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warf
물통 속 번져가는 물감처럼
아주 서서히 아주 우아하게
넌 나의 마음을 너의 색으로 바꿔 버렸다
너의 색으로 변해버린 나는
다시는 무채색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넌 그렇게 나의 마음을 너의 색으로 바꿔 버렸다.
- 물감 / 김정수
있잖아, 엄마.
…….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내 모습을 보고 뭐라고 했을까?
글쎄다. 나는 잘 모르겠는걸.
엄마는 분명 그랬을테지. 자꾸 상황에 휩쓸리지 말고, 내 마음을 올곧게 직시하라고.
그래. 그럼 너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엄마, 엄마. 사실 난 잘 모르겠어.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지도 모르겠고, 지금 내가 이걸 해도 되는 지도 모르겠어.
그럴 땐 엄마가 어떻게 하라고 했지?
…네 마음이 따르는 대로, 현실에 겁이 나더라도 일단 무작정 부딪히라고.
세상이 늘 나긋나긋할 수는 없어. 세상은 물이 아니라, 아주 딱딱한 금속과도 같아서, 날카롭게 갈려 너를 찌를 수도, 너를 크게 내리칠 수도 있어.
그런 세상에 나를 왜 낳았어. 응? 이렇게 무서운 세상에 어떻게 나 하나만 내버려두고 떠날 수가 있어, 엄마.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지. 행복할 것이라고도 믿었어.
그럼 나는 엄마한테 상처가 되는 거겠네. 엄마가 부딪힌 세상이 남겨준 거니까.
아니, 너를 낳은 것은 내가 살면서 제일 잘 한 일이야.
엄마. 보고싶어요.
나도 보고싶다. 내 딸. 잘 크고 있지? 피아노는 열심히 치고 있고? 멋진 남자친구는?
응. 아직 멋진 남자친구는 없어요.
네 마음 속에 그 사람이 남자친구가 아니면 누구야, 그럼?
화들짝.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엄마…. 엄마는 분명 웃는 목소리로 내게 그랬다. '네 마음 속에', '그 사람', '남자친구'. 엄마는 내 마음 속을 아주 훤하게 꿰뚫고 계시는 분이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나는 악몽이라도 꾼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를 만나는 건 행복한 일이었지만 너무 슬프고 힘들었다. 사실 나는 엄마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그 분은 나를 낳기 위해 끔찍한 난산에 시달리시고, 결국 나를 낳은 뒤 돌아가셨다. 이조차 남들이 수군대는 것을 들어 알게된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항상 내 옆에 있었고, 가끔 내가 혼란스러울 때면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을 거셨다. 딸, 잘 지내고 있니? 예쁘구나. 나는 기억에도 없는 엄마에게 솔직하게 내 마음을 모두 보여드렸다. 꿈 속에서만큼은.
전화가 왔다. 나는 스탠드를 키고 테이블 위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어 액정을 슥 밀었다. 전화가 연결되었는데도 상대편에서는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 …누나.
"세훈이야?"
- 응. 내가 혹시 깨운 거야?
"아니. 일어나 있었어."
- 아직 안 잤어? 새벽 다섯 신데?
"자다 일어났어."
- 그렇구나.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꼭 누가 먼저 말하면 지는 것처럼 서로 입을 꾹 다물고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세훈이는 어떤 생각일 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무슨 말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 누나. 나 오늘 너무 힘들었어.
"왜?"
- S 그룹 창단 50주년 파티가 있었거든.
"……."
- …후계자라는 단어만 들어도 구역질이 치밀어.
"……."
- 어쩌겠어. 이렇게 태어난걸. 그치? 난 내가 싫어. 이렇게 태어난 게 싫어.
"세훈아."
- 누나는 부모님이 밉지 않아? 아버지는 매일 누나한테만… 가끔씩은 내가 다 미안해.
"난 괜찮아. 나는 이해할 수 있어."
- 누나는 너무 착해.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괜찮아. 나는. 누나 걱정하지 마."
- 누나한테 너무 미안해, 정말로. 그냥 집에 들어와서 살면 안 돼? 굳이 그런 카페에서 일 안 해도….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괜찮으니까, 정말로."
- …누나는 가끔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어.
"너도 날 이해하게 될 거야."
- 누나도 많이 힘들겠지?
"……."
- 그래. 푹 쉬어. 다음에 또 연락할게.
