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BGM : 두번째달 - 얼음연못)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새까만 어둠 속에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총을 굳건히 쥐고 있는 손등에 식은땀 한방울이 흘러내리는 소리조차도 크게 들릴 듯한 밤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보이는 천막들에 하나둘씩 불이 꺼질때마다 힘줄이 불거져 나온 손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머리를 짓누르는 군모 틈새로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침내 모든 천막에 불이 꺼졌다. 온 세상이 고요에 휩싸였다. 병장의 팔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실명이 된 것처럼 깜깜하고 눅눅한 공기 속에서도 병장의 손이 똑똑히 보였다. 꽉 쥐고 있던 병장의 손가락이 펴지기 시작했다.
하나, 바람은 매서웠지만 군복은 땀으로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호원은 문득 바다의 짠내음이 섞여들어오던 해안가 고향집의 겨울바람이 생각났다.
둘, 군화에 돌이 들어간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끈이 너무 헐렁한건 아니겠지. 호원이 입대하기 한달전 입대했던 같은반 친구의 전사통지서를 받고 오열하던 그의 어머니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셋, 마른침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그동안 지나쳐온 수많은 전투 현장의 처참한 모습이 머릿속을 하나둘 스쳐지나갔다.
넷, 쥐죽은듯 조용한 가운데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방아쇠에 검지를 올렸다. 애써 눈물을 삼키며 입대하는 호원을 배웅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다섯.
땅을 박차고 뛰어나가며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에 힘을 주는 순간,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의 밝게 웃는 모습이 가슴깊이 파고들었다.
-
눈을 떴다가, 감았다가. 다시 또 떴다가, 감았다가. 달라진건 없었다. 눈꺼풀에 가려진 세상도 까맸고, 달빛 하나 없는 폐허의 밤도 까맸다. 까무룩 잠들기전 바람이 불안하다 느꼈던건 착각이 아니었던듯하다. 여전히 겨울치고는 눅눅하고 어두운 공기가 바람을 타고 맴돌았다. 햇빛도 구름도, 맑은 하늘도 없는 이 탁한 세상에서는 오직 바람만이 많은 것을 전달해준다. 언제나 담겨오는건 짙은 모래냄새, 그리고 차가운 겨울의 기운. 그리고 간혹가다 섞여오는...
피비린내?
쇳내음이 가득 담긴 이 공기는 전쟁터를 돌아다니다 보면 드물게, 하지만 심심찮게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서로가 서로를 겨누고 서로가 서로를 쏘고 결국 서로가 서로의 눈앞에서 쓰러지는 모습에서 번지는 검붉은 자욱들. 그 속에서 퍼져나오는 찢어질듯한 비명과 코를 찌르는 비린내.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방아쇠를 당겼던 손가락은 갈 곳을 잃고, 그 앞에 서있던 여린 한사람은 답지않게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내 눈앞은 온통 새빨개지고. 눈에서 흘러내리는 피눈물은 흐르는 눈물에 피가 섞인것인가, 흐르는 피에 눈물이 섞인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내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화염이 그대로 쏟아지는것인가. 분명 몇초전까지는 새까맸던 세상이 붉게 뒤덮이고 내 눈에선 또다시 피눈물이 흐르는구나. 눈 밑을 아무리 훔쳐봐도 피는 묻어나오지 않고, 세상을 덮었던 붉음이 내 머릿속까지 뒤덮어오기 시작하면 그만 난 정신을 잃고 만다.
-
다시 눈을 떴을때는 붉음 대신 어둠. 아직도 속눈썹에 핏방울이 맺힌듯한 착각에 눈을 문질러보았지만 눈썹에 맺힌건 투명한 눈물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 묻고 또 묻어도 가끔가다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그 기억을 감당하기가 힘들다. 애써 얼굴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니 주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까보단 어렴풋이 밝아온 하늘. 새벽 네다섯시 정도 된 것 같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어 굳어버린 몸을 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떨어지는 무언가.
"두개?"
초록색 담요 두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분명 어깨에 덮고있던 담요는 한장. 그 사람이 왔다갔구나. 아닌가, 아직 이 근처에 있으려나? 떠오르는 얼굴에 기분이 좋아져 담요를 주워들고 팔랑거리며 주위를 살피다가 기대있었던 돌더미 반대쪽으로 돌아간 동우의 놀란 눈에 담긴 것은,
"으아악!"
"...안녕, 일어났네?"
떠올렸던 얼굴의 주인공과,
"왜...왜 이래요!"
그의 주위에 번져있는 붉은 피.
순간 다시 덮치는 피의 향연에 휘청거리던 동우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긴장감이 온 몸을 뒤덮었다.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다...다친...거에요?"
