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트/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03
w.규닝
03. 옥상, 개새끼
"추워서 돌아가시겠네."
탁,하는 둔탁한 소리가 성열의 심기를 건드렸다. 보도블럭 위로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든 성열이 얇은 소매를 싹싹 문지르며 다시금 통화버튼에 손을 가져갔다. 이 웬수새끼, 전화 좀 받지? 인상을 한껏 찌푸린 성열이 달달달,어금니가 맞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벌써 수십번은 듣고 있는 신호음에 괜한 눈더미만 발로 찬 성열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질렀다. 에라이!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남우현.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 새끼, 머리채라도 잡아채서 끌고 왔을텐데. 답답한 마음에 머리칼을 있는대로 헝클어뜨린 성열이 아직도 왁자지껄, 부어라 마셔라 떠들어대고 있는 호프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당최 회장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아니, 남우현이 뭐라고 저렇게 성을 내는거지. 성열이 꾹 다물린 입을 삐죽였다. 그도 그럴 것이, 회장은 굳이 친해질 맘도 없어 뵈는 남우현이 그렇게도 마음에 들었나보다. 종강 총회임을 단단히 이르면서 남우현을 데리고 올 것을 신신당부했던 것도 그렇다. 우현과 함께 등장하지 않은 저를 보더니 단번에 표정이 구겨진 회장은 몇시간째 계속해서 성열만을 닦달했다. 그 새끼는? 왜 같이 안 왔는데? 끈덕지게 물어오는 회장에게 남우현은 집에 일이 있어서 못왔다고 몇번이나 설명을 했는지 모른다. 성열은 속으로만 곱씹고 있는 말을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내뱉을 뻔한 걸 느끼면서 앞에 놓인 술을 들이켰다. 씨발, 왜 남우현을 나한테서 찾아. 게이세요?
급기야는 다른 선배들까지 성열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야, 너랑 세트로 다니는 걔는 왜 안왔대? 평소에도 남우현을 힐끗힐끗 보는 꼴이 웃기더라니, 술이 조금 들어가니까 본심이 나오는 모양인지 꽤나 추근대기 시작하는 여자 선배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은 성열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이성열인데, 왜 죄다 나한테서 남우현만 찾냐고. 온갖 질문공세를 견디지 못한 성열이 은근슬쩍 테이블에서 빠져나와 호프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전화 좀 받아, 웬수 새끼야. 나도 편하게 술 좀 마셔보자. 성열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고 있는 우현때문에 실컷 짜증이 솟아 있음에도 호프 안쪽에서 저를 불러오는 목소리에는 소리 높여 대답했다. 네!네! 가요,지금!
* * * * *
"아!아파."
"니가 움직여서 그런다고는 생각 안하냐?"
"김성규! 아파!"
"이름 부르지 마."
"김성규ㅡ 좀만 더 살살해."
씨발,씨발 거리던 아까와는 달리 한껏 어려진 목소리로 김성규,해대는 우현에 대번에 정색을 한 남자가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죽고싶냐?"
"아아니."
장난 치고는 지나치게 살벌한 남자의 표정에 꼬리를 내린 우현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남자가 그 꼴을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숙여 우현의 발목을 어루만졌다. 저 개새끼가, 얼떨결에 이름을 알려줬더니 벌써 30분째 말꼬리마다 김성규,김성규 타령을 하고 있는 거다. 게다가 정색 갖고는 말도 안 들어먹는 모양인지 능글거리며 기어오르는 모양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신기해서."
"……."
"왜 이름이 가브리엘 같은 게 아니야?"
"……."
"그 있잖아. 미카엘이나 가브리엘 이런거."
"가브리살도 아니고."
…천사가 개그도 한다. 제 발목을 부여잡고 박혀있는 유리조각을 섬세하게 빼내고 있던 성규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비록 믿기지 않을 만큼 썰렁하지만 그의 딴엔 개그임이 확실했다. 어울리지 않는 그 유머에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려던 우현이 간신히 참아냈다. 여기서 비웃어버리면 이번엔 내 머리통으로 소주병이 날아올 것 같으니까.
