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상승 한 번 해볼 테냐 /채셔
3. 잠행 一장
"저하, 잠행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궁밖으로 뫼시지요."
"잠시."
"……예?"
"병아리는 어디 간 게냐?"
태형의 물음에 일동이 조용해졌다. 잠행이니 최소한 사람을 줄일 것이다. 정국이와 그 병아리만 남거라. 태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정국을 제외한 모두가 물러났으나 여전히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또 병아리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던 정국은 뒤늦게서야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병아리라고 함은, 태형이 그때 보았던 나인을 말하는 것일 테지. 태형은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춤을 잡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자세를 취했다. 무려 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세자를 기다리게 하는 이가 고작 나인 하나라니, 정국은 기가 차 푸스스 웃을 뿐이었다.
"참으로 저하답지 않으십니다."
"무어?"
"병아리가 무엇입니까."
"………네가 그것을 어찌 알지?"
태형이 다시금 표정을 구기며 날카롭게 정국에게 질문했다. 오호라, 저하께서 투기라. 그것 또한 정국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저하께서 방금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정국의 장난기 섞인 말에 태형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분명 혼잣말로 말할 것을 무의식적으로 내비쳐버린 것이리라. 태형은 입술을 침으로 축이더니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뒷짐을 지고 정국의 반대편을 향해 의미 없이 응시했다. 허나 태형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버렸음은 어찌 모르실꼬. 정국은 소리를 죽여 키득거렸다. 이제 함께 한지 어언 20여 년, 태형의 수족 정국에게도 처음 보이는 허술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태형의 첫 연정인 것이었다. 새삼 그 나인에게 어떠한 매력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김여주라고 하였다."
"………예."
"데려오너라."
정국은 재빨리 동궁으로 다시 들어섰다. 나인 무리에게 여주의 이름을 대니, 몇몇 나인이 총총 뛰어가 아이 하나를 데려왔다. 나인의 모습이라 정국은, 앞에 선 여주에게 환복하고 따라나서라 명했다. 총총 다시 제 처소로 들어간 여주는 평복으로 환복한 이후에 고개를 숙이고 정국 뒤에 섰다. 조그마한 여주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정국의 시야에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왔다. 헥헥거리며 여주를 쫓아온 강아지가 여주에게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소, 송구하옵니다. 정국에게 용서를 빌던 여주는 입술을 깨물고 강아지에게 얼른 가라고 재촉했지만, 강아지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괜찮으니 달래어 보내거라."
"예, 바로 보내겠습니다. 지민아, 다녀와서 놀아줄 테니 오늘은 들어가 있어. 으응?"
"………."
꿇고 앉아 강아지를 연신 달래던 여주는 다시 일어섰다. 풀이 죽은 모습에 괜히 마음이 아린 것인지 시무룩하게 있던 여주는 곧장 강아지를 안고 처소 안에다 내려다주었다. 이내 문을 꼭 닫고 다시 정국의 뒤에 선 여주는 '소인이 갈 곳이 어디지요?'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정국은 빤히 여주를 바라보고 있다가, 미련없이 처소를 나섰다. 잠행에 따라나설 것이다. 정국의 짧은 답에 여주는 아, 하고 작게 느낌씨를 내며 정국에게 따라 붙었다. 왠지 모르게 정국의 얼굴이 굳어 있는 것 같아 괜히 기가 눌리는 기분이었다. 풀이 죽어있던 지민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는데, 정국의 표정 탓에 더 마음이 가라앉는 듯 했다.
"지민이라고 하였느냐."
"예?"
"한낱 강아지 이름답지 않아 묻는 것이다."
"………아…."
"정인이라도 되는가 보구나."
여주의 얼굴이 당황스럽다는 듯이 굳었다.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지민이라…. 정국의 얼굴이 아까의 태형 못지않게 어두워졌다. 우리 저하를 어찌하누.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는 여주의 말을 반쯤 무시한 채로 정국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내 정국은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바꾸었다. 이 조선의 세자인데, 가지지 못할 것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하게 이 조그만 나인 하나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정국은 빠르게 태형의 앞으로 끌고 갔다. 정국의 보폭에 거의 뛰다시피 하는 나인을 보며 정국은 픽 웃었다. 태형이 좋아할 만 하다 여겼다. 궁에 어울리지 않는 맑음이군. 정국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와 정말 똑 닮은 취향이었다. 허나……. 꼬리를 무는 걱정에 정국은 내심 한숨을 쉬어야 했다.
"또 명령 불복종이구나."
"………예?"
"내 잠행을 나갈 때에 꼭 따라나서라 했거늘."
"내 잠행을 나갈 때에 꼭 따라나서라 했거늘."