나는 문득 가슴 한 쪽이 답답해졌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어두운 새벽의 찬 바람이 얼굴에 부대꼈다. 세훈이의 전화가 끊기고 나서도 나는 한참동안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세훈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세훈이는 늘 내게 어렸고, 여렸다. 내가 해 주지 못하는 공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주는 세훈이가 문득 새삼스레 걱정되었다. 아직 스물 한 살 밖에 안 되었는데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게 맞는 것인가.
주말 연속극 같은 인생의 주체가 되는 건 생각보다 지루했다. 나는 어머니가 어제 한가득 보내준 각종 영양제와 안마기, 그리고 정성껏 손으로 쓰신 편지와 화초 화분을 쳐다봤다. 나는 화초 화분을 창가에 놓으며 편지를 폈다. 사랑하는 내 딸에게, ……다음에 한 번 본가로 와라. 전에 먹고 싶다고 했던 등갈비찜 해 줄게. 늘 아름다운 모습 펼쳐주어 고맙다. 사랑한다. 나는 편지를 끝까지 읽고 원래 접혀있던 대로 접었다. 그리고는 침대 서랍에 들어있는 검은 새틴 상자에 그 편지를 넣었다. 피곤했다. 조금 있다가 학교를 가야 하니 다시 자기도 애매한 시각이었다. 나는 그냥 침대에 누워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썼다.
White Dwarf
W. 베브
어쨌든 지금, 나는 민석 오빠와 테이블에 앉아 아무 말 없이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둘 다 말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몇 분 전 민석 오빠는 ㅡ나로선 모델을 전혀 알 수 없는ㅡ 검은색 차를 끌고 정문 앞에 멈춰섰다. 내가 차를 알아보고 조수석 문을 열자 민석 오빠는 간단하게 안부를 물으며 내가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는 또 정적. 음식점에 도착해 가장 안쪽의 칸막이가 설치된 자리를 달라고 한 뒤, 육수가 담긴 냄비를 불 위에 올리고 옆에 야채와 고기더미를 내려놓고 간 웨이트리스가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입을 뗐다.
"…잘 지냈어요?"
"응."
"애들은 말 잘 듣고?"
"애들이 뭘 알겠어. 그냥 하라는 대로 하고, 시키는 대로 따르는 거지."
오빠는 나와 같이 피아노를 전공한, 내 고등학교 선배였다. 오빠와는 두 살 차이가 났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오빠는 3학년이었고, 당시 오빠는 무려 학생회장을 도맡고 있었다. 처음 듣기만 했을 땐 대체 예고에서 학생회장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곧 오빠의 직책은 나를 살리는 길이 되었다. 그리고 오빠는 지금 대학을 졸업한 뒤 입시생들 레슨을 받아가며 돈을 벌고 있었다. 피아노 레슨, 특히나 입시 대비용 레슨비는 상당한 액수였다. 정작 아이들이 뼈 빠지게 일해 레슨비 바치는 부모님들의 뜻을 알아주나? 그건 또 아니었다. 민석 오빠는 항상 그걸 못내 안쓰러워했다.
"맞다. 오빠, 그…"
"응?"
"고민이 있는데요."
"말해봐."
민석 오빠는 나를 실험대상처럼 관찰하듯 고개를 들고 내 눈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그것은 민석 오빠의 습관이었다. 남의 눈을 읽는 것. 나는 괜히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어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살그마니 내려놓았다. 곧바로 자기의 행동이 내게 부담을 주었단 걸 깨달은 민석 오빠는 표정을 유하게 풀었다.
"그… 별 거 아닌데."
"응. 천천히 말해."
"사람이… 좋아지는 게 있잖아요. 사람이 좋은 건 당연한 거고 여러 사람과 가까워 질 수도 있는 건데 저한텐 너무 어색해요."
"그 전까지 사람하고 가까이 지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따로 있는데요. 아무래도 그게 경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경험?"
"…그, 예전에 한 번 데여본 적이 있어서."
민석 오빠는 즉시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챈 것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자신감이 없어요. 매사에.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될 것 같고, 다시 상처받을 것 같고."
"너는 그렇게 생각해?"
"네. 사실 그렇잖아요, 내가 이렇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내가 남에게 사랑을 부어줄 수 있는 그릇이 맞는 건가."
"……."
"소설 같은 데를 보면, 주인공이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이 나오잖아요. 그런 걸 보면, 나도 사랑을 받으면 치유가 될까 싶기도 한데."