"야."
"어, 어? 네?"
힘겹게 감고있던 눈을 뜨고 노려보듯 쳐다보는 그에게 놀라 동우는 뒷걸음질쳤다.
"존댓말."
"...에?"
"존댓말 왜 쓰냐고...반말하기로...했잖아..."
"어...그게 문제가 아니고 지금... 다쳤잖아요... 말하지 마요! 피나!"
"다음에 만날 땐 반말하기로... 했잖아, 동우야."
"알..알았어! 말하지마!"
"안녕, 동우야."
"말하지 말라니까!"
"...너도 인사해. 나만 인사해?"
"아니 근데... 어깨 다친거에요,가 아니고..다친거야? 피 많이 나는데..."
반갑게 인사 좀 해주면 어디 덧나나...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존댓말을 섞어가며 어깨의 상처에 당황해 어쩔줄을 모르는 동우가 귀여웠다. 호원은 옆에 풀어놓은 작은 가방을 가리켰다.
"저..저기 뭐 있어요, 아니 있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호원은 다시 눈을 감았다. 피가 솟구치고, 아프기도 무진장 아팠는데. 저 사람을 보니 다 괜찮아진 듯했다. 다, 괜찮아.
한참 후 눈을 뜬 호원의 어깨에는 피에 젖은 군복 대신에 초록색 담요가, 쓰라린 상처대신 어설프게 감긴 붕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겨울에 옷을 벗기긴 좀 그랬는지 옷은 어깨부분만 찢어져있었고, 응급처치도구는 다시 가방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고통도 아까보다 덜했고, 피가 많이 난 것 뿐이지 생명에 지장이 갈만한 상처도 아니었다. 모든게 멀쩡한데, 얜 어디있다니. 동우가 옆에 없었다. 호원은 최대한 어깨에 무리가 가지않게 조심스레 일어나 돌더미 반대쪽으로 향했다.
"환자가 쓰러져있는데 왜 봐주지도 않고 반대쪽에 있냐."
나즈막히 말하자 무릎사이에 폭 박혀있던 동우의 고개가 들렸다. 그리고 반가운 그 얼굴에 흐르는건,
"야, 너 왜 울어?"
그 말이 신호탄이 되었는지 천천히 흐르던 눈물이 왈칵 터지고 말았다. 호원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옆에 몸을 낮췄다. 호원과 자신의 눈높이가 같아지자, 동우는 꺽꺽 울면서 호원을 주먹으로 퍽퍽 쳐댔다. 물론 어깨 근처 가지않게.
"왜 울어..."
"흐..흐어...이..흐..이 나쁜 놈아...흐어엉..."
"......"
"놀랐잖아...흐...내가...어...얼마나 놀랐는데요...흐어어엉..."
"놀랐는데요가 아니고 놀랐는데."
"노..놀랐는데...흐.."
"......"
"담요보고 좋ㅇ..으..좋았는데..."
"......"
"피...피 나고.. 흐윽...그렇게...누워있어서..으...얼마나..."
"......"
"...내가 얼마나...흐윽.. 놀랐는지 아냐구요!"
"아냐구요가 아니라 아냐고."
"놀랐는지 아냐고...흐윽...지금 이딴게 문제가 아니잖아! 흐어어엉.."
크게 울음을 터뜨려버리는 동우를 바라보던 호원이 그를 살짝 끌어안았다.
"그래... 미안..."
다치지 않은 쪽 어깨가 눈물로 젖어들어가는 걸 느끼며 호원은 웃었다. 동우는 서러워보였지만 사실,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웃겼다.
"이제 괜찮냐?"
한참을 꺼이꺼이 운 다음에야 얼굴이 새빨개진채 동우가 호원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호원은 실없이 웃었다. 아, 귀여워.
"잘도 우네."
"...놀리지 마..."
"담요보고 왜 좋았냐?"
"에?"
"담요보고 좋았다며. 왜 좋았는데?"
"어...그냥...어..."
"내가 찾아와서 좋았어?"
"어? 내가 왜! 내가 왜 니가 온게 좋아서 웃었겠어! 난 절! 대! 안그랬어!"
"내가 와서 좋아서 웃었구나. 알았어."
"아니라니까!"
순진한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럼, 아까 못했던걸 해볼까.
"자, 그럼 인사."
"응?"
"인사하라고. 난 인사했잖아."
"너..."
"왜?"
"좀...음..."
이건 무슨 병신인가,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동우의 눈에 호원은 그저 웃었다.
"인사해줘. 다시 만났잖아."
"그래... 안녕..."