두번째 올라와보는 천사의 옥탑방에는 그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씨팔! 천사고 뭐고 살인미수로 고소할거야! 씩씩거리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른 것도 벌써 삼십여분이 지난 상태였다. 옥상 난간과 맞붙어있는 평상 위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남자가 어느새 그 다이나믹했던 표정을 싹 바꾸고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우현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누가 거기 서 있으래? 왜 이 앞에 서 있었던 건데? 남자의 히스테릭한 목소리에, 병을 던지면 어떡하냐고 따지려 마음먹고 올라왔던 우현의 말문이 턱 하니 막혀버렸다. …무의식적으로 찾아왔다고 죽어도 말 못해.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둘은 서로의 눈만 노려보았다.
남자는 꽤 오랜 시간 평상 위에서 노상을 까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소주병과 마른 안주들이 지난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잔뜩 흥분한 채로 옥상 위로 올랐던 우현이 그 모습을 보고서는 뜨거워졌던 머리가 순식간에 식어가는 것을 경험했다. 술…이라니, 왠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고 있었는데.
올라오기 전에 봤던 담뱃재도 천사의 것이 맞았나보다. 평상 주위에 널린 화분 위에는 그것이 마치 재떨이라도 된 것 마냥, 다 피운 담배 꽁초들이 수북히 쌓여있었으며 앙칼진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남자의 주위에는 아까까지 폈을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살인 미수에 술담배까지 하는 욕쟁이 천사. 아주 가관이라고 생각한 우현이 종래에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따가우면 말해."
"안 따가워."
"병신."
실수로 더 깊게 들어갔구만, 안 따갑긴 뭐가 안 따가워. 엄청나게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중얼거린 남자가 쯧쯧쯔,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씨팔, 어쩐지 아프더라니. 사실 티내지 않으려 꾹 다문 잇새로 신음을 삼켰던 우현이 어금니를 깨물면서 웃었다. 그,그래도 하나도 안 아프거든. 진짜로. 엠창. 그런 우현의 말에 잠깐동안 손길을 멈춘 남자가 힐끔,우현을 올려다 보았다.
"엠창이 무슨 뜻인줄이나 알면서 쓰냐."
"욕이지."
"나쁜 말이야."
"그건 알아."
"알면 쓰지 마, 씨발새끼야."
남자가 우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난데없이 씨발새끼라는 더없이 상스러운 욕을 들은 우현이 당황한 두 눈을 깜빡였다. …욕 쓰지 말라고 말하는 주제에 본인은 더 심한 욕을 하고 있으면서. 하지만 감히 대꾸할 용기는 나지 않는 우현이 깨갱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중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같이 있는 동안에도 함부로 말을 걸었다간 뼈도 못 추리게 될 것 같은 기분에 우현의 입을 꾹 다물리게 만든 것도 그렇고. 그렇게 우현은 한참동안이나 저의 발목에 박힌 유리조각을 살살 긁어내는 천사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눈은 아까보다 훨씬 더 무서운 기세로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추운 걸 즐기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그저 그런 겉옷 하날 걸친 남자는 머리 위에 잔뜩 눈을 달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술을 마셔대고 있던 눈치였다.
어딘가 모르게 속상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술은 술대로, 담배는 담배대로라니. 심지어 제 앞에서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는 와중에도 옅은 술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살짝이 미간을 찌푸린 우현이 이제는 살살 연고를 발라오는 남자의 손길에 멈췄던 입을 뗐다. 술 마시지 마.
"몸에 안 좋아."
"……."
"엠창 안 쓸게, 넌 술 마시지 마."
우현의 텅 빈 눈이 난간 위에 진열되듯 늘어져있는 일곱 병의 소주병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우현의 말은 가뿐하게 무시했다. 훤히 드러난 발목이 추위 때문에 점점 빨갛게 변해가고 있지만 계속해서 와 닿는 하얀 손가락의 느낌이 묘하다고 느끼면서, 우현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간 안 좋아져. 그래서 난 오늘 종강 총회도 안 간건데.
"그러다 빨리 죽는다."
"……."
"술 왜 마시고 있었어?"
"있으니까."
"있으니까 마셨다고?"
우현의 말에 남자가 두어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술이 니 눈앞에서 없어지면 돼?"
"……."
"그럼 남은 건 내가 마셔야지."
"…뭐?"
"술은 좀 약한데, 그래도 마셔볼게. 어디 있는데?"
이왕 온 김에 천사의 몸 건강이라도 챙겨주고 가야겠다. 갑자기 어디서 솟아난 미친 정의감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아마 눈 앞에 있는 천사가, 정상적인 사고따윈 하지 못하게 계속해서 오지랖을 넓혀주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자꾸만 제 시야를 가리는 눈송이들에 두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두리번 거린 우현이 구석에 남아있는 세 병의 소주병들에 시선을 두었다.