민석 오빠는 불을 줄이며 입매를 작게 움직였다.
"내가 널 7년을 봐 왔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너는 항상 어른인 척하는 애 같아."
"왜요?"
"되게 감성적이거든.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너의 입장을 빗대어서 생각해. 물론 너는 그게 아닌 척하지만."
나는 왠지 민망해져 민석 오빠의 컵에 물을 가득 따랐다. 오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빠는 항상 직설적이고 단순한 길을 찾아 내게 해답의 열쇠를 건네줬다. 오빠와 내가 만나서 하는 얘기는 보통 이런 종류의 것들이었다. 인생의 길, 그리고 관계의 굴레, 신뢰의 중요성. 오빠는 내 인생의 멘토였고 나는 민석 오빠의 말이 대체로 삶에서 편리하고 옳다는 걸 일찍 깨달았다. 오빠의 가치관은 대개 나의 그것과 맞아떨어졌다.
"너는 지금, 네가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줄 건가를 걱정하는 게 아니야."
"……."
"그 사람이 네게 상처가 될 지, 치료제가 될 지 생각하는 거지."
"……."
"나는 있잖아, 애초에 상대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아."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거든. 어떻게 되었든, 상대는 100%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없고, 나는 그 사람에게 실망하게 되겠지.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거란 기대를 아예 하지 않는 거야. 그 사람은 자유롭고, 나는 그 사람을 막을 권리가 없어. 그리고 나는 그 사람과 이미 일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크게 엮여 있고, 나는 그래도 그 애를 믿고 있어. 그게 서로에게 편하거든. 모든 관계는 그런 거야. 작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조금 더 부가적인 감정을 덧붙여 견고하고 커다랗게 만드는 거지.
"…오빠는 안 힘들어요, 그렇게 사람들한테 맞추는 게?"
"나는 사람들한테 맞추는 성격이 아니야. 그냥 그 사람을 인정할 뿐이지."
"무슨 뜻인지 한 번만 더 물어봐도 돼요?"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한테 맞춰서 변화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차이를 인정할 뿐이라는 거."
"그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가능해요?"
"일단 타고난 내 성격도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냥 마음을 비워봐. 혹시 의견이 안 맞고 다툼이 있으면, 네가 한 발 물러서고. 그 사람 입장에서도 한 번 쯤 생각해주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서 수긍의 의미를 전달했다. 민석 오빠는 항상 차분하고, 생각이 깊다. 더러운 연예계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어서 그런 걸까? 나는 유일하게 민석 오빠에게만 온전히 의지했다. 그러니까- 내 비밀을 오빠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빠도 내게 자신의 비밀을 알려준다. 예를 들자면- 오빠가 바라보는 세상, 그리고 오빠의 가치관, 그리고 다른 것들.
나는 이 쯤 되어서 이런 대화를 멈추기로 했다. 나는 괜히 화제를 돌리려 오빠를 재촉했다.
"…저는 배가 안 고파서, 안 먹을래요. 오빠 드세요."
"미리 말하지. 많이 시켰는데."
"제가 낼게요."
"뭐하러 그래, 나는 돈 벌잖아. 내가 낼게."
"…가끔씩 이렇게 많이 긁어야 어머니께서 좋아하세요."
"……."
오빠는 젓가락을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오빠 또한 내게 유일한 사람이다. 나와 내 가족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우리 부모님도, 내 이복동생도 모르는 나의 감정까지 낱낱이.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오빠는 아주 느리게 먹었다. 나는 오빠가 음식을 먹는 것을 한 시간 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인사를 하고, 빠져나왔다. 계산대 앞에서 지갑 가장 깊숙이에 숨겨진 카드를 꺼냈다. 어머니가 내게 쥐어주신, 한도를 알 수 없는 블랙카드. 나는 현금영수증을 받아든 뒤 음식점을 빠져나갔다.
빗방울이 마른 땅에 점을 찍었다. 얼굴과 팔 위에 두어 방울 씩 차가운 비가 떨어졌다. 나는 걸음을 옮기지 않고, 그 상태에서 계속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욕을 하며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뛰어가는 아저씨, 급하게 산 티가 역력한 3000원짜리 비닐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우비를 쓰고 폐휴지가 가득한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와 분홍 노랑의 화려한 우산을 쓰고 꺄르르 웃고 지나가는 여고생들.
그리고 나는…,
"여보세요?"
- 누나 어디예요, 지금?
"어… 여기 방배역."
