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은 내 손을 잡은 채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민윤기는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 뒤에야 느릿하게 고개를 든다. 날카로운 눈매에 귀찮음이 묻어난다. 전정국은 고개를 외로 꼬고 민윤기를 노려본다. 인형극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총괄 및 감독 전정국, 극본 전정국, 주연 전정국, 민윤기 그리고 불쌍한 조연 김탄소. 새아버지는 골치가 아픈지 자꾸만 머리 근처를 문지른다. 당연히 골 때리겠지. 물론 착해빠진 엄마는 모두의 눈치를 보느라 바쁘다. 나는 엄마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인생 순식간에 바닥이라고 귀띔해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다. 이번에는 전정국의 손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온다. 나는 위로하듯 손을 한 번 쓸어준다. 둘이 왜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인지 완벽하게 알아내기 전까지는 둘 중 누구에게도 호감을 잃으면 안 된다.
"형."
"왜."
"누구 덕분에 그 자리까지 갔으면 처신 똑바로 하셔야죠."
"전정국."
드디어 새아버지가 변신할 시간이다. 온화한 사업가와 아버지의 가면을 벗어던진 그는 이상하리만큼 민윤기를 감싸고 돌며 전정국을 나무란다. 민윤기는 말릴 생각은 없는지 그저 의젓한 첫째 아들을 연기하며 방관한다. 전형적인 훈계의 말이 이어지자 전정국의 얼굴에 점점 질린 표정이 떠오른다. 나는 아까부터 질려 있었기 때문에 굳이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엄마는 민윤기의 입맛에 맞춰 정성스럽게 준비한 저녁 식사가 망가져가는 꼴을 보며 울상을 짓는다.
"네가 양아치처럼 굴어도 봐줄 수 있었던 건 다 윤기 덕분이다."
"......"
"윤기가 장남의 위치에서 제 할 일을 해줬기 때문에 널 둘 수 있었다는 말이다."
"......"
"주워온 자식이라고 보듬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크는 걸 보니 참..."
"아버지. 그만하세요."
새아버지의 입에서 아침 막장드라마 뺨치는 대사들이 마구 쏟아져나온다. 나는 일류의 입에서 폭로되는 더러운 삼류 이야기들을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경청한다. 최고 시청률을 찍으려는 순간 갑자기 굳은 표정의 민윤기가 나선다. 민윤기가 그러거나 말거나 전정국은 들을 말 다 들었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나는 전정국에게 끌려 2층으로 올라가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콩가루 집안끼리 만나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저녁식사였다.
전정국은 제 방 침대에 나를 내팽개친다. 그제서야 자유로워진 손목에 따끔한 열이 오른다.
"너 사람 작작 던져. 내가 짐짝이야?"
"김탄소."
"또 뭐가 좆같아? 지금 네 편이잖아, 나."
나는 전정국을 살살 구슬리다가 이내 짜증을 낸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민윤기 옆에 붙어서 아양을 떨든 지랄을 하든 그의 관심과 호감을 살 수 있었다는 걸, 그걸 포기하고 전정국을 따라왔다는 걸 나도 전정국도 알기 때문에 전정국이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너 행복하고 싶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욕심내지 마."
민윤기한테 붙어서 뭐 잡아볼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그냥 나만 이용해.
"나는 호구 새끼니까 맘껏 이용당해 줄게."
담담한 듯 보이던 목소리가 살짝 흔들린다. 나는 애써 고개를 들어 전정국을 쳐다본다. 전정국은 아직 날 제대로 알지 못한다.
"민윤기가 도대체 뭘 어쨌길래."
나는 궁금한 게 있으면 꼭 알아야 해. 여기서 만족할 생각도 없고 너만 이용할 생각도 없어.
"그리고, 너 주워온 애니? 그럼 우리 좀 친하게 지내자. 굴러들어온 애들끼리."
