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작가들과 함께 참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제목을 동일시하였으나 이어지는 게 아니므로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부제가 곧 제 글의 제목입니다.
* BGM 들으면서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시점이 자주 바뀔 수 있습니다.
#1.
문이 열리고 나온 이홍빈의 걸음걸이에는 사정의 여운이 짙게 남아있었다. 밖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발견이라도 한듯, 발꿈치를 바라보고 걸으면서도 내 앞을 지나치는 꼴이 우스웠다.
보스의 총알받이, 그 수식어란 참 잔인하고 또 웃긴 말이었다. 그리고 총알받이란 수식어 뒤에는 또다른 수식어가 이홍빈의 이름 앞에 마치 꼬리표처럼 돌아다녔다.
정액받이. 그건 이홍빈의 이름과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다른 이름은 똑같은 유년생활을 지내온 나와 이홍빈의 인생길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겉으로 보기엔 보스의 오른팔과 왼팔인 나와 이홍빈이지만 한명은 평탄한 길을 걸어갔으며, 다른 한명은 가시밭길을 넘어선 한계가 보이는 길을 뛰어갔다.
"아파?"
멍청한 물음을 왜 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그딴 뭐같은 일을 당하면서도 총잡이질을 청산하지 못하는 이홍빈의 정신에게 묻는 말이었다.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둘의 역할이 총잡이로 정해지고 또한 정액받이라는 임무까지 부여받아 첫 거사를 치른 후부터 이홍빈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못하게 된 거라고 생각도 해봤지만 밤중에 들려오는 흐느낌과 발악은 모두 이홍빈의 방이 근원지였다.
보스의 심기가 거슬릴때, 혹은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거나 일이 안풀릴 때 이홍빈은 불려갔다. 사격연습을 하고있던 밥을 먹고있던 자고있던 부름이 있으면 달려가야했다. 그 부름을 전달해주는 사람이 나였으며, 그를 보스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끝나면 다시 그의 방까지 데려다주는 게 나의 임무였다. 언제나 이홍빈은 검고 단정하여 흐트러짐 하나 없는 정장을 입고 들어가서 또다시 흐트러짐 하나 없는 정장으로 나왔다. 흐트러짐이 있는 거라곤 그의 발걸음과 내 눈동자였다.
동정 필요없어.
언젠가 열병으로 앓는 이홍빈을 불러와야하는 괴리에 빠졌을 때가 있었다. 결국 난 이홍빈을 부르지 않았고, 그로인해 벌을 받은건 내가 아닌 아파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이홍빈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홍빈은 내 방문 앞에 포스트잇으로 저 여섯글자를 써놓고 돌아갔다.
왜 너였으며, 그걸 전달해줘야하는 게 나였을까. 우리의 인연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홍빈은 실전에 투입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보스의 부름에 달려와야했기에 나보다도 더 보스 가까이에 위치했고 보스가 투입되지 않으면 이홍빈도 투입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내가 투입되고 돌아온 날이었다. 또 무슨 성이 난건지 보스가 이홍빈을 부른 상태였고, 그걸 몰랐던 나는 보스에게 보고하려 방 가까이 다가갔다. 원래 이홍빈이 들어가면 아무 소리도 듣지 않으려 보스의 방에 가까이가지 않는 나였으나. 이홍빈이 그 방에 있는 지 몰랐고, 정말 알았다면 난 가까이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으윽..그..그만.. 싫어...!
이재환 안지키고 싶은가봐?
내 이름이 들린 게 착각이라 믿고싶을 정도로 그 상황은 소리만으로도 안쓰러웠다. 근데 왜 내 이름이?
저절로 문을 두드리려 올린 주먹을 내렸고, 나도 모르게 손에 피가 안통할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방을 나온 이홍빈의 표정은 처연했다. 항상 듣는 이야기인 듯 했다. 나만 안절부절한가 싶어 비틀거리는 이홍빈의 팔로 손을 뻗었지만, 돌아오는 건 그의 말없는 질책이었다. 항상 방으로 가기 전 마사지를 받기에 치료실로 가는 이홍빈의 등을 바라보다 결국 물었다.
"너, 날 위해 뭐 하는 거 있냐."
"..."
"보스에게 그러는거 그거..나, 때문이냐고."
개새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어렸을 적 듣던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다. 언제나 목소리 좋다고 감탄을 내뱉은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다. 쉬고 또 못나 마치 철이 녹슬어 삐걱대는 목소리였다. 그럼 이제까지 말을 안한 이유가...
"멍청한..새끼."
천천히 뒤를 돌아 나를 보는 이홍빈의 눈동자는 텅 비어있었다. 원망도, 실망도, 질책도, 후회도 아무것도.
그리고 또한 행복, 희망, 즐거움 이딴 사람의 기본 감정까지도 없었다. 모든 감정이 이홍빈만 비껴간 듯한 눈동자였다. 그 텅빈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게 나였다.
고귀하고 순결한 무언가를 내가 더럽혀버린 것같아 나는 뒷걸음질쳤다. 꼭,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
뒷걸음질치다 제 발에 걸려 주저앉은 나의 모습을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바라본 이홍빈은 그대로 천천히, 뒤를 돌아 치료실로 들어갔다.
"왔어?"
작게 끄덕인 홍빈이 자연스레 치료실 침대에 엎드렸다. 물리치료사 학연이 마사지 기기를 들고오자, 홍빈은 눈을 감았다.
"뭔데 요즘은 멍까지 들어."
그가 이렇게 마사지를 한지도, 그리고 홍빈을 전담으로 맡게 된지도 어연 7년 이상이었다. 남 걱정에 오지랖 넓은 성격도 있었지만 홍빈에게만큼은 엄마같던 학연이 홍빈에게 걱정스러운 어투로 내뱉는 건 그다지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뭐겠어요."
다, 꼴같잖은 이재환 때문이지. 녹슨 기계 삐걱대는 듯한 제 목소리에 뒷말을 삼켜버린 홍빈이 끙끙거리며 요통을 참았다. 찌르르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이 또다른 짜증을 밀고왔다.
"보스는 뭐이리 너만 괴롭힌다냐."
"정액받이 숙명이죠, 상관 없어요."
그래서 네 그 거지같은 숙명, 대체 누가 정한건데. 저절로 마사지하는 손길에 힘이 들어가는 학연.
그 말을 끝으로 홍빈이 물리치료를 끝내고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올 때까지 물리치료실에 더이상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