- 우산은요?
"…있어."
- 거짓말 하지 말고.
"있어 정말. 걱정하지 마."
- 누나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요.
"비 안 맞으면 돼. 어디 피해 있거나 하다못해 우산은 사면 되잖…"
- 데리러 갈게요. 거기 아무 카페나 들어가 있어요.
"됐어, 귀찮게 왜 그러냐니까."
- 이미 엘리베이터 잡았으니까 좀만 기다려요. 뭐 마시고 있어요.
전화는 무심하게 툭 끊겼다. 이래저래 종인이와 대화를 하면 내가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었다. 다 나 좋으라고 하는 짓이지만 어지간히도 제멋대로였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아무 카페나 골라잡고 들어갔다.
*
종인이는 항상 내 뒤를 따라다녔다. 나는 그 애에게 왜 나를 쫓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 애도 내게 왜 나를 따라오는 지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애가 있는 듯 없는 듯 갈 길을 갔고, 종인이는 내가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되돌아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나는 뒤돌아서 그 애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애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종인이의 집은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가기가 애매한 곳이었다. 종인이가 사는 흑석동은 우리 집 근처의 서초역에서 출발하기에는 너무 복잡했다. 그럼에도 그 애는 귀찮은 내색 없이 항상 날 집까지 '모시듯' 데려다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 씻고 침대에 누워서는 내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어쨌든. 평소와 다른 하루 계획 탓에 본의 아니게 카페에 앉아 종인이를 두 번 왔다갔다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평소 귀찮음이 많은 종인이에게는 엄청난 에너지 소비라는 걸 알기에 나는 카페라떼와 샷 하나를 추가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카페라떼는 우선 내가 기다리는 동안 마실 거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종인이를 위한 것이었다. 천천히 우유거품을 빨대로 떴다. 구름 같이 부드럽고 달콤한 거품이 내 혀에 닿는 순간 녹아내렸다. 나는 빨대를 내려놓고 컵을 들어 입에 갖다댔다.
나는 딸려나온 냅킨으로 젖은 얼굴의 물방울을 톡톡 두드렸다. 비를 많이 맞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감기에 걸린 것처럼 머릿속이 맹해졌다. 카페인이 들어가서 그런건가. 나야 알 수 없었다. 집에 가면, 우선 가방을 내려놓고, 새 옷을 꺼낸 다음,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해야지. 그리고 뭘 할까, 그래. 공부도 좀 하다가 약을 먹고 자야지. 오늘 향초는 뭘 키고 잘까….
"누나."
"……."
종인이가 온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종인이는 약간 빗물이 튄 얼굴을 티셔츠 소매로 닦으며 테이블을 짚고 삐뚜름하게 서 있었다. 나는 찬찬히 손을 까닥여서 종인이보고 앞에 앉으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종인이는 순순히 내 앞에 앉아 내가 내미는 커피를 받았다.
"샷 넣었어요?"
"응. 한 번."
"시럽은요?"
"두 번 펌핑."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종인이는 커피를 마시지는 않고 그냥 컵을 꾹 쥐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휘핑크림을 빨대로 걷어내 입 안에 털어넣었다. 종인이와 처음 카페에 갔을 때, 그 애는 아메리카노에 샷을 한 번 추가하면서 시럽은 두 번이나 펌핑했다. 나는 카페라떼 위 휘핑크림에 뿌려진 시나몬 가루를 빨대로 훑다가, 그 모습을 보고 넌지시 물었었다.
"그런데 있잖아, 아메리카노 샷을 넣으면서 왜 시럽을 넣어?"
"음, 그냥 멋있잖아요. 아메리카노 샷 추가. 말도 길어지고."
해맑게 웃으며 하는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냥 푹 웃어버렸다. 종인이는 앞머리를 슥슥 빗어내리더니, 컵을 들고 일어났다. 누나, 가요. 나는 컵 뚜껑을 꾹 닫고 종인이 뒤를 따라갔다. 종인이는 아주 커다란 우산을 펼쳐들고 나를 제 옆에 꼭 붙였다. 굳이 우산을 기울이지 않아도 둘 다 비를 맞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크기의 우산이었다. 멋없는 검정 우산. 우산을 하나 사 줘야 하나, 저 무거운 거 하나 밖에 없는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꼭 감쌌다.
"누나."
"응?"
"영화 볼래요?"
"갑자기 웬 영화?"
"저기 영화관 보여서."
