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나간 자리
또 불합격이다. 이번 면접까지 하면 벌써 네 번째 불합격. 살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한참 뒤처진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이제 생각해보니까 전부 내 착각이었구나 싶다. 면접에서 떨어질 때마다 서로 앞다퉈 위로를 건네곤 하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지 뭐. 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건데 위로가 무슨 소용이겠어. 아직 스물셋밖에 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기회가 많다고는 하지만 취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 사실이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해서 내가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니까. 뉴스에서는 또 최순실인가 뭔가 하는 사람의 만행을 하나하나 떠들어대고 있다. 대통령 비선 실세라고? 이러다 대통령까지 파면되는 게 아닌가 몰라. 아무튼 저 딸은 돈 많은 부모 만나 능력 없이도 잘 먹고 잘 살아서 좋겠네. 누구는 면접 하나에 울고 웃는 인생을 사는데.
띠링띠링-
재환이다. 타이밍도 참. 사귄 지 일 년 반쯤 됐는데 요즘 내가 자주 놀아주지 못해서 아마 잔뜩 토라져 있을 거다. 미안하긴 한데, 당장 취업이 급한 걸 어떻게 해. 솔직히 요즘 재환이에게 너무 소홀하긴 했다. 데이트까지 포기해가며 준비한 면접도 날 배신했는데, 몰라. 될 대로 돼라.
“여보세요?”
[여주야 뭐해?]
“그냥 있지, 집에. 왜 전화했어?”
[나도 그냥 심심해서 전화했지.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재환아.”
[응? 무슨 일 있어? 너 지금 목소리 되게 안 좋아.]
“무슨 일 없어. 재환아,”
[아 왜애... 무슨 일인데 이렇게 뜸을 들여.]
“우리 여행 갈래?”
인생 뭐 있어? 그냥 질러보는 거지. 지금이 아니면 이제 시간 내기도 어려워질 텐데.
bgm : DooPiano - 마음 cover
01_그 해
[진짜? 진짜야? 정말? 우리 여행 가?]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진작 가자고 할 걸 그랬나.
“응. 진짜. 가고 싶었던 데 있어? 나는 다 좋아.”
[나도 너랑 가는 거면 정말 어디든 좋아. 어디로 갈지는 천천히 생각해보자.]
“그래. 뭐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여주야...]
...지금 설마 우는 거야?
“야 너 울어?”
[아니이... 우는 건 아니구... 그냥 너무 좋아서......]
깜짝이야. 난 또 우는 줄 알았네. 내 남자친구지만 진짜 귀엽다 귀여워... 재환이도 자기가 귀여운 걸 알아야 할 텐데. 아, 이미 알고 있으려나?
“여행 가는 게 그렇게 좋아? 너 지금 거의 우는데?”
[우는 게 아니라... 너 그동안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는 것 같아서 계속 마음 쓰였단 말이야. 나랑 못 놀아주는 건 둘째치고 네가 쉬지도 않고 면접 준비하는 걸 아니까... 학교 다니면서 과제 하기도 바쁠 텐데 취업 준비까지 하려면 너무 힘들겠다 싶었지. 너 간절한 거 아니까 놀러 가자는 말도 함부로 못 꺼냈고.]
스물셋밖에 안 된 여대생이 이렇게까지 취업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가정사이긴 한데 뭐, 다 지난 이야기니까.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잘 나가던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다. 그냥 조금 망한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폭삭 망한 수준이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나의 대학 입학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좁은 골목을 따라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나오는 단칸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간신히 대출을 받아 대학을 다닐 수는 있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작년, 아버지께서 큰마음을 먹고 가게를 하나 얻어 분식 장사를 시작하셨다. 사업의 성공으로 나름 안정된 생활을 유지해 오던 우리 가족이 장사를 시작하며 우왕좌왕할 때 도움이 된 건 역시 재환이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께서 장사하시는 걸 지켜보며 컸다는 재환이는 언제나 강의가 일찍 끝난 날이면 가게에 들러 서빙을 도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가게에서 잘생긴 알바생이 일한다는 소문이 근처 여고에 퍼지며 손님이 제법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가게의 개업을 준비하던 어느 날 일을 돕겠다며 무작정 찾아온 재환이 덕에 의도치 않게 부모님께 남자친구를 소개한 그 날 이후 재환이는 나보다도 우리 부모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가끔은 친딸인 나보다 재환이가 우리 부모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환아, 너 지금 안 바쁘면 잠깐 나올래? 어디 갈지 정하자.”
[지금 바로? 헐. 이따가 밴드 연습 가기 전에 한 시간 정도 시간 있어. 빨리 갈게!]
말 나온 김에 여행 장소도 정해버리지 뭐.
***
“해외는... 무리겠지?”
“재환아...”
“알았어 알았어. 나도 알지.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혹시나 해서.”
또 두 번씩 말하네, 김재환. 하여간 두 번씩 말하는 버릇 참 안 고쳐져. 요즘엔 나까지 따라서 두 번씩 말하게 된 것 같다니까? 해외여행이라... 나도 가고는 싶다만 대학생 주제에 해외여행을 갈 돈이랑 시간이 어딨어... 국내에서 그나마 해외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고민하다가 딱 한 곳이 떠올랐다. 비행기, 야자수, 그리고 탁 트인 해변...
“음... 제주도 갈까 우리? 해외는 못 가지만 국내선 타고 기분이라도 내자.”
“허얼... 제주도...? 나 비행기 한 번도 안 타봤는데... 제주도...”
“아... 제주도 별로야? 비행기까지 타는 건 너무 그런가?”
“무슨 소리야! 제주도 가자. 좋아. 완전 좋아. 진짜 최고야 최고!”
제주도에 가자는 말에 재환이가 양 엄지를 치켜들고 흔들어 보인다. 진짜 어디 울창한 대나무 숲에 들어가서 외치고 싶다니까. 내 남자친구가 이렇게나 귀엽다! 하고.
“제주도 재밌겠다. 우리 차도 렌트해서 가고 싶은 곳 다 둘러보고 오자. 나 사실 남자친구랑 한적한 겨울 바다 구경하는 로망 있다?”
“나랑 보면 되겠네, 겨울 바다. 밤바다 보면서 캔맥주 한 잔씩 하면 진짜 대박이겠다... 어떡해? 나 너무 기대돼 여주야.”
“나도. 좀 더 여유 있을 때 다녀올 걸 그랬다, 그치. 그래도 참 다행이야. 네 덕에 다시 제주도도 가보고.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나는 제주도 아예 처음이야. 너랑 여행 가는 것도 처음이고. 와 나 진심으로 감동받았어... 나 감동받았어 어떡해?”
제주도 여행 하나에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는 네 모습에 내가 다 감동받았다 야. 아무튼 여행지는 정해진 것 같네. 제주도로.
“뭘 또 감동까지 받고 그래. 그럼 다음 주 금요일부터 2박 3일 제주도 맞지? 확정이다!”
“오케오케~”
이왕 여행 가기로 한 거 마음 편하게 다녀오자.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도 다 날려버리고, 정말 마음 편하게.
+ 스물다섯의 여주는 모르는 재환이를
스물셋의 여주는 알고 있다...?
그동안 여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