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프리텔캄 (Roopretelcham)
모든것을 이루어지게 하는 주문
Chapter 3. 어른아이
"..와, 진짜 대단하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바로 교실 밖으로 달려나가던 전원우 뒷모습을 보면서, 그래, 쟤도 사람인데 당연히 지 할 일이 있겠지. 하곤 아무 생각 없이 나온 내가 호구 중의 호구였다. 혹여나 내가 다른 길로 새어나가 지 밥 안 사줄까봐 전학 첫 날 부터 청소도 째고 교문에서 기다렸단다. 교문에서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고 날 맞이하는 모습에 얼른 뒤돌아 다른 길로 튈까 생각했지만 막상 뒤돌아보니 저 멀리 보이는 민수인 모습에 억지미소를 짓곤 다시 전원우를 마주해야했다.
터덜터덜, 너한텐 쥐똥만큼도 밥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라는 무언의 소리와 함께 전원우를 바라보니 어깨를 으쓱 해보이곤 앞장서서 걷기 시작한다. 가방끈을 일부러 쥐었다폈다, 운동화를 질질 끌며 가기 싫은 티를 팍팍 내니 전원우가 뒤를 돌아본다. 나도 모르게 움찔해 말까지 더듬으며 뭐, 뭐. 하자 전원우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내게 묻는다.
"그렇게 가기 싫냐?"
"..."
"아, 그럼 가지 말든가."
갑자기 웬 성질, 속으로 계속 전원우만 욕하고 있던 내가 뜨끔하여 얼른 표정을 풀고 뭘 먹고 싶냐고 묻자 나를 한번 실눈을 뜨고 쳐다보더니 다시 한번 묻는다.
"진짜 가도 돼?"
"응."
"아싸, 그럼, 걸어가면서 생각해볼래."
"..."
... 마법사가 아니라 그냥 미친게 아닐까.
"맞아, 내가 여기 와서 제일 처음 먹어본게 라면이었어."
"라면?"
"응, 내 동료 집에 얹혀살았었는데 걔가 해줬거든."
"라면 끓이는 방법은 알아?"
"당연하지."
학교 앞 분식집으로 직진한 전원우는 라면 하나를 시키곤 씩 웃고있다. 자기가 이 곳에서 처음 와서 먹었다는 라면. 어딘가 모르게 정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하여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동료도 있다니, 저런 미친 놈을 동료라고 둔 '그 사람' 도 참 안타까운 인생을 살고 있구나. 나중에 만나면 꼭 같이 전원우 뒷담이라도 까고 싶은 심정이었다. 라면 끓이는 방법은 아냐고 물어보니 당당하게 안다고 썩소까지 날린다.
"스프 넣고."
"응."
"무슨 이상한 쓰레기가 있던데 우선 그건 버려."
"..."
"봉지 안에 스프를 넣고, 잘 묶은 다음에."
"..."
"부셔서 먹던데?"
내 생각엔 동료도 만만치 않은 또라이 인것 같아 '전원우 뒷담화 같이 까기' 계획은 재빠르게 철회했다. 미친, 아무리 멀쩡한 사람이 아니라 해도 라면을 저따구로 '끓여 먹은' 사람이 도대체 어딨는가. 뿌셔뿌셔도 아니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전원우를 쳐다보니 눈만 깜빡이며 뭐가 잘못됐냐고 묻는다.
잘못되긴 했지, 아주 한참...
"좀 이따 라면 나오면, 니가 끓여먹은거랑 완전 다를걸."
"뭐?"
아마 전원우가 말한 '이상한 쓰레기'는 후레이크일거고, 이 자식은 라면에 물도 붓지 않았다. 잠시 후 나올 진짜 라면을 보고 무슨 표정을 지을진 이미 다 예상이 간다. 제가 생각한 라면이 아니라는 말에 눈빛이 불안해지더니 주방만 계속 쳐다보고 있다. 누가보면 라면에 독이라도 타는 줄 알겠다, 정말.
"여기, 라면~"
"..."
전원우의 눈이 빠르게 흔들린다. 그 모습에 웃겨 입을 앙다물고 웃음을 참으니 전원우가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든다. 젓가락도 서툴게 잡고, 입술만 적시고 한참을 어쩔줄 몰라하며 허공에서 젓가락만 휘적거리던 전원우가 결국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내게 묻는다.
"..이거 어떻게 먹어?"
"라면, 라면 하나도 못먹어."
"진짜 조용히 해."
"마법사라면서, 라면 하나도 못 먹-"
"야이씨."
