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입들이 빠를수록 소문은 커진다. 나는 보란 듯이 전정국과 손을 잡은 채로 급식실에 들어선다. 전정국은 인상을 찌푸리지만 잡힌 손을 빼지는 않는다. 내가 먼저 손을 내민 적이 처음이라 그런 거겠지. 얼굴값을 좀 했는지 여자들에게서는 질투 어린 시선과 험한 말들이, 남자들에게서는 경악과 감탄의 눈빛이 쏟아진다. 전정국과 나는 급식실 중앙에 앉는다. 전정국과 같이 다니는 무리처럼 보이는 아이들은 멀리서 기웃거리다가 이내 각자의 식판으로 얼굴을 박는다. 나는 전정국의 식판으로 싫어하는 반찬들을 옮겨 담는다. 전정국은 밥에 손 댈 생각도 않고 나를 노려보기 바쁘다. 마지막 시금치를 옮기려던 순간 철퍽, 하는 역겨운 소리와 함께 내 머리로 엄청난 오물들이 쏟아졌다. 씨발 시금치 냄새... 재빠르게 전정국을 쳐다봤지만 전정국의 시선은 내 옆에 붙박여있다. 나는 대충 머리를 털며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다.
"아, 너구나."
시시하게. 범인은 전정국도, 그의 친구들도 아닌 아까 그 여자애였다. 전정국의 목덜미에 환장하던 그 여자애. 아마 전정국과 자신이 꽤 대단한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뭐라도 해 보려는 순간 동생이라는 년이 나타나서 깽판을 쳤으니 제 딴에는 꽤 분했겠지. 역시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여자애는 마스카라가 흉하게 번진 얼굴로 난잡한 욕설들을 퍼붓다가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금세 태도를 바꿔 전정국에게 매달린다. 테이블 아래로 전정국이 주먹을 가만두지 못하는 걸 멍하니 쳐다보면서 머리에 달라붙은 콩나물이 말라가는 걸 느낀다. 나는 전정국에게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끝내라는 뜻의 눈짓을 보낸다.
"정국아, 너 진짜 저 년이랑 무슨 사이야? 진짜 동생이야? 저런 더러운 년이랑?"
"알고 싶어?"
그럼 닥쳐. 전정국이 기다렸다는 듯 여자애의 머리채를 잡아올린다.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전정국이 얼마나 나를 조심스럽게 다뤘는지 알 것 같다. 전정국은 머리채를 잡지 않은 한 손으로 시금치가 한껏 쌓인 제 식판을 집어든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이 덜덜 떨린다.
"쟤 내 가족 맞고."
한 번.
"더러운 년도 아니고."
두 번.
"너 같은 년이 이딴 짓 할 수 있는 애는 더 아니고."
세 번. 전정국이 깨끗하게 비워진 식판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친다. 씩 웃는 꼴이 더럽게 잘생겼다. 모두가 숨죽인 급식실에 쇠가 나뒹구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퍼진다. 나보다 더 더러워진 꼴을 하고 입만 벙긋대는 여자애를 향해 너그럽게 한 번 웃어준 뒤 미련 없이 급식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전정국은 따라올 것을 알기에 굳이 부르지 않는다. 아악. 막무가내로 내던져진 여자애가 그제서야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이런 몰골로 수업이 가능할 것 같지도, 듣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막무가내로 교문을 빠져나온다. 전정국이 급하게 제 마이를 벗어 내 어깨에 두른다.
"너 호구냐? 왜 말을 못하는데."
"굳이 내가 말할 필요 있어?"
어차피 네가 알아서 할 텐데. 당당한 내 말에 전정국은 나지막히 욕을 중얼거리지만 딱히 반박하지는 않는다.
"아저씨 부를까?"
"아니, 그냥 걸어가."
사람들도 없고 좋네. 듣기 싫다는 의미로 단호하게 앞만 보면서 걷자 전정국도 나를 어쩌지 못한다. 음식물을 뒤집어쓴 채로 걷는 게 다른 사람에게 이런 몰골을 보이는 것보다 낫다. 혹시나 더럽혀진 내 모습을 보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바닥에서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살던 나를 상상하는 것. 그게 내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은 시간 개념을 잊게 만드는지 벌써 저 멀리 깔끔하면서도 웅장하게 지어진 저택이 보인다. 눌린 초인종에서는 싸구려 알림음 대신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들려온다. 지금쯤이면 새아버지는 직장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을 것이고, 엄마는 어울리지도 않는 사교 모임에 섞여보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다. 도우미 아줌마의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전정국과 손을 잡고 함께 들어선다.
