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 : P
"코드네임 Z, 현재 적군와 대치중입니다."
"애들 데리고 공격 시작하겠습니다."
".. 혹시 연락이 안된다면, 지원, 부탁합니다."
왼쪽 어깨 위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붉었던 코로나 아스트레일스 요원 표식을 단 채 제 총을 가지고 내린 순영이, 자신들과 대치중인 무섭게도 반대적인 파란 표식의 코로나 보리얼리스 군들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순영의 눈에 들어온, 적군 가장 앞에 서있는 흑발의 남자. 지난 4월 1일 자신이 잃었던 기억 속 바로 그 남자였다. 짧게 기침을 뱉어낸 순영이 마지막으로 통신부에 자신의 말을 짧게 전하곤 오는 내내 거슬렸던 통신기를 빼냈다.
"가자."
제 부대원들을 뒤에 세운 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적군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순영이, 제 바로 앞에 겨뉘어져오는 총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흑발의 남자가 아닌, 그의 부하로 보이는 요원의 총구. 잠시 눈을 감고 입꼬리를 당겨 기가 찬듯 웃어보인 순영이 느리게 눈을 뜨곤 제 앞에 서있는 흑발의 남자에게 물었다.
"여기서,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건가?"
"..."
"왜, 내가 용케 살아있어 꽤 실망한 표정인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씩 웃어보인 순영이 눈 깜짝할 새 총구를 손으로 쳐내곤 그의 부하를 가볍게 넘어트렸다. 그의 행동에 모두가 총구를 겨눈 채 긴장상태였으나, 순영과 원우만큼은 그 어느때보다 여유로웠다. 그들의 표정으로만 보아서는, 절대 전장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살아있어주어서, 고맙네."
"뭐?"
"한번 더 너를 죽일 수 있게 되었잖아."
순영의 말을 가볍게 쳐낸 원우가 한걸음 순영의 앞으로 다가섰다. 잘, 지냈어? 여우처럼 씩 웃어보인 원우가 순영의 어깨를 두어번 톡 치자, 순영이 날카롭게 그의 손을 쳐냈다. 한걸음 뒤로 물러선 원우가 역시 변한건 없는 것 같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자 순영이 제 허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이거."
"..."
"네 작품 아냐?"
낮은 목소리의 순영이, 지난 4월 1일의 순간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고통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원우는 사뭇 놀란 표정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것만 같던 사람이,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것만 같은 눈빛으로 자신에게 그 날의 기억을 되묻는 꼴은 한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일까. 무언가가 잘못되었긴 했구나, 라고 생각한 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때 네가 한번 더 개기지만 않았어도-"
"아니."
"..."
"그 때의 내 선택, 한번도 후회해본 적 없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4월 1일, 그 때와 똑같은 눈빛으로 원우에게 날을 세우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CA 또라이의 모습이었다. 그 날의 기억을 자신도 모르게 다시한번 떠올린 원우가 웃어보였다. 역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먼저 총을 꺼낸 순영이 자세를 잡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 다시 그의 부대 앞에 섰다. 순영이 뒤로 물러섬과 동시에 CA와 CB의 대치상태가 다시 한번 이루어졌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원우가 총을 들곤 순영에게 물었다.
"날 죽이고 싶어?"
"..."
"그럼, 그 때처럼 개겨봐."
"..."
"상대는 얼마든지 해줘."
"그 말, 후회하지 마라."
원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영이 연막탄을 던졌다. 순식간에 연기가 퍼져버린 두 부대의 사이. 순영의 외침과 함께 총탄이 두 부대를 덮쳤다.
- 코로나 보리얼리스, 작전본부
"오셨습니까."
"상황 보고해."
"현재 W가 이끌고 있는 부대가 CA 쪽과 전투 중입니다."
"다른 곳은."
"현재 전투 중인 곳은 모두 4 곳입니다."
"메딕쪽은 어때."
"물자, 인력 모두 이상 없습니다."
".. 해커는."
"이상 없습니다."
본부로 돌아온 조슈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읽은 CB 요원들이 모두 전투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을 보아 평화로운 협상은 이미 결렬된지 오래일 터. 남은 것은 조슈아의 선택 뿐이었다. 전쟁의 끝을 승리로 이끌어나갈 것인지, 아니면 다시 한번 물러설 것인지.
"전 병력, 모두 전투 지원 시작한다."
"네."
