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 이젠 익숙한 일이지만.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딘가에 걸쳐 서 있다는 것만을 느낄 수 있는 정도. 천천히 발을 내딛는다. 들리는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누군가 또 있다는 이야기리라. 고개를 들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선명히 느껴지는건, 누군가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 하나. 아, 너구나. 직감적으로 호준은 알았다. 피하지 않았다. 이대로 서 있으면 될 것이었다. "호준아." 네가 내 앞에 멈춰서 숨을 고르며 내 이름을 불러주면, 한 발을 내딛어 네 앞에 더 가까이 가. 너는 나를 품에 꽉 안았다가 놓아줘. "진효상, 왜 이제 와." "나도 몰라." "바보." "응. 근데 너도 바보야." 너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어. 아마도 넌, 예전처럼 다정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테지. "호준아," "왜." "나 보고 싶었지." "많이." "난 아니었는데." "나쁜놈." "왜, 다시 보게 될 줄 알았으니까 그랬던 건데." "말이나 못하면.." "장난이고, 보고싶어 죽는 줄 알았어." 피식 웃음이 나더라. 있지, 효상아. 나도 보고싶어 죽는 줄 알았어. 네가 없는 시간은 끔찍하게도 어두웠고 차가웠으니까. 이제는 내 앞에 네가 있어도 볼 수 없지만, 어쨌든 앞으로는, 차갑지만은 않을 것 같아. 미래를 볼 수 있었어. 내가 원한다면 지금의 몇백년, 몇천년, 맘만 먹으면 수십만년 뒤라도.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고, 그 미래 속을 걸어다녔어. 사실, 원했던 일은 절대로 아니었어. 미래가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괴물, 미친놈 취급하고 미워하는 눈들이 참 많았으니까. 그래서 말하지 않았고,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니 조심하라는 그 말 한마디도 해 주지 못했어. 어차피 말해줬대도 믿지 않았을 사람들이지. 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떠나갈 때는 죄책감이 들더라, 그것도 엄청 많이.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그들이 자초한 결과라며 나 혼자 위로하고 그랬지. 매번 그런 식이었어. 그리고 어느 봄날의 밤, 폐허가 된 유원지에서 너를 만났어. 네가 있는 현재에서는 이 곳이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유원지라고 했지만, 내가 서있는 미래에서는 이 곳은 그냥 폐허가 되어 방치된 유원지였어. "그러니까, 니 말은," "응." "여기가 몇 년쯤 뒤에는 망한다는 거네?" "응, 근데 너무 극단적이지 않냐?" "왜, 그게 그거지." "그런가? 아무튼 언젠가는." "그렇구나. 아, 뭔가 아쉽다." "뭐가?" "그렇지 않아? 여기 오는 사람도 되게 많고 그 사람들에겐 나름 추억도 있을텐데, 몇년 뒤에는 아무것도 남는게 없을 거 아냐." "음..그렇긴 하네." 넌 아쉽다는 눈빛으로 그 곳의 모습을 눈에 담았지. 그러고는 다시 내게 눈길을 돌렸어. "근데, 넌 미래에 있는 거잖아. 근데 날 어떻게 보고 있는거야? 너한테는 과거잖아. " "아니지, 내가 여기가 미래인걸 아니까 결국에는 니가 현재고 내가 미래인거니까." "그런가? 근데 이게 되는건가." "그러게, 나도 처음 겪은 일인데." "그나저나 너무 늦었다, 너는 계속 여기 있어야 돼?" "아마도 그럴걸? 괜찮아, 난." "나 있잖아, 내일 이때쯤에 너 보러 다시 올 건데. 그러면 너 그때도 있을거야?" "그러게..있을 수 있으려나." "가야되면 가도 돼." "아냐, 안 가도 돼. 기다릴게." 난,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약속을 덜컥 해 버렸어. 다행히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우린 그 곳에서 만날 수 있었어. 매일같이 넌 내게 와서 내 눈을 보며 웃어주었고, 변함없이 내 손을 잡고, 나를 안아주었어. 그렇게 몇일이고 몇달이고 너와 나는 밤새도록 함께 있었지. 그리고 그 해 크리스마스, 아마 그 때 쯤이었을 거야. 우리가 헤어지고, 내가 '미래를 본다'는 정말 맘에 안드는 그 꼬리표를 잃어버린 때가. 그 날도, 어김없이 난 폐허가 된 유원지에, 넌 사람 많은 유원지에 서 있었어. 매일 그랬지만, 장소는 같지만 시간은 달랐지. 그런데 그 날 따라 이상하더라. 내가 볼 수 없는 게 보였어. 사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너의 미래라고 해도 나한테는 과거였는데, 왜 그게 보였던 걸까? 아무튼, 내가 봤던 건 큰 자동차 한 대 였어. 네 쪽으로 오고 있더라고. 피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저 안된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무작정 네가 있던 자리에 섰어. 그때 너는 내가 왜 그랬나 몰랐을 거야. 사실은 그게 당연한 거지. 아무튼, 그 순간에, 자동차가 날 치고 멈춰 서더라고. 뼈가 부러지거나 하진 않았어. 그래서 크게 문제는 없겠구나, 했는데 갑자기 앞이 깜깜하더라. 그 때 까지는 몰랐어. 그냥 네가 있던 곳이랑 내가 있는 곳이 떨어지면서 잠깐 그런가보다 했지. 근데 아니더라고, 몇일 지나고 나서야 완전히 알 수가 있었어. 우리는, 내가 차에 치이는 그 순간 떨어졌고, 난 더 이상 미래를 볼 수 없었어. 그리고 이렇게 됐지. 이제는 앞도 못 볼 거라고 하더라. 처음에는, 그게 되게 무서웠었어. 