"안녕 다음에?"
"어?"
"내 이름도 불러줘야지. 설마 까먹었어?"
"아니, 아니! 안까먹었어!"
"그럼 얼른 인사해."
"안..안녕, 호원아."
다시 얼굴이 새빨개진 동우가 얼굴을 가렸다.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 친구잖아."
"치...친구?"
"열아홉살이라며. 지금 말도 트고 있잖아. 친구맞네."
"으..응..."
눈을 내리까는 동우를 빤히 쳐다보던 호원도 돌더미에 나란히 기대앉았다.
"저..저기..."
"왜?"
"어쩌다가 다친거야?"
"아... 야간기습나갔다가... 분명 기습이라 생각했는데 상대편에서 알고 있더라고. 선견지명이라도 있는 새끼가 있는건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양쪽 다 피터지게 싸웠지."
"......"
"그러다가 다쳤어. 어떤 놈이 쏜 총알에 스쳤거든."
"많이...아프겠다..."
"별로 안아파."
"......"
"니가 옆에 있어서."
"어? 뭐라고?"
다시 얼굴이 터질듯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동우를 보면서 호원은 크게 웃었다.
"하하- 장난이야. 뭘 그렇게 놀라. 얼굴까지 빨개지고."
"......"
"첫눈에 반했냐?"
"뭐..뭔소리야!"
"순진하긴. 장난을 범죄로 만들어버리냐?"
"...이씨..."
동이 터오고 있었다. 눅눅하고 어두웠던 공기가 걷히고,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따뜻하고 기분좋은 공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바람에서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짙은 모래냄새, 차가운 겨울의 기온, 그리고 이렇게나 행복한 기분까지.
"근데, 왜 그렇게 놀랐어?"
"뭐가?"
"그냥 피만 좀 많이 난거잖아. 나 안죽는데. 하도 울어대서 내가 죽을병걸린건가 착각까지 했잖아."
"어..."
"내가 다친게 그렇게 많이 걱정된거야?"
"응?"
"역시... 너 첫눈에 반했지?"
"아니라니까!"
"으하하- 장난이래두. 그런데 너무 서럽게 울더라. 혹시...막 피 공포증이나 상처공포증... 이런거 있어?"
"......"
"...괜한걸 물었나..."
"아니야. 그냥...좀... 그냥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래."
"...그래?"
"어... 그러니까 다치지마... 호..호원아.."
"우와, 걱정해주는거야? 고맙네."
기어들어갈듯한 목소리로 얘기하고 다시 얼굴을 붉힌 동우의 얼굴엔 어느새 공포가 가셔 있었다. 같이 있어서, 그냥 같이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아...아까 때린거 미안해."
"아프지도 않았어."
"그래도 미안해..."
"맨날 미안하대."
"우리가 몇번 봤다고 그래."
"세번이나 봤지. 이 전쟁통에 그렇게 보는건 인연이야, 임마-"
"호원아...음...근데 너..."
"어?"
"다치자마자 나한테 온거야?"
"그러고보니 그렇네."
"왜 군의관한테 안가고..."
"그냥... 총알이 어깨를 스쳐지나가고, 손에 힘이 타악- 풀리는데. 그냥 그 순간에 니가 생각이 나서..."
"내가 어딨는줄 알고 그 몸을 하고 날 찾아와?"
"그냥 여기있을거 같아서 여기로 왔어."
"내 몸에 위치추적기라도 달아놨냐?"
"그럴지도."
"흐억...진짜?"
"뻥이야, 바보야."
"야!"
"근데 나 망했다."
"어?"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여기 왔는데. 다 나 찾는다고 혈안이 되있을거 같은데."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조심스레 일어나 돌더미 반대쪽을 내다본 동우는 부산스레 움직이는 군인들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호..호원아... 너 가면 안돼?"
"왜?"
"너 찾으러 오잖아..."
"나 혼날까봐? 나 안혼나~ 환자를 누가 혼내냐."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좀 걱정되서."
"그래? 그럼 나 갈까?"
자리에서 일어난 호원이 가방을 들고 동우를 내려다보았다.
"나 진짜 가?"
"으...응?"
"나 간다? 진짜 갈거야."
뒤돌아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호원의 모습에 동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실 좀 무서웠다. 혼자 있고 싶지도 않았고. 안갔으면 좋겠는데, 또 그러면 무서운 군인들이 호원이를 찾으러 올까봐 걱정도 되고...
"안녕, 동우야~"
어? 가면 안되는데... 가지 말지...
"다음에 보자~"
손까지 흔드는 호원의 모습에 다급해진 동우는 벌떡 일어나서 조르르 뛰어가 호원의 손목을 잡았다.
