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참 푸르지 않아?" 구름 몇 개가 동동 떠다니는 하늘을 쳐다보는 이성열에게서 캔커피 하나를 건네 받았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따뜻하지 그지없었다. 내가 널 부른 이유가 뭔지 알아? 옅은 미소를 띠우며 나를 보는 이성열에게 모른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저어보였다. 너만 알고 있었잖아, 김명수랑 나랑 사귀는 거. 씩 웃는 이성열의 모습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고마웠어, 우리 둘 사귄다는 거 알고 알게 모르게 배려도 해주고 그랬잖아. 친구니까 해줬던 그 행동들이 이성열에게는 꽤나 큰 고마움으로 자리를 잡음이 틀림 없었다. 고맙다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내 이야기 좀 들어줬으면 하고, 불렀어" "……"
"이제는, 나도 좀 살고 싶어서, 너도 알지? 김명수랑 나랑 3년동안 사귄거"
3년쯤 되가니까 김명수가 나한테 점점 질렸던 거 같아. 갑자기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는 이성열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씁쓸함이 보였다. 처음에는 몰랐어, 나한테 질렸다는 거, 그래서 나 혼자 못 받아들이고 아파했어. 물론 김명수 원망도 많이 했고. 갑자기 이성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눈물을 닦은 이성열이 캔커피를 땄다. 그 때, 너 나랑 같이 술 마셨잖아. 막 나 우는데 너는 앞에서 고기 먹고. 키득키득 웃은 이성열이 목이 마른지 캔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많이 아팠지, 한참을 아팠어. 근데, 그게 또 한 순간이더라고, 지나고 나니까 이게 또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하게 되더라. 근데 더 웃긴 건, 인정하고 나면 안 아플 줄 알고 인정해버린 거지, 그러고 나서 더 아팠어
김명수가 내 옆에 없으니까, 그게 너무 아프고, 슬펐지. 이성열은 이제 눈물이 흐르던 말던 그냥 그대로 앉아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닦지도 않겠지만 이성열의 손에 가방에서 꺼낸 손수건을 쥐어주었다. 병신 같지 않아? 맨날 울고, 아파하고. 그렇게 살다보니까 이게 뭐하는 짓인 가 싶더라. 그 날에는 하루종일 울다가 웃고 난리 났었어. 맨날 우는 것도 결국엔 소용이 없더라고. 김명수는 돌아오지 않는데, 나는 뭐하는 건가 싶고. 사실, 나도 알고 있었던 거 같아. 나 바보 같고 병신 같은 거. 이미 떠나버린 김명수를 맨날 혼자 기억하고 아파하는 거, 계속 해봤자 뭐 하겠어, 나만 더 아프고 그런데. 아, 거기서 하나 더 생각한 거 있다, 듣고 화내지 마, 알겠지? 음… 뭐라고 해야하나… 이렇게 인정하고 슬프긴 엄청 슬프고, 아프긴 또 엄청 아프니까,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은 거야, 괜히 사는 거 같고. 어어, 화 안 낸다며, 거짓말이었지? 애써 웃는 얼굴로 내게 장난을 건 이성열이 꾹 쥐고 있던 내 손수건으로 볼을 가득 적신 눈물을 닦아냈다.
너도 나 병신 같다고 생각하지?
킥킥 웃는 이성열에게 아프지 않을 꿀밤을 먹여주었다. 가끔씩 물어보고 싶어, 물론 김명수는 대답해 줄 수 없겠지만. 김명수도 나만큼 아플까?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김명수긴 하지만, 걔도 아프지 않을까? 아니면, 먼저 헤어지자고 했으니까, 먼저 질렸으니까, 김명수는 안 아플까, 그런 거… 사실 나 봤거든, 며칠 전에 김명수랑 걔 애인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 걸어가는 거, 아마 손 잡고 있었으니까 애인 맞는 거 같긴해. 음… 새로 시작한 사랑은 나랑 한 사랑이랑 다르게 할만 하겠지? 이번에는 질려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 사람, 예쁘고 매력있어 보였거든. 나랑 다르게 애교도 많아 보였고… 또, 김명수가 그렇게 좋아하는 표정 본 적도 없는 것 같아. 이렇게 보면 나만 아파하는 것 같아서 좀 짜증나긴 해, 그래도, 내가 더 많이 좋아해서 그런거니까, 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야지 뭐. 그렇게 불쌍하단 표정 짓지 마, 조만간 안 불쌍해질 거니… 아니다, 더 불쌍해질지도 몰라. 그래도 넌 화내면 안 된다? 넌 나한테 하나 밖에 없는 가장 소중한 친구니까.
