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점이 자주 바뀔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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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환의 전체적인 평판은 '나쁘지 않다'였다. 겸손하다기보다 솔직했고, 거짓말할 줄 모르지만 독설을 내뱉지는 않았다. 여자와의 관계는 게이설이 돌만큼 깨끗했지만 지인관계도 넓은 편은 아니었다.
고독을 즐기는 편인 재환은 술자리를 그닥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고, 남에게 관심또한 별로 없는 편이라 결과적으로 그의 곁에 친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성격이 재환의 연예인생활 총평에 걸림돌은커녕 재환이 별탈없이 성장할 수 있는 거름이 되었고, 택운 또한 몇년전, 아니 몇달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믿어왔다.
그런데 몇달전 차학연의 시나리오가 재환의 손으로 들어왔고, 학연의 간곡한 부탁에 택운은 재환에게 학연의 시나리오를 받아들이라고 권유했다. 악덕대표가 아닌 택운은 학연의 영화가 항상 까다롭고 민감한 문제임을 알기에 그렇게 독촉하진 않았고, 재환이 싫다하면 안할 생각이었다.
할게, 대신 배우선정은 내가해.
두 시나리오를 들고선 거의 일주일은 고민하던 이재환이 단 일초의 고민도 없이 오케이싸인을 내뱉은 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택운의 시련 시작이었다는 것을, 택운은 몰랐다.
신인은 발톱의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던 재환이 생판 모르는 신인 홍빈을 주연 역에 턱하니 붙여놓을 때까지도 택운은 짐작하지 못했고, 그 신인을 택운의 소속사에 들어가게 해달라 강요할 때 즈음에야 택운은 어렴풋이 이상함을 느꼈다.
형. 이홍빈 매니저는 왜 안붙여줘.
개새끼, 그냥 니가 다 해먹어 아주. 며칠전에 고의적으로 매니저의 전화를 씹으면서까지 홍빈의 연기를 봐주었다는 소식을 그대로 재환의 매니저에게서 보고받은 택운은 대체 남 일에는 개미 똥구멍에 붙어있는 먼지만큼도 관심이 없던 재환이 무슨 심보로 홍빈에게는 관심을 가지는지 미치고 돌아버릴 일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알아서 하는 사람이 일주일이 넘도록 매니저를 안붙여줘? 애가 시간 늦을까봐 한시간 일찍 와있더라.
내 연예인에게는 욕하지 말자라는 철칙을 오랫동안 고수하던 택운이 입밖으로 욕을 내뱉을 뻔했을 정도로 재환의 태도는 마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과 같았다. 간신히 알았다 대답한 택운은 전화를 끊고 홍빈에게 매니저와 벤을 공급해줄 것을 이야기했다.
"이상해, 다시."
"저..저. 어떻게 해야.."
"내가 말해줘야 아나 그걸? 설마 집에서 대본리딩 안해본 건 아니지?"
"해봤는데요..이 부분은 잘 몰라ㅅ.."
잔뜩 울상을 지은 홍빈은 지금 상황이 반쯤 이해가 안되고 반쯤 정신이 나가버렸다. 평생의 롤모델이자 곧 자신의 단짝역할로 거의 8개월 남짓을 자신과 같이 찍을 거물 중의 거물이 앞에서 연기선생을 해주고 있다. 홍빈은 자신이 대본을 읽고 연기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너무 신기했다. 오디션을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일대일? 나 이러다 고작 이거 읽고 하얗게 불타는 거 아니겠지?
"니가 이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하는 거지, 잘 모르는 게 어딨어? 만약 대본리딩하다 몰랐으면, 그상태로 멈출건가? 모른다고 징징거릴래?"
"...아니요."
이래서 신인을 싫어하는 거구나, 홍빈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재환의 소속사에서 연락이 온 날 바로 계약하러 가겠다 대답을 한 홍빈이 계약서에 싸인을 하면서 택운에게 들은 이야기는 재환이 신인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홍빈에게 혹시 아는 사이냐, 친척 사이냐라며 꼬치꼬치 캐묻는 택운에게 아니라는 말 외에는 할 수 없었던 홍빈은 왜 재환이 신인을 싫어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이 저같아도 답답할 듯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면서 왜 자신은 오케이해줬는지, 그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하..한번만 보여줄테니까, 잘 봐."
홍빈이 일어나 들고있던 대본을 뺏어간 재환이 다시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더니 눈을 감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눈을 뜬 재환은 벌써 '정 훈'이라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어린 애가 실수했다고 생각해주시면 안될까요? 정말 몰랐어요, 그냥.. 그냥 진희가 너무 막..막 보고 싶고 그러고 계속 보고 있으니까 또 껴안고 싶고..그래서.. 죄라는 생각은 없었어요, 으아..그냥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사랑하니까.."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가며 연기를 하는 재환. 재환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는 시나리오에 쓰여있는 글자가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듯 홍빈의 귀에 들어와 박혔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정 훈'을 연기하는 재환이 아니라 재환의 얼굴을 한 '정 훈'을 보는 듯해 홍빈 또한 눈물이 맺혔다.
"알았..너 우냐?"
"예? 아..아니요."
"쓸데없이 감정은 풍부하네. 이제 해봐."
작게 알았다 대답한 홍빈이 시나리오를 다시 받아들었고, 홍빈이 재환의 연기를 되새김질하며 나머지 연습을 마쳤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분이 그 유명한 홍빈씨?"
"네? 제가요?"
약속된 시간이 되자 재환과 홍빈, 그리고 재환의 매니저가 있는 방 안으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배우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홍빈과 악수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이분이시구나 홍빈씨가."
"반가워요 홍빈씨. 행운아라 그래야하나?"
비꼬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저 이 많은 연예인들 사이에서 오히려 유명인이 되어버린 홍빈은 갸우뚱거렸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 대한 무슨 소문이라도 퍼졌나 싶은 홍빈이 옆에 앉은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오히려 홍빈이 모르면 자신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홍빈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재환은 그런 홍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머어머, 다 모여있네요. 반가워요 다들. 차학연 감독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웅성웅성 처음 만난 사람들의 어색한 첫인사와 아는 사람들끼리의 반가운 인사가 끝나갈무렵 전혀 그런 민감한 문제는 다룰 거 같지 않은 준수한 외모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감독이 바나나우유를 한 손에 든 채 환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반갑고요, 내 시나리오가 이번에도 또 반향을 일으킬 만한 시나리오인 걸 알면서도 오케이해줘서 다들 고마워요."
청소년 성폭행과 탈선문제에 관련된 영화라며 간단히 자신의 영화에 대해 소개한 학연은 배우들을 둘러보았고, 시나리오의 퀄리티와는 다르게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은 학연은 배우들의 대본리딩을 하는 동안 만족스럽다는 웃음을 지었고, 몇시간 지나지않아 대본리딩이 모두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음.. 일단 재환씨, 홍빈씨, 그리고 하연씨는 남아주실래요?"
아까부터 긴장때문에 애꿎은 대본지만 구겨뜨렸다 피는 행동을 반복하던 홍빈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를 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홍빈에게만 긴장된 대본리딩이 끝났고, 세명의 배우와 차학연 감독만 남고 나머지 배우들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