"메딕팀 쪽 지원을 제외한 모든 요원들은 다 준비 시작해."
"네."
"적어도 이 전쟁만큼은, 절대 패해서는 안된다."
밖을 바라보는 조슈아의 표정이 날카로웠다. 제 비서를 제외한 모든 요원들이 전투 지원을 위해 본부를 떠나자 그제서야 조슈아가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승철을 보낸 후로부터 자꾸만 느껴지는 통증에 갑갑했던 숨을 느리게 몰아쉬었다. 이번에도 자신이 단단히 잘못한것이라는 직감이 그의 목을 죄여오자 숨은 더 가빠졌다. 결국 조슈아가 주저앉아 소리내지 않은 채로 울기 시작했다. 눈치가 빨랐던 그의 비서가 조용히 자리를 비켜준것도 모른 채, 작년 겨울 승철을 만나 상처를 입고 돌아왔던 그 날의 밤, 그 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그의 텐트 앞에 서 가만히 울음소리를 듣고 있던 N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우리의 시작은 이러지 않았는데. 무언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요즘들어, 오늘은 특히나 많이 느끼고 있던 여주가 조용히 눈을 감아보았다. 상황과는 맞지 않게 자신을 부드럽게 휘감는 바람이 오늘은 어찌나 밉게 느껴졌는지, 눈을 감으면 자꾸 잔상이 떠오르는 원우의 모습에 감고 있던 두 눈 속이 바람마냥 흔들렸다. 아직까지 실려온 부상자는 없다. 이제 내전이 시작되었으니 지금 자신이 쥐고 있는 두 손은 곧 피로 물들여질 터. 제 반대쪽 손에 꼭 쥔 채 가져왔던 신경안정제를 조슈아가 울고 있던 텐트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가 더이상은 무너지지않길 속으로 바라며.
약을 두고 다시 의료본부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산산조각이 나 부서진 돌조각들이 발에 채여 잔상처가 났음에도 지금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혹여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의료본부에 원우가 누워있지는 않을까, 제 동료들이 쓰러져 실려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온 몸이 흔들렸다.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3세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행복했을까?
"B, 부상이 심각합니다."
"B, 베드가 부족해요!"
"한솔씨, 약 채워주세요-"
아직까지는 고요하던 CB의 의료본부와는 달리, 정반대의 상황이었던 CA의 의료본부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벌써부터 피로 물들어버린 하얀 침대들과 붕대. 수많은 신음소리에 파묻혀버린 의료팀들의 다급한 외침. 그 속에서 정신을 차려야만 했던 승관과 한솔은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혹여 제 동료들의 얼굴이 보이면 어쩌나 싶어 가슴 한켠이 꽉 막혀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시작한지 벌써 반나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 속에서, 그들의 동료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지금 자신들이 자리하고 있는 의료본부는 그들이 올 곳도, 와야 할 곳도 되지 못하였으니.
- 통신본부입니다. 코드네임 B, 응답바랍니다.
정신없이 부대원들의 상처를 치료하던 승관이 제 통신기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다급하게 붕대를 감고 있었다. 통신본부의 통신 재요청에 결국 한솔이 달려와 승관을 불렀다. 한솔이 마주한 승관은 정신이 반 쯤 나가있던 상태, 눈동자에 비친 핏자국들이 그의 눈이 마치 피로 얼룩진 마냥 보이게 했다. 물끄러미 승관을 지켜보던 한솔이 결국 통신을 돌렸다.
"코드네임 V, 현재 상황 좋지 않습니다. 대신 응답합니다."
- V, 현재 3세계 동쪽에서 코드네임 Z를 선두로 전투중인 내전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
- 메딕팀 지원을 부탁합니다. V에게 메딕팀 RC 지휘권을 부여합니다.
".. 통신 완료."
통신을 끊은 한솔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말없이 제 하얀 신발이 피로 물들어있던 것을 바라보던 한솔이 고개를 돌려 승관을 쳐다보았다. 지금 자신이 승관에게 이 사실을 전한다면, 그는 아마 정말로 무너져내릴지 모른다. 흔들리는 곳에서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한솔이 결국은 발걸음을 옮겼다. 피로 물들어 있던 하얀색 의사가운을 벗어던지곤 새하얀 새 가운으로 갈아입은 한솔이 모든 장비를 챙겨 나오며 통신을 보내었다.
