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 거야.
Murakami Haruki - <Norwegian wood> 중에서
‘A대 대나무 숲’에 아침부터 소동이 일었다. 족보를 조건으로 새내기를 꼬드겨 술을 마신다는 비인간적인 선배들의 행태가 익명 게시판에 고발되면서 사람들은 당사 학과를 밝히려 눈에 불을 켰다. 경영부터 디자인까지 A대의 모든 과가 거론되나 싶더니, 결국 진흙탕이 되어 이 사건에 일절 관련 없는 뭇 사람만 상처를 안고 쓸쓸히 퇴장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 대나무 숲: 트위터를 비롯한 SNS를 이용하여 해당 학교 재학생의 제보를 익명으로 올려주는 페이지.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한들 족보는 존재하며, 또한 그것을 악용하는 자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발을 닦고 잠을 자도록 하자. 어느 익명의 말이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족보 왕’이 될 걸 그랬다. 소신을 지킨다 어쩐다 할 때부터 난 이미 학점의 패배자가 아니었을까. 술 그까짓 게 뭐라고, 한 두시간 불편하게 노는 건데 그게 뭐가 힘들다고 줘도 못 먹냐는 말이야. 혼잣말에 영혼이 팔려 나간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 힘든 그 상태, 이제부터 ‘김여주 상태’라 해 두자.
금요일 공강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 나는 교내 카페에 앉아 여유를 만끽했다. 역시 금요일엔 오전 수업을 들어야 제맛이지. 아홉시부터 강의에 시달린 자의 정신 승리였다. 배터리가 없는 노트북은 밥을 달라 끔뻑였다. 워드 반 페이지도 채우지 못한 과제를 바탕화면 구석에 몰아넣고 구부정한 등을 두드렸다. 미래의 나야, 좀 더 열심히 해주 길 바랄 게.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어후, 깜짝이야.”
- “또 이상한 생각 했네.”
- “……향수 뿌렸어?”
낯선 향에 코를 킁킁거리며 탐색전을 펼친다. 그가 약속 시각에 늦은 건 지금으로선 별문제가 아니었다. 거의 안기다시피 파고드는 감각적인 동물이 그의 손목을 잡는다. 진짜 향수네. 별로면 안 하고. 쿨남들만 쓴다는 쿨 워터 향. 드라마 좀 그만 봐. 상대에게 가벼운 칭찬을 하면서도 눈동자는 자연스레 다른 곳을 향했다. 팔 마디에 잡혀 있는 힘줄을 감히 외면할 수 없는 본능이었다. 걷어 올린 니트와 다부진 근육의 조화는 완벽하다 못해 기립 박수 감이었다.
미안한데 헤드락 한 번 걸어주면 안 될까. 절대 변태는 아니고 너한테 관심이 너무 많아서 그래. 이러한 헛소리를 가장한 진심을 보일 때마다, 그는 특유의 눈빛으로 대담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뭐 어쩌라는 것이냐. 이것이 이지훈의 현재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깜빡 죽는 나였다. 본인 상식에 벗어난 상황이 닥치면 표정에 다 드러나는 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물론 그와 다소 친밀하지 않은 사람들은 차가운 외모와 언행 따위를 들며 날 이해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다분히 선을 긋고 색안경을 쓰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 “좀만 더 세게 해 주면 안 될까.”
- “카페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 “요즘 운동하나?”
- “사람들은 누구나 다 힘줄을 가지고 있단다.”
슬쩍 주변 눈치를 보다 아프지 않게 목을 감는 주인공이 바로 이지훈이라는 사실을. 그 선을 넘어 본 사람만 안다. 절대 해주지 않을 것처럼 온몸으로 거부해도 막상 기가 막힌 타이밍에 자신의 귀여움을 어필하는 아이라는 것을.
- “이제 기브앤 테이크.”
- “어디서? 너희 집에서?”
- “현기증 난다.”
- “현기증엔 라면인데 잘 됐다. 가서 끓여 먹자.”
그의 두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매만진다.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통하는 말이다. 다이어리를 꺼내 페이지를 펼쳐 끄적인다. 4월 첫 주, 미래의 첫 번째 계획은 바로…….
- “꼭 입성하고 만다. 이지훈 오피스텔.”
- “해봐. 한번.”
- “집들이용 두루마리는 양손 무겁게.”
- “맵 키고 와. 길치는 평생 간다.”
바람 빠진 목소리로 진지한 장난을 거는 그다.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는 분홍 손가락. 몰래 그것을 훔쳐보다, 마저 적지 못한 문장을 작은 글씨로 덧붙인다.
3월, 지훈이가 찰랑인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반달 눈으로 바라보는 그가 예뻐서, 또 그렇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워 하지 못한 고백이었다.
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Chapter. 15 <밀당의 고수>
08.
불가사리 독방…… 아니, 동방은 때아닌 노래자랑으로 한 주의 시끄러움을 담당했다. 보컬을 뽑지 못해 면접이 일주일이나 진행된 탓에 메인 심사관인 ‘개’선배는 며칠째 두통에 시달렸다. 다음과 다음, 또 다음을 외치는 확성기 같은 목소리는 동방 입구부터 늘어진 후보자들의 긴장감을 배로 앞당겼다.