본의 아니게 분식집에서 라면전쟁을 치른 전원우가 나오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30분간의 사투가 너무 웃겼던 나머지 분식집에서 나오자마자 웃음을 터트린 내가 계속 전원우를 놀리자 그만하라며 눈치를 보곤 얼른 다른 곳으로 향한다.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계속 전원우를 놀리자 결국 전원우가 뒤를 돌아보곤 날 쏘아본다. 그 모습에 놀라 얼른 웃음을 멈추니 전원우 얼굴이 새빨개진다.
"아니.. 처음 먹어봤다고."
"..."
"권순영이 그렇게 해줬는데 뭐 어쩌라고!"
"...푸흡.."
"아, 웃지마!"
"..."
아무래도 전원우에게 '라면 먹는법'을 알려준 또라이의 이름은 권순영인가보다. 누군지 참 궁금하네, 라면 먹기의 개척자.
"자, 이제 말해봐."
"뭘?"
"넌, 뭐냐."
"..."
"아, 말이 좀 이상했어. 넌 어떤 사람이냐고."
창피했는지 전원우가 얼른 그 주변을 빠져나와 인적 드문 공원으로 나를 데려갔다. 벤치에 나를 앉히곤 그 앞에 서서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넌, 뭐냐. 그러게, 넌 진짜 뭐하는 애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전원우를 쳐다보니 말을 고친다. 나를 구원해주려면 적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며 성화다. 앞에서 징징거리는 징징이를 세워두고 생각해봤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응."
"소심해."
"응."
"그리고.. 말도 없는 편이고."
"응."
"싫은 말 잘 못해, 내가 손해보더라도."
"..."
"인내심 하나는 엄청 센데, 면역력이 좀 세거든."
"..."
"맷집도 세, 여러 번 맞아봐서."
"..야."
덤덤하게 말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가득 맺히자 전원우가 앞으로 다가온다. 이럴 줄 알았다면서 한 손으로 내 눈을 가린 전원우가 한숨을 한번 쉬곤 다른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 품에 안아버린다.
"야, 그냥 울어."
결국 앉은 채로 전원우 품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그래도 잘 울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만해도 벌써 전원우 때문에 엄청 울었다. 그냥-. 전원우가 말없이 쓰다듬어 주는 그 손길이 너무 고팠던건지, 최근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진심 가득한 손길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울컥 했나보다. 나에게는 너무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만 생각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줄이라곤 꿈도 꿔보지 않았으니까.
오랫동안 한마디도 안하고 등을 토닥여주던 전원우가 무릎을 굽혀 앉아 나와 눈을 마주친다. 거의 눈물을 그친 내가 창피한 마음에 애꿎은 땅만 바라보고 있으니, 말없이 미소만 지으면서 나만 바라보고 있다. 그 모습이 하도 부담스러워 결국은 슬쩍 시선을 올려 전원우와 눈을 마주치니 픽 웃으며 내게 말한다.
"이제 알겠다."
"..."
"너가 날 왜 불렀는지."
"..어?"
되물음에 말없이 웃기만 하던 전원우가 손에서 뚝딱 보라색 손수건을 만들어냈다. 내 손에 말없이 쥐어주곤 이제 집에 가자며 날 일으킨다. 아까와는 다르게 상냥해진 전원우를 보며 말없이 뒤를 따랐다. 이 자식, 이중인격도 아니고. 아까는 그렇게 빽빽 소리만 지르더니 지금은 순둥순둥 상냥 그 자체다.
여차저차 전원우 밥도 사주고, 자신은 일이 있어 다른 곳으로 가봐야한다는 말에 전원우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전원우가 준 보라색 손수건을 손에 꼭 쥐고, 하루종일 전원우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오늘 제일 웃겼던 건 라면 하나도 못먹고 쩔쩔 맸던 전원우. 그리고 제일 창피했던건 전원우 앞에서 그렇게 운거.
에라, 모르겠다. 피곤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버렸다. 엄마는 오늘도 늦게 들어오실 것 같고, 남동생은 또 어디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새벽이나 되어서 집에 올거고.
"..."
아무 말 없이 침대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다 어릴 적 동생과 함께 천장에 붙인 야광별이 눈에 들어왔다. 바쁜 일상에 치여서, 혹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잠에 빠져들어 거의 몇년동안 잊고 지냈던 추억이 담긴 야광별. 오랜만에 눈에 들어온 별들에 씩 웃어보였다. 저거 붙일 때 참 재밌었는데-
"누나, 나 키가 안 다아!"
"웅, 누나가 해주께."
"..."
"...짜안!"
"와, 예뻐! 짱 예뻐!"
"재진아, 나중에 크면 꼭 이렇게 예쁜 사람 되야 해, 알아찌?"
