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사님도 참 . 급하셔라. 저도 안조급한데 뭐이리 형사님이 급하셔요.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고 으르렁거리는 형사에게 재환이 빙글빙글 웃으며 딴지를 걸었다.
글쎄, 형사님도 참. 내가 했는지 안했는지야. 밝혀지면 나오겠죠-
어금니 가는 소리가 여까지 나는 듯 어휴 이 부러지시겠다, 라는 말까지 덧붙인 재환은
여유롭게 등받이로 몸을 젖혔다.
니가 제일 유력한 놈이라니까? 빨리 안불래?
유력한게 저라고 해서 제가 범인.은 아니죠. 안그래요? 근데 뭘 불어요? 뭐, 풍선?
아오 이놈을 그냥!
결국 재환의 머리를 사건일지로 쳐버린 형사가 격한 숨을 몰아쉬며 욕을 내뱉었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학연이 한발자국 나섰다.
형사님, 쉬시죠. 제가 맡겠습니다.
어, 차형사. 그래줄래?
냉큼 자리를 비킨 형사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씩씩거리며 서를 나섰고, 재환의 앞에 앉은 학연은 이를 악물었다.
당신, 이거 엄연히 공무집행방해죄라고요.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은 곧대로 해야할거 아냐.
피부 되게 새까맣다. 그래서 그런가, 되게 섹시하네요?
학연의 말에도 눈 하나 깜짝 안한채 수갑을 채운 손으로 학연의 얼굴을 가리키며 능글거리는 재환. 학연은 아까부터 지켜봤던 터라 그닥 신경쓰진 않았다.
근데, 새까맣게 탄 얼굴인데 왜 빛이 나지-
그야 뒤에 햇빛 비추니까요. 자, 어제 밤 7시에 뭐하셨죠?
힘든데 음료수나 좀 마시면서 하죠. 아니, 이렇게 사람 붙잡아놓고 이래도되요?
뭔데 이렇게 뻔뻔한지 짜증이 점점 치민 학연이 옆에 놓인 부채로 열심히 부채질을 했고, 땀흘리는 학연을 본 재환이
입술 한꼬리만 올려 씨익 웃었다.
차학연, 섹시하다. 진짜- 반하겠네.
그 뭔지 모를 소름돋는 표정과 말투에 순간 얼어버린 학연이 쉬자며 다른 형사에게 지키라 한 후 선풍기로 다가갔다.
그런데.
쟤가 내 이름은 어찌알지?
다시한번 묻죠. 어제 7시에 뭐했어요.
싱글싱글. 경찰서에 잡혀온 건 엄연히 이재환 자신임에도, 제 앞에 있는 학연의 물음에 전혀 동요의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음...모르겠는데요?
뭐라고요?
결국 그런 재환에 나자빠진 형사들만 한둘이 아니었고, 결국 열혈 패기로 둘러싸인 신입 학연만이 재환을 맡고 있었다.
에이, 솔직히 형사님은 다 기억해요? 그때 뭐했는지?
ㅁ, 뭐가요.
그럼 말해봐요. 3일전 6시 30분에 뭐했어요?
그날 뭐했더라.. 어느 순간 그 때 뭐했는지 떠올리던 학연은 퍼뜩 자신이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재환에게 소리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형사님도 모르면서. 나도 몰라요, 그 시간에 정확히 뭐했는지 그거 제대로 기억해 내는게 이상한거지.
구구절절 논리적으로 맞는말만 늘어놓는 재환에 할말을 잃은 학연이 결국 두손두발 다 들었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당신, 뭐하는 놈이야. 아까 내 이름은 어찌 알고.
글쎄요, 아 진짜 형사님. 내 스타일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ㅉ..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재환의 말을 다 듣고있던 학연이 결국 옆에 있던 종이컵을 구겨 재환의 얼굴로 날렸고,
그 종이컵은 그대로 명중했다. 아싸, 헤드샷.
까탈한것 조차도 내 스타일이네. 캬-
저 망할.
차형사! 저..진범 잡혔대.
어, 진짜요?
이재환, 너 이노무 새;끼 운 좋은줄 알아. 엉?
예, 예.
소식을 전해준 형사가 가고 남은 재환과 학연 사이에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가도 되요, 이제.
이렇게 몇시간을 붙잡아놓고 그 한마디로 끝?
그럼 뭐 어쩌라고요.
밥 한끼 사요, 그럼 끝.
싫어도 어쩌랴, 재환을 붙잡아 둔건 자신이었는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학연이 재환의 수갑을 풀어주고 서 앞으로 배웅했다.
학연이 들어가는 뒷모습까지 본 재환이 서밖으로 흥얼거리며 나섰다.
수갑이 채워져있어 뻐근했던 손목을 돌리며 재환이 낄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휴..다음엔 또 무슨 사건을 저질러야 서로 불려올라나. 우리 차학연 봐야하는데-
친구녀석이 뒷골목을 지나가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전화가 왔다. 녀석이 여자도 아니고 건장한 남자거니와 태권도 유단자여서
왠만한 사람들도 잘 건들지 못하는 놈인데, 어째서 그렇게 당한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야, 나 진짜..꼭 잡아줘라.
얼굴은 기억나?
그냥 키크고 코가 컸던 것만 기억나. 어두워서 사실 잘 보이지도 않았어.
아..그럼 어떻게 잡아..
요즘들어 이 주위에만 하루에 한번씩 사건이 터져, 우리 서는 하루종일 비상사태다.
내가 이곳으로 발령난 다음날부터 일어나는 바람에 서 안에서 내 별명은 '차사건'이었다.
재수없게시리.
- 형사님, 그래서 밥은 언제 사요?
바빠요 지금.
- 은근슬쩍 회피하는 거예요?
아니예요.
- 그럼 지금 당장 나와요.
바빠 죽겠는데 짐덩이 하나까지 더 늘었으니, 골치아파 죽는 건 모두 내 몫이다.
- 왜요? 뭐가 바빠요, 또 사건 터졌어요?
네. 그러니까 좀!
결국 폭발해버린 학연의 짜증이 된통 핸드폰 너머의 재환에게로 넘어갔다.
아..아 미안해요.
- ..아니예요. 내가 다 미안하네요. 나중에 한가할 때 봐요. 성폭행범 꼭 잡고요?
예 고마워ㅇ...
채 학연이 다 대답을 하기도전에 끊긴 핸드폰. 종료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있던 학연은
어제부터 느끼던 이 감이 결코 그냥 넘어갈 수만은 없는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잠시후, 소름이 끼쳤다.
성폭행 사건을 이재환이 어째서 알고 있는거지.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