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한 번도?
일요일 저녁식사 자리, 여주와 지훈이 집으로 돌아오고 저녁을 먹을 때에 대화주제는 다름아닌 싸움 여부였다.
시작은 한솔과 승관의 싸움이었다. 초딩시절 신발 던지기를 하다가 승관이가 한솔이의 머리를 가격해 싸우기 시작했던 것부터, 중학교 때 한솔이가 승관이의 샤프를 빌려가놓고 음악실에 까먹고 두고왔다는 것까지 야기를 하던 아이들은 이 대화가 끝나자 여주와 창균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여주가 오물오물 거리더니 눈을 느리게 깜박이고, 창균은 무언가 기억난 듯 말했다.
창균) 싸운 적 있어.
여주) …있었어?
창균) 내가 그렇게 화낸 적 처음이었지 아마.
여주) …오빠가 화낸 적이..
기억이 안나는데.
여주는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 듯 젓가락질을 이었고, 창균의 말에 아이들은 창균을 빤히 쳐다봤다. 어서 말을 이어보라는 듯이.
창균) …됐어. 근데 뭐.. 싸운 거 말해서 뭐해?
승관) 아 형!
민규) 아니 거기서 끊으면 어떡해!
정한) 야 어차피 지난 일인데~!
지수) 그래- 궁금한데 말 좀 해줘~
창균) …………..
다음에, 다음에 해줄게 ㅋㅋㅋㅋㅋㅋㅋ 여주 없을 때
지수) ..뭐해?
여주) ..멍 때리기.
지수) 좋네.
여주) ㅋㅋㅋㅋㅋㅋㅋ이게 좋아? 너무 비생산적인 것 같은데.
몇몇 아이들이 출근을 한 오전. 자신의 방에있던 지수가 테라스 창으로 통해 마당 의자에 앉아있는 여주의 뒷모습을 보더니 천천히 마당으로 나왔고, 뭐하냐는 물음을 시작으로 여주의 옆에 앉으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지수) 비생산적인 활동을 할 필요가 있어 넌
여주) 그런가. 난 하루에 하나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속이 편하던데.
지수) 그걸 안좋게 말하면 일을 하나라도 해야한단 거지
여주) 음… 그렇지.
지수) 한마디로,
스스로가 쉬는 꼴을 못본다는 거잖아. 난 그거 반대.
지수의 단호한 어투에 여주는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의자에 완전히 기댔고, 지수의 뒷통수를 바라보던 여주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여주) 비생산적인걸 매일 해야할까?
지수) 난 생산적인 걸 할 필요가 있고, 넌 비생산적인 걸 할 필요가 있어
여주) 그래? 어떤거?
지수) 지금 처럼 멍 때리는 거? 이것도 좋지.
여주) 음.
지수) 대신 잡생각은 금지.
여주) 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어려운거 아냐?
지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생산적인 일 만큼 비생산적인 일도 어려운거지 뭐
짧은 정적, 예쁜 4월의 소리들이 둘 사이를 채우고, 또 승관이의 채널 예약을 무시한 건지, 명호를 향한 승관의 고음이 집에서 조금씩 새어나왔다. 아 서명호 진짜아-!!!!!!!!!! 아 나 아니라고!!!!!!!! 준휘형이 그런거라고!!!!!!!!!!!!! 구라치지마!!!!!!!!!!
지수) …………
여주) 승관이는 저정도 볼륨이면 확성기인 것 같아.
지수) 그럼. 고등학교 때부터 느낀 사실이지.
여주) …………
지수) …………
여주) …………
지수) 아무말이나 뱉어봐.
여주) 응?
지수) 아무말이나 뱉는 거 해보라고. 해야하는 말 말고 그냥 승관이처럼, 석민이처럼. 쓸데없는 말 뱉으라고.
여주) …………
지수) 별 생각 없이 꼬리를 무는 그런 말들을 계속 반복하다보면,
잡생각들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지수의 말에 여주는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눈을 느리게 꿈벅거렸고, 그러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끝말잇기 같은건가.
승관) 마리모!
승철) 모종삽
민규) 삽살개
석민) 개나리! 나리나리 개나리~
여주) 리튬.
순영) ………….
찬) ….? 아니,
여주의 끝말잇기 발언에 지수는 집으로 들어가 끝말잇기나 해보는게 어떻냐 물었고, 결국 저녁식사 이후 삼삼오오 모여 끝말잇기를 시작했다. 여주의 리튬 발언에 다음 순서였던 순영은 입을 옴짝달싹 못하더니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여주) …아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생각나는 리 자가 별로 없어..