남의 성질을 부숴 긁어서라도. 최소 머리채 정도는 잡힐 거라고 각오하고 던진 회심의 일격에도 전정국은 무덤덤하게 나를 응시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다. 빛을 등지고 있는 전정국의 얼굴에 뚜렷한 음영이 진다. 둘 사이에 처음으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이런 감정선은 별로다. 나는 엄마처럼 빼어나게 예쁘지도 않고 착해빠지지도 않았다. 이 곳에서 살아남는 매일매일이 지옥이다. 외줄타기는 이미 시작됐고, 전정국이나 민윤기 둘 중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내 인생은 어떤 식으로든 망가진다. 사랑을 얻고 바닥으로 가거나, 사랑을 버리고 신세계로 가거나. 나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전정국을 등지고 돌아눕는다. 전정국 특유의 냄새가 훅 밀려온다. 전정국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고 구급상자를 찾아 침대 옆에 두고 나가버린다.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문득 전정국을 잡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탄소야."
"......"
"김탄소."
그리 깊게 잠든 것 같지는 않은데 민윤기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고서야 깰 정도면 피곤했던 모양이다. 주인 없는 방에 주인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대화의 주제는 분명 좋은 내용은 아니겠지. 나는 흐린 눈의 초점을 애써 민윤기에게 맞춘다. 식사를 마쳤는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민윤기는 상당히 평화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죄송해요, 너무 피곤해서 잠깐."
"나한테 죄송할 건 없고."
민윤기가 침대 끝에 아무렇게나 걸터앉는다. 나는 전정국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하다가 황급히 민윤기에게 집중한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세요?"
"말 편하게 해.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가족인데. 유난히 가족이라는 말에 악센트를 주어 발음한다. 민윤기는 처음 보여줬던 그 웃음을 똑같이 지어보인다. 눈은 날을 세우고, 입만 환하게 웃는 잔인한 웃음. 나는 불길함을 직감한다. 분명 좋은 얘기는 아니다.
"내가 가족 뒷조사를 좀 해봤는데.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고."
"... 그럼요."
"이게 무슨, 완전 콩가루더라고?"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 민윤기가 담당하던 공장에서 일하던 어머니, 어쩌다 감독 나온 새아버지와 눈이 맞은 어머니, 그리고 가난하고 성격 더럽고 가진 게 없으며 거지근성까지 가진 그녀의 딸. 나는 민윤기의 입에서 생생하게 재생되는 나의 지난 삶들을 회상함과 동시에 부러워한다. 돈과 명예, 권력이 있으면 저렇게 남의 뒤를 캐고 다녔다는 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구나.
"나는 여기 절대 못 떠나."
"......"
"누군가 나를 떠나게 만드는 건 더더욱 싫고."
그게 네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정국이와 달리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잖아? 민윤기는 침대에서 일어난다. 미련 없이 제 할 말을 하고 떠날 수 있는 위치. 이 집안을 떠나고 싶지 않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윤기는 완벽한 갑이고 나는 완벽한 을이다.
"너희 학교에서 매달 열리는 파티가 있어, 탄소야."
"... 파티요?"
"말이 좋아 자선 파티지."
그냥 재벌 2세들끼리 더럽게 노는 거야, 영화 같은 거 보면 알잖아. 민윤기는 내가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까지 아는 걸까. 민윤기가 가진 돈이면 누구를 얼마나 어디까지 조사할 수 있는 걸까. 처절하게 농락당하는 기분이다. 나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뜬다. 비참하다. 사라진 전정국이 보고 싶다.
"그런데요?"
"거기서 제일 더럽게 놀아 봐."
"... 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얘기 들어보니까 우리 집안 망가진 거 학교에도 다 퍼졌다던데."
"......"
"네가 저지른 일인데 책임은 져야지. 원래 있던 애들보다 더 더럽게 놀아. 아무나 붙잡고 입술 부비고, 술도 맘껏 마셔."
