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
“ 선배, 진짜 죄송해요. ”
잔뜩 심통난 얼굴을 하고 있는 지성선배를 보고 있자니 마치 제가 정말 큰 죄라도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말없이 이리저리 눈만 굴리며 앉아있었다.
임원 엠티 날짜와 장소가 정해졌고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근데 하필이면 딱 출발 전 날에 생리가 터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지성선배에게 엠티 불참을 알렸다.
평소 생리통이 엄청 심한 편이라 이대로 엠티를 갔다간…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 아니야, 어쩔 수 없지. 내일은 집에서 푹 쉬어. ”
“ 네. 애들이랑 재밌게 놀고 오세요. ”
“ 다음 엠티는 절대 빠지지 마라. ”
“ 당연하죠. ”
아쉽다는 얼굴로 제 팔을 툭툭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성선배를 뒤따라 빈 강의실에서 나왔다.
다시 한 번 지성선배와 인사를 하곤 학교 건물을 빠져나와 통증이 가득한 허리를 부여잡고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 집까지 또 언제 가냐.
지하철을 타고 걸어갈 생각을 하니 막막해져 편의점에 들러 초코우유를 하나 사서 입에 물고 나왔다.
생리통엔 단 거지.
“ 여어, 김여주.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자 언제 나온 건지 박지훈이 저를 부르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하필 저 밉상은 또 왜 만나는 거야.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로 멀뚱멀뚱 서있자 박지훈이 제 옆으로 다가와서 제 팔을 툭 쳤다.
“ 왜. ”
“ 야, 너 나 싫어하는 티 너무 내는 거 아니냐? ”
“ 알긴 아네. 모르는 줄 알았지. ”
“ 와, 김여주 인성. ”
저를 째려보는 박지훈을 등지고 걷기 시작하자 박지훈이 같이 가자며 제 옆으로 헐레벌떡 쫓아왔다.
그렇게 둘이 걷고 있는데 박지훈이 왜인지 모르게 자꾸 저를 힐끔거리는 느낌이 들어 옆을 쳐다보자 얼굴엔 잔뜩 궁금증을 달고 씩 웃는 박지훈을 모른 척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박지훈이 괜히 기침도 안 나오면서 헛기침을 잔뜩 해대곤 슬쩍 입을 열었다.
“ 야, 김여주. ”
“ 왜. ”
“ 너 영민이 형이랑 다시 만나냐? ”
“ 뭐래, 미쳤냐? ”
“ 아니야? ”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째려보자 되려 놀란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박지훈에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우리 과 대표 오지라퍼 박지훈이 왜 잠잠하나 했다.
“ 아니니까 쓸데없는 질문 좀 하지마. ”
“ 그럼 왜 둘이 밥도 같이 먹고 그러냐? ”
“ 아, 나도 몰라. ”
“ 보아하니 영민이 형이 다시 만나자고 연락 왔구만? ”
“ 닥쳐줄래, 제발. ”
눈치는 또 더럽게 빨라요.
박지훈이 제 반응에 뭐가 혼자 신나는지 깔깔 웃다 제 어깨를 다시 툭 치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저를 쳐다보았다.
아, 씨. 내 어깨 그만 치라고.
“ 그리고 딱 보니까 너도 아직 영민이 형한테 미련 남았지? ”
“ 닥쳐. ”
“ 잘 생각하고 얼른 선택해라. ”
“ 아, 진짜 너 자ㄲ… ”
“ 괜히 우진이한테 상처주지 말고. ”
“ …야. ”
“ 아닌 것 같으면 최대한 빨리 끊어내. ”
“ …… ”
“ 희망고문이 제일 고통스러운 거 알지? ”
저에 대한 박우진의 마음을 아는 듯한 박지훈의 말에 멍하니 박지훈을 쳐다보자 저를 향해 씩 웃었다.
뭐야, 박지훈도 알고 있었어?
“ 니가 어떻게 알아? ”
“ 나랑 우진이는 소울메이트 아니냐, 영혼의 단짝이야. ”
“ 근데 너 저번엔… ”
저번에 임영민이 나와 밥을 먹으려고 강의실 앞에서 만났을 때 박지훈은 박우진을 말리고 나랑 임영민이랑 밥을 먹게 해줬었다.
그땐 왜 그랬는데?
박우진이 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으면 박우진을 도와줬어야 되는 거 아닌가?
“ 내가 볼 때에는 넌 우진이한테 아예 마음 없는 것 같아서. ”
“ …… ”
“ 근데 영민이 형한테는 마음 남아있는 것 같길래 그랬어. ”
“ …… ”
“ 근데 그건 그냥 내 생각이고, 내 별명이 괜히 오지라퍼겠냐. ”
만약 니가 우진이한테 마음이 있으면 박우진 강력 추천. 우진이가 너 많이 좋아해.
아직도 멍하니 가만히 서있는 저를 향해 힘내라며 화이팅을 날려주곤 이만 버스를 타러 가보겠다며 박지훈이 돌아갔다.
예상치 못했던 박지훈의 말들에 갑자기 마음이 심란해져 입술을 꾹 깨물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귓가에 박지훈의 목소리가 울렸다.