오늘의 마지막 후보는 고음을 넘기지 못하고 안타깝게 떨어지고 말았다. 계범주 귀 예민해. 소파에 앉아 면접을 구경하던 그의 첫마디였다. 과외 중에도 들리 지도 않는 수박 트럭 소리가 난다며 돈을 챙겨 들어 마당으로 뛰어간 일이 허다했고 이웃집 고양이가 담벼락을 걷는다며 신경질을 낸 적도 다반사였단다. 지훈은 그럴 때마다 3M 스펀지 귀마개를 권유했으나, 효과는커녕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며 욕을 먹었더랬다.
오랜만에 I’m Yours 불러 봐. 고막 청소나 하자. 선배는 두통약을 한 움큼 집어 입으로 털었다. 지훈은 소파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손가락으로 리듬을 탔다. 여태 들어보지 못한 노랫소리에 마른 입술을 뭉근히 적셨다. 그가 노래 꽤나 잘 한다는 승관의 말을 얼핏 들은 적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 속담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 “이지훈 합격. 이만 A등급 자리로 돌아가 줘.”
- “뭐래.”
- “아까 애들 봤잖아? 뭐 느끼는 거 없디?”
- “다들 정도껏 했어.”
- “네 옆에 있는 애 표정이 야시꾸리하다?”
한껏 녹아든 눈빛이 애꿎은 사람에게 걸리고 만다. 야시꾸리한 눈동자는 간이 테이블 위 하늘 보리차 성분을 읽어 내렸다. 선배는 그런 내 눈동자에 건배를 외치자 지훈이 실소를 터트렸다. 얘 놀리지 마. 나중에 화나면 그거 다 내 책임이거든. 주먹 쥔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비스듬히 내려보는 그에게 또 반해 버린 순간은 불과 5초. 햇반도 2분 30초를 돌려야 하는 마당에 반응하는 심장이 참 빠르기도 하다.
선배는 문밖 친구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춤을 추켜올렸다. 너희들 어디 가지 말고 꼭 붙어 있어라. 그는 거의 소파에 눕다시피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흔한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는 불가사리 동방에 정적이 찾아온다. 아무도 없는 공간, 오직 둘만이 꼼지락 대는 애매함이 남는다.
- “건반 만져본 적 있어?”
- “……왜?”
- “너도 쳐본 적 있나 해서.”
어렸을 때 좋아해서 많이 쳤거든. 움푹 패인 소파를 떠나 건반에 손을 올렸다. 얼추 잘한다 싶더니 결국 방향 잃은 손가락은 비슷한 음을 꾹꾹 눌러가며 길을 헤맸다. 더불어 한 구간에 막혀 속도마저 제대로 내지 못했다. 곧 옆에서 건반을 만지는 손가락이 유독 매끄러워 눈을 뗄 수 없어 같은 음만 반복한 건 눈치채지 않았으면 좋겠다.
- “코드 다 외우고 다녔었는데…….”
- “나중에 보여 줘.”
- “그래도 악보 주면 다 칠 수 있어. 원하면 알려 주지.”
- “말만 하지 말고.”
- “누나가 확실히 가르쳐 줌.”
- “콜.”
내가 체르니 30번에서 멈춰서 그렇지 스킬은 장난 없다. 백 건을 무작위로 두드리다 국민 멜로디인 ‘젓가락 행진곡’으로 돌아선 손가락이 이제야 안정감을 찾는다. 잠시 후 돌아온 선배는 신성한 대학에서 연애 질 하는 것들은 꼴도 보기 싫다 어쩐다 잔뜩 불만을 놓고 팔짱을 꼈다. ‘CC’만 3년째 하고 있음을 망각한 사람의 좋은 예시였다.
선배는 건반 앞에 서 있는 그를 보며 설레발을 쳤다. 드디어 동방에도 새로운 인재가……. 그러나 단호한 거절이 뒤를 잇는다. 건축 동아리 벌써 가입했어. 진짜 필요하면 그때 도와줄게. 일 인용 소파에 앉아 입을 댓 발 내민 선배가 눈가를 훔친다. 클라리넷이 없어서 가입 망설이는 게 틀림없다며 그를 원망하는 목소리였다.
- “너 클라리넷도 해?”
- “어렸을 때 잠깐.”
- “근데 클라리넷이 뭐야?”
- “……뭔가, 리코더 비슷한 거.”
아무튼 입으로 부는 건 똑같아. 턱을 밑으로 당겨 부는 시늉을 한다. 허공에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에, 그가 클라리넷을 불던 리코더를 불던 그 악기는 무조건 계를 탄 거라 결론을 내렸다. 내 관심은 오로지 이거였다. 다음 생에는 이지훈 악기로 태어나 그의 사랑을 맘껏 누려야겠다고.
- “이지훈, 너 건반은 오랜만에 만져보는…….”
- “형 머리에 나방 붙었어.”
- “공생하게 내버려 둬. 나 좋다는 생물 얘밖에 없다.”
- “여자친구 어디 두고.”
- “군대 갔어.”
- “또 싸웠네. 이번엔 뭐 때문에 군대까지 보내.”
김여주. 밖에 추워. 가디건 위에 걸쳐도 되고. 자신의 외투를 집어 내게 건넨다. 난 괜찮다 말을 흐물거리다 소파에 앉아 억지로 팔을 구겨 넣었다. 선배 말에 반응하면서도 자연스레 내 옷을 여미는 그였다. 대학로 일식집에 알밥을 먹으러 가자 했더니 그 수많은 생명체를 어떻게 먹냐며 되려 본인을 탓했다던 여자친구 이야기를 조잘거리는 선배의 하소연에, 그는 아직 멀었다는 투로 충고를 남겼다.