"넌 그만 마시고."
"야."
"그렇게 마시면 빨리 죽으니까."
"난 죽어도 돼. 멀쩡한 술 동내지 말고 이거 다 바르면 그대로 꺼져."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현이 짐짓 진지한 눈으로 남자의 내리깐 눈을 노려보았다.
"마셔주고 갈거야."
김성규. 또다시 튀어나온 제 이름에 연고를 발라주던 손길을 뚝 멈춘 남자가 이상하게 단호해 보이는 우현과 눈을 마주쳤다.
*
"남우현 술 싫어해요."
노골적인 회장의 눈빛에 머쓱하게 뒷통수를 긁적인 성열이 어물쩡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위가 안 좋다나, 그래서 어차피 왔어도 못 마셨을거예요. 형, 대신 제가 한 잔?"
미친, 진짜 게이세요? 꾸역꾸역 치미는 짜증을 웃는 얼굴로 위장한 성열이 과장된 리액션으로 회장에게 술병을 들어올렸다. 못내 내밀어진 빈 잔에 콸콸콸 술을 채워넣으면서도 형,근데 오늘 머리 멋있으신데요. 하며 칭찬을 가장한 악담은 멈출 줄을 몰랐다. 멋있기는 무슨. 존나 자다 일어난 사람 같아. 아직도 언짢아 뵈는 회장과 잔을 부딪히며 원샷을 하는 와중에도 삐딱한 생각을 한 성열이 파하- 하고 과도한 리액션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야, 야. 까불아."
옆자리에서 계속해서 제 눈치를 살펴대던 여자가 이때다 싶었는지 말을 붙여오기 시작했다. 성열이 입가를 닦아내며 대답했다. 네,네?
"우현이 여자친구 없지?"
"여자친구요?"
성열의 반색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사실 내가 우현이한테 관심이 좀 많거든.
"번호 좀 알려줘."
"…저 남우현 번호 모르는데."
한참을 있다가 뱉어낸 씨알도 안 먹힐 변명에 흐릿하게 풀린 두 눈으로 여자가 깔깔대며 웃었다. 야 까불이! 너 좀 웃기는 앤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여자가 성열의 어깨죽지에 계속해서 팔을 갖다 댔다. 그러지 말고 알려줘라 하면서 콧소리를 내는 여자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인 성열이 속으로는 벌써 백번도 넘게 우현을 씹어댔다.
넌 술 약하니까 이 형이 백번 천번 봐주는 줄 알아, 미친새끼야. 나같이 철벽 쉴드 쳐주는 친구도 몇 없다고. 앞 쪽에 앉은 회장과 여자의 사이에서 난처한 웃음을 지은 성열이 비워진 잔에 술을 쏟아넣었다. 이렇게 스트레스 받는 술자리도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면서.
*
성규는 제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꼴을 보며, 헛웃음도 치고 싶지 않을 만큼 벙쪄 있었다.
우현이 술병을 가져다가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을 때부터 잠시 멈췄던 함박눈이 다시금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시간은 벌써 10시를 향해가고 눈 앞의 미친놈은 맛이 갈대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둬봐야 헛소리만 지껄일 게 뻔하고, 차라리 먹겠다는 술이나 취해 집 밖으로 내다 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병을 따는 우현의 행동을 굳이 말리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되려던 참이었다. 성규의 미간에 지긋이 주름이 잡혔다.
"김성규ㅡ"
"이름 부르지 마."
"김성규우."
"……."
"가브리엘."
내 천사.
성규는 점점 우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꾸벅거리며 아래로 떨어지려는 머리를 스스로 다잡은 우현이 잔뜩 꼬인 발음으로 고장난 카세트처럼 성규의 이름만을 불러대고 있었다. 그 앞에 정자세로 가부좌를 튼 성규가 한심한 눈빛으로 우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동안은 불린 적 없던 제 이름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있는 그 입만을 주시하고 노려보면서.
아까부터 천사니 뭐니 이상한 타령을 해대는 우현은 저를 가만히 보고 있는 성규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남아있는 술병을 들어 입 안으로 탈탈탈 털어 넣었다.
"너는 왜 몸을 팔아?"
우현이 무거운 고개를 아래쪽으로 떨어트리며 물었다.
"왜…그런 짓을 하는건데?"
"……."
