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가 끝나고, 어느덧 10월 중순이었다. 날씨가 쌀쌀해진 탓에 민규와 석민의 신경은 항상 곤두서있었다. 이유는 역시 여주였다.
여주) 아이, 집에서는! 보일러도 빵빵한데!
민규) 빵빵해도 일단 네 방이 가장 춥잖아! 이불 하나 더 덮고 자!
석민) 그래 여주야. 아님 그 잠옷을 기모로 좀 바꿔!
민규) 그래 그것도 좋고.
여주) 아직 10월이라고..
민규) 곧 11월이지.
민현) 무슨 얘기해?
티비를 보기 위해 거실로 여주가 내려오자, 먼저 소파에서 티비를 보고있던 민규와 석민이 얇은 여주의 잠옷을 보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이에 제 방에서 나온 민현이 소파에 앉으며 아이들을 향해 묻자 민규가 입을 열었다.
민규) 형. 솔직히 여주 잠옷 문제 많지않아? 기온이 떨어지고 있는데 아직도 봄 잠옷이라니까.
석민) 슬슬 기모있는거 꺼내라는데도 말을 안들어-
민현) ...얇긴 얇은 것 같은데. 꺼내 입는게 어때?
여주) ...그럼 11월 들어가자마자 꺼내 입을게. 어때.
민규) 그건 당연한거 아냐?
여주) 그게 뭐가 당연해! 원래 12월에 꺼내 입는건데!
민현) 그래,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어 야 윤정한!
정한) ..엉?
민현) 거기서 여주 담요 좀 가져다줘.
정한) 아.
민현은 계단을 내려오려는 듯한 정한을 향해 소리쳤고, 정한은 곧 여주 방에서 담요를 가져와 여주에게 건넸다. 여주는 의아한 듯 민현을 쳐다봤고, 이에 민현은 웃으며 답했다.
민현) 그럼 남은 10월은 담요 덮은 채로 생활하는 걸로. 좋지?
석민) 오 좋네!
여주) ..........
...아니 글쎄 난 안춥다니까아...
사건의 발단은 사람이 가장 지쳐있다는 수요일 오후였다. 배고픔에 신경이 곧두서있던 민규가 승관이 불과 며칠 전 아이들에게 먹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한라봉 하나에 손을 댔고, 이를 안 승관이 노발대발했다. 둘이 냉전 상태임을 안 아이들은 급히 모두가 자리한 금요일 저녁, 긴급 가족 회의를 주최했다.
지훈) 민규가 잘못한 건 맞지. 승관이네 조부모님께서 분명 한라봉 열박스를 보내주셨었는데 우리가 그거 거의 다먹고 승관이는 별로 못먹었었잖아. 그래서 하나 남은 거 냉장고에 둔건데, 민규가 그걸 먹은거고.
명호) 그래, 민규가 잘못한 건 맞는데 민규 입장에선 서운할 수도 있지. 한라봉 하나 더 먹은거가지고..
석민) 에이 아니지! 먹으려고 분명 먹지 말아달라고 했었고! 승관이가 우리보다 확실히 덜 먹긴 했잖아! 자기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많이 먹어봤으니까 양보했던건데!
정한) 석민이 말이 맞지. 먹지 말아달라고 단톡방에 얘기했는데.
승철) 그리고 딱 하나 남은거 먹은거면 더 속상하지..
지수) 맞아. 여러개 남았던 것도 아니고. 그럼 좀 서운하지.
준휘) 근데 승관이가 화나서 들고있던 수건 던졌다며.
지훈) 그건 잘못한 거고.
정한) 화나도 던지면 안됐지.
석민) 그래 그건 좀-,
여주) 너도 수건 던진 적 있지 않아?
석민) 조용히해.
민현) ...그래. 일단 민규도 승관이 톡 봤지?
민규) ...어.
민현) 봤는데도 불구하고 승관이 거에 손을 댄거고. 승관이는 민규한테 수건 던졌고.
민규는 알고있었음에도 먹은 잘못, 승관이는 화가나서 무력을 쓴 잘못. 둘 다 똑같이 잘못했어. 그래도 민규야, 먼저 먹지 않았더라면 이럴 일 없었잖아.
지훈) 그래. 너 왜먹었어?
민규) ...사실 까먹었었어. 그냥 있는 줄 알았어. 진짜 고의는 아니야.
민현) 사과해.
민규) ...미안해.
민현) 승관이도 때린거 사과해.
