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응."
"아침부터 어디 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국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우린 늘 그렇듯 잠깐 뻑뻑하고 서먹한 사이가 되어 비참한 기분을 느낀다. 보잘것없는 환경에서 맞는 아침은 언제나 씁쓸하고 비참하다. 정국은 오늘 오후에 약속이 잡혀있고 나는 오전에 약속이 있다. 우린 아마 하루의 대부분을 서로를 떠난 채로 보낼 것이다. 그런 사실은 언제나 날 기쁘게 하면서도 외롭게 했다. 사실 나는 가끔씩 정국과 나를 '우리'로 칭해도 되는지 고민한다.
그림은 오늘따라 잘 팔리지 않았다. 파리는 안타깝게도 예술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멍하니 죽치고 앉아있기도 무안해서 행인들과 눈맞춤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그들은 무관심하게 지나쳐갔다. 나를, 내 그림을, 내 인격과 내 모든 것들을. 별안간 먹은 것도 없는 속이 더부룩해졌다. 정오쯤에 한 여자가 와서 관심을 보였지만 푸르고 검은 빛들로 가득 채워진 캔버스를 보고는 혀를 내두르며 발길을 돌렸다. 난 괜히 부끄러워져 캔버스를 끌어안아 숨기면서도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진 여자의 옷을 저주했다. 한 번 버림받은 그림이 다시 구원의 기회를 얻은 건 내가 다섯 번째 캔버스를 가방에 집어 넣고 있을 때쯤이었다. 그림을 집은 사람은 단정하게 차려 입은 코트가 잘 어울리는 갈색 머리 남자였다. 하얗다기보다는 창백하다는 말이 더 적합할 정도의 피부를 가진 남자.
"그린 사람을 닮아서 그런가 예쁘다. 살게요."
남자의 어깨 위로 햇살이 침몰했다. 난 무능한 선장처럼 숨이 막힌 채로,
"사세요. 근데, 돈으로는 안 받을게요."
"제가 바라던 바인데요."
배를 버리고 그림을 팔았다.
남자의 이름은 민윤기라고 했다. 깔끔한 외모와 성격에 맞는 이름이었다. 깨끗한 성역을 연상시키는. 다정하게 이불을 덮어주는 고운 손을 보며 나는 항상 무심하고 거칠었던 정국의 손을 생각했다. 윤기는 일주일에 세 번씩 그림을 사러 오겠다고 했다. 그가 손을 흔들어주는 따뜻한 집을 나서기 무섭게 불어닥친 냉혹한 칼바람이 환상을 베었다. 아, 정국이. 난 늦어버린 시간과 잠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정국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말끔한 금화로 두둑하게 찬 주머니가 묵직하게 짤랑거리는 소리를 노래 삼아 걷는 밤길이 꽤 즐거워서였나, 그게 아니면.
"좀 늦었네요."
"응."
"그림은 많이 팔았어요?"
"으응. 밥은?"
"먹었어요."
"나도."
정국은 자신도 방금 들어왔다고 말하며 매고 있던 목도리를 벗었다. 오뚝한 콧대에 희미한 물감 자국이 남아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린다. 내 직업과 사생활에 정국이 상관하지 않듯 나도 그가 그림 모델을 위해 쏘다니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정국의 얼굴에 예술적으로 손을 댔다는 사실은 상당히 불쾌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정국이 무미건조하게 눈짓한다. 왜요.
"물감 묻었네."
"아, 오늘 일이 좀 오래 걸려서요."
"누구야?"
"네?"
"오늘 누구 모델 해줬냐고."
"아…"
그런 건 안 물어보기로 했잖아요. 나지막한 탄성 뒤에 정국이 불만스럽게 덧붙였다. 난 잠시 패배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너 나 사랑하긴 해?"
"하."
이번엔 불만 대신 경멸이 돌아왔다.
"그러는 누나야말로 그림을 그리러 다니는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는데."
정국이 거칠게 턱짓했지만 난 굳이 시선을 내리지 않아도 그가 무얼 뜻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침묵했다. 그 날 밤 나눌 공간도 없는 좁은 방에서 꾸역꾸역 떨어져 자면서 나는 윤기의 따뜻한 집을 떠올렸다. 나와 마찬가지로 뒤척이던 정국이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밀쳐내고 밖으로 나간다. 흰 티 하나에 후줄근한 바지를 걸쳤지만 적당한 주근깨와 흰 피부는 그를 귀족 소년처럼 보이게 만든다. 나는 최소한의 온기조차 없는 방에 홀로 남아 담배연기로 만든 캔버스에 내 숨을 칠하며 윤기를 덧그린다.