"내가, 김성규"
"……."
"그거 때문에 일주일 내내, 집중이 안 됐어 아무것도."
내 천사가 몸을 판다잖아. 마지막 말은 입 안으로 삼킨 우현이 자울거리는 고개를 푹 꺼트렸다가, 얼핏 보이는 성규의 손에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 하면 안돼?"
반쯤 풀린 흐릿한 눈동자를 크게 뜨려고 힘을 준 우현이 표정을 알 수 없는 성규의 얼굴 윤곽에 시선을 고정했다.
"술도 마시지 말고, 담배도 피지 말고, 몸도…팔지 말고."
"……."
"그렇게 진짜, …내 천사처럼."
성규가 벌게진 우현의 얼굴을 쳐다보다, 아까보다 더욱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천사 천사, 지랄하고 있네 아까부터. 취한 새끼 상대로 진지한 말 하면 바보 취급 당하는 건 나일테니까 이런 말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빈정이 상해온 성규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애초부터 마음에 안들었다. 멋대로 이 앞까지 찾아왔던 주제에 실수로 떨어트려 깨진 병을 핑계치고 쫓아 올라와선 피해보상이니 어쩌니 하던 꼴도. 그래도 다친 건 다친거니까 치료는 해줬다 쳐도 이 개새끼는 점점 적당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친한 척 구는 것도 정도껏이지. 한달동안 저를 훔쳐보던 꼴이 마치 전에 키우던 개새낄 닮아서 먹을 것 좀 줬다고 바로 이렇게 신난다고 꼬리를 흔들어대는 꼴이라니. 비틀거리며 머리통조차 가누지 못하는 우현의 머리채를 확 잡아챈 성규가 표정을 굳혔다.
"그럼 어떻게 할까."
우현의 머리를 잡아 쥔 손에 힘을 준 성규가 여전히 멍한 얼굴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죽을까?"
"……."
"술도 마시지 말고, 담배도 피지 말고, 몸도 안 팔면 내가 뭐할까. 그냥 확 죽을까, 나?"
성규가 허탈한 눈을 치켜떴다.
"개새끼는 언제나 오냐오냐 해줄 때 거기서 멈춰야 돼."
"……."
"진짜로 죽,"
"너도 나같았어?"
성규가 이어가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저가 머리채를 잡아 쥐던 말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우현이 천천히 눈을 들어 한 말은 뜬금없는 말이었다. 우현은 여전히 아래로 떨어지려는 머리를 가까스로 바로 세우며 저의 코 앞까지 들이밀어져 있는 성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 죽어. 너도 나처럼…그래?
"그래서 이거,"
"……."
"이랬어?"
성규가 별안간 제 손목에 와 닿는 차가운 감촉에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장시간 병을 잡고 있던 탓에 꽁꽁 언 우현의 손이 저의 머리칼을 잡아채고 있던 성규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천천히 손이 당겨 내려지는 와중에도, 차가운 손은 단번에 손목 언저리를 꽈악 감싸 쥐었다.
가로로 길게 그어진 흉터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새 본 건지, 치부를 들킨 것만 같아 입술을 꾹 깨문 성규가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우현과 눈을 마주했다.
*
"아까부터 남우현 얘기만 하고 있네. 걔가 그렇게 슈퍼스타냐?"
진짜 걔 번호 모른다니까요. 성열이 되지도 않는 변명으로 여자의 추근거림을 쳐내고 있을 때였다. 옆 테이블에서 만취한 채로 시끄럽게 굴던 남자가 갑자기 우현의 얘기를 꺼내며 합석을 시도한 것은.
느닷없이 들려오는 다른 목소리에 회장과 여자, 성열의 눈이 일제히 남자를 향했다. 잠시 휴가 차 나온 군인으로, 부르지도 않은 과행사에 덥석 참여한 모양이었다. 이건 또 뭐야. 성열은 아니꼽게 생각하면서도 꾸벅,눈인사를 하면서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미친놈. 취했냐?"
"내가 그새끼랑 좀 친했는데."
갑자기 대화에 끼어드는 남자에 회장에 타박을 놓았음에도 꼬인 발음으로 몸을 당겨 앉은 남자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나 군대가기 전에 남우현이랑 술도 몇 번 마셨지. 애가 워낙 싹싹해서."
"그…그쵸. 애가 좀 싸가지가 없을 뿐이지 친화력은,"
"근데 걔 좀, 그런 거 있더라고. 애정 결핍? 이런 거."