승관) ...미안. 나도 모르게 욱해서 던졌어.
지수) 그래도 손에 수건 들고 있던게 어디야. 휴대폰 들고 있었으면 휴대폰 던졌을지도 몰랔ㅋㅋㅋㅋ
승관) 형, 형은 날 뭘로 보는거야^^
지수) ㅎㅎ미안.
민현) 둘이 내일 아침 식사 준비해.
승관) 둘이서?!
민규) 형 둘은 힘들지!
민현) 너희 냉전 할 때 애들 너희 눈치봤어. 안미안해?
민규) ..아니 그건 미안하지..
승관) 근데 둘은 너무..
민현) 둘이 어색할텐데 내일 아침 잘 준비해주고,
민현의 말에 민규와 승관의 시선이 얽히고 둘은 민망함에 급히 회피했다. 민현은 신경쓰지 않는 듯 할 말을 이었다.
민현) 다 모인 김에 가족회의 마저 해버리자. 이번주 일요일 회의는 없애고.
석민) 헐 그럼 시켜먹는건? 그것도 없애는거야!?
순영) 아 안돼! 이번주는 2층 사람들이 원하는 음식 먹기로 했잖아!!!
한솔) 아 그건 좀 그런데.
민현) 진정해. 시켜는 먹을거야..
순영) 다행이다. 그치?
석민) 응. 난 일요일 저녁식사만 바라보면서 일주일을 보내잖아 ㅎㅎㅎ
민현) 불만사항 있는 사람?
여주) ....불만은 아닌데.
석민) ..난 여주가 입을 열 때가 가장 무서워.
민규) 우리가 그만큼 죄가 있단 소리지.
여주) 그 저번에 나 먹는거 느려서 간식통 만들어줬잖아.
..근데 거기에 자꾸 도둑이 들엌ㅋㅋㅋㅋㅋㅋㅋ
명호) 뺏어먹을게 없어서 여주 걸 뺏어먹어?
찬) 진짜 누구냐. 왜그러는거야.
승철) 지독하다 지독해 ㅋㅋㅋㅋㅋㅋ
석민) 미안합니다!
민규) 죄송합니다!
순영) 사랑합니다!
여주) 미치겠다 진짴ㅋㅋㅋ
민현) 하아. 너희 왜그러는거야 ㅋㅋㅋㅋㅋ
정한) 그럼 우리가 간식통을 만들어준 의미가 없잖아!
원우) 간식상자를 어디다 두는데?
여주) 방문 앞에. 왜냐하면 방에 둘 자리가 없어가지곸ㅋ
원우) 간식통을 방에 들이는게 좋을 것 같은데? 애들이 양심이 없어서
한솔) ㅋㅋㅋㅋㅋㅋ팩폭
지훈) 진짜롴ㅋㅋ거기 두면 아마 계속 가져다 먹을 것 같은뎈
민현) 그래 여주야 그게 좋겠다. 아니면 자물쇠를 달아줄까
지수) 그것도 좋다.
여주) ..아냐, 뭐. 그렇게까지 간식을 지키고 싶다기보단 그냥 그렇다고..
민규) 진짜 이제 더이상! 손 안댈게!
석민) 아니 근데 여주야 그거 그렇게 그냥 두면 유통기한 지나!
민규) 맞아! 그건 좀 아깝잖아!
지훈) 이야, 이제 방귀 낀 놈들이 성을낸다
여주) 야! 너희가 그렇게 말할 군번은 아니지! 김민규 하여튼 너는 급식 먹을 때도 내 후식 뺏어먹더니!
정한) 그랬었어? 너 아주! 버릇이 고약하구나!
민규) 아 그건 니가 안먹는 줄 알고!
여주) 너이씨 뻔한 거짓말!
너 간식 손대지마! 석민이만 줘버릴거야!
한가로운 토요일, 여주는 아침을 먹고 지수의 방을 찾았다. 여주는 개인적으로 지수의 방을 참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인테리어가 참 마음에 들어서 라고. 깔끔한 화이트 톤의 방이라 들어오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지수의 침대에 걸터앉아 베란다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던 여주에게 지수는 오렌지 주스를 건네며 옆에 자리했다. 무슨 생각해?
여주) 오, 고마워. ..아니 그냥 뭐, 벌써 11월이구나. 올해도 이렇게 가는구나. 뭐 이런생각.
지수) 한 해 진짜 빠르게 가지? 가면 갈수록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아.
