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빨간 사춘기-심술
[랩슈] 얼굴 위 감정 中
나는 내가 지을 수 없는 표정을 내 손끝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이유로 그림을 시작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사람의 인체에 대해 대부분 공부해왔고, 또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도 생겼다. 수많은 사람들은 같은 표정을 지어도 그 위로 각자 다른 수많은 감정들을 덧그려내었고 나는 그렇게 떠오르는 감정들을 동경했다. 김남준을 향한 마음도 처음에는 그런 동경인줄 알았다. 언제나 사람의 중심에서 부드러우면서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의 감정을 가지고 모든 이들을 자신의 쪽으로 이끌었다. 캔버스에 김남준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그 이유였다. 그 생생함, 부드러움, 환함을 내 손으로 그려내고 싶었다.
"어, 형. 2층 거의 비었어요. 오늘도 아이스 카페라떼?"
"응."
"손님 없으니까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형."
나는 자주 단골 카페 구석에 앉아 통유리 너머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한 손에는 크지 않은 연습장만한 스케치북을 들고. 그림 연습을 하기에도 좋았고, 몇 안되는 취미생활 중 하나였다. 몇 명 관찰한 것 같지도 않은데 맞은편에 누군가 앉으면서 커피와 작은 롤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거, 안 시켰는데."
"서비스. 서비스. 형한테는 이런 거 줘도 사장님이 봐줘요."
학교 근처에 있는 작은 2층 사립카페는 적당한 수의 사람들로 채워지곤했다. 그리고 이 카페의 알바생인 호석이는 내 무표정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내 인맥, 그리고 친구같은 동생이었다. 오해도 하지 않고, 가끔은 날 너무 꿰뚫어보는 느낌이 들어 도리어 날 당황시키기도 하는 녀석이었다. 정호석은 자연스럽게 챙겨온 포크 2개 중 하나를 들어 롤을 반으로 갈라 크게 한 입 먹었다. 저거 사실 본인이 먹고 싶어서 내 핑계대고 빼온 거고만.
오늘은 평일이라 손님이 없다면서 소파에 늘어지는 정호석을 빤히 보다가 스케치북을 들었다. 호석이는 내 행동에 날 또 그려줄거냐면서 갑자기 멋있는 척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숙이고 연필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정호석과 있으면 내가 표정을 짓지 않는다는 것을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고, 굳이 말을 하려고 조급하게 날 채찍질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기만 했다.
"이야, 역시 윤기 형이랑 있으니까 마음이 싹 풀어지는게 편하네."
"…?"
"형이랑 있으면 편하거든요. 조용하고, 차분해지는 기분? 뭐, 이렇게 설명하면 되나?"
"아, 나도."
급하게 나도 맞장구를 치니 정호석이 씩 웃는다. 생기있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언제나 좋았다. 그리기도 좋고, 보기도 좋았다. 얼른 마저 그림을 마무리하고 꽤 마음에 들게 완성된 그림을 정호석에게 내밀었다. 정호석은 진짜 형 손이 금손이라며 감탄을 하며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종이 한 쪽을 잡고 내게 눈짓을 했다. 정호석이나 사장님은 내가 편하게 그린 그림들을 종종 받아가 카페 인테리어로 쓰곤했다. 딱봐도 연습장에서 방금 찢어낸 흔적이 가득한 러프한 그림들까지 카페 곳곳에 걸려있는 것의 대부분은 내 그림이라는 건 이 카페의 사장님과 나, 그리고 정호석 정도였지만.
이번에도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심조심 스프링에 박힌 종이를 뜯어낸 정호석이 밑에서 다른 손님이 종을 울릴 때까지 그림을 바라보며 이건 내가 카페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을거라며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호석이 내려간 뒤 나는 내가 비춰지는 통유리를 바라보았다. 웃고있다고 생각했지만, 보이는 건 여전히 무표정한 내 얼굴뿐이었다. 그래도, 아주 조금 입꼬리가 올라가긴 했다.
"윤기 선배?"
