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0 서울.
척박하고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할 듯한 모래바닥 위에 한 남자가 서있다.
후-
남자의 입에서 나온 긴 한숨만이 조용한 공간안에서 울려퍼지고 있다. 터벅-터벅-. 조심스레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던 남자는 경계심을 잃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멸망한 도시라고 할 지라도 언제,어디서 위험에 처할 지 모른다.
"멸망한 도시...라..."
'멸망'이라는 두 글자가 가슴을 먹먹하게 조여온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 멸망이라......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단어이다.
허리를 굽혀 바닥의 퍼석한 모래를 한 움큼 쥐어본다.
스르륵-
모래가 손 안에서 흘러내린다. 더 이상 서울에서는 풀 한포기조차 찾아볼 수 없다.
"A-72, A-72. 확인 완료. 인류 생존 가능성 없음. 변종인류 없는 것으로 추정. 생명체 없음. 이상."
한 때,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 이곳조차 완전히 황폐해졌다.
아차, 지금 추억에 잠겨 이곳에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다. 서둘러 다음 구역을 조사해봐야한다. 조사가 늦어질 수록 우리의 생존가능성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
터벅- 터벅-
사박- 사박-
......? 내가 아닌 나 이외의 또 다른 발소리가 들린다. 야생동물? 생명체? 변종인류? 등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소름이 돋았다. 뒤를 돌아보기가 두렵다. 매우. 슬쩍 손에서 흐르는 식은 땀을 닦으며, 내 자신을 보호할만한 것을 찾았다.
칼. 칼이 있다.
하나.
둘.
"형"
......나를 아는 이인가. 혹은, 변종인류의 속임수 인가.
"왜 이제왔어요. 빨리 데리러온다면서요."
......알고있다. 그래, 난 이 아이를 알고있다. 아니지, 이제 아이가 아닌가. 나를 유난히 잘따르던 동생.
이런 낮은 목소리와, 커다란 그림자는 내가 알던 너와는 조금 다르지만, 나는 알 수있다. 너와의 약속을 어찌잊겠니.
"......표지훈."
나는 너를 알고있다.
천천히 뒤를 돌았을 때, 이제는 많이 자라버린 너가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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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남은거야."
"......형은 잘 모르겠지만,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숨어있어요.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지훈이의 얼굴에 씁쓸함이 문득 스쳐지나간다. 내가 알던 표지훈은 저런 아이가 아닌데, 명랑했던 철부지 어린아이 표지훈은 어디로 간걸까.
"그 사람들 중. 변종인류나 '좀비'가 혹시라도 섞여있냐......?"
일명 '좀비'라 부르는 것들은 멸망 전 인류가 알던 좀비의 개념과 비슷하긴하지만 조금 다르다.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으나 바이러스를 보균하고 있고, 그들은 호흡만으로도 타인을 전염시킨다. 겉으로는 그들이 좀비인지 아닌지 전혀 구분할 수 없다. 검사를 받으면 손쉽게 알 수
있지만 말이다. 그들은 멀쩡하다가도 갑작스레 폭팔하며 바이러스를 퍼트리며 사망하고만다.
"없는 것 같지만, 혹시 모르죠. 기본적인 검사도 못받은 사람이 많을테고, 그런 걸 받을 상황도 안돼요."
"......"
더 이상 내가 알던 아이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장한, 덜 성숙한 성인이 있을뿐이다.
지훈이의 눈이 번뜩이며 빛난다. 그리고 느껴져온다.
나에 대한 불신이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 어렴풋이 숨겨진 그리움과, 나에 대한 원망이.
"......"
"......"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조용한 적막만이 흐른다.
칙- 치지칙- 치직-
무전기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적막을 깨트린다.
"A-72, A-72. 응답하라."
"A-72. 아직 이 구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위협 무. 이상 없음."
이제는 가봐야한다. 지훈이를 뒤로한 채 조용히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형"
"......" 부르지마 제발. 부탁이야.
"가지마요."
한 발작도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가지말라는 네 글자가 내 발목을 잡아왔다.
나는 아직 네게 미련이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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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홀렸거나, 혹은 미쳤거나. 어찌됐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지금 지훈이의 뒤를 따라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그러한 곳으로 가고있다. 어떤 위험이 있을 지 모르는 그곳에.
아니, 그렇게 따지면 지훈이도 좀비일지, 혹은 변종인류일지 알 수 없다. 인전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도 내가, 겁쟁이인 내가 널 따라가는 이유는
너의 온기가, 아니, 너란 존재가 조금 그리웠던것 같다.