여주) 그니까.
지수) 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졸업반이네.
여주) 와 난 벌써 2학년. 2학년은 어때?
지수) 음.. 1학년을 잘 보냈다면 그 연장선? 그렇지 않았다면 기찻길을 달리는 기분이지.
여주) 기찻길?
지수) 뒤에서 기차가 언제올지 모르잖아, 기찻길은 ㅋㅋㅋㅋㅋ
여주) 앜ㅋㅋㅋㅋ 그런 불안감.
지수) 여주는 1학년 열심히 보내서 그런 거 없을거야. 아마 연장선 같겠지.
여주) 오빤 어땠는데?
지수) 기찻길.
단호한 지수의 말에 여주와 지수가 웃음을 터뜨리고, 여주가 주스를 마셨다.
여주) 걱정이네.
지수) 뭐가?
여주) 또 떨어질 생각하니까 좀 그래. 오빠들 다 졸업하면 이제 정말 마지막이잖아. 취업을 같은 곳으로 하지 않는 이상? ㅋㅋㅋㅋㅋㅋㅋ
지수) ㅋㅋㅋㅋㅋ그치 그건 그렇지. 같은 회사를 들어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봐야지. 과가 다 가지각색인데.
여주) 그러니까. 고등학교 땐 대학교에서 만날 희망을 품고 살았는데, 이제 오빠들이 졸업하면 무슨 희망을 갖고 대학을 보내야하나.
지수) 같이 살잖아.
여주) ...아.
지수) 이렇게 매일 볼텐데 무슨 걱정이야.
여주) ...그렇네. 바보같은 걱정이었네.
지수) 학교 다닐 때 심심하긴 하겠다. 인원이 줄어서.
여주) 그치.
지수) 고등학교 땐 어땠어? 우리 없을 때.
여주) 더 똘똘 뭉쳐다녔어. 무조건 우리끼리 밥먹고, 뭔 일있으면 다 가가지고 편들어주고.
지수) ㅋㅋㅋㅋㅋ상상간다.
여주) 재밌는 얘기 해줄까?
지수) 응. 뭔데?
여주) 찬이가 찬이네 반에 어떤 애랑 싸움이 붙었었나봐.
지수) 찬이가? 찬이 싸움 잘 안하잖아.
여주) 그니까. 그래서 놀라가지고 민규랑 석민이랑 2반갔는데ㅋㅋㅋㅋㅋ 아니 글쎄 사 대 일로 싸우고 있는거야.
지수) 왴ㅋㅋ 아 한솔이랑 승관이랑 명호가 찬이 도와주느라?
여주) 엌ㅋㅋㅋㅋㅋ 근데 그와중에 민규가 좀 욱하고 키도 크잖아. 석민이도 키가 크고. 그래서 민규가 그 남자애를 막 내려보고 그랬는데, 그 남자애 친구들도 와가지고 민규를 툭툭 치는거야.
지수) 어우 안되는데. 민규 건들면 안되는뎈ㅋㅋㅋㅋ
여주) 그래서 민규가 화가나가지고 멱살잡고 던졌잖앜ㅋㅋㅋ
지수) 그래서 어떻게 됐어?
여주) 누가 선생님을 불렀더라고. 그래서 다같이 교무실 불려갔었어.
지수) 그 남자애는 왜그랬대?
여주) 찬이한테 열등감이 있어서 그랬었던 걸로 기억해. 그 친구가 발목이 안좋아서 무용을 그만뒀던 애였는데, 찬이는 무용을 하니까.
그래서 찬이를 욕한거였지. 남자새끼가 무용한다 그러면서.
지수) ..질투가 참. jealousy가 아니라 envy만 있으면 참 좋을텐데.
여주) 그렇지. 시샘이 아닌 선망의 질투였더라면. 근데 이해가 가. 그 남자애의 시샘이.
지수) 그치. 이해는 가.
웃으며 대화를 나누다 잠시 멈춰 다시금 주스를 마시는 둘이었고, 옅은 공백 사이에 밖에서 새어들어오는 아이들의 말소리가 둘 사이를 채웠다. 그리고 지수가 여주를 향해 물었다.
지수) 여주는 부러워했던 적 있어?
여주) 예를 들어?
지수) 뭐.. 갖고싶은 걸 가진 사람을 보고 부러웠다던가, 그냥 그 사람이 부러웠다던가. 그런거.
