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국의 여름은 매우 뜨거웠다. 나는 매일매일을 몇 년 동안 못 봤던 친구들을 만났다. 그중 너는 없었다. 너의 소식은 궁금했지만, 알면 상처받을게 분명했기에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 친구들이 프라이빗 룸을 잡아 작게 파티를 열어줬다. 환영 파티였다. 이름만 파티지 그냥 모임 정도였다. 보고 싶었다며 나를 안는 친구들에게 고맙다며 웃어 보였다. - 친한 친구가 조용히 내게 와 물었다. 다 잊었느냐고. 이제 괜찮은 거냐고.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소식 알아?" 내 물음에 친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너 유학 가고, 최수빈 전학 갔어. 그래서 소식도 몰라. 아마 아무도 모를걸?" 전학 갔다는 사실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편지 덕에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과의 연락도 다 끊었다니. 너 다웠다. - 축하 파티를 가장한 술 파티였다. 양옆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친구들 덕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지러워져서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갔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담배에 불을 붙일까 하다가 관뒀다. 금연을 다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담배에 불을 붙이면 연기가 네 얼굴 모양으로 피어오를 것 같아서. 네 생각에 또 잠겨버릴까 봐서. 남은 담배들을 쓰레기통에 모조리 버렸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를 처음 봤던 날의 하늘처럼 맑았다. 별이 쏟아질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한국의 여름은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목소리 익숙한 번호였다. 아무리 전화번호를 지워봤자 이미 외워버려서 소용이 없는, 그리웠던 번호였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 전화기 너머에는 그가 있다. 전화를 받으면 그토록 그리웠던 너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고,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깐의 정적 후, 저음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때린다. "한국 왔다며. 어디야." 또 다시 나를 울린다. 네 목소리는 항상 내 마음을 쿵-쿵- 하고 마구 때렸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너를 정리하려고 별 짓을 다하고 노렸했는데. 이제야 너를 잊었다고, 정리했다고 생각해서 들어온 건데. 몇 년의 노력이 너의 말 한마디로, 그 낮은 목소리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여주야, 보고 싶어. 지금 거기로 갈게. 어디야 응?"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저음의 목소리가 자꾸만 나를 울린다. #재회 너를 만났다. 2년 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네 눈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2년 만에 만난 너는 더 성숙해지고, 깊어졌다. 특히나 원래부터 깊었던 그 눈빛이 더욱더 깊어진 듯했다. 그 눈빛에 빨려 들어가 버릴까 봐서 조심해왔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왜 이제야 왔어." 오랜 정적을 깨고 네가 물었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편지에 답장 한 번을 안 해주더라 넌." 약간 원망이 섞인 듯한 말투로 넌 다시 내게 물었다. 나는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편지가 왔는지도 몰랐어. 이사 가서." 너는 숨을 크게 내쉬더니, 이런 거 묻자고 부른 게 아닌데- 미안. 하고 나를 내려다봤다. 네 눈을 피하다가 자연스레 너의 손가락으로 시선이 향했다. 약혼반지가 있던 손. 그 큰손에 깨워져 있던 작디 작은 약속의 반지가 어찌나 미웠었는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깨달았다. 반지가 없었다. 묻고 싶었다. 네 약지를 계속 쳐다보던 나에게 네가 말했다. "결혼 안 해 나. 그 사람이랑 결혼 안 할 거야." 나는 놀란 눈으로 너를 올려다봤다. "새어머니랑 이혼하셨어.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 다 아빠한테 말씀드렸거든." 너는 조곤조곤 그간의 일들을 설명해줬다. 나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다가 울컥하며 말을 잠시 멈추기도 했다. 혼자서 많이 힘들었겠구나. 많이 아팠겠구나. 아픔을 이겨냈구나. 안쓰러운 너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 결혼 안 한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하고 싶었어." 