나는 나쁠 것도 없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종인이는 데이트 승낙을 받은 남자처럼 해맑게 웃으며 나를 좀 더 끌어당겼다. 나는 살살 종인이의 옆으로 끌려가며 핸드폰 홀드를 한 번 눌렀다. 여덟시 반. 나는 천천히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종인이가 망설임 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조용히 종인이의 뒤를 따랐다.
"…정말 이걸 보자고?"
"네. 이거 재밌대요."
"그래. 무슨 내용이래?"
"어… 그냥. 모르겠어요. 재밌대요."
나는 웃음을 꾹 참으며 영화표를 붙들고 간신히 종인이의 등 뒤에 숨어있었다. 누가 봐도 '저는 여자에 관해 완전히 쑥맥입니다!'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대체 반 년이 넘도록 짝사랑해서 그렇게 공들여 쫓아다닌 여자랑 첫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는데 액션 영화를 집어오는 게 뭘까 싶었다. 영화야 수정이나 한결이랑 자주 보러 왔지만, 보통 여자를 데리고 올 때는 로맨스 영화 같은 거 보지 않나?
나는 영화관에 들어가서 약간 뻣뻣하게 앉았다. 카라멜이 잔뜩 끼얹어진 팝콘 통과 콜라는 종인이의 차지였다. 나는 눈 앞에서 폭죽이 터지고 총성이 남발하며 온갖 피가 흘러내리는 장면을 잠시 쳐다보다 그냥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건 내가 볼 만한 영화는 확실히 아니었다. 옆을 슬쩍 돌아보니 종인이는 공중에 팝콘을 집은 손을 그대로 멈춘 채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 몰입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살짝 쳐다보다가, 입가에 묻은 팝콘 가루를 슥슥 털어주었다. 아무 생각없이 한 행동이었는데 종인이는 눈에 크게 보일 정도로 깜짝 놀라며 날 쳐다봤다. 방해한 건가? 나는 어쩐지 미안해져 슬쩍 웃었다. 종인이는 팝콘을 집지 않은 왼손을 들어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스크린에 집중했다. 나는 꽉 잡힌 손을 쳐다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에 빠졌다. 귀에서는 계속해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필 골라도 전쟁영화를.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종인이 손아귀 속에서 살짝 꼼질댔다.
'불편해요?'
금세 그걸 눈치채고 괜히 내가 불편할까 눈썹을 뉘며 물어오는 종인이를 보고, 나는 또 한 번 그냥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감정의 진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부터 불어온다. 너도, 나도.
*
"누나 재미없었죠."
"아니. 완전 재밌었어."
"주인공 이름이 뭔데요?"
"……."
"…미안해요."
"아냐. 됐어."
종인이는 아까 영화를 보고 나랑 손까지 잡았단 생각에 기뻤던 건지, 화장실에 간단 핑계로 누군가에게 전화통화를 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한참동안 왁왁 시끄럽게 누나랑 손을 잡았다며 말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나는 어쩐지 민폐를 끼치는 기분이었다. 종인이는 그 이후로도 계속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손까지 뽀득뽀득 씻고서 당당하게 내 손을 잡아챘다. 어느덧 비가 그친 날씨에 우산을 앞뒤로 힘차게 흔들며 버스정류장을 찾는 종인이를 보면 어쩐지 내가 그동안 이 애를 데리고 얼마나 쓸데없는 상상을 한 건지 괜히 실감이 났다. 그냥 좋은 건 좋은 거였다.
* * * *
1. 오타는 나중에 수정 일단 올리고 본다!
진짜 주간연재... 앞으로도 주말에 한 편 씩 올라올 것 같아요.
기다리기 힘드시다면 잠시 절 기억에서 잊으신 후 한 세 달 뒤에 찾으시는 것이... (눈물)
2. ? 막장소재. 엄마가 날 낳고 바로 돌아가심-> 동생이 있음-> ?
3. 진도는 빠르게 왜냐면 지루하니까! 급전개 죄송해요. 하지만 이미 종인은 반 년이나 짝사랑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종인이는 원래 저렇게 귀엽고 애기 같은 이미지에요. 멋있는 척 남자다운 척하고 가끔 정말 무섭기도 하지만 귀여운.
약간 카이와 종인이의 간극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듯 싶네용!
4. 암호닉은 5편에 받는 것으로...
5.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XD!
다음주에 (ㅎㅎ..) 봬요! 감사합니당 ㅎㅅ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