의아해하는 아줌마에게 사고가 좀 있었다며 둘러대는 전정국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욕실로 향한다. 살갗이 부어올라 벗겨질 정도로 문질렀다. 아무도 더러운 내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깨끗하다. 더 이상 같은 옷을 몇 주씩이나 입지 않아도 되고, 쌀밥 먹는 날을 정해두지 않아도 된다. 나는 몇 번이고 되새긴다. 어떻게든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누구에게도 감정을 주지 않겠다고. 그렇게 몇 번이고 다짐하느라, 오늘 첫째 도련님이 식사하러 오신다는 아줌마의 말을 듣지 못한 건 행운이었을까 불운이었을까.
"탄소야."
"네, 아버지."
"오늘 첫날인데 학교는 어땠니?"
새아버지의 다정한 안부 인사 한 마디에 평화로워 보이던 저녁 식탁이 쨍하게 얼어붙는다. 엄마의 한껏 올린 속눈썹이 불안하게 떨리는 반면 전정국은 표정 변화 없이 밥만 깨작인다. 나는 새아버지와 눈을 맞추며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하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이 속으로는 얼마나 끓고 있을지 짐작해 본다. 태생도 모르는 년과 붙어먹었더니 일이 골치 아프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걸까? 유일한 소음인 전정국의 젓가락질만이 정적을 뚫는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기 위해 살살 머리를 굴려본다.
"진짜로,"
"죄송합니다."
아. 낯선 목소리에 엄마가 돌연 반색한다. 전정국은 확연히 굳어진 표정으로 젓가락을 내던진다. 마구 헤집어진 반찬들이 처량해 보인다. 새아버지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내게서 눈을 떼지 않다가 이내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손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S그룹의 공식적인 후계자, 언론에서 가장 주목받는 재벌 2세, 세상과 외부에 노출된 유명인.
"서류가 좀 밀려서요."
전정국과 아버지가 같지만 성은 다른 형. 뚜렷한 이목구비와 크고 탄탄한 체격의 전정국과 달리 흰 피부에 적당한 키, 나른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사람.
"민윤깁니다."
내 인생의 흥망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 민윤기였다. 빈 자리를 골라 앉은 그는 엄마에게 예상 외로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새어머니 되실 분이라고요. 전정국은 우리 엄마를 처음 보던 날 어떻게 했더라. 아마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고 욕을 퍼부은 뒤 그대로 나갔었을 것이다.
"그럼 얘는 제 동생?"
처음으로 민윤기와 나의 시선이 마주친다.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민윤기는 사람을 꿰뚫는 듯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전정국이 잔뜩 날을 세우다가도 이내 꼬리를 내리는 타입이라면 민윤기는 항상 부드럽게 칼을 갈고 있는 타입.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예의 바르고 잘 배워먹은 정상적인 여동생처럼 보이기 위해 최대한 밝게 웃는다.
"안녕하세요, 오빠."
"......"
"김탄소예요."
"아, 탄소. 이름 예쁘네. 알고 있겠지만 민윤기."
민윤기가 입꼬리만 올린 채로 웃는다. 웃음기 없이 서늘하게 휘어지는 눈과 마주치며 나는 직감한다. 민윤기와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내 인생은 끝나겠구나. 우리 둘 중 누구도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애써 화를 참는 듯한 얼굴의 전정국 역시 민윤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식탁 아래를 더듬어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내 손을 찾아 잡는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악력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찌질하게 굴지 마.'
전정국은 내 입모양을 읽었음에도 손을 더 세게 쥔다. 다 이해한다는 듯 웃어보인 민윤기는 고개를 돌려 새아버지와 사업 이야기를 시작한다. 밥이 맛있다는 예의바른 인사도 빼놓지 않으면서. 한창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갈 무렵 전정국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저 정도면 오래 참았다 싶어 나는 전정국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 주기로 한다.
"씨발, 밥맛 떨어져서."
왜냐하면.
"아주 천사 새끼 납셨어요."
우리는 우아한 가족이니까.
암호닉 |
윤기 등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과분한 관심과 응원 항상 감사합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혹시라도 빠진 분들이 계시면 꼭 댓글 남겨주세요! ( ◍•㉦•◍ )♡ 그리고 신알신을 해주셨던 분들은 다시 한 번 해 주셔야 신알신이 정상적으로 온답니다. ㅠㅅㅠ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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