‘ 우진이가 너 많이 좋아해. ’
“ 아, 허리… ”
어제 집에 도착해서 생리통 때문에 평소보다 몇 배로 더 피곤한 탓에 씻고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어 깨어보니 벌써 날이 바뀌어있었다.
대체 얼마나 잔 거야.
대충 어제 오후 6시 쯤에 자서 지금이 오전 9시니까 15시간?
많이도 잤네.
핸드폰을 열어보자 다들 엠티를 출발한 건지 단톡방이 시끌시끌했다.
사진을 보니 쌓여있는 술들이 어마무시한 걸 보아 다들 가서 멀쩡히 돌아오진 못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 배고프다. ”
아무도 없는 집에 밥을 차려줄 사람도 없어 혼자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다 생리 때문에 아픈 건지, 배가 고파서 아픈 건지 모르겠는 배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집에 먹을 것도 없는데 뭐 먹지.
냉장고 앞으로 향해 냉장고를 열고 뒤적거리고 있는데 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아침부터 누구야.
“ 여보세요. ”
- 집이야?
이 아침부터 전화한 주인공은 박우진이였다.
“ 어, 집이지. 왜? ”
- 밥은?
“ 이제 먹으려고. ”
- 안 돼, 먹지마.
“ 뭐? ”
- 먹지 말고 기다려.
“ 뭔 소리야, 뭘 기다려. ”
- 먹으면 안 된다.
그리곤 뚝 끊어진 전화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앉아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다.
아니, 대체 뭘 기다리라는 소리지. 난 지금 배고파서 죽을 것 같은데.
박우진에게 카톡을 보내볼까 싶어 카톡방을 들어가 자판을 누르는 순간 딩동- 울리는 현관문 벨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벽 한 쪽에 붙어있는 현관과 이어진 인터폰 화면을 쳐다보자 당당하게 서서 문 좀 열어달라며 화면에 대고 손을 흔들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박우진이 대체 여긴 왜?
“ 뭐야, 왜 왔어? ”
“ 너 밥 안 먹었다며. ”
손에는 음식들을 가득 싸들고 해맑게 웃으며 제 집으로 들어오는 박우진을 보다 순간 제가 방금 일어난 민낯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박우진과는 이런 만남이 종종 있던 일이라 이젠 서로 씻지도 않은 모습을 봐도 아무렇지 않을 지경에 이르러 그다지 별로 신경은 쓰지 않는 듯 했다.
“ 너 엠티 안 갔어? ”
“ 어. ”
“ 왜? ”
“ 너 안 간다고 그래서. ”
뭐가 문제냐는 듯 저를 쳐다보곤 다시 상을 펴 자기가 사온 음식들을 펼치고 있는 박우진을 보며 절로 나오는 한숨에 이마를 짚었다.
지성선배가 또 엄청 툴툴거렸겠구만.
계속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자취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엔 당연히 먹을 것도 거의 없었다.
또 워낙에 귀차니즘이 강한 성격이라 뭘 만들어서 먹을 생각은 당연히 안 했고.
그럴 때, 박우진이 종종 들러서 음식을 사다주거나 가져다주는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러고보니까 박우진도 참 정성이다.
“ 앉아, 먹자. ”
“ 뭘 또 이렇게 아침부터 오고 그래. ”
“ 너 혼자 배고프다고 뒹굴거리고 있을 게 눈에 뻔하잖아. ”
“ 그래도 너 막, 어?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이렇게 불쑥불쑥… ”
“ 음식 가져오면 좋다고 환영할 땐 언제고. ”
사람 반박 못하게 왜 맞는 말을 하고 그러냐, 민망하게.
그래도 배부터 채우자는 생각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딱 내가 좋아하는 걸로만 다 사왔네, 역시 센스 甲.
말없이 열심히 먹기 시작하자 박우진이 저를 빤히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 있던 생수를 꺼내왔다.
제게 내밀어주곤 젓가락을 들어 제 앞에 이것저것 음식들을 쌓아주기 시작했다.
“ 아, 내가 알아서 먹을게. ”
“ 누가 뭐랬냐. ”
“ 나 챙기지 말고 너 먹어, 너. ”
“ 나도 먹고 있어. ”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음식을 우걱우걱 먹고 있으니 제 모습이 웃긴지 박우진이 고개를 숙여 킥킥거렸다.
뭐야, 지금 비웃는 거지.
“ 너 되게 햄스터처럼 먹는다. ”
“ …욕이야? ”
“ 칭찬이야, 너 귀엽다고. ”
뭔 그런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괜히 어색하진 마음에 다시 집중해서 먹고 있으니 저를 빤히 쳐다보는 박우진의 시선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져 애써 신경을 쓰지 않으려 음식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박우진이 아예 상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저를 쳐다보는 탓에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 마주보았다.
“ 우진아, 나 체할 것 같다. ”
“ 왜? ”
“ 니가 사람 먹는 걸 빤히 쳐다보니까. ”
“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되게, ”
“ …… ”
“ 신혼부부 같지 않아? ”
순간 입에 남아있던 음식물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불상사가 일어날 뻔했다.
