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에 문자소리에 잠깐 잠에서 깨서 확인해보니 폭염주의보가 내렸더라고요.
이야, 한동안 재난문자 안 오더니 이제 또 국가가 나를 신경써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 뒤
다시 잤습니다.
폭염을_피하는_방법_txt.
진짜 괜찮겠어요?
안 괜찮을건 뭔데. 괜찮다니까.
연락 자주 할테니까 꼭 꼭 받아요. 가서 괜히 혼자 다니지 말고.
내가 애냐? 그리고 너 안 가? 곧 가야된다며.
남준이가 몇 번이나 집 앞에서 윤기를 붙잡고 언제 전화할테니 받아라, 정말 괜찮냐 등등의 걱정을 쏟아내었으면 좋겠다.
윤기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남준이를 바라보다가 괜찮다면서 남준이를 반대편으로 밀어 걸음을 옮기게 만들었으면.
꿋꿋하게 걸음도 옮기지 않던 남준이가 에이씨,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뒤를 돌아서 윤기의 손을 조심히 잡았으면 좋겠다.
혹여 몰라 씌워준 후드까지 꼼꼼하게 점검한 뒤에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윤기의 얼굴을 빤히 내려봤으면.
너 군대가냐?
아니, 그건 아닌데.
야, 2박 3일 먼저 그, 엠티인가 엔티인가 그거 다녀오겠다고 한 건 너잖아.
가고 싶어서 가는거 아니라니까요.
아, 얼른 좀 가. 아니면 내가 먼저 간다?
매정한 토끼. 야박한 토끼. 너무해.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채로 투덜거리는 남준이가 알겠다며, 자신도 이제 진짜 진짜 가보겠다며 몸을 돌릴 때 작은 한숨 소리가 살짝 울렸으면.
이번에는 윤기가 남준이에게 다가가 남준이의 소매깃을 꾹 잡아 챈 뒤에 빠르게 남준이의 볼에 입을 맞추었으면 좋겠다.
가. 쪽팔리니까 말 걸지말고.
토끼야.
아씨. 진짜.
남준이가 방금 말랑한 무언가가 닿았던 볼을 감싸쥔 채로 윤기를 빤히 보면 어느새 목까지 붉게 물든 윤기가 빠르게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결국 그걸 지켜보던 남준이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해야겠다면서 다짐을 한 뒤 뒤늦게 걸음을 옮겼으면 좋겠다.
그렇게
남준이는 MT를 위해 모이기로 했던 역으로,
윤기는 그 동안 지낼 태형이의 집으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으면 좋겠다.
아주 가끔, 혹은 자주. 힐끗 힐끗. 괜시리 아무도 없는 뒤를 바라보면서.
윤기는 처음에는 MT를 무려 2박 3일동안 간다는 남준이를 향한 투덜거림을 중얼중얼 속으로 뱉어내다가 조금씩 시간이 갈 수록 오랜만에 태형이를 볼 생각에 신이 나기도 했으면 좋겠다.
태형이 지금쯤 나 기다리고 있겠지? 어제 아침 일찍 간다고 했으니까 일어나있으려나. 아니면 아직 자고 있으려나. 잠귀는 밝으니까 문 두드리면 깨겠지.
윤기는 태형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 도착해서는 이미 머릿속에 온전하게 있는 태형이가 살고 있는 몇 동, 몇 호. 현관 비밀번호 등을 다시 떠올렸으면.
느리지만 오랜만에 태형이 집에서 마음껏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기대가 잔뜩 담긴 걸음걸이고 바로 문 앞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하던 윤기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고 할 때 큰 소리가 태형이 집 안에서 들려왔으면.
깜짝 놀란 윤기가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귀에 두 번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두 손을 올려 후드를 꾹 누르며 진정하길 기다리는 동안
집 안에서는 또 한 번 태형이의 목소리가 울렸으면 좋겠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정확하게 들리지 않아서 혹여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 걱정이 된 윤기가 문을 두드리려는데 다시 우당탕.
현관문을 잡은 윤기가 절로 열리는 문에 더 놀라서 바로 안으로 박차고 들어갔으면 좋겠다.
태형아!
놀라서 들어간 윤기가 본 장면은 바로 태형이가 소파에서 어느 남자에게 깔려눌린 채 누워있는 모습이었으면.
곧이어 들리는 외설스러운 소리에 윤기가 모든 행동을 멈췄으면 좋겠다.
으, 하, 자, 잠, 야, 전정국. 그만하라고!
악! 말로 해요, 말로. 꼭 이럴 때마다 박치기를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네가 말로 하면 듣냐? 엉?
태형이가 흐트러진 차림을 겨우 정리하면서 소파에 내려온 순간 마주친 게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윤기였으면 좋겠다.
윤기는 저 못지 않게 굳은 태형이를 보고 뒷걸음질을 쳤으면.
미안. 나 다시 나갈까?
하던 거 마저 하라면서 근처 카페에라도 있겠다는 윤기의 말에 달려든 태형이가 윤기의 허리를 꼬옥 붙잡고 외쳤으면 좋겠다.
윤기 형! 저 변태 좀 말려봐!