"메딕팀 RC, 지금 모든 약품, 장비 챙겨서 의료본부 앞으로 나옵니다. 나오는데 30초."
"늦는 사람은, 방금 전우 한 명을 잃은겁니다."
"…K 통신."
- 통신본부입니다. K, 보고바랍니다.
"…죽겠습니다……."
- K, K? 현재 위치 어디입니까.
"……"
- K, K !
연막탄의 연기로 정신이 아득해지던 민규가 힘겹게 통신을 보냈다. 통신본부에 어찌됐건 지원 요청을 보낸 민규가 기침을 하며 무너져내린 돌에 몸을 기댔다. 적군이 터트린 수류탄에 의해 제 주변엔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웃었던 동료들의 시체가 즐비하다. 몸에 전해져오는 소름에 민규가 눈을 꾹 감았다. 자신의 부상도 적지 않다. 허리를 빗겨나간 총알, 욱신거리는 느낌에 이를 꾹 깨물었다.
"아… 아파 죽겠네…."
고요함 속에서 혼자 불러보는 동료들의 이름, 대답이 없는 그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민규가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그 날, 그 때도 하늘은 참 파란 하늘이었는데.
"Z, 팔은 좀 괜찮습니까?"
"어, 손가락 하나 안 잘려나간게 다행이다."
"Z…"
"지금… 좀 많이 보고싶습니다……"
"살아있긴… 한겁니까…."
"H는 또… 어디에 있는겁니까…"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한 민규가 주먹을 꽉 쥐곤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차갑게 느껴져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폭탄으로 부서진 유리조각을 치워도 마냥 행복했던 그 때를 가슴으로 느끼며. 자꾸만 아려오는 가슴 한켠이 너무 아파 엉엉 울면서. 하루 빨리 이 전쟁을 끝내고, 다시 회의실에 앉아 순영과 승관의 헛소리를 듣고 싶다고. 지훈이 작업하고 있던 해킹파일을 지훈 몰래 보다가, 지훈에게 걸려 등짝을 한 대 맞아도 정말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내 선택, 후회하지않을겁니다."
"설령… 모두가 알게 된다 해도……"
"나는……"
"큭………"
"아프지."
모두가 쓰러진 가운데 순영은 원우와 대치 중이다. 금방이라도 제 목에 칼이 들어올 상황에 제 멋대로인 순영의 허리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한다. 순영의 정신이 잠시 아득해졌다. 그 상황을 눈치 챈 원우가 여우같은 웃음으로 순영에게 묻는다. 순영이 이를 악물었다. 다시한번 고통을 참아낸 순영이 원우를 세게 밀쳐낸다. 서로가 지친 상황, 현재 CA 쪽 의료팀은 지원요청을 받아 이 곳으로 오고 있는 상황, 그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상황을 끝내야한다.
상황을 끝내기 위한 선택은 딱 두가지.
전원우를 죽이거나, 전원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Z, 많이 지치지 않았어?"
"..."
"그만할까?"
"닥쳐."
"아량을 베풀어도, 받아먹질 못하니, 원."
순영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원우가 순영의 다리를 세게 차 넘어트렸다. 순영에 비해 반듯하기만 한 원우의 상태, 지금으로선 순영은 절대 원우를 죽일 수도, 이길 수도 없다. 순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이 상황,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재밌는거 알려줄까, Z?"
금방이라도 무너질것만 같던 순영의 앞에, 4월 1일의 그 날처럼 무릎을 굽히고 앉아 씩 웃어보이던 원우가 순영과 눈을 맞추곤 눈썹을 올려보였다. 말해줄까? 또 어떤 헛소리를 내뱉을까 싶어 순영이 기가 찬듯 웃어보였다. 지친듯한 순영의 귀에 원우가 속삭이던 그 한마디.
그 한마디가 순영을 일으켜세웠다.
"너희 팀에, 우리 쪽 스파이가 하나 있어."
"..."
"그리고 난 그게 누구인지 알아."
눈이 번쩍 뜨인 순영이 그대로 원우의 멱살을 잡아 넘어트렸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H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저 여우의 입에서 이지훈의 이름이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순영이 원우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말해.
"누구였으면 좋겠어?"
"말하라고."
"..."
순영의 표정을 보고 입꼬리를 올려 씩 웃은 원우가 순영의 귀에 다시한번 속삭였다.
"코드네임."
"..."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