난 어렸을 때 장난감 있었던 애들이 부러웠었어. 우리 부모님은 그런거 잘 안사주셨었거든. 다른 부분말고 장난감만.
여주) 오..
지수) 그런거 있어?
여주) 많지. 사실 수도 없을 걸? 여태 가장 부러웠던 건 그림 그리는 친구?
지수) 왜? 너 그림 못그려?
여주) 아니 잘그리는 친구 말고. 진로가 디자인 쪽인 친구. 입시미술하고 그러면 돈 많이드는데 부모님들이 그걸 다 지원해주는 그런..
지수) 아. 여주 그림그리고 싶었어?
여주) 그랬지. 근데 미술이 워낙 돈이 많이 들잖아.
지수) 그치.
여주) 그래서 좀 부러웠었어. 고등학교 때 화구통 들고다니고, 미술학원 간다고 점심 안먹고 학원가고, 그냥 그런거 보면 부러웠지.
지수) jealousy? envy?
여주) 음.. 좀 jealousy.
여주) 고1땐가 미술 과제를 늦게 해서 점심시간에 혼자 제출하러 간 적이 있었거든? 근데 선생님이 나지막하게 나한테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나.
지수) 무슨 말?
여주) 우리반에 입시미술하는 친구 이름이 채영이였는데, 넌 채영이보다 재능도 있고 그림도 훨씬 잘그리고 성적도 조금 더 높은데 왜 미술 안하냐고.
지수) ...........
여주) 아깝다고. 그래서 그냥 머쩍게 웃다가 나왔어. 솔직히 이렇게 말하면 재수없을 지도 모르지만, 내가 채영이보다 재능있고 잘그린다는 건 나도 알았거든. 근데 뭐 어떡해. 현실이 이런걸?
지수) 음. 좀 슬프네.
여주) 그치.
..아, 오늘도 잘 쉬다 갑니다! 잔 줘. 내가 가져다 놓을게.
여주가 풍경을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주스를 입에 털어 마시더니 일어나 지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지수가 고마워. 하더니 잔을 건넸고, 여주는 잔을 들고서 부엌으로 내려갔다. 지수는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몸을 눕히고,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따스한 가을의 햇볕, 폭신한 이불, 여주와의 잔잔한 대화. 잠이 몰려오기엔 완벽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지수가 오후1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더니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내려갔고, 점심을 먹고있는 민규와 석민의 식탁에 밥을 하나 퍼 합류했다. 그리고 곧 여주와의 대화내용이 생각난 듯 애들에게 물었다. 너희 여주 그림 본 적 있어?
민규) 형이 여주 그림 그렸던 걸 어떻게 알아?
지수) ..그걸 알았다기 보단 뭐.. 들었어. 그림 좋아했다고.
석민) 본 적 있지. 근데 고1때였나. 어느순간부터 안그리더라고.
민규) 맞아. 여주 되게 잘그렸는데. 약간 몽환적이고 뭐라그래야할까. 창의적? 독창적? 아 비슷한 말인가?
석민) ㅋㅋㅋㅋㅋㅋㅋ뭐 어쨌든. 그림대회 나가면 거의 상받았지. 전시도 되고.
민규) 아 상 얘기하니까 또 슬퍼지네.
지수) 왜?
민규) 그림을 안그리기 시작한게 고1때부터였던 것 같은데, 안그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자기가 받았던 그림 상들을 다 불태우더라고. 학교 소각장에서.
석민) 깜짝 놀랐지. 점심시간에 혼자 잠깐 쓰레기 버리러간대서 민규가 불안해가지고 따라갔더니 그러고 있었다더라고.
민규) 상을 왜 태우냐그랬더니, 이게 다 무슨 필요가 있냐고 그러더라.
민규와 석민의 말에 지수가 입안에 있는 음식을 모두 삼키고 조용히 물을 마셨다. 그리고 석민과 민규는 금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고, 생각에 빠진 지수가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수) 알 것 같아.
민규) 엉? 뭘?
지수) 여주가 왜 상을 불태웠는지.
석민) 왜?
지수) 입시미술 못할 거라는 걸 알아서.
아까 여주가 그랬거든. 고등학교 때 미술쌤이 자기한테 그랬대. 넌 입시미술하는 친구보다 그림도 잘그리고 재능도 있는데 왜 미술 안하냐고. 여주 성격이었다면 그 얘기 듣고 생각 많이 했겠지. 그러다가 결론은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는 걸 알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