"......"
"그럼 널 가족으로 인정할게. 별 볼 일 없는 네 엄마까지도."
민윤기는 내 상상보다 화끈하며 내 예상보다 멍청하다. 괜히 쫄았네. 혼자 남겨진 나는 미친 듯이 웃으며 기업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제안이 저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맘껏 비웃어준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양심도 도덕도 없었다. 차라리 순결한 성녀를 연기하라고 하는 게 더 어려웠을 것이다. 재벌들의 문란한 일탈이 내게는 일상이었고 하루 일과였다. 저 정도쯤은 식은 죽 먹기다. 민윤기는 어쩔 수 없이 나를 가족으로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한결 개운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든다. 잠들기 직전 전정국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간다.
전정국은 아침까지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로 가는 길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교실에 이르러서야 말없이 손을 내미는 전정국과 눈을 마주친다. 오늘 처음으로 마주본 전정국은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얼굴인데도 막상 보니까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똑바로 해.'
'너나.'
그런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정국은 내게 굽히고 들어오지 않는다. 아마 그가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일 것이다.
"안녕, 얘들아!"
나는 필요 이상으로 세게 교실 문을 열어젖힌다. 전정국은 나를 이끌어 제 옆자리에 앉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럽던 교실은 소름 돋을 정도로 조용해진다.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휴대폰으로 머리를 박는다. 전정국과 나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말을 걸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몇몇 있었다. 아무리 대가리에 든 게 없더라도 눈치 있고 야망 있는 애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정국아, 우리 1교시가 뭐야?"
전정국이 질색하는 꼴을 보고 싶어 오빠라고 부를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서 오빠 타령은 그만두기로 한다. 전정국은 소름끼치게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교과서까지 챙겨주는 친절함을 보이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한 아이들이 슬쩍 고개를 들자 곧바로 으르렁거리는 센스까지 보여준다. 나는 전정국이 이 학교의 무법자이고 양아치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서울 게 없는 전정국이 꼼짝 못하는 존재가 있고 그게 나라는 소문 같은 사실이 온 학교에 퍼지는 것이다. 유난히 쨍하게 들리는 종소리 후에는 담임이 지루한 목소리로 느리게 읊는 전달사항들이 이어진다. 나는 대충 흘려들으며 파티에 입고 갈 옷들을 생각한다.
"오늘 그 날이라고 다 미친 새끼들처럼 놀지 말고. 적당히 놀아라."
"네!"
파티가 기대되기는 하는지 담임이 나가자마자 교실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진다. 교사들까지 인정하는 파티면 대체 어느 정도까지 문란한 걸까. 나는 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즐기며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는다. 새아버지나 엄마의 인정은 필요없이 오로지 민윤기의 마음에 드는 순간 게임은 끝날 것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전정국의 손을 찾는다. 따뜻한 손이 차가운 내 손과 맞물린다. 나는 전정국을 향해 할 수 있는 한 가장 밝게 웃어준다. 오늘은 내가 이 가족의 '진짜' 일원으로 인정받는 날이 될 것이다.
양심 고백 + 암호닉 신청은 최신 화에서 부탁드려요! |
사실 저도 이 글의 결말을 모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글을 쓸 때 스토리를 정하고 쓰는 게 아니라 제가 보고 싶은 장면 위주로 쓰기 때문에 이 글이 어떻게 될지 저도 몰라요... ㅠㅠ 자기만족용으로 쓴 글에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실 줄은 몰랐고... 결론은 사랑한단 말... 파티는 제가 가장 보고 싶었던 장면이었기 때문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쓰겠습니다. ㅠㅁㅠ♥
그리고!
제가 연재 텀이 좀 빠른 편이라 우아한 가족사가 예상 외로 빠른 완결을 맺게 될 것 같아요. 이따 투표가 하나 올라올 텐데 그 글을 꼭! 읽어주세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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