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빠르게 집으로 사라진다. 너 뭐 입을 거야, 너 무슨 약 가져올 거야, 무슨 술 마실 거야, 누구랑 키스할 거야? 상식을 뛰어넘는 질문 수준에 일반인이라면 경악하겠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들은 이미 질리도록 봐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정도니까. 나는 전정국이 깔끔하게 연미복을 빼입은 모습을 상상하며 묻는다.
"너 뭐 입을 거야?"
"아무거나."
전정국은 의외로 파티에 관심이 없는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나는 마찬가지로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그렇구나. 우리는 무관심하고 건조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전정국이 관심을 보이기 전에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옷을 고른다.
간단하게 세미 수트를 빼입은 전정국은 내 깊게 파인 드레스와 틀어올린 머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평소에는 신경전으로 팽팽하던 차 안이 오늘따라 전정국의 못마땅한 시선으로 소란해진다.
'뭘 쳐다봐.'
'갈아입어라.'
'파티잖아. 뭐가 어때?'
전정국은 애써 깔끔하게 넘긴 머리를 요란하게 헝클인다. 기분이 좆같다는 뜻이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덮여지는 수트 자켓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이런 상황에서 전정국은 나보다 능숙하게 대처한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내 손을 잡고 당당하게 학교로 들어서는 전정국,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누구보다도 문란하게 놀기 시작하는 전정국. 예쁘장해 보이는 여자의 허리를 붙들고 전정국이 내게 눈짓한다.
'뭐 해? 놀아.'
더럽게 노는 거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말을 마친 전정국은 고개를 돌려 여자와 키스하기 시작한다. 나는 전정국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민윤기를 실망시킬 마음 따위는 전혀 없기 때문에 기꺼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준다. 입고 있던 드레스의 밑단을 이미 손질된 선을 따라 뜯어내자 허벅지가 훤하게 드러나는 미니드레스가 된다. 남 보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민망하지만 지금 이 파티에는 민망한 사람들이 넘쳐나므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조명이 번쩍이고 뇌가 터질 정도로 음악이 울려대는 홀을 맘껏 누빈다.
이딴 파티에도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식 명칭은 불야성. 밤이 없는 성이라는 뜻이다. 나는 불야성을 자유롭게 누비는 불나방처럼 술을 마시고 약을 찍어 먹고 스테이지에 올라가 난잡한 춤을 춘다. 도수도 생각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들이켠 술기운이 슬슬 올라오는지 몸이 나른해진다. 대충 해장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는 마약을 몇 번 훑어먹고 또 바에 앉아 칵테일을 들이켠다.
"야."
너무 급하게 마셨는지 뇌가 얼얼해진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돌리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다. 전정국이다. 머리가 흐트러지고 헝클어진 와이셔츠를 입은 전정국. 술냄새가 풍기긴 하지만 멀쩡한 것을 보니 예상 외로 주량이 센 것 같다. 흰 와이셔츠 군데군데 여자들의 립스틱 자국이 난무한다. 항상 정갈한 모습이었던 전정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나는 문득 그런 전정국을 엿먹이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조용히 술만 마시다가 집에 갈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민윤기도 그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전정국도 민윤기도 실망시킬 생각이 없다.
"술 마셨네."
"응."
"약도 했냐?"
나는 전정국의 잔소리를 대충 흘려들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돈 많아보이고 잘생기고 여자 잘 꼬실 것 같은 남자애. 마침 근처 소파에 여자 무리에 둘러싸인 남자애가 한 명 보인다. 요란한 색깔으로 물들인 머리에 몇 명의 손이 달라붙는지. 돈 많아보이고 잘생기고 여자 잘 꼬시겠네. 나는 거침없이 걸어가 남자애의 어깨를 톡톡 친다.
"자기야."
"응?"
남자애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입술을 들이박는다. 내 감이 틀리지 않았는지 남자애는 당황하지도 않고 큰 손으로 뒷통수를 감싸쥐며 리드한다. 끼를 떨던 여자들이 시끄럽게 소리친다. 나는 남자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른 손의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올리는 것으로 보답한다. 데시벨이 커지면 모이는 시선도 비례하기 마련이다. 점점 몰리는 눈들이 많아지자 남자애는 더 적극적으로 키스에 응한다. 나도 지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키스를 선사한다.
