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 : Q
순영은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을 모두 부정했다. 마음 한 켠에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었던, 'H가 조직을 떠났을 것' 이라는 두려웠던 감정. 그 모든 것을 깨부수어버린 원우의 말에 순영의 속은 뒤집어지는 듯 했다. 순영이 온 힘을 다해 원우를 밀쳐내고 제 옆에 떨어져있던 총을 주워 그대로 사격했다. 원우의 팔을 빗겨나간 총알, 비틀거리는 원우를 뒤로 한 채 순영이 그대로 의료본부로 달리기 시작했다.
"김민규 어딨어."
"네? 방금 치료 받으시고 건물로 들어가셨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 마냥 피로 얼룩진 몸을 이끌고 휘청거리며 들어온 의료본부, 아무나 낚아채 잡곤 민규의 행방을 묻는 그의 얼굴은 아마 그 누가 보았다한들 쉽게 잊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민규의 행방을 알아낸 순영이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 코너를 돌자, 그가 그렇게 살아있기만을 기도하던 K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K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날 속였어."
민규의 이마 중앙에 총을 대고 묻는 순영의 목소리와 손이 떨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것 같은 Z의 눈에 민규가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사실, 금방이라도 순영의 손을 낚아채고 그 총구를 순영에게로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왜?
저를 그렇게 아끼고 챙기던 순영에게 결국 제 정체를 들켜서?
아니면, 순영이 지금 느끼고있을 배신감과 절망감이 제 머리로 너무나도 아프게 다가와서?
순영은 금방이라도 주저앉고싶었다. 모든게 꿈이었으면- 하고 자꾸만 눈을 감았다 떠봐도, 지금 제 눈에 끈질기게도 비추어지는건 아무말도 하지않는 배신자, 제가 아끼던 후배인 K뿐. 심장부터 울컥 차오르는 설명할수 없는 감정에 순영은 자꾸만 크게 심호흡을 한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자꾸 가슴이 욱신거려와 순영이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네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지, 네 입으로 직접 설명해."
순영이 아픈 제 심장을 겨우 짓누르고 민규에게 묻는다. 사실, 설명 같은건 듣고싶지 않다. 그저 모든게 오해라고- Z가 무언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것이라고, 당황하며 변명이라도 해주기를 바랬다. 총을 잡은 손이 자꾸만 떨려 총을 다시 고쳐잡았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 제 귀로 박히는 말에, 순영은 결국 총을 놓친다.
"여기까지 와버렸네, 그 쪽만 안 만났어도, 나 이렇게까지 미련가지지는 않았어."
민규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총이 떨어져 비어버린 손 안을 묵직한 공기가 휘어감았다. 순영은 제가 들은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랬다. 하지만 무섭게도 순영이 지금을 현실이라고 느끼게 한 말이 또한번 제 귀에 박혀들어온다.
"제 임무는, CA정보를 CB쪽에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민규의 말과 함께 순영이 울컥하며 입술을 깨문다. 제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싶지도 않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입술에서 피가 날 때까지 눈물을 참았다. 혀를 통해 너무나도 익숙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결국 순영이 눈물을 터트렸다. 누구보다 가까이, 누구보다도 많이 K를 지켜봐온 순영은, 지금 K가 일부러 모진 말을 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더 가슴이 미어진다.
"Z는, 겉은 강하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 여리더군요."
"..."
"그런 Z를 암살하는것 또한, 제 두번째 임무였습니다."
"..."
"하지만 두번째 임무는 실패했습니다."
"..."
"그리고 앞으로도, 실패할 예정입니다."
K의 말에 결국 순영이 어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앞으로도 자신을 죽이는 임무를, 영원히 실패할 것이라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순영은 그 날 처음, 무섭게도 심장이 아파왔다. 넌, 넌 도대체 왜-
"아마, Z가 지금 절 죽이지않는다면…"
"..."
"전 CB로 돌아가, J에게 죽임을 당하겠죠."
"..."
"상관은 없습니다. Z."
"..."
"Z는 언제까지나, 제 인생에서 가장 멋진-"
"..."
민규의 말이 끊기자, 바닥을 보고있던 순영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눈물이 가득맺혀 시야가 흐릿했지만, 민규의 손에 피가 묻은것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당황한 순영이 빠르게 일어나 민규의 손을 낚아챘다. 그와 동시에 민규가 힘없이 쓰러진다.
"뭐야, 너, 왜그래."
"..."
"김민규, 정신 차려."
"Z."
"죽을 생각 하지마, 아직 나한테 덜 맞았어. 빨리, 일어나."
