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한시.
호텔 체크아웃까지 남은 시간은 열두 시간쯤.
적어도 그 사이엔 아무도 이 방으로 들어오지 않을거야
너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손톱 끝을 물어뜯고 있었어.
오늘 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패션쇼가 열릴 예정인 파리의 한 호텔 가장 작은 방 안에는 너만 덜렁 앉아있었어.
캐리어도 없이 TV 화면도 꺼진 채로 너는 손톱이나 물어뜯으며 저 문을 열까 말까 고민하고 있어.
오늘 밤 저 문을 열고 운이 좋다면 패션쇼를 보겠지.
그 무대 위엔 그렇게나 쫓아다닌 그가 올라올 거야.
그리고 그는 오늘 밤 이 호텔의 수많은 객실 어딘가에서 잠이 들겠지. 아마 스위트룸쯤 되지 않을까.
그는 굉장히 잘나가는 모델이니까.
그런데 운이 좋지 않다면?
째깍째깍. 어딘가에서 시계 초침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 이 방 안에 벽에 걸린 시계는 없으니 네 손목에 얹힌 손목시계에서 들리는 소리일거야.
시계 모양이 조금 특이해.
시계 소리에 맞춰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해.
살면서 운이 좋았던 날이 없었는데 오늘 하루쯤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라본 야경은 너무 아름다웠어.
하늘이 온통 깜깜한데 빛나는 불빛들은 별빛 같았어.
이 긴 밤을 그를 따라온 것 같은데 제발 오늘 하루만은. 제발.
드디어 너는 일어서서 문으로 향해. 하나 둘 셋.
드넓은 초원. 네 앞에 서 있는 소가 음메하고 너를 바라봐.
네 뒤에는 허름한 창고가 있고 여기저기서 소들이 풀을 뜯고 있어.
손목시계는 어지럽게 몇 바퀴를 돌더니 두시를 가리켰어. 그리고 너무나 눈부신 햇빛.
아 젠장. 이번 생은 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