- “여자친구 말은 무조건 다 맞는 거야.”
- “알밥 먹는 게 슬프면 뭐, 명란젓도 못 먹겠다?”
- “정확해.”
- “너 인마, 많이 변했다.”
- “형이 잘못 했어 솔직히.”
동방 출입문까지 에스코트하던 그가 뒤돌아 짧게 인사를 고했다. 손가락으로 슬쩍 날 가리키며 상대에게 확인 사살까지 했다. 그로 인해 얼굴에 핀 수줍음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선배는 인사를 가장한 직격탄에 얼이 빠져 넋이 나가버렸다. 당사자는 굉장히 진지한데 말이다.
- “얘가 된장을 고추장이라고 하면 고추장이고, 콩이 바다에서 나면 원산지는 바다야.”
- “이지훈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
- “밤에 농구 하러 나와.”
- “말도 안 돼…….”
선배는 현실 부정 초기 단계인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가 맞잡은 두 손을 선배에게 흔든다. 힘내. 뭐 어쩌겠어. 부르다만 멜로디까지 흥얼거리며 동방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다. 저번에 갔던 북카페 알지. 거기 옆에 보드게임장 생겼다고 그러던데……. 말끝을 흐리며 비스듬이 고개를 뉘인다. 살짝 고양이 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 “젠가 콜?”
- “콜.”
- “콜콜”
손을 잡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귀엽게 웃는다. 심장아 제발 가만히 좀 있어 봐. 아직 눈에 다 담지 못했는데 너까지 쿵쿵대면 어떡해. 고개는 위아래로, 광대는 과학실 볼록 거울, 마음을 숨기려 힘을 준 입술은 결국 패배. 잇몸이 만개한 웃음이 폭 터진다. 지훈아, 난 너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까 심히 걱정스러워. 아무리 생각해도 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아.
- “귀여워.”
- “게임 하다가 배고프면 밥 먹고.”
- “부끄러워서 또 말 돌린대.”
- “……스시는 별론가.”
밥이 보약이라는 ‘밥 타령 이지훈’ 선생님께 가볍게 기대면, 이 선생님은 고민의 타래를 접고 어깨를 사뿐히 감쌌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진짜로 말한다. 언제는 안 한 것처럼 그러네. 진짜 한다. 서로의 말꼬리를 잡고 길게 늘어지다 그 끝을 단박에 마무리 짓는 건, 낮과 가장 어울리는 내 대답이었다.
- “나는 너.”
- “…….”
- “너.”
농담 반 진담 반을 적절히 구사하는 내게 칭찬의 스티커를 붙여줬으면 좋겠다. 물론 주어는 이지훈. 정말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에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 결정체로 돌아가 화들짝 놀라는 척 입을 막는다. 그는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짚었다.
- “아니, 네가 만든 스시를 먹고 싶다는 얘기지.”
- “들었다 놨다 진짜 수준급이다.”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 “넌 도대체 무슨…….”
얼굴까지 빨개졌대요. 세상 사람들, 이지훈 얼굴 좀 봐주세요. 이글이글 타오른다. 아주 알맞게 익어가고 있다. 깍지를 끼고 즐겁게 흥을 낸다. 내일 수업 쨀까 어쩔까. 교수님 얼굴 아른거릴 텐데. 현재에 충실하자. 곧 닥칠 네 현실이야. 냉정하기 짝이 없는 내 짝을 흘겨보며 화를 내도 습관처럼 위로 곡선을 그리는 입술에 마음이 들통나버리고 만다. 뭐든 이렇게 좋아서 어떡하나. 이거 완전 중증이잖아.
- “내일도 너랑 데이트해야 하니까 수업 미뤄 달라고 교수님한테 메일 보낼까.”
- “그리고 널 영원히 보낼 수도 있겠지.”
- “너무 팩폭이라 견딜 수가 없다.”
- “당신의 최선과 열정을.”
살아있는 교과서가 내 옆을 걷는다.
교과명은 ‘이지훈과 즐거운 생활’.
부록은 훗날 최초 공개하도록 하지.
09.
살살. 아파. 잠깐만. 다급히 상대방의 손을 막는다. 이번엔 진짜 살살. 힘 빼. 그가 가볍게 내 손을 뿌리치며 뒷목을 잡는다. 아침부터 볼륨 세운 머리는 망가진 지 오래다. 내 이마를 겨냥하는 분홍 가지를 피하고 싶은 애처로운 움직임 때문이었다. 가격당한 이마를 붙잡고 이를 악문다. 반면 그는 즐거워 박수까지 쳤다.
김여주 게임 진짜 못해. 벌써 세판 째 연승을 거두고 있는 그가 점퍼 한쪽을 부러 내리며 반듯한 어깨를 과시했다. 이쯤 되면 젠가고 뭐고 파토를 내야 한다. 하지만 누누이 언급하지 않았는가. 난 오기와 승부욕에 불타는 사람이라는 것을.
- “한 판 더 해.”
- “드래곤 볼 천진반 눈 같다.”
- “오늘 둘 중에 한 명 이마에 눈 생겨서 나가는 거야.”
- “자기소개 많이 늘었네.”
그가 이마 정 중앙에 생긴 홍점을 가리키며 웃는다. 일 년에 한두 번 돌아갈까 말까 작동하지 않던 스팀기가 터져 나간다. 눈치 백 단 이지훈 어디 갔죠. 오늘 왜 이렇게 애 같죠. 무너진 나무 막대기 쌓는 것마저 건축하고 앉아 있는 널 어쩌면 좋죠. 나 이제 어떡하죠.