태형이의 집안에는 태형이가 신나서 윤기와 뭘 하고 싶은지, 자신이 형이 놀러온다는 소리를 듣고 뭘 준비했는지 등등을 늘어놓는 목소리,
그리고 그에 맞장구를 치면서 제 허리나 어깨를 꼭 끌어나고 떨어질 줄 모르는 아직 아기 강아지 같은 늑대 한 마리 매달고 짐을 푸느라 돌아다니는 윤기가 내는 인기척 소리,
마지막으로는 그 모습을 삐딱하게 팔짱을 낀 채 바라보는 정국이가 가끔 태형이를 부르는 소리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윤기 형. 윤기 형. 오늘 저녁에 뭐 해먹을래? 재료도 잔뜩 사왔는데? 아니면 외식할까? 예전처럼 데이트하자, 데이트.
데이트는 무슨. 그리고, 저기. 눈으로 레이저 쏘는 사냥개 한 마리부터 어떻게 좀 해라.
응?
신난 태형이가 자신이 늑대인 것을 아는 정국이와 윤기 사이에 있으니 마음놓고 귀와 꼬리를 내보인 채로 윤기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있었으면 좋겠다.
윤기도 귀와 꼬리를 내보였을 때 잠깐의 신기하다는 시선을 제외하고는 내내 자신을 정말 불타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정국이에 계속 신경이 쓰였으면.
꼭 뭐라도 잡히면 바로 물어뜯을 것 같은 눈빛에 포식자인 늑대보다 먹잇감인 토끼가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치와 똑 닮았으면 좋겠다.
결국 윤기가 내내 자신과의 계획을 늘어놓는 태형이에게 정국이에 대해서 한 마디 하면,
태형이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서 못마땅한 얼굴로 있는 정국이를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너 아직 있었냐? 그러고보니 너 학교 안 가?
개교기념일이요.
뻥치지마.
와, 나. 지난주부터 내가 금요일 개교기념일이라고 말했잖아요. 난 형이 오늘 쉰다고 해서 나랑 데이트하나 했더니. 지금 외간남자랑 데이트 나간다는 거예요?
야. 외간남자라니. 우리 윤기 형한테 막말하지마라.
지금 토끼 왔다고 애인 눈에 보이지도 않죠?
토끼라니. 형이라고 불러, 전정국. 버릇없게 왜 자꾸 그르냐?
그래. 너네는 싸워라. 나는 내 짐이나 풀련다. 무념무상. 윤기는 묵묵히 제 짐을 풀어 얼마없는 것들을 다 정리한 뒤에 아직도 제 등에 매달려있는 태형이의 손을 톡톡 두드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신호를 알아들은 태형이가 윤기의 허리를 감싼 손을 풀어내면 냉장고를 열어 어제 태형이가 사다뒀다는 당근 하나를 꺼내 씻었으면.
그리고 그 뒤를 여전히 태형이가 졸졸 쫓아다니면서 그 당근이 유기농이니 어쩌니 하면서 윤기가 당근을 한 입 와작, 깨무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봤으면 좋겠다.
그런 일련의 행동, 눈빛, 표정 등이 더욱 정국이를 화나게 만드는 것도 모르고.
쿵, 하는 소리가 들렸으면.
정국이가 금방 자신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뒷전으로 미뤄버리는 태형이의 태도에 벌떡 일어났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으면.
오늘 하루 자고 가는거죠? 알았어요. 그정도는 내가 이해할 수 있으니까.
아니? 윤기 형 2박 3일이랬으니까 일요일에 가는건데? 일요일 저녁에 가는 거 맞지, 형?
응. 그때 김남준이 데리러 온댔으니까.
아, 진짜? 그러지 말고 그냥 월요일까지 같이 있다가 가면 안 돼?
왜 이렇게 자꾸 어리광이냐, 태형아.
형이 좋으니까 그르지.
입을 네모로 만들며 씨익 웃은 태형이의 말에 윤기도 작게 웃었으면.
그 둘의 알콩달콩한 분위기에 정국이가 쿵쾅쿵쾅 두 발을 구르며 태형이의 집을 나왔으면 좋겠다.
자신은 무려 3일동안 태형이와 놀 데이트코스까지 어젯밤 끙끙대면서 다 짜놨는데. 웬 토끼가 와서 그걸 다 망쳐버리다니.
씩씩거리며 나간 정국이의 뒷모습을 보면 윤기가 한 마디 했으면 좋겠다.
삐쳤네.
라고.
잠시 뒤에 아침을 먹자면서 냉장고를 문을 연 태형이와 그 옆에서 자신이 먹을 야채를 고르는 윤기가 또 벌컥 열리는 현관문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평소 메고 다니는 조금 큰 가방을 메고 온 정국이가 집안으로 들어오다가 소파 위에 가방을 툭 내려놓았으면.
그럼 저도 그동안 여기서 잘래요.
…허어? 야. 너 바로 옆집이 니네 집이잖아.
주말동안만 신세 질게요, 태형이 형.
말은 태형이에게 하면서 자신에게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정국이의 시선에 윤기는 조용히 직감했으면 좋겠다.
아, 이번 주말은 마냥 편하지는 않겠구나, 하고.
와작.
티격태격거리는 태형이와 정국이의 소란스러움 사이로 윤기가 당근을 깨무는 소리가 간간히 울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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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자랑 |
귀여운 민트토끼 윤기 그림 감사합니다. ♥
초콜릿 좋아하는 귀여운 민트토끼 윤기 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귀엽고 아기자기한 글귀 감사합니다. ♥
귀여운 윤기 그림 정말 감사합니다. ♥
예쁜 부농부농한 윤기 그림 선물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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