"Z는……"
민규를 부축하던 순영의 손에 붉은 피가 묻었다. 아까 현장에서 허리에 총을 맞은게 분명했으나, 그의 입에서도 피가 보이자 순영의 손이 멈추었다. 알 수 없는 상황에 순영은 머리가 하얘지고, 민규는 눈을 감으며 씩 웃어보인다. 그의 눈엔 눈물이 맺혀있다.
"웃지마, 장난 치지말고 당장 일어나라고 했어. K."
"Z는…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아, 일어나라고!"
"조직에서 버려져도 제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일어나, 김민규."
"끝까지 살아남으십시오. V에게 가면……"
"김민규!"
"제,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겁니다."
"..."
"용서해주십시오."
"김민규."
"다음 생엔… 이렇게 지독한 인연으로는, 만나지 맙시다. Z."
"김민규!"
순영의 눈에서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제 품에 안겨있던 K는 미동조차 없다. K가 죽었다.
순영이 한참을 K를 품에 안고 울었다. 미동조차 없는 민규의 얼굴을 자꾸 만져보며 순영은 그 언제보다도 더 서럽게 울었다.
제가 가장 아끼던 사람들이 곁을 떠날 때엔, 언제나 비가 내렸다.
"비 옵니다, Z, 우산도 안 챙겨가고 뭐했습니까?"
"당연히~ 너가 가져올거라고 예상하고있었지-"
"..."
"Z~ 제가 많이~ 존경합니다아~!"
"얘 왜이래!"
"Z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스나이퍼에요~"
"꺼져! 더러워!"
"야, K 많이 취했다, 빨리 데리고 꺼져!"
모든 것이 변했다. K를 처음 만났던 그 날 본부에서 키우고 있었던 분홍빛의 코스모스는 시들었고, 덜렁거리던 K의 신분증을 본부 쓰레기통에서 찾은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K에게 인수인계를 하던 달이 참 밝던 그 날, 본부에서 제일 먼저 친해진게 자신이라며 순영에게 민망한 듯 웃으며 말하던 K를 귀여워 했던 그 날.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바뀌었어도 K만은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순영을 따르며 불화산같던 순영의 성격을 유일하게 잠재우던 그 사람은 이제 없다. 작전이 진행될때면 온 몸을 부대끼곤 좁은 침낭 안에서 함께 큭큭 거렸고, 별이 반짝였던 밤하늘 아래에서 잠을 자던 그 사람은, 이제 정말 없다. 순영이 믿고 의지할 또 하나의 사람을 잃었다. 심각한 일이 일어났을 때에도 언제나 긍정적인 모습으로 본부 사람들을 일으키던 아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던 새벽, 동료들 몰래 라면을 끓이려다 스프가 두 개나 나와 세상을 다 가진듯이 기뻐했던 소년. 웃는 모습이 참 예뻤던 아이.
순영은 한참을 울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아파올 때까지 순영은 민규를 붙잡고 울었다. 일어나라고, 거짓말 치지 말라며 민규를 흔들어도 미동조차 없었던 그. 제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것도 모른 채 순영은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울었다. 불안한 마음에 순영을 따라 올라가본 메딕팀 후배가 순영과 민규를 발견한 것은 그 후의 일. 사색이 되어 둘을 데리고 내려오자마자 그 둘을 마주한 승관의 표정이 무너진다.
"지금 이 상황, 뭡니까."
"..."
"김민규, 뭐냐고요."
"..."
"권순영, 대답해요."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 승관이 성큼 다가와 순영의 뺨을 소리나게 때렸다. 그대로 돌아간 얼굴, 하지만 미동도 없는 그. 그와 동시에 중심을 잃은 민규의 몸이 그대로 승관의 앞으로 넘어진다. 승관의 손이 떨린다. 권순영, 빨리 상황 설명해요. 김민규 왜 이래요.
"..."
"권순영!"
승관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순영이 그대로 의료본부를 나간다. 그 상황 속에서도 승관은, 순영의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을 보았다.
순영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V의 간이텐트. 비가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순영은 끝까지 걸었다. 제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자신이 걸어온 길은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순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신이 지금 너무 절실해서일까, 제 어깨에 실탄 한 발이 스쳐지나간것도 모른채 순영이 텐트 안으로 들어섰다. 금방이라도 부서질것 같은 텐트, 그 안 테이블에 혼자 앉아 팔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애써 삼키고 있는 한솔을 보며 순영은 또 한번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처음으로 후회를 했다, 자신이 제 3세계로 발을 들인 그 날을.