찬) 리본!
여주) …………
승관) 아 다시해 다시! 이번엔 이렇게 돌아! 나부터 할게! 청소기!
지훈) 기러기
창균) 기소
지수) 소인
민현) 인듐
정한) 아니 야!
민현) ㅋㅋㅋㅋㅋㅋㅋㅋ생각이 잘 안나서 그래!
석민) 인간!
민규) 인스타그램! 많잖아!
여주) 봐! 나만 그런게 아니잖아!
화공과 출신다운 민현의 발언에 다시 한 번 게임이 멈추고, 결국 원소 이름은 안되는 걸로 정한 아이들이 다시금 끝말잇기를 이었다.
끝말잇기가 끝나자 여주는 멍하니 거실 소파에 앉아 의미없이 채널을 돌리고 있었고, 동시에 승관이 옆에 앉으며 여주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승관) 야 이 티셔츠 파란색이 더 예쁘지.
여주) …응. 근데 흰색 없어? 너 흰색 잘어울리던데.
승관) 아 그래? 고민되네. 옷 자체는 파란색이 더 예쁜데.
여주) 마음에 드는 걸로 사.
승관) …근데 흰색이 더 잘어울린다며.
여주) ..그건 그렇지. 근데 마음에 드는 옷을 사야 자주 입지 않을까? 별로면 안입게 되잖아.
승관) ..그건 그런데, 흰색이 잘 어울리니까 흰색을 사는게-..
여주) …………
대화가 쳇바퀴마냥 빙빙 도는 느낌에 여주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쓸데 없는 말을 계속 해보라는 지수의 말을 떠올리며 리모컨을 내려놓고 온전히 승관과의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여주) 어울리는게 중요할까, 입고 싶은 옷을 입는게 중요할까?
승관) …어울리는 거?
여주) 글쎄. 근데 입고싶은 옷이 엄청 이상한게 아니라면 입고싶은 걸 입는게 좋지 않을까?
승관) …아냐. 어울리는게 좋은 것 같아. 왜냐면 옆에서 잘어울린다 잘어울린다 해주면 계속 입게될 것 같거든
여주) …오. 일리있어. 그럼 흰색?
승관) 좋아 흰색. 파란색은 다음 달에 사던가, 아님 흰색 때문에 잊혀지겠지.
땡큐!
승관이 문제가 해결된 듯 소파에서 일어나고, 여주는 다시금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여주가 리모컨을 집은 걸 무색하게 정한이 여주의 옆에 앉았고, 곧 정한은 채널이 돌아가는 걸 보더니 여주를 향해 말했다.
정한) 여주야.
여주) 응?
정한) 요즘 잠은 잘 자?
여주) …글쎄. 잘 모르겠는데
정한) 보통 몇시 전에 잠들어?
여주) 두시? 두시 반? 그 때 잠드는 것 같아
정한) …그럼 평일엔 다섯시간 밖에 못자네.
여주) 응. 그래도 주말엔 우리 아침 늦게 먹으니까 좀 더 자잖아.
정한) …평일에 낮잠 자?
여주) 거의 안자. 진짜 피곤한 거 아니면.
정한) …피곤한게 어떻게 피곤한건데?
여주) …어떤,
정한) 육체적 피곤, 정신적 피곤?
여주) …………
난 늘 알다시피.
여주의 짧은 대답에 정한은 고개를 주억거렸고, 곧 무언가 생각하더니 여주를 향해 물었다.
정한) 그럼 넌 좀 더 잘래? 아침밥 제외하고.
여주) …왜?
정한) 적정한 수면이 밥보다 더 중요한 것 같아서.
여주) 음.. 아냐. 같이 밥은 먹어야지. 오빠들 출근할 때 못보면 퇴근하고도 못볼 때 많아서, 하루 종일 못보는 일이 생기는 건 좀 그래.
정한) …그럼 낮잠을 많이 잤음 좋겠어.
여주) ….그래야 할까?
정한) 포근하게, 아무런 생각 없이,
여주) …………
정한) 널 위한 수면이 필요해.
여주) …………
정한) 이것 저것 걱정하고 생각하다가 지쳐서 두 세시에 잠드는 거 말고, 여주야.