카페 내부를 손을 푸는 느낌으로 슥슥 그리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가 내 옆에 서서 날 불렀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김남준이 서 있었다. 그래. 김남준. 김남준? 남준? 헐? 경영학과 16학번 김남준?
허억. 순간 너무 놀라서 스케치북을 꾹 쥔 채로 시선을 돌리지도 못 하고 있는데 김남준이 여기 자주 오냐, 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말하더니 지난번에 마음대로 굴어서 기분 상하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사과를 또 해왔다. 그거, 이미 신경 안 쓰는데. 고개를 저어 괜찮다고 나름 표현했는데 전달이 잘 안 된건지 김남준이 커피 이미 마신 것 같으니 케이크라도 하나 사겠다고 했다. 슬쩍 내 테이블을 보니 정호석이 서비스라며 가져왔던 롤은 대부분 정호석이 먹고난 뒤 아까 내려가면서 빈 그릇을 가져간 모양인지 내 커피잔 하나만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어떤 케이크를 좋아하냐는 말에 잠시 눈을 굴렸다. 고민을 하는 와중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다시 올려 김남준을 보니 내가 가장 보기 좋아하는 웃음을 띈 김남준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내려가서 정할래요?"
와, 그랬다가 나 심장 터질 듯. 고개를 저으면서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고 했다. 그러자 김남준이 알겠다며 몸을 돌려 1층으로 내려갔다. 내 맞은 편에 쿠션이 있어서 손을 뻗어 쿠션을 가져와 품에 안았다. 꽉 끌어안았다. 고작 몇 마디를 나누었다고 아직도 정신이 없었다. 모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빙글빙글. 선선한 에어컨 바람이 느껴지는 카페 안이 분명했는데, 어쩐지 더워지는 기분이 들어 눈 앞에 아이스 커피를 몇 번이고 마셨다. 근데 이 경우에는 김남준은 나한테 케이크를 사주고 다른 자리로 가는걸까, 아니면 나랑 설마, 같이 먹게 되는걸까. 후자는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기야, 왜 굳이 나랑 먹어. 그렇지? 뭔가 아쉬운데 다행스럽다.
혼자만의 생각은 끝도 없이 쭉 이어졌다. 이제서야 겨우 후끈했던 귓가가 가라앉았다.
"저 여기 앉아도 돼죠?"
"…?"
한참 열을 식히다가 겨우 얼굴의 열이 내려갔다고 생각이 됐을 즈음에 익숙하면서 대하기에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올렸다. 김남준이었다. 김남준이 맞은 편에 앉았다. 김남준이 내 앞에 포크를 놔주었다. 김남준이, 그러니까, 어, 내 앞에 앉아있다.
내 앞에. 그러니까, 내. 앞. 맞은 편. 손 뻗으면 닿는 거리.
"아무거나 다 괜찮다고 하셔서 그냥 제 취향으로 사왔는데, 괜찮아요?"
"…."
이거 꿈?
"여기서도 그림 그리고 계셨어요? 선배 그림 진짜 좋아하시나봐요."
"…."
와, 심장 떨려서 응이라는 대답도 안 나오네. 미쳤나봐. 좀 주절주절거려봐라, 내 입아. 속으로 지금 상황에 대해 신께 감사를 드리면서도 꿈인가 싶어 멍하니 있는 사이 김남준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뭐지? 싶어 그제야 멍했던 시선에 초점을 맞추자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는 김남준이 보였다. 아, 진짜 부드러운 인상이다. 생생하고, 부드럽고. 예쁘면서도 남자다운.
"선배. 혹시 저랑 이야기 하기 불편하시거나 그러신 거라면…."
"아니야."
"네?"
"그런 거 아니니까."
절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차마 뒷 말은 나오지 않았다. 욱한 마음에 아니라는 말까지는 했는데 분위기 수습은 어찌해야 하는거지.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가 김남준의 웃음으로 정적이 깨졌다. 아, 다행이다. 선배가 저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턱을 괸 채 씩 웃는 얼굴은 싱그럽기까지 했다. 근데 싫어한다니? 그럴리가. 내 표정때문에 그랬나? 이해가 얼추 가면서도 가지 않았다.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는데 이런 내 반응을 보았는지 김남준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금방 또 곱게 휘어들어갔다. 아, 그리고 싶다. 저 얼굴. 저 표정.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놓고 싶다.