아, 잠시만… 지금 내가 잘못들은 거 아니지?
아니, 마음을 밝혔다고 해도 이건 너무 대놓고 갑자기.
“ 나 진짜 체할 것 같아. ”
“ 그냥 해본 소리야, 얼른 먹어. ”
“ 우진아, 나… ”
“ 아, 진짜 장난이야. 미안해. ”
씩 웃고선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박우진을 보고 있자니 순간 열이 확 올라 고개를 돌려 다른 곳만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의아한 듯 저를 쳐다보는 박우진을 두고 화장실로 향해 문을 닫고 거울을 쳐다보자 예상대로 볼과 목 부근에 붉게 달아오른 게 눈에 보였다.
갑자기 미쳤나봐, 왜 이러지.
빠르게 손부채질을 하다 물을 틀어 찬물로 세수를 간단하게 하고선 화장실을 나오자 음식을 먹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박우진이 보였다.
뭐야, 쟤는 또 왜 저래.
“ 왜 그러고 앉아있어? ”
“ …진짜 미안해. ”
“ 어? ”
“ 혹시 기분 나빴어? 아, 내가 진짜 지금 약간 정신이 없어서 필터링이 안 되고 말이 막 나오거든. ”
“ …… ”
“ 진짜 미안해, 앞으로는 그런 말 안 할게. ”
밥을 먹다 뜬금없이 사라진 제가 기분이 나빠서 그랬다고 생각한 건지 제 눈치를 보며 횡설수설 사과하는 박우진을 보다 기분이 이상해져 고개를 저었다.
기분 나빠서 그런 거 아닌데.
얘는 또 뭘 그렇게 눈치를 보고 미안해하는 거야, 사람 무안하게.
“ 그런 거 아니야. ”
“ …… ”
“ 뭐, 내가 언제 니 장난에 기분 나빠한 적 있었어? ”
“ 그래도. ”
“ 너 그냥 장난으로 말한 거라며. 왜 이렇게 미안해해. 사람 민망하게. ”
아, 너 민망하라고 그런 거 아닌데. 미안해.
또, 미안하다는 소리.
요새 들어 느끼는 거지만 박우진이 유난히 제 눈치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아마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서 그런 거겠지.
남녀사이에서 더 좋아하는 사람이 을이 된다는 것, 그건 이미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근데 지금 저와 박우진 사이에서 박우진이 그 을을 자처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뒤숭숭했다.
니가 왜 굳이, 나 때문에.
박우진을 보내고 멍하니 누워있다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한 저녁이 다가왔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만 있으니까 세상 엄청 평화롭네.
생리통도 약을 하나 먹었더니 많이 나아진 것 같아 그냥 생각없이 뒹굴뒹굴 침대 위에서 쉬고 있는데 울리는 카톡 진동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쥐었다.
대충 화면만 확인해보니 보낸 사람은 임영민.
순간 벌떡 일어나 카톡에 들어가자 제일 위에 숫자와 함꼐 떠있는 임영민의 카톡에 차마 누르진 못하고 떠있는 미리보기 한 줄만 읽었다.
근데 내용이,
「 문 앞에 확인해봐 」
문 앞? 문?
설마 우리 집 문?
“ 뭐야… ”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가 조심스레 문을 열자 무언가 툭- 밀리는 느낌이 들어 확인하자 쇼핑백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거 확인하라고 한 건가?
쇼핑백을 들고 들어와 앉아 쇼핑백을 열어보자 그 안에는 각종 군것질, 음료들이 들어있었다.
초콜릿, 젤리, 사탕, 과자, 초콜릿 우유, 꿀물, 홍차 등등…
전부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내용물에 입술을 꾹 깨물고 쇼핑백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사귈 때에도 제 생리 주기를 알고 생리통이 심한 것도 알고 있던 터라 날짜가 다가오면 항상 이렇게 군것질들을 바리바리 싸서 주곤 했었다.
아마 제가 몸이 아파 엠티를 못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준 것일 거다.
임영민은 이번 엠티 못 간다고 했었으니까.
“ 하아… ”
어쩐지 조용하다 싶었다.
아침에 그렇게 박우진과 보내고 낮에도 멍때리다 자다 반복해서 임영민을 생각할 틈이 없었는데,
꼭 이렇게 자기가 있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신경이 쓰이는 짓만 골라서 한다.
카톡을 들어가 답장을 보낼까 고민하다 문득 어제 박지훈이 제게 했던 말들이 귀에 맴돌았다.
‘ 희망고문이 제일 고통스러운 거 알지? ’
핸드폰을 꼭 쥐고 제 옆에 놓인 쇼핑백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꾸 두 남자들이 저를 시험에 들게 한다.
자꾸 이런 식으로 상처주기 싫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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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앞으로는 따로 글을 올려야겠습니다 !
어떻게 오늘 글도 잘 읽으셨나요 ?
글을 쓰면서 뭔가 이게 제대로 쓰고 있는 건가 싶고 ~.~
그래도 독자님들이 재밌게 읽으셨다면 전 그걸로 만족합니다.
다들 좋은 밤 보내시고, 많이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