- “여기서까지 건축하지 말라고.”
- “약간만 어렵게 만드는 거야.”
- “……그냥 좀 봐 줘.”
- “게임은 무조건 페어플레이지.”
- “날 잃고 싶어?”
- “네가 잘 하면 되잖아.”
아니 지훈아, 다른 사람들 좀 봐. 다들 하하 호호 즐겁게 하고 있잖아. 어떤 사람은 친구를 봐주기도 하고 때리는 척하다가 넘어가기도 하던데, 우리는 왜 경쟁을 하고 앉아 있는지 모르겠어. 대답을 해봐. 야이, 가운데 세우지 말라고! 연타로 쏘아붙이는 폭풍 잔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가운데 막대기를 고의로 세우는 건축계의 이단아는 제작품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부터 시작해. 이번이 막판이다. 이마 조심해. 집중 좀. 손가락 끝으로 가장자리를 자신 있게 내치는 그가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자신이 쌓아 올렸으니 구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가 패배할 확률은 현저히 낮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 “나한테 고백한 날 기억나?”
- “…….”
- “그때 네가 뭐라고 그랬더라.”
집중을 흐트러지게 할 참이었다. 너의 멘탈을 탈탈 털어 버릴 것이다. 승부욕의 이단아는 앙상한 가지가 된 젠가를 슬쩍 확인하다 제멋대로 입을 놀렸다. 네가 먼저 고백했던 건 알지. 그때 너 엄청 떨었는지 계속 손가락 꼼지락대더라. 작은 한숨이 얇은 입술을 비집는다.
-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해.”
- “생일 케이크 들고 갔는데 네가 사귀자고 했잖아.”
- “사귀고 싶다는 말은 네가 먼저 했잖아.”
- “와, 웃긴다. 내가 언제?”
- “하긴 기억 안 날 만도 하겠다.”
- “우리가 친구냐고 은근히 신호 준 사람이 누군데.”
……나만 믿는다며? 나만 믿고 싶다며? 왜 내 말 안 믿어? 결국 다 뻥이었니? 젠가에 타오르던 불똥이 그날에 옮겨붙는다. ‘누가 먼저 사귀자 말했는가’, 이것이 바로 핵심 주제였다. 그는 먼저 ‘사귀자’ 말을 한 건 김여주 너였다 반박했다. 내게 없는 필름이 그에게 있다.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진술이다. 혹 내 멘탈도 털어버리겠다는 물귀신 작전일까. 왠지 이쪽에 신뢰가 간단 말이지.
- “이제 네 차례.”
- “고백 내가 먼저 안 했어.”
- “했어.”
- “안 했다니…… 아…….”
폭삭 무너진 건축물은 또 한 번의 패배를 알렸다. 내 꾀에 내가 당했다. 그는 엄지와 중지를 동그랗게 말아 입김을 불었다. 오빠, 정말 잠깐만요. 빨리 대. 두 눈으로 열심히 살게요. 세 개도 나쁘지 않아. 도망가려는 다리를 제 것으로 옭아매고 두 손까지 붙잡는다.
내일 학교 못 갈 수도 있어. 갈 수 있어. 결석해버릴 거야. 그건 네 사정. 아아, 당최 져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페어플레이의 정신인가. 질끈 눈을 감고 짱구를 굴린다. 어마 무시한 딱밤과 바꿔 칠 수 있는 딜을 빨리 찾아야 한다. 뭐가…… 뭐가 있을까.
- “잠깐만! 소원 한 가지!”
- “소원 뭐.”
- “딱밤 대신 소원 한 가지.”
- “아니야, 전자가 더 나아.”
강력하게 입김을 불어 넣는 전문가의 자세를 보라. 안 그래도 굴러다니는 뇌는 기절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 잠깐만! 소원 세 가지! 손가락으로 숫자를 꼽아 당당히 딜을 시도한다. 이미 내 머리 위에서 뛰어노는 그를 보며 오늘만큼은 게임도 주도권도 다 뺏겼다 생각한다. 그는 짐짓 고민하는 척 턱을 매만졌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좋았다. 어차피 들어 줄 게 뻔했으니까.
- “뭐든 일단 소원 세 가지?”
- “당연하지. 여부가 있을까.”
- “사도에서 춤추기 이런 것도?”
*사도: 사회대 도서관
- “진심으로 날 잃고 싶어?”
공격적인 반응에 바람 빠진 웃음을 남긴 그가 옭아맨 다리에 자유를 준다. 소원 받고 유효 기간 없는 것도 추가. 젠가 막대기에 입김을 불어 넣더니 내 손등에 도장처럼 콩-, 박는다. 대답은 이미 한 걸로. 이 계약은 무효다 뭐다 반박의 기회를 얻고 싶었건만, 그는 화장실을 핑계로 잠시 도주했다.
휴대폰이 울린다. 타이밍 눈치는 본인 콧잔등 밑에 난 콩알만 한 점보다 없다. 야, 너 이지훈이랑 같이 있냐. 수업도 없는데 한잔할깝숑. 나와 마찬가지로 승관은 금요일 공강에서 제외된 불쌍한 중생이었다. 오전 수업까지 아싸리 마친 자신이 자랑스러워 오늘은 꼭 죽마고우와 달리고 싶다 애원하는 중이었다.
- “일단 지훈이한테 물어볼 게.”
- “언제부터 의견을 물었다고.”
- “우린 서로를 존중하는 사…….”