나 술 좀 더 따라줘봐. 회장 쪽으로 팔을 뻗어 빈 잔을 내민 남자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낄낄거리는 소리를 냈다. 친화력은 개짱이에요. 하며 자리에 없는 친구 기 좀 세워주려던 성열이 입을 딱 다물었다. 미친 놈아, 작작 좀 쳐마셔-하면서도 남자의 빈 잔에 술을 따라준 회장이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니들은 그런 거 못 느꼈냐? 그 새끼 맨날 실실 웃고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어두운 놈이잖아."
"……."
"아니면 나 군대 간 새에 성격이 바뀐건가. 여기저기서 그 놈 칭찬밖에 안 들리네."
어느새 테이블 위에서는 남자 혼자 떠드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회장과 여자는 턱을 받치고 남자의 말에 나름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했다. 성열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끌벅적한 주위에서 유난히 진지한 저희 테이블의 분위기에 어이없는 실소를 뱉으며 남자가 하는 말에 어쩔 수 없이 관심을 표현했다. 남우현, 이런 선배하고 친하게 지냈을 줄은 몰랐는데. 성열이 마른 안주를 집어들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새끼 죽으려고도 했잖아."
물론 그 대목에서는, 안주를 집은 손으로 장난질을 치려던 성열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
"내가 그거 말리느라 얼마나 고생했었는데. 아마 나 아니었으면 그 놈, 시도때도 없이 죽으려고 들었을걸. 이유는 까먹었는데 내 기억으론 집안 문제 같던데. 그래서 걔 약간 그런 끼 있어."
애정결핍.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잔을 든 손을 까딱했다. 아마 우현과 친해지려고 기를 쓰고 있던 두사람에게는 흥미로운 정보였을 것이다. 무심하게 남자가 하는 양을 지켜만 보던 회장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애정결핍?"
"어지간히 외로웠나보지. 하여튼 그 새끼 술마시고 죽는다고 설치는 거 달래주느라 죽는 줄 알았다."
니들은 남우현 뭐가 이뻐서 친해지고 싶어하냐? 급기야는 빈정거림이 가득한 목소리로 회장의 어깨를 툭 친 남자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어댔다.
종강총회의 분위기는 한참이나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떠나가는 사람보단 새로이 등장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갔고 연말에 있는 과행사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들뜬 목소리들이 엉망으로 뒤섞인 술자리였다. 여기저기서 벌칙 게임을 수행하느라 떠들썩한 와중에도 회장과 여자, 남자의 구도에서는 왠지 모를 이상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그래도 휴가 나와서 그런지 그놈 얼굴은 한 번 보고싶네. 종래에는 어깨를 으쓱한 남자가 다시금 술잔에 입을 대려고 했을 때였다.
"아무리 취하면 개가 된다고들 하지만."
성열이 손에 들고 있던 마른 안주를 빈 접시 위로 퉁명스럽게 던져 넣었다.
"인성까지 개가 되면 못쓰죠, 선배. 군대에서 꽤나 고단하셨나봐. 거기서 개 취급 당해요?"
그래서 개같아지셨나? 아니면 원래 개같았어요? 성격이.
친했다고 유세떨면서, 본인 입으로 친했다고 말했던 후배를 그렇게까지 까서야 쓰나. 성열이 억지웃음을 지어보이면서 저를 쳐다보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어쩌면 나한테마저 말하지 않았던 걸 그쪽한테 말했을지도 모르는 새낀데, 그걸 그렇게 공개적으로 떠벌리고 싶을까. 성열은 방금 전 마셨던 술이 식도 안에서 따끔하게 타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회장과 여자, 남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내며 코웃음을 쳤다.
"남우현은 알까, 지가 친했던 선배가 이렇게 개같았다는 거?"
…난 이제 과생활은 다했다. 성열이 쓰도록 웃으면서 생각한 것은 그것이었다.
* * * * *
가부좌를 튼 채 허리를 꼿꼿이 편 성규가 마악 제 볼에 와 닿는 눈송이가 차갑다고 생각했다.
마치 아직까지 제 손목을 가리듯이 잡고있는 남우현의 손처럼. 성규가 아무렇지도 않은 눈을 옆으로 비켜 저와 맞닿아 있는 감은 눈꺼풀을 쳐다보았다.