얼마 전에, 내가 갑자기 너한테 술 먹고 전화한 날 있었지?
그 날, 김명수가 갑자기 너무 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술 좀 마시고 울었어. 그 전에도 그랬거든, 하루종일 김명수가 생각나서 일도 못하고… 그 생각만 하면서 김명수랑 했던 거 하나하나 해보기도 하고, 갔던데도 가보고… 김명수도 가끔 날 떠올릴까? 그러면… 참 좋을 거 같아. 너 우리 집 와봤지? 기억나? 아직도 그대로야, 김명수랑 김명수 물건이 사라진 거 말고는 아직 다 그대로야… 사진도 그대로고, 가구도 그대로고, 나도 그대로지.
아, 미안, 시간이 벌써 이렇게… 이것만 마저 이야기하고 난 가야겠다
마지막으로 김명수 얼굴이나 한 번 더 보고 오게, 이젠 나도 숨통 좀 트이게 하고 싶거든 사실, 난 두려워, 모든 게. 이렇게 김명수를 못 잊으면 어쩌나 싶어서, 또, 새로 사랑하자니 김명수처럼 상처 받을까 겁나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김명수를 못 잊고 새사람한테서 김명수를 찾으면 어쩌나 싶고. 아, 제일 두려운게 뭔지 알아? 김명수가 나를 잊으면 어떡하나야, 물론 내가 김명수라는 그늘에서 벗어난다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아직 아니잖아? 자꾸 김명수 시선에서 벗어나면 내가 잊혀진다는 걸 알지만, 내가 자꾸 김명수 눈에 들면 걔가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었어.
이젠… 김명수도 내 마음 속에서 떠나보낼 때가 된 거 같지?
물론 김명수는 내가 자길 잊든 말든 신경도 안 쓰겠지만. 기지개를 쭉 편 이성열이 살며시 웃었다. 아직 한모금 밖에 안 마신 커피를 쭉 마셔버리고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버린 이성열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붕붕 휘둘러지는 이성열의 손을 보다가 손을 들어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방긋 웃은 이성열이 손수건은 다음에 돌려줄게! 하고는 냅다 뛰어서 가버렸다.
- 후하, 속이 다 시원하네. 건물 뒤에 선 성열이 숨을 내쉬며 씩 웃었다.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명수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간 성열이 커피머신 앞에 서 있는 명수를 보며 웃었다. 문 위에 달링 작은 종이 딸랑 소리를 내며 울렸다. 어서오세요-하는 진부한 인삿말과 함께 명수의 시선이 성열에게로 향했다. 표정이 굳은 명수가 생글생글 웃는 성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에이, 왜 그래. 아랑곳 않고 커피머신 앞에 있는 의자에 앉은 성열이 명수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뭐 하러 왔어, 가" "야박하게 굴지 마, 오늘만 보고 나도 너 안 보러 올 거야"
"……"
"마지막이니까, 이번만 용서해줘, 다시는 우리 얼굴 마주 볼 일 없을 거야"
성열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명수가 완성된 커피를 성열에게 내밀었다. 아메리카노? 한 쪽 눈썹을 들썩이며 커피를 내려다본 성열이 웃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마지막이니까, 이야기 좀 하고 놀면 안 돼? 나 오늘 하루종일 할 게 없거든.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며 마시던 성열이 저를 뚫어져라 보는 명수에게 웃으며 말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명수가 알겠다며 성열을 데리고 구석진 테이블로 갔다. "5시까지 끝 내, 그 때 되면 애인 오니까" "아아, 알겠어, 근데 나도 니 애인 보고싶다, 얼마나 매력있으면 김명수가 넘어갔을까 싶거든"
"……"
"쳇, 알았어,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마, 안 보면 될 거 아니야, 마지막인데 진짜"