태형의 말에 여주는 퍽 당황한 티를 내며 그대로 주저앉아 고개를 땅에 박았다. 소, 송구하옵니다. 오래 기다렸는지 삐친 티를 내던 태형은, 땅에 이마를 박고 덜덜 떨고 있는 여주를 잠시 바라보다 뒤돌았다. 되었으니 따라 나서거라. 태형의 말에 여주는 흙이 묻은 제 치마를 털어내지도 않은 채 허겁지겁 태형의 뒤에 붙었다. 모질게 말했으나 만남에 기분이 좋았던지 태형의 얼굴에 짜증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정국은 푸흐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절었다. 무예를 위해 연모지정을 버린 저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감정일 뿐이었다.
"…여기 의복을 파는 곳이 어디요."
"저기 있잖소, 저잣거리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오."
저잣거리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말없이 걷던 태형이 범인을 붙잡고 의복 상점을 물었다. 뜬금없이 무슨 의복인가 싶어 의문스레 보자, 다시 한 번 얼굴이 빨개진 태형은 빠르게 저잣거리를 걸었다. 의복 상점에 들어선 태형은 뒷짐을 진 채로 의복을 둘러보다, 주인에게 치마를 물었다. 아, 하고 정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치를 챈 티를 냈으나 여주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궁을 나선 것인지 이리저리 둘러보는 얼굴이 매우 들떠보였다. 칙칙한 궁에 있다보니 이러한 활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을 터다. 태형은 비단 치마 하나를 들었다. 여주와 치마를 대충 눈대중으로 맞춰 보더니, 이내 여주에게 치마를 던졌다. 아슬하게 떨어뜨리지 않고 받아낸 여주는 제 손에 들린 치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비단결이었다.
"입어보거라."
예…? 당황하는 여주에게 태형은 짐짓 근엄하게 다시 명령했다. 마련되어 있던 곳으로 끌려 들어간 여주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치마를 환복해야 했다. 그 서툰 표현들에 정국은 다시 고개를 저어야 했다. 이내 빠르게 입고 나온 여주의 꼴을 보니, 어찌 되었든 흙에 묻어 더러워진 치마보다는 나아 보였다. 태형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팔짱을 끼고 천천히 여주를 바라보았다. 잠시 멍하게 바라보던 태형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겠느냐."
"………."
"형편없구나."
태형의 말에 여주가 시무룩해져 고개를 푹 내렸다. 이내 태형은 영 어울리지 않으니 이것도 함께 입어야겠다, 하고 저고리와 꽃신을 툭 던졌다. 다시 아슬하게 의복과 신발을 받아낸 여주는 태형의 손짓에 다시 주인장에게 끌려갔다. 다시 환복을 하고, 이번에는 머리까지 제대로 매만지고 돌아온 여주에, 태형은 그제야 만족감이 도는 듯 했다. 허나 표현은 어찌 그리 서툴고 날이 서 있는지. 태형은 이번에도 '돈이 아까울 지경이군.'하고 매정하게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하고 말하는 여주의 말 끝에 우울감이 서려 있었다. 다시 환복하고 오겠사옵니다, 하고 뒤돌아서는 태형은 급하게 여주를 잡았다.
"네가 이미 입은 것을 누구에게 주겠느냐."
"………예에."
"따라 나서거라."
정국은 혀를 쯧, 하고 찼다. 그저 치마가 더러워져 사준 것이라고 말하면 될 것을. 괜히 고개를 다시 저으며 정국은 태형의 뒤에 붙었다. 어찌 되었든 여주의 변신이란 놀라운 것이었다. 그저 평범한 계집 애 같던 여주가, 어엿한 숙녀 같았으니. 아니나 다를까, 태형의 얼굴에도 설렘이 묻어 있었다. 여주가 허겁지겁 뒤따라나오는 틈에 태형은 '배꽃 같았어….'하고 중얼거렸다. 마치 소년의 첫 연정 같이 심장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던 태형은, 여주가 오자 다시 뒷짐을 지고 지엄한 척을 하였다.
태형과 여주, 그리고 정국은 다시 저잣거리를 걸었다. 평범한 저잣거리에는 동냥하는 거지들도 있었기에 태형은 이따금씩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태형이 가진 돈들을 몇 냥씩 나누어 준 이후에, 광대 패의 공연을 함께 구경하던 도중이었을까. 한순간이었다, 여주가 저잣거리의 인파 속에서 헉, 하고 뒤돌아보게 된 것은.
덧붙임
안녕하세요, 채셔입니다.
선생님, 나빠요를 들고 오려고 했지만
T-T 갑작스러운 슬럼프 때문에 한참을 놑북을 붙들고 있다가
겨우 신분상승으로 찾아뵙네요... 흡...
폭군도 적고는 있지만 잘 써지지가 않아요
4월 내에 보내드린다고 계속 말씀드렸는데,
면목이 없네요 얼른 써서 보내드릴게요 죄송합니다ㅠㅠㅠ
아휴... 많이 많이 글 써야겠어요, 슬럼프는 정말 다메요...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오늘도 반가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