네 눈에는 눈물이 잔뜩 고여있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만 자꾸 흘렀다. 너는 그 큰 몸으로 내게 안기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너무 그리웠어 네가. 나 진짜 많이 힘들었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제 같이 있자 우리. 내 옆에 있어주라." 나는 너에게 안겨, 너의 옷깃을 꽉 쥐었다. "많이 좋아해 여주야.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많이 좋아해 내가." 그토록 듣고 싶던 말들이었다.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도 밤하늘의 별들이 그의 고백을 듣고 있었다. 우리의 첫 입맞춤과 고백들을 저 하늘의 빛나는 별들이 다 알고 있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사랑할 거야." 눈물 범벅으로 내게 말하는 네가 사랑스러웠다. #진심 그는 아이처럼 울며 내게 말했다. “나는 사랑받고 싶었어. 사랑이 너무나 고파서, 그래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나는 어머니의 말만 따랐어.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어.” 나는 낮은 목소리로 제 진심을 말하는 너를 조용히 안았다. “너를 좋아하면 네가 불행해질 거라 여겼어." 눈물 흘리며 내게 말하는 너를 토닥였다. “네가 떠나고 죽을 만큼 힘들었어. 너무 그리웠어..." 네 이름을 불렀다. 수빈아-. 내 어깨에 얼굴을 묻는 너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겁이 많아서, 상처 받는게 무서워서 그냥 너를 떠나버렸어. 너는 혼자 이렇게나 힘들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너를 외면했어. 미안해. 이겨내줘서 고마워." 각자의 진심을 전했다. - 이제 가위바위보를 할 때면 우리는 똑같이 가위를 낸다. 서로가 무얼 낼지 알기에 똑같은 패를 낸다. 사랑이다. 누구 한쪽이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다. 그저 사랑이다. 네가 나를 보며 웃는다. 네 양 볼에 보조개가 쏙 파인다. 종종 말하지만 나는 너의 그 깊은 보조개에 빠져 죽어도 좋았다. 그것마저 나는 좋았다. #이해 네가 나를 너의 깊이에 데려가지 않은 이유는, 내가 숨이 막혀 죽어버릴까 봐서, 혹은 가라앉아버리거나 물거품이 되어 버릴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라고 했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어린 나는 몰랐다. 그저 너를 찾다가 지쳐 물에 둥둥. 그러면서 내 눈물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울기도 하고 원망도 하고 그랬다. 너의 생각은 몰랐다. 나는 이제서야 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질문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나는 애매한 질문을 너에게 던졌다. 뭘? 이라는 물음이 되돌아올 줄 알았는데, 너는 내 질문의 본질을 꿰뚫어 본 듯한 대답을 했다. "말했었잖아. 사랑하니까." 눈물이 났다. 네가 나를 안는다. 다시 네게 물었다. "그럼, 지금은 왜 이러는 거야?" 너는 내 눈을 깊게 쳐다보며 답했다. "여전히 사랑하니까." 너의 그 한마디는 내가 몇 년 동안 묻어뒀던 질문들을 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너를 더 꽉 끌어안았다. #편지 내가 보내지 못한, 내 마음에만 꾹꾹 담아온 편지들을 네게 건넸다. 너는 숨죽여 편지들을 읽더니, 이내 엉엉 울었다. 그런 그의 볼을 쓰다듬으며 사랑을 속삭였다. 내 마음이 너에게 전해졌다. 참 오래 걸린 듯 싶었다. 이제서야, 너에게 나의 모든 마음을 전했다. #연애 우리는 장거리 커플이 되었고,–그는 이 사실을 꽤나 힘들어했다.– 방학 때마다 우리는 마치 견우와 직녀마냥 애틋한 데이트를 이어갔다. 다음 해, 그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며 캐나다로 교환학생을 신청을 했으며, 그해 우리는 내내 붙어있었다. 함께 맞이하는 모든 계절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늦게 깨달은 마음은 우리를 더 가깝고 애틋하게 만들었다. 일방이 아닌 쌍방이었다. 나는 그의 깊은 눈을 종종 들여다보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게 입을 맞추는 그가 참 사랑스러웠다. 그가 웃을 때, 쏙 파이는 보조개에 괜히 손을 넣어보기도 하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역시 사랑이었다. - 언젠가, 너는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받아본 적이 없어서 주는 법을 모르겠다고 했다. 괜찮다. 내가 너의 옆에서 사랑을 마구 퍼줄 테니, 너는 그저 웃어만 줘라. 너의 그 깊디깊은 보조개에 내가 잠겨죽을 수 있게.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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