 모른다. 쉼 없이 떠오르는 잡념과 고민, 그리고 그 끝은 항상 여주가 있었다. 내가 족보를 만들어서 주면 되잖아. 여주야, 그래 안 그래. 기어코 헛소리 단계까지 온 그는 정한에게 묻고 싶었다.
밤마실만 나가면 연락 없는 김여주 걱정하는 나, 과연 정상인가요.
상상 속 정한은 청진기를 들어 지훈의 감정을 진찰한다. 결과는 매우 정확했다.
삐빅-, 정상입니다.
- “……약 먹을 시간이네.”
여주 덕분에 별 걸 다 상상하는 지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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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이가 말하는 사랑.gif 예쁜 하루 보내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