"선배. 저, 이거 한 번 보고 싶은데 봐도 돼요?"
"아. 잠깐만."
손을 뻗어 내가 먼저 스케치북을 촤르륵 펼쳐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 대부분 풍경이나 호석이. 그리고 길가에 다니는 여러 사람들이 담긴 그림, 카페 안 그림 정도가 끝이었다. 나는 순순히 김남준에게 스케치북을 건넸다. 김남준이 스케치북을 받으며 눈을 빛냈다. 기대감이 어린 얼굴로 싸구려 스케치북을 조심조심 다루며 펼쳤다. 참, 뭐랄까. 사람이 단순해보이지는 않지만 느끼는 감정이 다 확실하게 다가왔다. 솔직하다. 그래. 김남준은 솔직한 사람이었다.
"와. 대박이다. 와. 진짜, 선배 진짜 그림 잘 그리시네요."
"전공이니까."
"그래도요. 선배 진짜 잘 그리세요."
"…."
낯 뜨거워. 어떠한 대답도 없이 반 이상이 비워진 커피잔에 꽂혀진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내부를 휘저었다. 달그락거리는 얼음소리가 조금 울렸다. 김남준은 내내 감탄을 하다가 맨 마지막 장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마지막 장에 내가 뭘 그렸었지? 뭐길래 저렇게 빤히 보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소파형식의 의자에 몸을 푹 기대었다. 카페 내부에 서늘할 정도로 틀어진 에어컨 바람과 바로 옆의 통유리에서 쏟아지는 햇빛은 딱 어울려 적당한 체온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었다. 나른해지는 기분에 품에 안은 쿠션을 고쳐안고 이제 얼추 진정이 된 심장에 감사를 표하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김남준의 시선이 움직였다. 내 시선과 마주쳤다. 아무 말도 없는 김남준의 모습에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김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 자화상 같은 거예요?"
무슨 자화상? 생각을 하느라 가만히 눈만 깜박이는데 김남준이 스케치북 맨 마지막 장을 펼쳐 내게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다리를 꼬고 누가봐도 기분이 안 좋은가 생각하게 만들정도로 딱딱한 표정을 지은 채 앉아있는 사람이 그려진 그림, 이고. 이 사람은, 나네. 어. 나네. 엉. 나. 아. 아아. 기억났다.
"후배가 그린 거야."
"다른 사람이 선배를 그려준 거예요?"
"전공, 강의 때문에."
예전 강의 때 재수없게 학번으로 골라 모델로 뽑힌 적이 있었다. 쭈뼛거리면서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어떻게 해도 어색했던지라 결국 다리를 꼬는 걸로 마음의 위안을 얻었더래지. 그 때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던 호석이가 스케치북을 다른 동기에게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았다는 걸 깜박했다고 해서 잠깐 빌려주었었다. 두꺼운 스케치북이어서 작년 2학기 일인데도 그림은 계속 그 자리에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아. 그러네요. 여기 예쁜 우리 윤기 형. 이라고 써져있네."
"…."
아. 맞다. 그거 보고 내가 미간 좀 구겼더니 정호석이 형이 미간까지 구길 정도였냐면서 상처받았다고 어쩌고 저쩌고 했었지. 이번에도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손을 내밀었다. 김남준은 내 뜻을 눈치채고 아쉽다는 얼굴로 스케치북을 다시 돌려주었다. 빳빳한 종이를 매만지다가 잠시 내려놓았던 연필을 들었다.
"선배. 혹시 저 그려주실 수 있어요?"
"…?"
"그, 3분만에 쓱 그리는 거 있잖아요. 아,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배웠었는데. 크, 크…."
"크로키?"
"맞아요. 그거. 괜찮으면 진짜 간단하게라도 그려주실 수 있어요?"
