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가요 (Feat. 조현아)
보통의 연애 w. 샐리비 |
감긴 눈을 괴롭힐 정도로 강렬한 햇빛에 백현이 조심스럽게 두 눈을 떴다. 어제 박찬열이 권해주는 잔을 먹다가 일정량을 오버한 것 같았는데. 밀려오는 숙취감에 백현이 잠시 눈가를 찌푸리며 자신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댔다. 아, 진짜 죽을 맛이다.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백현이 그대로 누군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경수야”
자신과는 조금 떨어진 벽에 기대어 두 눈을 감고 있는 경수였다. 정갈한 머리카락은 전 처럼 반짝였고, 꽉 다문 입술은 여전히 빨갛다. 도경수는 늘 예쁘다. 나는 그런 도경수가 정말 좋았다. 내 첫사랑. 누군가를 이렇게나 좋아할 수 있구나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알려준 너. 그래서 자꾸 눈길이 가는 너. 새근새근 잠이 든 너의 모습을 이렇게 오랫동안 보는게 얼마만이던가. 한참을 경수를 바라보던 백현이 조심스럽게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는 조금 추워보이는 경수의 어깨 쪽에 덮어준다. 추위도 잘 타던 녀석이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왔는지. “후, 모르겠다.” 나는 너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나는 너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별 직전의 너는, 그리고 이별 후의 너는. 나는 그런 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애가 보통 다 그렇던가. 여전히 알 수 없는 연애. 보통의 연애가 다 이럴까. 보통의 연애 下
첫 눈에 반했다. 너를 처음 본 건 고등학교 입학식이였다. 사실 너는 기억도 못할 그런 나만의 기억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 처럼 너는 내 시야에서 가장 빛이 났던 사람이였다. 정갈한 검은색 머리와 동글동글한 작은 얼굴과 예쁘기만 하던 빨간 입술이 조금씩 움직일 때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뒤흔들렸다. ‘예쁘다.’ 나의 열 여덟 속에 너는 미친듯이 아름다웠고, 예뻤다. 무심한듯 시크하게 있던 네가 친한 친구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을 때. 입술이 하트 모양으로 변하던 그 예쁜 모습에 나는 첫 눈에 반했다. 입학식 내내 나의 눈은 계속해서 너를 뒤쫓았고, 네가 나와 다른 층에 있는 1학년 5반이라는 정보만 겨우 알 수 있었다. ‘나도 어쩌면’ ‘...’ ‘네가 좋은지도 모르겠어.’ 무척이나 뜬금 없었던 나의 마음을 처음으로 표했던 그 날. 빠르게 도경수에게서 도망쳐 나왔던 그 날. 경솔했던 나 자신을 자책했던 그 날. 보충이 끝나고 짐을 싸던 나를 향해 왔던 네가 내게 내뱉었던 그 말. 우리의 연애의 첫 시작.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던 그 날. 아직도 이렇게 생생하게 생각나는 그 날이 였다. 세상을 다 가진듯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던 그 날. 처음 만났던 그 날도, 처음 너에게 고백했던 날도, 네가 내게 고백했던 그날도. 그리고 내가 이별을 고한 날도 이렇게나 생생하기만 하다. “오빠?” 정신을 차리자 그제야 경아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냐는 뾰루퉁한 경아의 표정에 백현이 살짝 웃어보이며 빨대를 꽂았다. 여름이 정말 가고 있는 건지 슬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날씨와 다르게 경아는 오늘도 짧은 미니스커트에 애나멜 구두를 신고는 백현의 옆에 나란히 섰다. 경아와는 세 달을 만났다. 내가 좋다며 찾아온 경아를 매섭게 내치기도 한 달. 끝없이 찾아오던 그녀를 내치지 못하고 받아 준 그 날은. 도경수가 첫 휴가를 나오던 그 날이었다. 경수와 함께 였던 캠퍼스 안의 벤치에 앉았었다. 벤치 한 켠에 적어놓은 삐뚤삐뚤한 도경수의 글씨에 이유 없이 눈물이 핑 돌던 그 날. 친구들과 함께 아무렇지 않게 웃어보이던 녀석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면서 느꼈다. 경수는 나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요즘 이상해. 자꾸 딴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니 생각은 안하니깐 걱정마, 임마.” “응? 섭섭하네. 막연한 사이가 되도 그렇지. 아, 오빠 그러지 말고 나랑 다시 만나보자니깐?” “너는 내가 왜 좋냐. 자존심도 없이 왜 자꾸 따라다녀.” “좋아하는데 자존심이 대수인가, 뭐. 좋으니깐 좋은거지. 이유는 또 어딨어요.” 그렇다. 자존심이 뭐 대수던가. 연애에서 가장 불필요 요소는 바로 '자존심'이다. 내가 헤어지자는 그 말에. 경수는 나를 잡지 않았다. 대체 왜. 이유라도 묻지 않고 왜 나를 그냥 보내버린걸까.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였을까. 모든게 의문투성이였지만, 나는 찾아가지도 묻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여태껏 경수를 찾아간 것은 나였으니깐. 녀석도 이런 게 익숙해졌을 테니깐. 끝내 도경수는 내게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 4년 연애의 종지부를 찍을 때도. 나보다는 자신을 위하던 도경수. “어? 경수선배다.” 나와 경아를 번갈아 보는 도경수의 시선이 꽤나 곱지는 않다. 저렇게 자존심을 세우는 녀석을 보며 백현은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좋을까, 경수야. 나는 여전히 네가 신경이 쓰인다. 미친듯이 쿵쾅대는 이 마음도. * * * * *
전에 백현과 경수는 했던 약속이 있었다. 매 년 기념일때 마다, 고등학교 앞의 단풍나무 밑에서 보자고.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되었던 그 날 서로 나란히 앉았던 그 벤치에서 함께 손 잡고 있자며. 그렇게 어린 약속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어린 약속은 매 년 실행되었다. 학교를 다닐 때에는 자주 왔었고, 헤어지기 전 인 스무살에도 둘이 손을 잡고 이 벤치에 왔었다. 군 복무를 할 때도. 일부러 시간을 맞춰서 왔던 적도 있는 경수였다.