정국과의 냉전이 길어질수록 윤기와의 밀회는 잦아졌고 그는 약속한 날짜마다 꼬박꼬박 그림을 사러 와서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내가 꽤 많은 돈을 모으고 꽤 좋은 음식을 먹을 동안 정국은 여전히 차가운 골방에서 하루 번 돈을 한 끼 연명할 딱딱한 빵을 사는 데 썼다. 처음엔 그런 정국이 마음에 걸려 붙잡는 윤기를 두고 억지로라도 집에 들어왔으나 그가 구입한 내 그림 몇십 점이 깔끔한 대리석 벽면에 맞추어 걸리게 되었을 때 나는 정국에 대한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내 모든 것들이 윤기에게 휘둘릴수록 정국 그리고 세상과의 간극은 걷잡을 수 없이 벌려지기만 했다. 난 이제 완전히 그가 만든 그의 세계에 갇혀 사는 나를 윤기가 어떻게 봐줄지 가끔 생각한다.
"사랑해요."
"왜 나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왜 나냐고."
"사랑하는데 이유를 붙일 수 있으면 완전 계산적이잖아."
"……"
"난 그런 거 별로던데, 너는 좀 고지식하네."
그런 부류의 낯간지러운 말들을 잘도 내뱉으며 낄낄대는 윤기에게 내가 거의 섞여들어갔을 때쯤, 그는 별안간 이별을 선포했다. 멋있는 작품들은 꼭 소장하겠다며 잊지 않겠다는 젠틀한 인사까지 덧붙여서. 그동안 내가 써온 물건들은 가지고 나가도 좋다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밑바닥부터 흔들리는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는 나를 통째로 부정당한 듯한 생각은 예상보다 비참했고 최선을 다해 그를 붙잡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처음 봤을 때처럼 깨끗한 옷차림과 순한 눈매로 나를 부정했다. 나는 처음 그림을 팔았던 장소에서 물감만 대충 발라놓은 캔버스를 몇 개 세워놓고 일주일 내내 기다리기도 하고 밤새 윤기의 집을 맴돌기도 해보았으나 그는 정말 성역에 몸을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흔적 없이 증발했다. 결국 난 정신병원까지 전전해야 했고 일 년이 지난 후에야 급작스레 추락한 현실의 저수지에 윤기와 속삭였던 모든 사랑의 언어를 버리고 잔혹한 외로움 속에서 천천히 익사해야 하는 운명을 간신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러게요."
"잘 지냈지?"
"네."
"미안... 해."
"뭐가요."
오랜만에 만난 정국은 언제나처럼 미지근하고 무관심했다. 난 그의 한결같은 태도에 안도했다. 선이 더 굵어지고 탄탄해진 정국의 몸에는 채 지워지지 않은 물감 자국들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누구야?"
"네?"
"네 애인."
"누나가 몰라도 되는 사람이에요."
"그래…"
한결같다고 생각했던 내가 틀렸다는 걸 단박에 깨달았다. 정국은 무관심한 게 아니라 날 증오하는 중이라는 사실이 굉장히 아픈 듯이 느껴졌다. 푸석해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느꼈지만 그대로 흘러내리지는 않았으므로 난 고개를 쳐들었다. 삼 년 전과 마찬가지로 느릿하게 목도리를 벗은 정국이 한마디 한마디를 꾹꾹 눌러 뱉었다.
"근데, 걔는 별거 아니에요."
정국이 싸구려 입욕제 냄새를 풍기며 내 등을 감쌌다. 나는 오랜만에 한 편의 작품이 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전정국의 소유였다가 민윤기에게 도난 당한 후 다시 내팽개쳐져 원래 주인을 찾아온 비운의 그림. 저주 받은 그림. 정국이 툭 튀어나온 내 어깨뼈에 나지막이 입술을 묻었다.
"누나."
"응?"
"날 사랑하긴 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국은 대답은 바라지 않았다는 듯 한참이나 입술을 뭉그러뜨렸다.
몇 년 안 봤다고 낯설어진 여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국이 조그만 숨소리를 뒤로 하고 낡은 방문을 열었다. 날이 풀리려는지 새벽인데도 바람이 따스해서 정국은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익숙한 골목 뒤에는 깨끗한 얼굴을 한 남자가 서 있다. 연신 초조한 얼굴로 불안한 시선을 옮기던 남자가 이내 정국을 보고 환히 웃는다. 성역이 무너진다.
"형."
"정국아."
정국도 마주 웃는다.
우아한 가족사 올리기 전에 잠깐 머리 풀 겸 쓴 글이라 일부러 신알신 끄고 올려요. 단편입니다. 셋의 관계를 해석해 보세요.
우아한 가족사는 리뉴얼을 거쳐서 F 편부터 올라옵니다. 문체도 그렇고 많은 게 바뀌긴 하겠지만 처음부터 진행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