순영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는지, 한솔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가득 맺힌 두 눈으로 결국 허탈하게 웃어보인다. K, 죽었나보군요.
"말해줘."
"K에 대해서… 말입니까."
"응."
"…어디부터 말을 해드릴까요. 다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아이, 많이 아팠어?"
"..."
순영의 말에 한솔이 입을 떼지 못했다. 한참 정적만이 흐르던 중, 한솔이 한번 숨을 짧게 내뱉곤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이미 CB에 있었을때부터요."
"근데 왜, 그 앨 스파이로 보냈어."
"…자신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
"자신이 아프다는 걸, 치료 할 수 없다는 걸 자신도 잘 알고 있었거든요."
"..."
"그래서, 자원했습니다. 자신이 스파이가 되기로."
"…허."
"CB 요원들 중, K가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건 저 뿐이었습니다. 다른 메딕이 또 있었긴 했으나, 제가 전담 메딕이었으니까요."
"…왜, 말리지 않았어."
"K는, 스스로에게 미련이 없었습니다."
제 목숨에 미련이 없었다는 말에 순영은 또 한번 울컥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건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는 순영을 보며 한솔이 한숨을 쉬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가 머지않아 죽을거라는걸."
"..."
"그래서, 갔습니다."
"..."
"사실 K가 제 3세계에 들어온 이유도 그 것 때문이었습니다."
"...뭐?"
"제 2세계에서, 태어나자 마자 버려진게 K입니다."
"..."
"제 아버지의 선천적인 병을 가지고 태어난것 같더군요. 그래서 버려졌습니다."
"..."
"버려진 K는, 잠시 제 2세계에 갔다왔던 J의 눈에 띄어 제 3세계로 들어왔습니다."
"…하필, 왜……."
"J 없었으면, K는 아마 2세계에서 이미 죽었을겁니다."
"K는, 진짜 CB의 스파이가 아닙니다."
"…뭐?"
순영의 눈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지금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스파이는 한명이 더 존재한다는 이야기.
"이제야 말씀드려 상당히 죄송한 부분이지만."
"..."
"아마, CB가 휴전 중간에 H를 영입한 것 같습니다."
"…H?"
순영은 제가 들은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랬다. 진짜 스파이가 H라니, 순영은 믿기도, 듣기도 싫었다.
"언제부터."
"아마 11월부터였을것으로 예상됩니다. 제가 CA로 들어오고 나서 얼마 안됐을 시기니까요."
"왜, 왜.."
"CB의 D, 그의 동생입니다."
"..."
계속해서 치고 들어오는 이야기에 순영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귀를 막고 싶었다. 아니, 그냥 모든게 다 꿈이었으면 했다.
"CB의 도겸의 본명은 이석민, 그리고 H가 이지훈, 아닙니까?"
"…맞아."
"D의 기억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J가 K를 통해 그에게 도겸이 H의 동생이라고 전했을겁니다."
"..."
"H는 심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지친 상태였고. 제 동생의 생존 소식을 듣고 나선 J의 꾐에 넘어가 CB로 직행했어요."
"..."
"그렇게 스파이가 되었을겁니다. 추정이지만요."
- 코로나 아스트레일스, 11월
"H, 잠시 드릴 말씀이."
"뭔데?"
K가 제 방에 있던 H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온 것은 10월의 마지막 밤. 잠시 뜸을 들이던 K가 H에게 입을 열었다.
"...H, 동생을 찾았습니다."
H에겐 2세계에서 제 3세계로 넘어오던 중, 2세계의 공격으로 인해 도망치다 잃어버린 제 유일한 핏줄이 있다. 부모를 2세계에서 잃고 유일하게 남은 자신의 혈연, 그 혈연을 지금 찾았다고 K는 말했다. 빠르게 요동치는 지훈의 동공을 보며 민규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가 스파이라는 것을 밝히는 날이기도 하지만, 이 상황을 잘 이용한다면 지훈을 CB로 끌고 오는것 또한 쉬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예전, 8월에 H가 찾았던 그 해커 말입니다."
"…뭐?"
"CB의 D, 그가 당신의 동생입니다."
거짓말 하지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가려고 하는 지훈의 팔목을 민규가 급하게 잡아챘다.
"이석민!"
"..."
"그 쪽 동생 이름 맞잖아요, 이석민."
"..."
지훈의 몸이 흔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K의 눈을 응시한다. 너,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금방이라도 민규를 넘어트릴것만 같은 눈빛의 지훈이 민규를 매섭게 노려본다. 민규가 한숨을 한번 쉬고는 지훈을 제 옆에다 다시 앉힌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민규가 결국은 제 방바닥을 응시하며 말한다.