그거 말고 진짜 널 위한 수면시간. 그게 필요해.
정한의 말에 여주가 정한의 시선을 맞추고 살풋 웃었다.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여주) ….갑자기 근데 잠은 왜?
정한) ..아, 엊그저께 창균이랑 대화하다가 너 잠 빨리 못든다고 그래서. 그냥 그런 얘기 하다보니까..
여주) 오빤 침대에 누우면 금방 잠들어?
정한) …별 일 없으면 보통 그런 편이지.
여주) ….오.
난 다 나같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정한) 여주같이 바로 잠 못드는 애들도 있겠지. 나같은 애들도 있을거고.
여주) 누우면 몇분만에 잠드는데?
정한) …난 한, 십분? 십오분?
여주) …진짜 빠르다 ㅋㅋㅋㅋㅋㅋ
정한) 지훈이는 오분이면 자.
여주) 진짜?
정한) 응 ㅋㅋㅋㅋㅋㅋㅋ 매일이 피곤한가봐.
여주) ㅋㅋㅋㅋㅋ그런 이유라면 좀 슬프고
정한) ㅋㅋㅋㅋㅋㅋ잠도 많은 편이니까 뭐..
여튼 잘 잤음 좋겠다-
정한은 여주의 머리를 살포시 토닥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민현의 방으로 들어가고, 여주는 멈춰있는 채널을 쳐다보며 옅게 웃었다.
…쓸데없는 대화도 좋네.
재밌어.
이상하다.
순영) 솔직히 그 날 승철이 안왔으면 난 쳐맞았을걸
승철) 타이밍이 좋았지. 내가 그 골목을 지나가고 있어서 ㅋㅋㅋㅋㅋㅋ
순영) 근데 웃긴 건 그 고딩 형들이 승철이가 자기네들이랑 동갑인 줄 알았던거 ㅋㅋㅋㅋㅋㅋㅋ
밤 열시면 분명 각 방에서 잠들 준비를 하는 아이들이었는데, 이상하게 우연히 거실에 하나 둘씩 모이더니, 이 뭉텅이는 흩어질 줄을 몰랐다. 술 하나 과자 하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정한) 승철이가 있어서 중학교 때 좀 편했지~
지훈) 근데 문제는 그 있어야 편한 애가 학교를 잘 안나왔잖아
민현) ㅋㅋㅋㅋㅋㅋㅋ그건 맞아
순영) 너희 넷도 같은 중 아냐?
승관) 맞아. 우리 삼년 내내 같은반이었잖아
명호) 고등학교 들어와서도 그럴 줄은 몰랐다 진심
승관) 표정 뭐냐 서운하게
명호) 빈말은 하지 않을게
승관) …말이라도 못하면..^^
한솔) 찬이는 그 때도 무용하느라 학교 안왔었지
찬) 맞아. 그래서 난 셋이 노는거 맨날 인스타에 올라오면 겁나 서운하더라
찬이의 서운하단 발언에 할말이 많은 듯 여러명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민규) 야 니는 근데 대학교 때도 그랬잖아~! 뭔 씨 같은 학교 애들끼리 점심먹은 거 갖고 부러워하고~!
석민) 지는 인서울 갔으면서~!~!
찬) 아니 솔직히 서운하지~! 나 빼고 먹고~!
승관) 저건 진짜 무슨 논리야? 지가 다른 학굔데 밥을 어떻게 먹냐! 우리끼리 따로 먹냐?!
한솔) 그리고 중학교 때도 무용 때문에 바빠서 못논건데 왜 우리한테 그러는거얔ㅋㅋㅋㅋ
승관) 야 우린 뭐 너랑 안놀고 싶었냐고~
찬) 아 그냥 서운했다 이거지~
여주) ㅋㅋㅋㅋㅋㅋㅋㅋ찬이는 참 감정에 솔직해 ㅋㅋㅋㅋㅋㅋㅋ
지훈) 그만큼 질타를 많이 받지 ㅋㅋㅋㅋㅋㅋ
민규) 야 서운한 거 말하니까 나 뭐 생각났어
정한) 뭐?
민규) 중학교 때 내가 여주랑 석민이랑 덜 친했을 때 인스타 친구였는데 맨날 둘만 놀러다니는거야 주말마다~!
석민) 아이야 그건~
여주) 그 땐 별로 안친했잖아~!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는 엄청 놀러다녔잖아~!