이미 널 그리고 있는데. 그것도 색까지 칠하려고 작정해서. 그렇지만 이걸 말 할 수 있을리가 없으니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김남준이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원래 사람끼리 대할 때 이렇게 조심스러운건가? 원래 김남준 성격인가? 속으로 피어오르는 의문을 꾹 눌러 담은 채 나는 새 장을 펼쳐 열었다. 김남준의 눈이 금방 기대로 물들여졌다. 진짜, 너무 솔직해서 웃음이 나왔다. 새삼 김남준이 이제 갓 20살이 된 새내기라는 게 와닿았다.
"지금, 연필 밖에 없으니까 그림이 지저분할 수도 있어."
"네. 네. 괜찮아요."
"3분, 정도. 움직이지마."
"와, 이게 뭐라고 떨리냐. 네."
너도 떨리냐. 나도 떨린다. 바르르 떨리는 손 끝이 느껴져 주먹을 꾹 쥐었다가 핀 뒤 나도 자세를 고쳐잡고 앉았다. 스케치북을 세우고, 고개를 들어 김남준을 바라보았다. 좋은 기회였다. 항상 대부분 뒷모습만 바라보면서 앞모습을 그리느라 고생이었는데 이 기회에 김남준을 정말 마음놓고 관찰할 수 있다.
3분 내로 최대한 김남준을 이루고 있는 선들을 따낼 생각으로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인물화를 그래도 가장 많이 연습해온 보람이 여기서 생겨났다. 크로키 특성대로 슥슥 그려내었다가 중간 중간 조금 경직된 얼굴의 김남준과 눈을 마주치면서 담아내었다.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는 건, 같이 그림을 보고 있지 않는 이상은 따분할텐데 김남준의 시선은 계속 내게 향해있었다.
"여기."
처음 그렸던 그림은 김남준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던터라 그림에도 어색함이 담겨져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넘기고 다시 그렸던 그림을 보여주니 김남준이 우와, 하는 소리와 함께 스케치북을 가져가 내가 그린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멋있어요."
응. 네가 좀 까리하긴 해. 인정. 모델이 멋있으니 그림도 멋지지.
"선배."
응. 응? 아, 내가 멋있다고? 내가? 왜? 뜬금없는 칭찬에 나는 연필을 내려놓고 커피를 마셨다. 목이 바짝 말라오는 걸 축여서도 김남준의 말은 내 귓가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저 주위에 그림 그리는 사람이 없어가지고요. 뭔가 이렇게 저 그려주시는 거 보니까 엄청 멋있는 것 같아요. 3분 만에 슥, 그려서 딱."
"크로키는 원래 그런거잖아."
"그래도요. 멋있어요."
고맙다고 말해야하는데 온 몸이 간질거리고 당장에 안고 있는 쿠션을 퍽퍽 내려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마 김남준 앞에서 미친 듯이 쿠션을 내려칠 수는 없으니 그저 모서리만 꾸욱 쥔 채 주물거리고 있는데 김남준이 다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뭔데. 뭐. 뭐. 왜 웃는데.
"지금 부끄러워하시는 거 맞죠?"
"…."
"맞는 것 같은데. 맞죠?"
"…."
시선을 아예 돌려버리니 김남준이 이번에는 크게 웃는다. 도대체 얘는 왜 갑자기 나한테 와서 친한 척이지. 와, 나 진짜 미치겠다. 나는 그 와중에도 웃는 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려 김남준의 얼굴을 관찰했다. 보조개까지 깊게 파인 웃음이 잦아질 때 쯤에 김남준은 그림을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장 다 뜯어가려고 하길래 나는 망한 건 가져가지 말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말을 듣는다. 다행이다.
"음, 보통 이럴 때 돈이라도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케이크. 괜찮아."
"아. 케이크 사줬으니까 괜찮다고요?"
그래. 그거야.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김남준은 이거랑 그림이랑은 또 별개란다. 그럼 내가 너한테 돈을 받냐. 그냥 가지라고 말했는데도 김남준은 미적미적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고민하고 있었다. 검지를 들어 아랫입술을 쓸어내리고 미간을 살풋 찡그린다. 아, 못 보던 버릇. 못 보던 표정이다.