"CB로, 넘어갈 생각 없습니까."
"…장난해?"
"CB의 D, 형을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
"지금 H가 CB로 넘어가는게, 제일 옳은 선택일겁니다."
"미쳤어? 조직을 배신하란 얘기야?"
"D, 그 쪽이 넘어오지 않으면 죽을겁니다."
"..."
"CB는 원래 그런 곳인거 잘 알지 않습니까."
"…동명이인일수도 있잖아."
지훈의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은 민규가 제 주머니에서 사진을 하나 꺼낸다. 아침에 조슈아에게서 받아온 옛날 사진 한 장. 어린 아이 두 명이 집 앞 마당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에 결국 지훈은 한숨을 토해낸다.
"가세요, CB로."
"…넌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전 CB 스파이입니다."
"…아, 진짜."
"..."
"왜…, 진짜 왜……"
민규의 말에 머리가 아픈지 머리를 쥐어잡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던 지훈이 결국은 소리없이 울기 시작한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지훈이 하염없이 운다. 몇 년만에 생사를 알게 된 제 하나뿐인 동생이 적이 되어 나타났다. 지금 자신의 조직을 배신하고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느냐, 동생을 버리고 동생을 적으로 만들고 싸우느냐, 지훈이 선택할 수 있는건 오직 하나다.
"..갈게."
"..."
"내 동생 죽는대잖아, 너 같으면 안 갈거같아?"
"…전해놓겠습니다. 그대신, CA 내부에서 알려진다면……"
"알아."
"…전해놓겠습니다."
10월 31일에서 11월로 넘어가며 그 어느 날보다 어두웠던 밤, CA의 해커가 조직을 떠났다.
그 날 이후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H의 모습에 한동안 민규는 가만히 제 방에만 틀어 박혀있었다. 제 방으로 달빛이 새어나오던 새벽, 제 모습과는 반대되던 밝은 달빛에 손을 가까이 대어보던 민규가 달빛에 몸을 숨기었다.
"그 쪽이, 저 대신 가는겁니다."
"…나는, 이미 틀렸어요."
"..이제부터 그 쪽은 CB, 나는 CA인겁니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좋은 선택일지도 몰라요……."
CB을 배신한 K와, CA를 배신하고 CB로 들어선 H.
각자의 사정은 이렇게 다르게 꼬여 믿지 못할 결과를 초래한다. 모든게 부질없는 싸움. 그 속에서 없는 희망을 찾기란 모두에게 힘든 일이었다.
"…민규는, 어떻게 된건데."
"CB에서 제명되었습니다."
"뭐?"
"그 쪽 입장에서는… 조직을 배신한거니까요. 저처럼."
"지금 장난해?"
순영이 한솔의 앞으로 다가가 금방이라도 멱살을 쥐어잡을듯 했다. 하지만 이 재앙 속에서 잘못한 사람이 여기 누가 있겠는가. 그저 모두가 제 3세계의 피해자인것을.
순영이 허탈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그리곤 주저앉아 한참을 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한솔이 텐트 밖을 바라보며 말한다.
"K의 병을 알고 있는건 저 뿐만 아니라 J도 있었습니다."
"..."
"그렇기에, 보스가 K를 미끼로 이용하는건 훨씬 쉬웠겠죠."
"..."
"아마 처음부터, K는 그런 임무를 맡기 위해 들어온 거였을지도 모릅니다."
"..."
"미리 말씀 못드려 죄송합니다. 저도…, 전쟁 시작하기 직전 K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
"K는,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던 걸지도 몰라요."
말을 하던 한솔의 목소리가 떨렸다. K의 이야기를 말하는 자신 또한 울컥 화가 치밀었으리라. 모두가 피해자다. 지독한 3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달리던 모든 이들의 사연과 아픔, 그리고 살아 남은 자들의 후회와 눈물. 이 모든걸 다 감당할 수 있는 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모두가 여리고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촛불같은 사람들. 이제는 모두가 한 마음으로 원하고 있다. 이 승자 없는 전쟁을 끝내달라고.
둘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제 동료는 이미 죽었다. 민규의 이야기를 다 들은 이 시점에서, CA 소속인 이 둘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것은 이 무자비한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끝낼 수 없더라도 끝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는 없다. 순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진다.
' 제 3세계에게 알린다, 지금 당장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라 - '
순영은 제 눈을 의심했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것이 아니라면……
"..2세계입니다."
"…뭐?"
"피하세요, 당장!"
한솔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순영의 앞으로 폭탄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