- “……여보세요?”
- “…….”
- “야야, 끊겼냐?”
지금 난 무엇을 본 것일까. 그가 두고 간 휴대폰에 시선이 박힌 지 오래, 모른 척하려 해도 그 내용은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승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대충 얼버무리고 급히 전화를 끊는다. 연달아 오는 메시지, 그것 중 유독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다.
- “과팅…… 콜?”
……
- “이지훈 너는 꼭…… 나와라?”
미친 걸까. 아니다. 미친 거다. 이 새끼…… 사람은 도대체 누구기에 임자 있는 애를 밑도 끝고 없이 과팅에 끌어들이는 건지 묻고 싶다. 날짜 언제지. 현장을 잡아야 하는 건가. 가서 뭐라고 말하지. 여태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면서 정강이라도 걷어차야 하나. 화나면 울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나 이제…….
- “가자.”
- “……어?”
- “밥 먹으러.”
- “아아…….”
- “왜 그래?”
- “아니, 아까 승관이가 같이 술 먹자고 연락 왔어.”
- “이 대낮에?”
- “원래 술은 낮술이거든요.”
그가 주머니를 뒤지며 무언가를 찾는다. 아마 휴대폰일 것이다. 테이블에 두고 갔어. 내적 갈등의 원인을 내밀며 괜찮은 척 웃어 본다. 지금이라도 물어볼까. 아니야, 괜히 오해만 살 수 있잖아. 근데 진짜면 어떡해.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두 개의 자아가 귀를 괴롭힌다. 얼굴을 좌우로 도리도리, 초점 없는 눈이 바닥을 훑는다. 분홍 가지가 흔들린다. 바로 눈앞에서.
- “이거 몇 개.”
- “제정신 맞아.”
- “그니까 몇 개.”
- “만 오천 개.”
- “작년보다 더 늘었네.”
내 상태를 덤덤히 받아들인다.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지났다는 거다. 그는 전신 거울 앞에서 스타일을 점검하다 자신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는 날 확인하고는 슬쩍 뒤로 돌았다. 괜찮냐는 물음에 고개만 크게 주억거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점퍼만 입으면 유난히 한쪽만 내려 입는 저 고집에 집중하고 싶다. 사실은 괜히 시비를 털고 싶은 거다.
- “왜 자꾸 한쪽만 내려 입어?”
- “그냥. 멋.”
- “너도 참 이해할 수 없다.”
- “이해해 달라고 입는 거 아니야.”
- “나 방금 상처 입었어.”
- “어디가 아프신지요.”
입술을 오므려 호호-, 내 손등에 처방전을 놓는다. 거기 아니고 여기.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려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이제 손님들 별로 없으니까 괜찮아. 여기 사각지대야. 아까 다 확인했어. 그가 딴지 걸 만한 사항들을 미리 속사포 랩으로 나열한다.
- “입술이 아프면 그거 해.”
- “…….”
- “인터넷 보면 사람들 그거 하던데. 입술 모양 팩 같은 거.”
오리 주둥이처럼 주욱 내민 한낱 명란젓이 짜게 식어 간다. 그래, 팩 사러 먼저 갈게. 딸랑거리는 출입문 종소리마저 화가 난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타하는 손가락이 분노한다. 어느새 그는 내 옆에 서서 발을 까딱거렸다. 아디다스 슬립온은 왜 또 신고 왔대. 너무 잘 어울려. 짜증 나. 엘리베이터 구석에 박혀 거울로 또 다른 나를 본다. 열 세 번째의 자신을 보면 죽는다는 속설을 확인해 보고 싶다. 간간히 그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고.
- “등에 먼지 있다.”
- “웃기지 마.”
- “진짜로.”
거울 속 그는 장난기 묻은 얼굴로 등을 가리켰다. 아니 거기 말고 오른쪽. 아무것도 없잖아. 그 밑에. 아무것도 없다고. 거울로 반사한 넓은 등딱지에는 먼지는커녕 튀어나온 실밥도 없다. 굳이 꼽자면 다부진 어깨가 털어내고 싶은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 그는 낑낑대며 등을 확인하는 날 톡톡 두드린다. 여기 봐봐. 그리고 내 입술에 부딪힌 달콤한 사고는 엘리베이터 종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 “없으면 말고.”
- “…….”
- “요즘 눈이 침침해.”
찾았다. 고양이. 새초롬한 고양이는 손바닥으로 살짝 눈을 덮으며 어지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요새 연기력이 늘었다더니 거진 최우수 감이었다. 나보다 조금 더 앞선 그가 뒷짐을 쥐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신호를 보낸다. 잡아 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럴 땐 호락호락하지 않는다. 애를 태운다기보다 뜻대로 해주고 싶지 않은 못된 마음이랄까. 부러 느긋하게 다가가 나 또한 뒷짐을 쥐고 길을 걷는다.
- “빨리 잡아줘.”
- “나도 눈이 침침해.”
- “그럼 내가 잡아줘야겠네.”
- “허락 아직 안 했어.”
- “허락까지 맡아야 하나.”
맘에 들지 않는 일에 가끔 사투리를 섞어가며 골이 날 때가 있다. 뾰로통한 얼굴로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차도 쪽으로 눈을 돌려버린다. 그의 뾰로통함 정도는 상중하로 나뉘는데, 이건 빨리 풀어줘야 할 레벨이었다. 빨간색 보도블록만 밟다 자연스레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는다. 아이쿠, 미끄러졌네. 발로 연기하는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대사였다.