남우현은 제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가로로 패인 손목의 상처를 감싸쥐면서 잡아온 손과 함께 얼굴을 들이민 남우현은 그야말로 충동적으로 입술을 갖다댔다. 그 때까지도 쏟아지고 있는 눈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어진 우현의 입맞춤에 어느새 둘의 머리 위엔 눈더미들이 얇게 쌓여가고 있었다.
굳이 밀어낼 생각은 없었다. 성규는 마냥 정자세로 평상 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의 쪽으로 길게 기울어진 우현은 맞닿은 입술에서 지독한 담배향과 쓴 술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취한 와중에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빨갛게 얼어붙은 두 뺨과는 다르게 뜨끈하게 열이 오른 이마가 부딪히듯이 맞닿았던 긴 시간. 천천히 눈을 뜬 우현은 그 순간 그대로 숨이 멎을 뻔 하였다.
김성규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저를 노려보듯이 부릅뜨고 있는 두 눈을 가까이에서 마주한 우현이 잠시동안 그렇게 눈동자를 마주치다 입술을 떼었다.
충동적으로 맞추었던 입이 떼어지자마자 움직인 건 성규의 손이었다. 제게서 떨어진 우현의 멱살을 순식간에 움켜 올린 성규가 우현을 제 쪽으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너."
"……."
"나랑 자고싶지."
성규가 멱살을 잡아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찾아왔지."
한참동안이나 이어진 정적 속에서, 덧붙이듯이 운을 뗀 것도 역시나 성규였다. 멀쩡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의 이가 갈리는 소리는 너무도 뚜렷하게 귓가에 박히듯이 들려왔다.
"저번에 한 번 왔다가 왜, 내 얼굴이 안 잊혀져서 다시 온거냐? 아무래도 못 하고 가니까 아쉬워서 다시 찾아 온거야?"
"……."
"그게 목적이면 한 번 해줄게. 어려운 거 아니니까. 근데,"
숨막힐듯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뱉어내는 성규의 목소리는 정확했다.
"난 지금까지 그 짓 해가면서 내 집에서는 그런 새끼들 들여본 적이 없어. 내가 하는 짓이 더럽다는 거 나도 알아서. 그래서 내 집에서 그런 짓 하는 건 나 자신조차 용납 못해."
"……."
"넌 방금 나한테 씨발스러운 짓을 한거야."
다시 한 번 잡고있던 우현의 멱살을 고쳐 잡은 성규가 또박또박, 내뱉었다. 씨발스러운 짓이라고. 지금까지 눈치없이 추근거렸던 거 다 무시하고 넘어갈 순 있어도. 그 좆같은 오지랖, 원래 니놈 성격이다 하고 참아낼 순 있었지만 이번 건 아니라고.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방금 건 용서 못해 개새끼야. 아까 실수로 깨트렸던 소주병ㅡ 지금 다시 니 머리통에 정확히 깨다 박고 싶을 정도로 너, 죽여버리고 싶어."
아무렇게나 멱살을 잡아 올렸던 손에서 흘러내려간 니트가 휑한 손목을 드러냈다.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입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아파보이는 상처였다. 적어도 우현의 눈이 읽기에는 그랬다. 거기까지 말하며 입술을 꾹 깨문 성규가 알 수 없는 눈으로 저의 드러난 손목에 시선을 고정한 우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숨기고 싶다. 아까부터 자꾸 뭔가를 꿰뚫어오는 것만 같은 눈에, 상처난 제 손목을 문득 감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던 아까처럼 이상하고도 차가운 기류가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친 욕설을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현의 눈은 오로지 성규의 손목에만 향해 있었다. 훨씬 전부터 흐릿하게 풀려있던 두 눈이 그 순간만큼은 정확하게 상처입은 손목에 날아가 꽂혔다.
아무도 손대지 않아 방치되어 있는 마른 안주도 어느새 눈 속에 파묻힐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멱살을 잡아올렸던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부릅 떴던 눈을 질끈 감았던 성규가 종래에는 긴 한숨과 함께 힘을 줬던 손을 천천히 놓았을 때였다. …미친새끼. 코웃음치듯이 욕을 뱉은 성규가 우현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푹 꺼트린 고개로, 우현이 중얼거리듯이 흘린 말이 이상하게도 귓가에 콕콕 박혀와서ㅡ
"외롭지 마."
죽지도 마.
나도 결국 죽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말해오는 우현의 입가에선, 성규에게서 옮아간 알싸한 담배냄새가 옅게 풍겨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