"웅!"
그 땐 둘 다 참 많이 어렸었다. 엄마가 자고 있을 때, 몰래 잠이 안와 동생을 불러 함께 천장에 박아두었던 별들. 바람같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가버려 놓쳐버리고 있던 시간들을, 우리가 추억으로 남겨두었던 별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같이, 문득 별이 눈에 밟혀 어린 추억을 다시 한번 선물해준 것처럼. 나중에 커서 꼭 저렇게 반짝 반짝 빛나는 별이 되겠다던 내 동생은, 이미 그런 건 다 지 방구석에 쳐박아버렸는지 한껏 허세에 물들어 양아치가 되어버렸다. 김재진, 누나가 널 그렇게 키웠냐.
"..."
올바른 길로 가게 해주어야 할 누나가, 힘도 없이 자신과 같은 부류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당하고 있다는걸 재진이가 알게되면, 걘 무슨 생각을 할까?
"...어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가뜩이나 누나를 호구로 보는 피 같은 내 아들래미인데, 누나가 학교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걸 알기라도 한다면-. 눈 앞이 아찔해져 얼른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런 생각 하지도 말아야지, 말이 씨가 될라. 밍기적거리며 침대 밖으로 나와 교복을 갈아입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시간을 보니 10시, 전원우랑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얘기한 탓에 시간이 많이 늦었다. 딱, 12시까지만 공부하다가 자야지.
"...우."
"?"
"...원우."
"안 들려."
"전원우."
"왜."
"아, 이제 됐네. 어디야, 너?"
"어디긴, 옥상이지."
"아니, 백날 기다려봤자 그거 안 온다니까?"
"아, 헛소리 하지말고."
"..진짜 미치겠네. 너 지금 수배범인건 모르냐?"
"알지. 나 완전 슈퍼스타잖아."
"미친 놈아, 슈퍼스타 타령하다가 쓱 잡혀갈래?"
"아, 왜 갑자기 *혜성으로 잔소리야, 잔소리가."
* 혜성 : *달의 주인들의 통신망
* 달의 주인 : 지구와 가장 가까운 천체, 달을 지키는 수호자들의 통칭
"아, 위에서 너 찾잖아, 빨리 오라고."
"안 간다 그래."
"안 가면 너만 죽냐? 나도 죽어, 미친 놈아!"
"죽-어도 안 간다 그래."
"아니, 달 조각만 찾으면 바로 오겠다던 놈이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지랄이야?!"
"끊는다-"
"야, 야!"
"권순영, 더럽게도 시끄럽네."
달이 제일 잘 보이고, 아름답게 뜨는 여주가 사는 아파트 옥상에 기대 앉아있던 원우가 혜성을 차단시켜버렸다. 오랜만에 온 혜성에 좋은 일이라도 생긴건가 싶어 얼른 받았더니 돌아오는 동료 순영의 폭풍 잔소리. 순식간에 기분이 다운 된 원우가 애꿎은 달만 바라봤다. 원우가 이 쪽 세계에 내려와 찾고 있는건 자신이 놓쳐버린 7번째 달 조각. 어린 나이에 달의 주인이 된 원우가 제일 중요하게 지켜야 했던 건 자신이 맡은 7번째 달조각이었다.
인간들의 수없이 많은 감정들을 달의 주인들은 수 십개의 달 조각으로 정해놓았다. 기쁨, 즐거움, 행복. 달의 주인들은 모두 관리가 쉬운 긍정적인 감정들을 담은 달 조각을 맡길 원했고, 이제 막 달의 주인이 된 원우가 맡을 수 있는 건 모두가 선택하지 않은 딱 하나의 감정. '외로움' 이었다. 부정적인 달 조각인 만큼 달 조각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달의 세계는 난리가 난다. 부정적인 달 조각들 중에서도 단연 말썽쟁이었던 '외로움' 의 조각은 초보미 가득했던 원우의 눈을 피해 잽싸게 도망가버렸다.
부정적인 달 조각들이 달의 주인들의 눈을 피해 도망 칠 수 있는 단 하나의 공간. 달의 주인들이 쉽게 내려갈 수 없는 인간들의 세계. 그 속에서도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인간이 나타나면, 달 조각은 달의 주인을 피해 빠져나갈 준비를 한다. 달 조각이 주인의 손에서 사라진다면 달의 주인은 이미 윗선에서 죽은거나 마찬가지. 달 조각을 찾아가지 못하면 전원우는 죽는다. 생사의 갈림길에 강제로 서게 된 원우가 짐작하고 있는 달 조각의 행방-.
"아무래도 그거."
"김여주한테 간 것 같아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