"형, 다왔어요."
아직도 나는 너의 너무나도 커버린 키와, 낮아진 중저음의 목소리가 적응되지 않는다. 아니, 지금 일어나는 일 모두가 적응되지 않아. 아직도 모든게 꿈일 것만 같고, 지금도 꿈 속을 여행하는 기분이야.
"다왔어?"
"넵."
내가 지훈이의 어깨너머로 바라본 그 곳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넘실대는 지옥이였다. 그러나,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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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한 남자가 거칠게 책상을 내리친다. 뿌드득- 이빨을 갈며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는다.
"젠장......"
사라졌다. 안재효가.
이상 없음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코드번호 A-72 안재효'
점점 미간이 좁혀져온다. 사망? 실종? 어디로 분류를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분명 생존자 중 한명이 사라졌을 뿐인데. 그뿐인데. 쉽게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왜일까.
다른이들의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런 기분이였나? 아니다. 확실히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고있는걸까.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태일님."
"뭐야. 바쁜거 안보여?"
괜히 아랫사람에게도 짜증을 내게 된다. 생존자들 끼리의 화합? 지금 안재효가 사라졌는데, 그딴게 중요하기나 할까.
"지금 B코드 생존자 쪽에서 변종인류일 가능성이 높은 인간이 발견되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변종."
생존인류의 지도자. 이태일은 안경 너머로 불안감으로 가득한 눈을 숨긴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을 숨긴다.
"아직은 밝혀진게 없습니다."
"알아내고나서 와."
"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온 몸에 힘이풀리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디있는걸까. 허탈한 심정으로 무심결에 바라본 창 밖으로 걱정으로 가득찬 하루가 또 다시 지나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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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눅눅하지만 그래도 지낼만하죠?"
지훈이는 조금은 걱정되는 듯한 얼굴로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조용히 지훈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물론 처음에는 많이 불안하고 걱정되었다.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될 지. 어떤 위험에 처할 지 알 수 없었으니.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이 생활이 편한 것 같다. 생존인류와 함께 정부에서 일하며 안전한 생활을 보장받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 곳은 무언가 멸망 전 우리들이 살던 곳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미가 흘러나온다. 나는 그런 이 곳이 좋다.
그리고 지훈이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게 좋다. 그러고보니 이태일은 잘 있으려나. 찡찡대고 아기같이 칭얼거리던 그 녀석. 묘하게 지훈이를 떠올리게 만들던 그 녀석. 남들앞에서는 차가운 척, 남자다운 척해도 사실은 귀여운 그 녀석.
뭐...... 잘 있겠지.
꼬르륵-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중 배꼽시계가 울렸다. 조금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배고프다."
"좀이 아닌 것 같은데요? 기다려봐요. 금방 구해올께요."
지훈이는 나에게 보기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밖으로 나갔다. 지훈이를 기다리는 동안 뭘할까- 하고 생각하던 중, 무전기가 보였다.
걱정하려나...... 문득, 이태일에 대한 걱정스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직까진 없었다. 그래. 나중에 연락하면 되지 뭐.
조용히 누워 눈을 감고 있자니,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좋은 기억, 나쁜 기억.
2015년. 갑작스레 모든 석유가 사라진다. 식료품은 제대로 배송되지 못하여 인류는 식량난을 겪는다. 대부분이 석유로 만들어지는 의료기기들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전염병이 극도로 확산되며, 변종인류와 '좀비'라 부르는 인류가 생겨난다. 대체에너지를 얻어내지 못한 채
인류는 계속해서 위기를 겪고, 결국 생존인류만이 모여, 다같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이 지금. 2060년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누군지 모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억나는 세계는 하얀 방이였다. 하얗고, 소독약 냄새가 나는.
그곳에서 나와 같은 아이들 몇명이 같이 있었다. 그 중 한명이 이태일이였다. 지금의 이태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맣고 작은 사내아이였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구인지 모를 사람들이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하나둘씩 줄을 맞추고 일렬로 선채 우리를 어디론가 태웠다. 태일이와 불안감에 떨며 어디로 가는지 모를 것에 올라탄 나는 처음으로 피곤함이라는 것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는 태일이와 다른아이들은 온데간데 없고, 지금과는 너무나도 다른 작은아이. 지훈이가 있었다.
그리고, 하얀방이라는 것이 있었냐는 듯. 더러운 땅이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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