명수야, 잘 지내지? 입술을 삐죽이던 성열이 갑자기 표정을 풀고 명수에게 물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명수가 씩 웃는 성열을 바라봤다. 다행이다… 커피를 식히느라 분주한 입술을 보던 명수가 보고싶었어, 하는 성열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나 이때까지 무지 힘들었다? 니가 그렇게 가버리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너 우리 사귀는 거 알고 있던 내 친구 생각 나? 나 맨날 걔 붙잡고 울고, 난리 쳤어, 그래서 방금도 혼나고 오는 길이야. 내가 너 훌훌 털어버리겠다니까 뭐라는 줄 알아? 축하한다고 그러더라. 난 축하받으려고 한 말 아니었는데, 졸지에 축하를 받았지 뭐야. 나이 하나 더 먹고 나니까 정신이 차려지더라. 혼자 니 기억 붙잡고 뭐하나 싶었어, 그래서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어, 이제 아프긴 싫거든. 음… 있지, 나 오늘 꼭 니가 보고싶었어. 오늘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서. 웃기지 않아? 이제 와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어, 뭐야, 그거 니 애인이랑 커플링으로 맞춘 거야? 치사하긴, 나랑 사귈 떄는 반지 하나 맞추자니까 귀찮다고 그러던 녀석이… "왜 울어, 울지 마"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성열에 당황한 명수가 손을 뻗으려다가 멈췄다. 안 울어,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손으로 눈물을 닦아낸 성열이 잔을 만지작거리며 커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넌 안 아팠으면 좋겠다. 니 애인이랑 평생 알콩달콩 잘 살아. 아, 너 나한테 한 것처럼 니 애인한테 그러면 안 된다? 너 그거 진짜 몹쓸짓이야. 확,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둘 거야. 장난스레 손을 뻗어보이자 명수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너, 그렇게 웃으니까 얼마나 좋아, 너 나 온 뒤로 계속 인상 쓰고, 정색하고. 누가 보면 내가 너 괴롭히러 온 줄 알겠다. 에이, 야, 이 말 하니까 갑자기 굳어지는 거 봐, 인상 좀 풀어, 왜 자꾸 갈수록 인상이 험해져? 으음… 피곤하다, 오랜만에 너무 많이 행동을 했어. 아침부터 집청소를 좀 했거든, 내가 아까 말했잖아, 너 훌훌 털어버리꺼라고. 그래서 사진도 치우고, 물건도 치우고 했어. 생각보다 너랑 한게 많더라고, 집 치우고 나니까 집이 휑, 해진거야. 그래도 좋았어, 너랑 한게 많다는 걸 알았거든
집청소 하고 나서 씻고, 바로 나왔지, 그러고 친구 만났어. 오랜만에 봤다고 잔소리 할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조용하더라고? 친구한테 다 이야기 하고 왔어, 속이 후련하더라. 이제 진짜 너랑 인연을 끊을 수 있겠다 싶었어.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본 성열이 나른한 눈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쳐다봤다. 걔한테는 좀 미안하긴 한데, 이렇게 하는 게 나는 제일 편한 거 같아서. 오래된 친구니까, 아, 다음에 혹시라도 걔 보면 내가 미안하다고 했다고 전해줘.
그럼, 난 이제 가야겠다, 잘있어… 많이 사랑했어, 안녕
어느새 다 비어버린 커피잔을 내려놓은 성열이 웃으며 명수에게 손을 흔들었다. 성열의 말을 생각하며 의아함에 돋은 소름을 느끼며 손을 흔들어준 명수가 잔을 들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다. 컵을 씻기 위해 들어올린 순간 손에서 미끄러진 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흰 컵이 조각나 바닥을 뒹구는 걸 보던 명수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뭐야, 이성열. 큰 조각을 주워 신문지로 싼 뒤 빗자루를 들고 와 바닥을 쓴 명수가 저 멀리 휘청이며 걸어가는 성열의 뒷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