- “날씨도 좋은데 우리 손 잡을까.”
- “이미 잡아 놓고선.”
- “그래서 지금 내 마음에 들어오고 있는 중이야?”
- “아니, 밖으로 쫓겨났어. 강제 추방.”
말은 저렇게 하면서 금세 끌어안으며 살갑게 웃는다. 어디로 가냐는 물음에 곱게 답할 리 없는 나는 귓가 가까이 입술을 대 소곤거렸다.
내 마음. 다시 들어 와.
감정에 서툰 그가 귓불을 붉힌다. 나는 그런 아이가 좋았고.
10.
세상엔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참 많다. 현재 내가 내뱉는 주문도 그중 하나였는데 생각보다 참 곤혹스럽다. 여주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랜덤 게임! 귀엽고 깜찍하게! 랜덤 게임! 랜덤 게임! 내 이름을 넣고 ‘귀엽고 깜찍하게’라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승관의 표정이 좋지 않다. 당장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더욱 신명 나게 어깨춤을 춘다. 옆에서 장단을 맞추는 지훈의 노력도 가상했다. 서로가 즐기지 못하는 이 상황을 타파하고 싶어 평화로운 만두의 신을 불렀다.
만두 만두 만두 마안-두! 삼! 아싸 부승관! 보기 좋게 걸려 버린 승관이 인디안 밥에 이어 소맥을 들이킨다. 은근 게임에 젬병인 녀석은 핑계를 찾기 급급했다. 야, 지금까진 봐준 거야. 진짜 프로는 처음부터 힘 안 빼잖냐. 허세로 범벅된 목소리로 만두의 신을 소환하는 깜찍한 승관은 ‘지훈’이라는 월척을 낚아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아까 젠가 게임에서도 그랬듯이, 그도 승부욕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란 걸 잊으면 안 된다.
- “오늘은 만두만 하자.”
- “지금 하나로 조지겠다 이거냐?”
- “지훈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 “야, 지옥에서 돌아온 게임 아니거든?”
진지 빨지 말고 귀엽고 깜찍하게! 두 팔로 원을 그리며 닦달하는 승관에게 못 이겨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최선을 다하는 그다. 지훈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랜덤! 게임! 막상 시키면 빼지도 않고 곧잘 하는 그가 신기하다 못해 놀라울 지경이다. 예상대로 만두로 조지기 시작한 그는 거대한 사투 끝에 승관을 넉 다운 시켰다.
야, 내가 미안하다. 네가 만두 다 먹어. 무려 네 시간 째 이어진 불멸의 만두에 승관이 술잔을 되레 돌려보내며 손사래 쳤다. 덩달아 몇 차례 걸린 나도 술을 넘겼으나, 그중 반절은 ‘이지훈 흑기사’로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승관은 이래서 흑기사가 없어져야 한다며 불평했다. 꽤나 취했는지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게 킬링 포인트였다.
풀린 눈으로 코를 훌쩍거리던 승관이 지훈의 휴대폰을 가리킨다. 이쥰, 문자 온다. 소주병을 까던 손은 일시 정지. 번쩍 뜨인 눈으로 보지 않는 척 눈을 굴리다 슬쩍 몸을 뺐다. 술에 취한 탓인지, 아님 뻑뻑해진 렌즈 때문인지 밝은 화면에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 간 심증만 품은 채 이도 저도 안 될 게 뻔했다. 적당히 취했겠다, 용기도 있겠다, 옆에 조사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다. 삼박자가 고루 완벽한 이 상황을 이용해야 했다.
- “뿌, 너는 과.팅. 안 나가?”
- “기공 인기 없기로 유명합니다. 물론 나는 아니지만.”
*기공: 기계 공학과
- “그래? 나는 과.팅. 들어와도 남자 친구 있어서 거절했거든.”
- “당연히 그래야지. 아무리 그래도 서로 간의 예의가 있는데.”
- “설마 만나는 사람 있는데 과.팅. 나가는 도덕적이지 못한 자가 세상에 과연 있을까?”
- “그건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지.”
그런 새끼들은 독방에서 만두만 처먹어야 돼. 승관은 소주 뚜껑으로 예술을 벌이면서 대화 상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이래서 진짜 친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쿵짝이 잘 맞는 구나. 아홉 번 빡이 쳐도 한 번은 이리 기특하게 구니 미워할 수가 없구나 친구야. 기분 좋게 건배를 외치며 술을 홀짝거린다. 그러나 정작 지훈의 눈길은 휴대폰에 가 있다.
- “이지훈.”
- “……어.”
- “…….”
- “왜, 뭐.”
침묵에 다다른 그에게 심통이 나다 못해 신경질이 난다. 전자파에 다 먹혀 버려라 주문을 외우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짜증을 참지 못해 한숨을 뱉었다. 취기가 올라 열을 식히는 손바닥이 이내 그의 어깨를 잡는다. 야, 내가 지금 할 말이 있어.
- “과팅 언제 나가는데?”
- “……뭔 팅?”
- “과에서 하는 미팅. 너 꼭 나오라고 어? 문자까지 보내더라?”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의아한 표정으로 조막만 한 얼굴을 집어삼킨 모자를 들어 올린다. 거의 완성한 별을 단박에 망가트린 승관이 눈을 부라렸다. 이지훈이 뭘 나간다고? 도대체 어딜. 김여주가 과팅이라잖아. 뭔 개소리야. 지훈이 인상을 구긴다. 그 순간에도 울리는 문자들, 답답함을 참지 못해 휴대폰을 낚아채 물증을 확보하려 스크롤을 내렸다.