"야, 씨발."
꽤 오래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전정국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묵직한 유리잔이 날아와 탁자를 친다. 탁자를 곁눈질한 남자애가 아쉽다는 듯 입술을 몇 번 더 물다가 눈을 찡긋대며 손을 흔든다. 잘 가, 자기야. 키스 한 번으로 대갈빡 깨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나는 열렬한 손키스로 응답해준다. 백 번 이해해, 자기야.
"너 진짜... 이 미친 년."
여유롭게 남자애와 인사를 나누는 내 꼴을 결국 참지 못한 전정국의 입에서 상스러운 욕설이 튀어나온다. 소동이 벌어지거나 말거나 제 할 일을 하거나 약에 취해 헤롱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우리에게 집중한다. 시끄럽게 빵빵거리던 음악도 전정국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살살 줄어든다. 이미 몰린 시선에 시선이 겹치고 또 쌓인다. 나는 새삼 전정국이 가진 위치와 명예를 실감한다. 기분이 안 좋다는 이유로 파티의 분위기마저 좌우할 수 있는 위치. 고작 양아치 주제에 이런 학교에서도 이 정도로 먹히는 권력인데 하물며 사회에 나가 있는 민윤기는 어떨까.
"왜 화 내, 정국아. 원래 이런 파티 아니야?"
나보고 놀라고 한 거 잊었어? 너 지금 되게 모순적이야.
"그리고 너도 아까 그 년이랑 키스했잖아."
나는 내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긴다. 분명 이 중에 민윤기도 나를 감시하기 위해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옷차림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민윤기나 전정국이나 놀아봤자 내 손바닥 위다. 나는 일부러 더 비아냥대며 전정국의 화를 돋군다. 결국 폭발한 전정국이 억센 손으로 내 머리를 잡아쥔다. 두피가 당겨지는 얼얼한 느낌에 저절로 고개가 젖혀진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전정국에게 질질 끌려간다. 홀에서는 우리가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샴페인이 터진다. 다시 신나는 음악이 흐른다.
"아파."
"야."
"아프다고."
"봐줄 때 적당히 기어올라. 하라는 이용은 안 하고 엿먹일 생각이나 하니까 내가 그렇게 호구 새끼로 보여?"
"갑자기 왜 지랄이야. 여기서는 원래 다 그렇게 논다며? 진짜 씨발, 여기 있는 새끼들하고 다 붙어먹는 꼴 보고 싶으면 계속 그따위로 굴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짝 잡혀진 머리채가 풀린다. 전정국의 풀 곳 없는 분노는 애꿎은 벽으로 향한다. 나는 망가진 머리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다. 전정국은 피가 배어나오는 주먹으로 내 턱을 잡아올린다. 나는 기죽지 않고 전정국을 마주 노려본다. 각자의 눈동자에 망가진 서로가 비친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입술이 번들대는 나와 먼지와 립스틱 자국으로 더러워진 전정국.
"한 번 붙어먹어 봐, 그럼. 민윤기랑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
"내가 이용당한다고 해서 이용하는 방법도 모를 것 같아?"
"......"
"여기서 태어나자마자 배우는 게 남 속이는 법이야. 알아들어?"
"......"
"그러니까 적당히 해, 김탄소. 내가 이용당해 줄 수 있을 만큼. 너 사람 좋아하는 마음 가지고 영악하게 구는 년인 거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그 이상은 나도 못 참아. 전정국은 다시 홀로 들어간다. 홀 문이 닫히기도 전에 입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온다. 전정국이 아무나 붙잡고 키스하는 모양이다. 나는 약간 멍해진 기분으로 잠시 서 있다가 담백한 박수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합격 축하해."
내가 너를 너무 얕잡아 봤네. 재밌다. 민윤기는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눈까지 환하게 웃는다. 그 웃는 얼굴에 침을 내갈기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나도 마주 입꼬리를 올린다. 귀가 찢어질 정도로 울려대는 음악 속에서 우리는 소리 없이 서로를 향해 잔인한 즐거움을 선물한다. 불이 타오르는 한 불나방은 절대로 몰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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