그리고 올해도.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 경수의 발 걸음이 멈추었다.
“..안녕”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경수가 혼자 인사를 건넸다.
어쩌면 이렇게 오는 것도 마지막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백현을 향했던 간절한 경수의 사랑을 이제는 보내줘도 된다고 경수는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경수는 단풍나무 아래에 섰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두 발자국 걸어나간 후,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주변에 큰 돌을 집어 들어서는 어제 가을비에 축축하게 젖은 땅에 내리 꽂았다. 조심스럽게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한 번, 두번, 몇 번의 돌의 움직임 속에 무언가가 걸리는 듯한 느낌에 경수가 하던 일을 그대로 멈추었다.
‘10년 후에 여기서 같이 보는거야.’ ‘와, 변백현 무슨 기지배냐.’ ‘이런게 나중에 다 추억이 된다고. 이 멍청한 도경수야.’ ‘나중에 오글거린다고 후회나 하지 마라.’
말은 거칠게 내뱉으면서도 백현이 땅을 파자 마자 자신의 편지와 백현의 편지와 함께 며칠 전에 둘이 산 반지 한 쌍이 담긴 작은 상자를 땅 속으로 쏘옥 집어넣은 경수였다. 그런 경수의 행동에 귀엽다는 듯 웃어보였다. 한참이나 앳되어 보이는 경수와 백현이 두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야 근데 우리가 나중에 마음이 변해버리면 어떡해?’ ‘아오, 도경수 진짜. 초치는 말만 해요, 아주.’ ‘아니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니깐.’ ‘경수야’ ‘응?’ ‘서로 마음이 변해도. 추억은 변하지 않을테니깐.’ ‘...’ ‘미래에 우리 둘이 없어도 그 때는 기분 좋게 와서 지금을 떠올리자.’
꽤나 진지한 백현의 모습에 경수가 백현의 등짝을 살짝 쳐냈다. 야, 너 나중에 오글거린다고 욕이나 하지 마라. 라며 경수가 퍼냈던 흙 한 줌을 그 상자 위로 뿌렸다. 그러자 자신이 쓴 검은색 뿔테 안경을 살짝 올린 백현도 흙 한 줌을 뿌렸다. 기약 없는 미래에도 우리가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추억이 어디로 도망 가지 못하게 흙으로 가둬놓듯이.
“..찾았다.”
열 여덟의 어린 소년들의 맹세는 부질 없이 깨져버렸다. 그리고 그 중 한 소년이 4년이나 남았던 그 타임캡슐을 꺼내 들었다. 아직은 그 추억이 유리 조각 처럼 마음에 와서 찔러대 아픔을 호소하고 있는 한 소년이. 조심스럽게 그 상자의 문을 열었다. 당시 학교 앞에서 팔던 싸구려 은반지가 녹이 슬어 있었다. 시간의 증거였다. 그런 반지 한 쌍을 경수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바닥 위로 올렸다. 그리고는 놓치기 싫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늘 툴툴대기에 바빴던 나와 그런 나를 늘 옆에서 받아주었던 네가. 변하지 말자며 맹세했던 너와 내가. 커플 사진 찍자며 졸라대던 너와 사진은 절대로 찍기 싫다며 정색하던 내가. 그 때만해도 모든게 영원하고,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많이 좋아했어”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자꾸 연연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네가 잘 사는 것 처럼 나도 이제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수가 꽉 쥐었던 자신의 손을 폈다. 그리고는 다시 그 타임캡슐 상자 안에 조심스럽게 집어 넣었다. 잘가, 백현아. 잘가, 어린날의 경수야. 작게 목소리를 낸 경수가 타임캡슐의 상자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 상자를 집어 넣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그 상자를 부르는 경수의 어깨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경수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경수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검은색 슬랙스에 하얀 셔츠를 함께 입은 변백현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찼다. 6년 전의 그 때처럼 나를 다정하게 부르던 변백현의 목소리에 경수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왜 너 혼자만 와서 이러고 있냐.” “...” “그리고 아직 4년 남았는데.”