"그럼 제가 저녁 쏠게요."
뭐요?
"선배 저녁 아직 안 드셨죠?"
안 먹었지. 오후부터 여기 죽치고 앉아있었으니까. 근데 나 더 있다가 토할 것 같아. 하도 심장 쿵쿵거려서. 아니, 어떡하지. 선약이 있다고 할까. 근데 이거 기회 아니야? 무슨 기회? 아, 내가 김남준이랑 친해질 기회인가? 근데 얘랑 친해지면 뭐해요? 그렇다고 사귀는 거….
"헐, 선배 괜찮으세요?"
혼자 하는 생각에 혼자 놀라서 사레가 들렸다.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지는 않았지만. 급하게 허리를 숙여 통유리 쪽으로 몸을 돌리고 기침을 토해내는데 내 등을 두드리는 김남준의 손이 느껴졌다. 그때 모델로 뽑혀 온 강의생들의 시선을 받았을 때보다 더 쪽팔린 순간이었다. 괜찮다며 손을 내젓고 아직 트레이 위에 남아있는 갈색 티슈를 가져와 입가를 닦아내었다.
야. 진짜 진심인데 너랑 더 있다가 나 죽겠다.
"음. 형. 혹시 형이 그런 거예요?"
"…?"
"연애 고자?"
뭐라는거야. 내 짝사랑까지 다 알고 있는 우리과 자칭 사랑둥이, 타칭 도른자인 김태형의 말에 나는 여전히 무시로 일관한 채 턱을 괴고 김태형이 아닌 유리창 아래로 학교 건물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보았다. 날이 좋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사람이 많았다.
"아니, 어떻게, 같이 밥을 먹을 기회를 혼자 차버려요?"
"…."
"그것도 짝사랑하는 상대가 먼저 들이댄 걸!"
이녀석은 왜 이렇게 목소리가 큰 걸까. 그리고 왜 이렇게 반응이 큰걸까. 짧게 한숨을 내쉬고 집중하라는 듯 책상을 두어번 두드린 뒤에 다시 큰 스케치북에 시선을 내렸다. 김태형이 또 말 돌린다고 투덜거리는 소리는 무시했다. 정호석이 아니었으면 신청도 하지 않았을 멘토링 프로그램이 얼른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김태형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짝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낯간지러운 대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프로그램 일정에 맞춰 그리라는 걸 그리고, 하라는 것을 다 하고 나니 저녁시간이 훌쩍 다가온 시간이 되었다. 김태형은 다음에 그런 기회가 있다면 진짜 체해서 토하는 한이 있더라도 놓치지 말라는 당부를 몇 번이나 내 머릿속에 심어주고 본인은 친구들과 술자리 약속이 있다며 빠르게 사라졌다.
'어디로 가지.'
딱히 배가 고프지 않으니 굳이 밥을 먹으러 갈 필요는 없다. 누구와 만날 약속은 있을리가 없고. 그냥 의미없이 맴돌다 집으로 간다고 해도 역시나 할 것도 없을테니, 그냥 작업실에 가서 그리던 것을 마저 그릴까. 안 그래도 어제까지 그 얼굴을 생생하게 담아내었으니 이대로 가서 그린다면 평소보다 더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이 근질거렸다.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몸을 돌려 예술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위를 원래 거의 타지 않아 긴 후드티를 입고 있긴 했지만 날은 확연하게 풀리다못해 조금씩 열기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낮이 밤을 밀어낸 만큼 하늘 위로 자리하고 있어서 그런지 쉽게 어둠이 내려앉지 않은 게 좋았다. 다급하지 않던 걸음이 조금씩 더 속도를 늦추었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방끈을 다시 추켜세워올렸다. 낮과 밤의 경계는 사람의 마음을 풀어내는 힘이 있었다. 한 번 더 하늘을 올려보았다가 하늘의 색감으로 물든 학교의 풍경까지 핸드폰 화면으로 찍어내었다. 나중에 색 연습할 때 꼭 그려보고 싶은 풍경 중 하나였다.