이제 너도 없고, 날 도와줄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냥 미래로 팅겨져 나와서는 나 혼자 동떨어져 있는 거였지. 꼭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이런 기분일까 싶고. 몇 날 몇일을 나 혼자서 그냥 멍하게 있었어. 무섭기도 했고, 너도 되게 보고싶고, 외롭고. 아주 잠깐 괜한 짓을 했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어. 그런데 억울하지는 않았어. 처음이면서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대신해서 내가 다쳐주었고 그게 너라는 걸 생각해 보니 마냥 억울하지만은 않던 거 있지. 그런데 미래가 현재와 같은 시간이 될 때 까지는 난 계속 이 시간대에만 살고 있어야 된다고 그랬어.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네가 사는 시간이랑 내가 사는 시간이 맞아야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2018년 네 생일에 있으면 나도 2018년 네 생일에 있어야 된다고. 그래서 난 그 시간에서 몇 년을 살아야 됐어.그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에 익숙해지려고 내 나름대로 많이 노력했지. 그러다 보니 혼자서도 여기저기 다니고 예전과 똑같지는 않아도 많이 힘들지는 않아졌어. 근데 갑자기, 처음에 너랑 만났던 곳에 가 보고 싶더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게 살다 보니까 그 곳이 얼마나 변했는지도 궁금하고. 그래서 그 쪽으로 갔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야. 사람들 이야기소리도, 발걸음 소리도, 그리고 네 목소리나 발소리도.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구나. 하고 생각이 드는데, 진짜 기분이 묘한 거 있지.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널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슬프더라. 신기하기도 했어,다른 시간 안에서 마주친 적 없이 나란히 서 있다가 어느순간 알게 되고, 또 갑자기 헤어지고,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수가 있다는게.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시 만났다는게. 나는 말없이 바닥에 쪼그려 앉았어. 그냥 나뭇가지에 바람 스치는 소리, 그런것만 들리고 인기척은 없어서 그 느낌이 좋으면서도 뭔가 쓸쓸하고 음산하고 그러더라. 옆에 누구도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그 '누구'가 한번도 머릿속에서 지워본 적 없던 너라서였을까. 되게 오랜만에, 입 밖으로 네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봤어. 만약 네가 이 근처에 있다면, 혹시라도 들릴까 해서. "진효상," "효상아," "진효사앙..." 물론 네 대답은, 들려올 리 없었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괜히 뭔가 모르게 비참해지는 느낌이라 자리에서 일어났어. 계단이던가 난간이던가, 아무튼 그쪽으로 갔는데, 바람이 되게 시원했어. 왜였을까, 널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 것은. 여전히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밝음도, 어두움도 뭐가 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그냥 어딘가에 걸쳐 서 있다는 걸 발 끝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야. 한 발을 내딛어. 한발 더. 그렇게 가만히 걷고 있는데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야. 내 발소리 말고, 하나 더. 고개를 들어. 보이지는 않지만 누가 날 향해 뛰어오고 있어. 너일까? 정말 너일까? 아니, 이건 분명히 너야. 맞아, 너야. 이건 네 발소리야. 분명해. 그럼 난 가만히 여기 서 있으면 되는거야. 네가 달려와서 날 꼭 안아줄 거거든. "호준아." 내 생각이 맞았어, 너야. 분명히 너야. 한 발을 내딛어 네 앞으로 갔어. 너는 말없이 나를 꼭 안아줘. 내 온 몸이 너로 인해 으스러질 듯, 그렇게 꼭 안아줘. "진효상, 왜 이제 와." 괜히 투정부리고, 네가 날 놓아줄때 한걸음 물러서. 그리고 네 대답. "나도 몰라." 몰라도 돼, 모르는게 당연한 거고 알아도 어쩔 수 없는 거였어. 다른 시간 속에서 나란히 걷고있던 우리가 같은 시간을 걷기까지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거니까. "바보." "응. 근데 너도 바보야." 괜히 내던진 말, 당연하다는듯 돌아오는 네 대답. 익숙하지만 낯설어. 이젠 늘 이렇게,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이야기 하고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지만, 네 모습은 더 이상 볼 수가 없다는 것도 새삼스레 슬퍼져. 그래도 좋아, 이제는 내 옆에 네가 있고, 내게는 그 원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보고 가게 될 시간들도 없어. 그냥 너만 있어줘. 지금이 아니라 나중을 봤고, 이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그 대가로 받는게 너라면 아무래도 좋아. 몇번을 더 망가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