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깍 째깍,
12시를 향해가는 초침소리가 적막한 방안을 메운다.
"믿는 도끼 발등찍히고선, 또 내발을 아작을 내놨네. 내놨어"
여느때처럼 하릴없이 움직이는 시계초침만 멀거니 바라보다가
내 옆에 마땅히 있었어야 할 따스한 온기가 비어있는 자리에 풀썩 앉는다.
끼익-
낡은 현관문이 바닥을 긁어 내는 잡음과 함께 잰 발걸음으로 방 문앞에서 기웃되는 인영이 있다.
일단은 모른척 해주자 싶어,
몸을 뒤틀어 획 이불을 턱까지 올려 눕고는 눈을 살포시 감고 있으려니
종종 걸음이 눈치를 보며 문턱을 한 발 내딛는 것이 보였다.
아니, 안봐도 비디오다.
"...자?"
"..."
삐뚤어진 내 입에서 나올리 없는 대답을 그는 의례상 묻고 있다.
그도 물론 대답을 바란건 아니다.
"..자나보네 히힛"
저 중얼거리는 버릇, 저거 좀 고쳐놔야지.
애가 어디 싸돌아 다니는게 온 동네 사발팔방 티가 난다 티가나.
"그래도 미안하니까...뽀뽀"
그러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내 볼에 촉 소리를 내고선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 덩치 산만한 망나니, 이재환
항상 나한테서 풍기는 샴푸향이 좋다며 절대 향수만은 사주지 않았던 너에게,
오늘도 낯선 여자의 향이 아주 폴폴 나는구나.
어디 재워졌다가 온거니?
"헤헤 어디보자.
눈에 인상쓰고 자는거 보니까 나 기다렸다가 성질나서 잔게 분명하네!
귀엽기는"
착각도 병이라고.
너 그 귀여운 맛에 내가 데리고 살긴 한다만.....
넌 진짜 병적인게 좀 있어.
아주 큰 고질병.
"귀여우면 재깍재깍 집에 들어오시던지요"
나직이 뱉어내는 음성에 재빨리 몸을 뒤로 물린 이재환.
어찌나 티가 나시는지. 의태어라도 넣어줘야 겠다. 흠칫- 이라고.
"아...안잤어?
늦었는데 왜...안자고 있었어?"
"돌아오지 않는 내 도끼를 기다리다 그만 발등이 찍혀서 말야."
"응? 왠 도끼? 나무패러 가?
날도 추운데 집에 있지!"
저 되도 않는 개그에 어이가 없어 바람빠진 소리로 피식 웃으려니
저건 또 자기가 웃긴줄 알고 뿌듯해 한다. 저 의기양양함은 대체 어디서 나온거냐.
"누구야"
"응..?"
"불어"
"아니...그게 니가 생각하는거랑 그게 많이 달라...
그러니까 그건 절대 아니라니까?"
"그냥 솔직히 말해. 나 화 안낼게 재환아"
"진짜..?"
"응. 진짜"
머뭇머뭇거리면서 덩치만큼 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내 연기가 썩 잘먹히는지 다시 조곤조곤 입을 벌린다.
"아니....갑자기 없던 회식이 잡혔는데 차비서가 자꾸 날 먹이잖아.....
나 술 약한거 알지? 1병만 마셔도 팩 쓰러지는거!
그래서 자꾸 눈이 감겨서 나 가겠다구- 가겠다구 하니까, 그럼 조금만 쉬다가자구-
자기가 편한데를 알고 있으니까 1시간만 자구 가라는거야~
몸도 약한 내가 뭐 어쩔수 있겠어? 그냥 아주 잠깐만 눈 붙히다가 올려구 그랬징...
진짜루...."
"그래서, 했어?"
"아...아니 그게... 내가 그럴려고 한게 아니라,
차비서가 자꾸 나를 막 만지잖아...
아니 무슨 여자가 그렇게 힘이 쎄대? "
"아하. 그러셨어요?
그럼 나가세요."
" 자기야.."
"열차는 내가 예매해놨어.
지옥행 급행열차. 나가."
쾅. 덩치 산만한 이재환을 거의 끌어내다 시피 밀어 내고 문을 닫았다.
저 고질병. 이젠 나도 두손두발 다들었다.
아니, 무슨 남자가 저렇게 치맛바람에 숭늉풀어 먹듯이 잘 넘어가??? 참.나
"자기야...잘못했어.
차비서가 가자고 했을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아 아니, 내가 더 힘이 쎘어야 했는데..
진짜 진짜 미안하니까 나 여기 손들고 서있을께 응?
나 좀 봐줘, 응? 자기야"
내가 한두번 속아넘어가나. 저 이중인격에 내가 속아넘어갈거 같아?
"응? 자기야. 잘못했어. 나 지금 밖에서 이렇게 막 팔들고 있다?"
그러던지 말던지. 내 알바 아니지.
그리고선 몇분 되지 않아, 문밖에서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야야... 나 너무 열심히 들고 있었나바... 팔이 너무 아프다 자기. 호~해죠. 응?"
강아지처럼 눈을 말똥말똥거리면서 문앞을 기웃거리고 있을 이재환의 모습이 그려지자,
폭포수처럼 솟아오르던 화도 조금씩 수그러드는 것도 같다.
그래. 한번찍힌 발등 두번이라고 못찍히겠나..
아. 이재환 진짜 약았어..
"팔내려."
내말에 종종걸음으로 헤실 웃으며 방으로 들어온 이재환은 덥썩 내 어깨를 잡더니
꽉 안고서는 하는말이
" 자기, 나한테 질투한거지? 그치!"
저 귀여운 인종이 뭘 생각하는 지는 뻔히 알고 있다.
하지만,
매몰차게 그를 내치는 건 왠지 마음이 석연찮다.
그는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더니,
이내 곧 이재환의 적나라한 시선이 내 가슴께에 머무른다.
"아, 예뻐죽겠다. 히힛. 내가 상줘야겠네?"
나는 이다지도 모성본능이 강한 사람이었나.
재환이의 손이 닿아오는 가슴께가 녹진녹진해진다.
"아프면 말해. 근데 하지말라고 하면 안돼
그래도 나 할거니까. 알겠지 자기야?"
저 고집불통. 그래 니맘대로 해라.
후크를 한손으로 쉽사리 풀어헤치는 손길에 나도모르게 그의 팔을 부여잡는다.
따스한 손길이 지분지분 눌러오는데 씨익 웃는 이재환의 개구진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목덜미에 쪽쪽 하고 소리내어 뽀뽀를 하곤,
잔소리 하느라 피곤했을 내 입술을 위로하듯 톡톡 건드린다.
"이왕 질투할거면 몸으로 해줘, 응?"
이 얄미운 이재환.
너 때문에 내 수명이 닳는다 닳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