"아, 깜짝이야. 또 왜."
"...아...안..."
"어? 안녕이라고?"
"아니... 안...가면 안되냐고..."
"뭐라고? 가버리라고?"
"그...그냥 여기..."
"여기서 빨리 사라지라고?"
"그런거 아니야!"
"그럼 뭔데?"
"가...가지말라고! 내 옆에 같이 있어!"
흡- 말했다. 나 어떡해! 동우는 활활 타오를 것 같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짓궂게 웃고 있는 호원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순진하긴.
-
군인들의 눈을 피해 군부대에서 좀 멀리 떨어진 마을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폐허가 되버린 마을엔 빈 집이 여러채 있었다. 그 중 가장 깨끗한(먼지가 수북했지만 그나마 깨끗한 편이었다) 집을 찾아들어가 나란히 담요를 덮고 앉으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아, 맞다, 이거."
동우는 어제 담요를 펴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전등을 꺼냈다.
"어? 후레쉬는 왜?"
"니꺼잖아. 이거 담요도 그렇고. 나한테 주고 갔잖아."
"아 그랬지..."
"너 밤에 안추웠어? 겨울인데..."
"보시다시피, 담요가 하나 더 있어서."
자신의 어깨에 둘러진 담요를 살짝 들어보인 호원이 씨익 웃었다.
"그럼 후레쉬라도 갖고 가..."
"너 가져."
"어?"
"우리 부대에 후레쉬는 널리고 널렸어. 밤에 혼자 다니면 어둡고 무섭잖아. 너 가져."
"그래도 괜찮아?"
"당근."
"응...근데 어깨 괜찮아?"
동우가 상처부근을 살며시 건드리자 호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많이 아픈거야?"
"좀 아파. 지금은 대충 붕대만 감아놨잖아. 나중에 부대 돌아가면 군의관이 치료해주겠지."
"잘못되는거 아니지? 나 그런거 한번도 안해봐서 좀 이상하게 감은 거 같은데..."
"괜찮아, 안 죽어."
"그래도 다치지는 마, 호원아."
"동우야, 먹을거 줄까?"
"응?"
"가방에 뭐 있을걸."
"아니아니, 너 먹어."
"흠...니 이마에 나 배고파요 하고 써있어, 임마."
"아니야! 너 아프잖아, 너 먹어."
"그래, 그럼 내가 먹을게."
"...응...맛있게 먹어..."
"왜 갑자기 울상이야. 솔직히 말해, 먹고 싶지?"
"아니, 괜찮다니까, 읍!"
호원이 동우의 입에 가방에서 꺼낸 빵 한덩어리를 쑤셔넣었다. 입안에 들어온 빵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동우는 호원을 쳐다보았다.
"나...음...진짜 괜찮은데..."
"입 찢어질듯이 웃으면서 그런 말 하면 안 믿기거든."
"...미안."
"그거 먹고 한숨 자자. 새벽에 잠도 안 자고 우느라고 가뜩이나 없던 니 기력이 쇠할대로 쇠했을거야, 아마."
"너는 안 힘들어? 피도 많이 흘리고... 싸우고 왔잖아. 배고프지 않아?"
"난 너 먹는것만 봐도 배가 불러. 첫눈에 반했거든."
"응?"
호원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빵을 물고 있던 동우의 볼이 새빨개졌다. 잔뜩 당황한 동우의 모습을 보면서 호원은 또다시 크게 웃었다.
"푸하하- 이 바보야. 몇번이나 똑같은 장난에 걸리냐?"
"야, 야! 너!"
"으하하하하- 너 놀리는거 진짜 재밌어, 알아? 으하하-"
입술을 삐죽 내민 동우가 호원의 얼굴에 먹던 빵을 훽 던져놓고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고 누워버렸다.
"너 삐졌어?"
"......"
"기지배도 아니고 그런 장난에 삐지냐?"
"아니거든!"
"그럼 이 빵 내가 먹는다."
"......"
"먹어도 되지? 너 이제 배부른거지?"
"......"
"그럼 먹는다. 이거 내꺼~"
그 때 담요 속에서 팔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호원의 손에 들린 빵을 낚아채갔다. 호원은 또다시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어느새 잠이 들었었나보다. 깨진 유리창 밖의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대체 몇시간을 잔거야- 하며 부스스 일어난 동우의 옆에 호원은 없었다. 그 대신, 시멘트 바닥에 하얀 돌로 적힌 가지런한 글씨들.
「곤히도 자네. 나 먼저 간다. 또 올게. 여기 있어라.
- 장동우가 첫눈에 반한 이호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