민규) 야 근데 친해지기까지 이개월이나 걸려써어~
석민) 우리 이개월이면 엄청 빠른거야~!
여주) 맞아~! 우리가 얼마나 어? 내성적인데!
정한) ㅋㅋㅋㅋㅋㅋㅋ 친해지는데 오래걸렸다니까 생각난겤ㅋㅋㅋㅋ 여주 우리 처음 봤을 때 존댓말
하던거 기억 나?
지수) ㅋㅋㅋㅋㅋㅋㅋ 엄청 귀여웠는데
여주) 아니 진짜아
아아아아 왜그러는데~!
그렇게 아이들의 수다는 열두시가 되어서야 수그라들기 시작했다.
벚꽃이 만개한 밤이었다.
•필수!
epilogue
“………….”
“…손 이리 줘.”
“..싫다고.”
미국에서 창균이 처음으로 여주의 손목을 본 날이었다. 긴팔을 입어 밴드도 붙이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냅둔 손목을, 펄럭거리는 소매 탓에 창균이 알게됐고,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여진 손목에 창균은 단단히 속상한 듯 여주에게 넌지시 손목을 보이라고 여러번 말했다.
“내가 너 그거 이상하게 생각 할 것 같아? 그래서 안보여주는거야?”
“…그럴 사람 아닌거 알아.”
“근데 왜 안줘. 빨리 손 줘. 치료는 해야할 거 아냐!”
“싫다고! 내가 알아서 한다고!”
“김여주!”
“…………”
“나 지금 너 이런 상태인 거 몰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한테 화 나.”
타지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이 나고, 널 제일 잘 아는 사람도 나고, 지금 미국에서는 김여주란 사람을 내가 제일 잘 안다고, 나 지금 그렇게 생각했는데,
“………….”
“…제일 중요한 걸 내가 모르고 있었잖아.”
…네가 이만큼 아픈 거, 내가 지금 그거 몰랐잖아.
창균의 흔들리는 목소리에 여주의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소리없이 흐르고,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대치하기가 어언 삼십분. 창균은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벅벅 지우며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
“…여주야.”
“…………”
“나 너 없으면 안돼,”
“…………”
“여기서 너마저 없으면, 난 의미가 없어.”
“…………”
“…그러니까 제발 치료하게 해줘. 응?”
다신 그런 짓 하지말라고 화 안낼게, 흉진다고 뭐라 안할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치료만 하게 해주라..
창균이 고개를 숙이자 창균의 눈물이 흰 바닥에 툭툭 떨어지고, 여주는 그 모습을 보더니 입술을 꽉 깨물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제 왼손으로 오른 팔목을 감싸 꽉 잡았다. 손 압박에 상처 사이로 피가 새어나오고, 아린 고통에 여주가 힘을 풀며 공허한 눈빛으로 창균에게 말했다. ..염치가 없잖아.
“…내가 그은 상처를,”
…왜 오빠가 치료해. 왜 그 상처를 오빠가 치료해주는데.
“………..”
“너무 이상해.”
“………..”
“내가 긋고 내가 치료하는 것도 이상하고,”
“………..”
“죽겠다고 그은 애가 누군가한테 치료 받은 것도,”
….씹, 그것도 다 이상해.
…그냥 난 내가 이상해서 싫어. 그냥 난 너무.. 이상해. 응. 이상해-….
여주가 양손에 제 얼굴을 묻고 자신이 이상하단 말을 반복하며 울었고, 창균은 그 모습을 보다 제 손에 들린 치료 상자를 바닥에 힘없이 툭 내려놓곤 여주에게 다가가 살며시 여주를 안았다.
“…………”
“…………”
안이상해. 우린 다 똑같아. 괜찮아.
안달라. 다 똑같아. 괜찮아.
하나도, 여주야 하나도 안이상해.
그러니까 제발, 제발…
제발 이라는 말 뒤에 창균은 아프지말아달라는 부탁은 제 속에 삼켰다.
네가 나의 전부니, 제발 머물러 달라는 부탁은 제 속에 삼켰다.
네 울음은 어떠한 물리적 정신적 고통보다 내게 극심하니, 울지말라는 부탁은 제 속에 삼켰다.
그것마저도, 이 여린 아이에게 혹 짐이 될까, 싶어서.
**
저 꽤 일찍 왔쬬?
즐거운 주말 되세요! 🥰🌂☔️🍀❤️
넉점반의 봄 눈 같은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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