허공에서 경수와 백현의 두 시선이 맞닿았다. 이유 없이 따뜻해지는 그 시선들.
“...” “경수야,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 “그 때. 왜 나 안 붙잡았어?”
2년 반이나 된 지금에야 처음으로 묻는 말.
가만히 백현은 경수를 바라보았다. 곧게 뻗은 어깨선 밑으로 경수의 주먹이 꽈악 쥐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떨고 있는 듯한 경수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대체 왜 그러고 있는 거야, 경수야.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경수를 향해서 백현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경수가 내려놓은 타임캡슐을 다시 꺼내들었다.
“좀 비싸더라도 녹슬지 않는걸로 준비할껄 그랬나봐.” “...” “이거 한 번 껴볼래?”
여전히 자신의 질문에 대답이 없는 경수를 향해 백현이 반지 하나를 경수에게 보였다.
“대답 안할꺼야? 도경수?” “백현아.” “응. 경수야.” “...미안해.”
정말 내가 미안해. 나는 너를 붙잡을 용기가 없었어. 늘 내게 져주기만 한 너라서. 그런 네가 내게 처음으로 등을 돌렸던 그 날이 내게 너무나 큰 상처라서. 내가 붙잡아도 너는 나를 향한 마음이 차갑게 식은 것 같아서. 붙잡을 수가 없었어. 그렇게 네가 떠나고 나니깐 정말 아무것도 못하겠더라. 용기 없는 내가 무척이나 싫었고, 너를 찾아가면 나를 귀찮아할 것 같은 네가 무서웠어. ...백현아. 그러니깐, 나는.
“좋아해. 백현아.”
아직도 너를 많이 좋아해. 하루도 너를 잊어 본 적이 없었어. 혹시나 너와 마주칠까 서성거리던 그 거리도. 너와 함께 였던 장소들에 가서 한참이나 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일도 수 백번씩. 나는 그렇게 너를 생각했는데. 나는 용기가 없었어. 백현아.
“다시 시작하자는..말은 아니야.” “...” “그러니깐. 나는.” “...” “이제 다 잊으려고. 마지막. 그래, 마지막으로..” “고마워, 경수야.”
백현의 말에 경수가 조심스럽게 백현을 올려다 보았다. 웃고 있는 백현의 미소가 따뜻했다. 아, 나는 이 미소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는데.
“이제 그럴 필요 없어.” “무슨 말이야?” “나는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어.” “...” “헤어지자는 말에도 뒤도 안 돌고 가는 너를 보면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 “너는 몰라. 나를 잊은듯한 네 모습을 보면서 홧김에 다른 사람 만난 일도 후회했는지, 너는 몰라.”
백현이 경수의 손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는 왼쪽 손의 네번째 손가락에 녹슨 반지를 끼워넣었다.
“..우리 다시 시작할래?”
경수와 백현의 주변에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경수의 머리 위로 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경수가 백현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는 말 없이 백현을 바라보았다. 백현아. 라고 하는 경수의 말에 백현이 웃어보였다.
연애는 타이밍이라고 했다. 그 알 수 없는 타이밍에서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사랑이 존재했다. 이 세요소가 합쳐지는 그 순간 연애는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가지 요소가 다는 아니였다. 연애를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내뻗는 자존심은, 쓸데 없는 것이리라. 사랑을 하기 위한 연애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존심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 그게 사랑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모두들 어렵다고 하는 보통의 연애는 이렇게나 간단한 일인데, 대체 뭐가 잘못되어 잘못된 연애를 품에 안고 있었을까.
|
더보기 |
보통의 연애 단편 完.
그냥 평범한 연애관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끝이 뭔가 허무맹랑하지만, 연애도 이런게 아닐까요. 어렵다고 느끼면서도 허탈하게 쉬운 것들만 가지고 있다면 쉬운 것이 연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요즈음 이에요.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요. 다들 뜨거운 사랑하세요. 행쇼.행쇼!!!!!!!!!!저랑 행쇼!!!!!!!!!!!!!!ㅋ..
고백으로 6월말에 뵙도록 해요!!! 모두들 사랑해여..S2..
♥ 암호닉 또치 / 하늘 / 상츄
흐귱...늘 고맙고 애정해요 아시죠..?ㅠ_________ㅠ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워아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