- “자! 여기 봐. 이지훈…….”
- “…….”
- “이지훈은……. 여친 있어서 못 나온대…….”
- “끝까지 읽어.”
- “……저번 과팅도 안 나오더니……. 여친한테 빠졌네…….”
전 조용히 휴대폰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고요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제 친구 승관이는 숨을 죽이고 다시 별을 만들기 시작했고요. 더불어 친구를 의심한 자신의 건조한 마음을 달래려 간간히 물을 축였습니다. 이제 제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려 합니다. 지금까지 제 추리를 들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 “어디가.”
- “아니, 단톡이었다고 말이라도……. 그리고 아까 봤을 때는 여친 있다고 그런 말도…….”
- “말할 기회를 줬어야 뭐든 했겠지. 그리고 계속 씹다가 그냥 지금 답한 거고.”
-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네.”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벽을 짚으며 도주하는 내 뒤꽁무니는 어땠을까. 한심하기 짝이 없다. 감히 누굴 의심한 거야. 생각 의자 어딨어. 고독하게 앉아서 반성해라 자신아. 급히 뛰어온 터라 세상이 어지럽다. 대충 ‘W.C.’ 문구만 살피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화장실 칸 앞에 쪼그려 앉아 타일을 만지작거리는 석민을 목격한 건 우연이었다. 해바라기 슬퍼 보여. 물 줘야 해. 뒤뚱뒤뚱, 석민의 앞까지 걸어가 졸졸졸-, 효과음까지 더한다. 바닥 타일을 세고 있던 석민이 고개를 든다. 어색한 손바닥을 보이며 인사를 건네자, 석민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 “나 일본이야.”
- “……너 일본이야?”
- “다다미 멋지지.”
- “이거 다다미야?”
해바라기처럼 쪼그려 앉아 타일을 매만지며 되물었다. 너 일본이야? 이거 다다미야?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만, 내 술버릇은 되묻는 버릇이 있었다. 몇 번을 그렇게 되묻다가 시간이 지나면 평서문으로 돌아오는 게 특이 사항인 요상한 술버릇 말이다. 석민의 두 볼이 새빨갛다. 아니, 얼굴 전체가 붉어 꼭 온천 열탕에 들어온 사람 같다. 다다미라 주장하는 타일을 만지며 열기를 느끼는 듯 ‘아-, 뜨거’를 연발하며 훤히 웃는다.
- “이석민, 너 취했어?”
- “아니.”
- “나도.”
- “아-, 뜨거.”
다다미 안에서 온기를 느끼고 있을 때, 뒤에서 들리는 역정 가득한 목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돌렸다. 선 이지훈, 후 부승관이었다. 미쳤네 어쨌네 상욕을 퍼붓는 주인공은 지훈의 뒤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광대로 화를 내는 승관이었다. 지훈은 말없이 날 일으켜 자신의 외투로 냉한 몸을 감쌌다. 석민은 지훈을 가리키며 ‘후지산’이라 외쳤고, 그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석민의 주장을 정정했다.
- “후지산쯤.”
- “오오, 후지산쯤!”
- “너도 빨리 들어가라.”
- “다다미 따뜻해.”
결국 석민은 승관의 등에 업혀 실려 나가듯 가게를 빠져나갔다. 호경 무리가 없는 걸로 보아 술에 약한 석민이 먼저 화장실로 이탈한 듯싶었다. 애한테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먹였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넓은 등에 볼을 비빈 채 옹알대다 눈앞에 바로 보이는 동그란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조잘댔다.
- “나는 지금 후지산 정상이다! 근데 도쿄 타워 못 봐. 슬퍼.”
- “대신 이지훈은 본다.”
- “그건 정-답-!”
뒤통수에 입맞춤을 퍼붓는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아아, 작게 신음하다 고개를 숙였다. 동그란 뒤통수가 사라지자 다음 목표는 목덜미가 되어 그를 괴롭혔다. 야……. 제발……. 앓는 소리에 키스를 거두고 다시 볼을 비볐다. 지훈아, 너 뭐해? 됴코 타워랑 친구 먹었어? 따위의 헛소리가 A대 정문을 통과한다. 한밤중에 무슨 일이냐 묻거든 아름드리나무 밑에서 온몸으로 거부하는 어린양과 주정뱅이가 있었다 전하면 된다.
- “지훈아……. 나는 왜 그때 기억이 잘 안 나지.”
- “…….”
- “내가 고백했다며……. 정말 생각이 안 나서.”
케익도 주고 촛불도 불었는데…… 왜……. 감기는 눈을 끔뻑 대다 큰 숨을 내뱉는다. 나만 생각 안 나. 그럴 만도 하니까. 그때 심장 튀어나오는 줄 알았는데. 잘 지켰네. 불규칙한 심장 소리에 내 것마저 빠르게 뛴다. 반달 비스 무리한 조각이 세상을 밝히는 시간, 한동안 침묵을 그리던 그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닿는다.
- “이지훈 좋아해.”
- “……지훈, 좋아해?”
- “지훈아, 좋아해.”
- “……지훈이.”
- “…….”
- “좋아해.”
- “……나도.”
……지훈아, 좋아해. 곱씹는 이름에 애정이 남는다. 술처럼 쓰디쓰다가도 동그란 무지개 사탕처럼 달달해 자꾸만 보고 싶은, 자꾸만 듣고 싶은, 자꾸만 담고 싶은 그런 이름.