'오늘 저녁은 뭐 먹지. 밥 먹는 것도 귀찮다. 굶을까.'
요리에는 관심이 없어서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다. 애초에 집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들어가는 길에 삼각김밥이나 하나 사가자고 다짐을 한 뒤 예술관의 문을 밀었다. 열리지 않았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유리문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안 쪽에 이미 자물쇠로 꽁꽁 잠겨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금요일 저녁에는 안 열어주는구나. 나 이제 진짜 뭐하지. 카페에나 갈까. 멍청하게 잠긴 예술관 앞에서 나는 다음 행동에 대해 고민하다가 우선 아직 문이 열려있는 본관쪽으로 가 자판기에서 코코팜 하나를 뽑았다. 우선 이걸로 허기진 걸 채우고 벤치나 그런 곳에 앉아 천천히 고민이나 해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건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딱 봐도 제일 신경쓴 티가 나는 반질반질한 건물 밖으로 나오니 그 사이에 어둑어둑해진 것이 보였다. 생각보다 해가 일찍 저물어서 잠시 당황하다가 코코팜 캔을 따려고 손을 올릴 즈음이었다.
"윤기 선배?"
"…!"
"선배?"
"아… 안녕."
난 좀 더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는 걸 연습해야겠다. 거울에 대고. 안녕. 이라고. 시크하게 고개를 까닥이는 것 정도도 괜찮지 않을까.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인사를 건넨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김남준을 한 번 보았다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인사를 했으니 가도 되는거지? 사람과 잘 지내보지 못한 티가 여기서 난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내 팔을 조심히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김남준은 웃고 있었다.
"오늘도 저녁 먹자고 하면 거절하실 거예요?"
"왜,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요."
누누히 말하지만 표정이 생생하고 생기 있는 사람은 그리기도, 보기도 좋다. 솔직한 사람은 속마음을 말해주니 나름대로 대하기가 편하다. 그런데 생기 있으면서 솔직한 사람에게 나는, 한 없이 약해지기만 한다. 게다가 그 사람이 김남준이다? 그럼 난 절대 이길 수 없는거다. 그러니까 결론은 난 이번에 김남준의 저녁식사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날 밤, 나는 기어코 체해서 내내 집에서 속을 게워내었다. 여러분, 짝사랑이 이렇게 위험한 겁니다.
"윤기 선배.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윤기 형. 어디 가요?"
"형. 저랑 학식 먹어요."
"형. 또 작업실쪽으로 가는거예요?"
"윤기 형."
"형."
그 뒤로 김남준은 본관과 상경대 건물, 그리고 가끔 예술관 쪽에서 귀신같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며 나를 놀라게했다. 게다가 볼 때마다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저 멀리서라도 날 발견하면 먼저 달려와 아는 척을 하고, 인사를 하고, 말을 걸어왔다. 김남준이 먼저 내게 아는 척을 해오고, 내 무표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다가와주는건 좋다. 혼자 설레고, 혼자 두근거리고, 혼자 작은 행동에도 괜히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힘들어해도 결국 좋아하는 사람과의 시간이 싫어질리가 없으니까.
다만. 아주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김남준과 있다보면 꼭 어디에서인가 나타나는 여자들이라는거다.
'김남준이랑 다니면 3번에 1번은 이런 모습을 본단 말이지.'
바로 지금처럼. 김남준이 먼저 날 아는 척 해오고 나는 어, 어 하다가 그대로 잡히고, 밥 안 먹었으면 근처 식당이나 학식. 밥을 먹었다면 카페. 시간이 비지 않으면 잠깐의 대화. 그리고 그 사이에 김남준에게 인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그 옆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여대생. 혹은 여대생들. 익숙하다면 익숙한 풍경이다. 몇 명은 나에 대해 묻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김남준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간혹, 더 가끔은 나에게 눈치를 주는 사람도 있었다. 참, 뭐랄까. 새삼스럽게 김남준의 관심이나 태도가 나에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기분이 마냥 좋지는 않은 정도랄까. 당연한거지만.
"아, 형. 미안해요. 과선배님이라 말을 끊을 수가 없어서."
괜찮은데, 그런거. 고개를 젓자 김남준은 또 다행이라며 웃는다. 저 웃는 얼굴을 나만 좋아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다들 그렇게 몰려오나, 싶어 빤히 바라보는데 김남준도 똑같이 내 눈을 바라보는게 느껴졌다. 이럴 때 관찰하는 버릇이 나오는건 마냥 좋은 건 아니지만, 작업실 한 켠에 있을 내 그림의 스케치가 끝나가는 단계에 오면서 김남준의 얼굴에 조금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저. 큼. 형. 할 말이라도?"
"아니. 아. 미안."
"형은 시선이, 참. 어…."
"…?"
아니에요. 그냥, 저, 신경쓰지 마세요. 어색하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 더 신경이 쓰인다는 걸 이 20살은 모르는걸까. 뒷말이 굉장히 궁금해졌지만 나는 물어보는 것을 포기했다. 굳이 말까지 돌렸는데 그걸 캐묻고 싶지도 않았고, 살짝 구겨진 미간이 말하기 곤란한 느낌이었다. 역시, 바로 앞에서 관찰하는건 실례겠지. 김남준이 이리저리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몰래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사이, 누군가가 또 김남준의 걸음을 잡았다.
"어? 남준아!"
응. 오늘은 하루에 두 번이라니 그래도 이정도면 양호한 편인가. 눈에 띄는 곳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김남준을 알고 있는 걸까. 실제로 그런 건 아니지만 10분에 한 번씩은 걸음까지 멈출 정도로 인사나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보여 학교를 돌아다녀도 아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는 내가 조금 과장스럽게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좀 길다, 대화가. 예쁜 긴 생머리에 군대까지 다녀와 복학한 나와 달리 풋풋한 대학생의 느낌을 가득 뽐내는 여자애는 누가봐도 김남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표정이 또 수줍었기 때문이다.
'저 아이도 솔직한 애네. 좋아하는 거 티 다 내고 있고.'
목이 칼칼했다. 같은 장소, 반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 공존했지만 나 혼자 멀찍이 떨어져있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 이게 내 위치고, 앞으로도 느껴야 할 기분이었다. 새삼스럽게 느끼면서도 낯설기만 했다. 어색함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 강의가 곧 시작할 시간이었다.
"네. 형. 왜요?"
김남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그제야 이야기를 하고 있던 김남준이 나를 돌아보았다. 가보겠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었다. 명백하게 난 이만 가보겠으니 다음에 또 보자는 의미의 손짓이었다. 김남준은 강의가 있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뒤로 돌아 강의가 있는 건물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30분정도 김남준과 있었지만 나눈 대화는 거의 없었다. 다음에는,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쳐야 될까. 어차피 이럴바에야.
"윤기 형!"
왁, 씨. 놀래라.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가 피며 고개를 돌리자 김남준이 내게 무언가를 가볍게 던졌다. 한 손을 들어 잡아챈 뒤에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또 갑자기 왜? 의아함에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김남준은 강의 마저 잘 들으라는 말과 함께 멀어지고 있었다. 강의 잘 들으라는 건가?
"또 굶고 다니지 말고요. 수업 잘 듣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들어요, 형!"
선생님이 아니라 교수님이겠지. 이상한 곳에서 또 새내기 티 내고 있네. 입꼬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웃기게도 방금 전 일 하나 때문에 가슴속을 짓누르던 생각을 모두 날려버렸다. 스스로가 너무 어이가 없을만큼, 쉽게.
'이건, 아까워서 못 마시겠다.'
김남준이 주고 간 복숭아 맛 코코팜. 참 바보같게도 김남준과의 사이에 어떠한 진전도 바라지 않으면서 이 음료수 캔 하나에 벅차오르게 감정이 솟아올라왔다.
결국 끝까지 난 그 음료수를 마시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