……지훈아. 좋아해요.
그런 네 이름.
Epilogue.
2016년 11월 22일.
주택이 즐비한 높은 언덕을 올랐다. 케익 상자를 신줏단지 모시듯 보듬어 안고. 야밤에 보는 주택들은 그 집이 다 그 집 같아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에 적절한 시간이었다.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목도리에 얼굴을 묻으며 야매 GPS로 목적지를 짐작할 때, 가로등 아래 한 겹 벗겨진 가지들이 손을 흔들었다. 하얀 입김이 그대로 흩어진다. 아카시아를 닮은 그런 색.
유독 추운 11월 가로등 아래, 케익에 초를 꼽으며 입김으로 손을 녹인다. 코트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짧은 연결 음 끝에 걸린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지훈아, 나 어디게. 바람에 꺼지는 촛불을 손으로 가리며 코를 훌쩍거렸다. 연신 기침이 터지는 걸 보아 감기가 찾아올 모양이었다.
- ‘어디야. 아파?’
- ‘아니 내가 지금 콧물도 나고, 기침도 나고, 산신령도 좀 보이는 것 같고…….’
- ‘지금 어딘데.’
- ‘너희 집 앞.’
옷은 두껍게 잘 입었고 지금은 네 촛불을 켜고 있어. 급작스레 끊어진 전화를 붙잡고 잠시 생각에 잠기다 바람에 쓰러지는 촛불을 살리려 애를 썼다. 한참을 촛불과 씨름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계는 11시 50분을 가리켰다. 거진 다 녹아내린 초에 애가 탄다. 선택이 없었다. 단번에 꺼트린 불에 잔 연기가 솟는다. 그리고 삐죽 솟은 앞머리를 가진 주인공도 때마침 등장하고 말았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 ‘언제 왔어?’
- ‘빨리 좀 오지. 집 앞에서 케익까지 주는 친구가 어딨냐?’
- ‘……우리가 친군가.’
- ‘…….’
- ‘그럼 친구.’
애매모호한 대답에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는다. 짐작하다시피 오늘 난 고백을 하러 왔다. ‘친구’라는 단어 위에 ‘연인’을 새기려고. 그리고 아마 이건 짐작하지 못할 텐데, 거실 장식장에 있는 복분자도 마시고 왔다. 본래 청심환을 찾고 싶었으나 아무리 뒤져봐도 밴드가 전부인 부실한 가정 의약품에 좌절하다 눈에 띈 것이 바로 복분자였다. 딱 한 잔만, 진짜 딱 한 잔만 하던 것이 다섯 잔이 됐다. 내가 기억하는 건 다섯 잔인데 부디 그 이상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 ‘……술 먹었냐.’
- ‘…….’
- ‘무슨 일 있어?’
눈치 빠른 이지훈은 후각도 좋았다. 바라건대 다섯 잔이 냄새까지 유발할 줄 몰랐으니. 목덜미 주변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던 그가 인상을 찌푸린다. 술이 뭐. 청심환을 못 찾아서 그런 거야. 마른 주먹에 땀이 난다. 다시 불을 붙여 케익 상자를 들기까지, 상대 시선이 따라붙는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 ‘이거 불면 말해 줄게.’
- ‘뭐를.’
- ‘……일단 불어 봐.’
- ‘싫어. 뭔데.’
녹아내리는 초가 꼭 나 같다. 우물쭈물 선뜻 꺼내지 못하는 그 고백에 침만 꿀꺽 삼켰다.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케익 상자를 받아 든다. 곧바로 제 발밑에 내려놓고 다시 내 시선을 쫓는다. 뭔데. 말해. 방패막이로 세웠던 케익 마저 사라진 공간, 온전히 그와 나만 있을 뿐이다. 심장이 튀어 나가 들어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가로등 아래 반사된 그를 오롯하게 마주하게 되었을 때,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던 입술이 그에게 홀리듯 고백을 건넸다. 단순하지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
- ‘우리 친구 말고…….’
- ‘…….’
- ‘……사귈까.’
뭐가 그리 무섭다고 목소리까지 부들부들 떨었을까. 취기가 뒤늦게 찾아온 덕분에 가쁜 숨을 여러 번 쉬는 내가 창피해 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헐벗은 아카시아 가지에 시선을 박았다. 그는 담담히 케익을 들고 가볍게 초를 꺼트렸다. 회색 연기가 흩어진다. 더불어 하얀 입김도.
- ‘사귈까 말고 사귀자.’
- ‘……응?’
- ‘사귀자, 나랑.’
여름 반딧불이 겨울 가로등 아래 내려앉는다. 지그시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그의 입술이 내 것을 짧게 스칠 때, 이어 답례하듯 뒤꿈치를 들어 부끄러운 입술 도장을 찍는다. 넌 내가 왜 좋은데. 달아오른 귓바퀴를 들키든 들키지 않든 그건 상관 하지 않아도 됐다. 지훈이도 나도 온전히 서로를 보여주길 원했으니까.
‘그냥 뭘 하든 믿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
‘그게 너였고.’
<오늘의 리빙 포인트: 고백하는 법>
; 고백하고 싶은 상대방이 있다면 당일 복분자를 마시자.
성공률: ★★★★☆
안정감: ★★★★★
어지러움: ★★★★☆
기억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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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 UP> '이지훈에 대한 고찰'로 찾아뵙겠습니다 (끄덕끄덕) 오늘도 다정한 지훈이와 함께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