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인 장동우, prologueㅡ전쟁의 서막 그 두 번째
매슬로 (Maslo) 늪
[인피니트/야동엘] 간병인 장동우 00 |
2000년 12월 31일 날씨 모름
아침에 일어났는데 호원이가 먼저 일어나서 누워있는 내게 뽀뽀를 해 줬다. 원래 늘 내가 먼저 일어나서 뽀뽀해주곤 했는데 오늘은 그 반대라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일어나자마자 호원이는 대뜸 내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12월 31일, 나와 호원이의 생일이다. 하지만 생일이라고 별로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다. 분명 조금만 있으면 원장님이 어김없이 우리를 부르실 테고 그럼 우리는 또 원장실에서 벌을 받아야만 한다. 어제는 종아리에 피멍이 들었는데 오늘은 또 어떤 벌을 받게 될까? 무서워서 호원이를 쳐다봤더니 호원이는 괜찮다며 나를 다독여 준다. 내 옆에 호원이가 있어서 정말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이렇게도 무서운데….
2001년 1월 1일 날씨 역시 모름
새해가 밝았다. 고아원 친구들이 밖에 눈이 온다고 해서 나는 호원이에게 나가자고 했지만 호원이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루종일 원장실에 갇혀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속상해서 눈물을 아주 쪼끔 흘렸다. 아마 꾹 닫힌 원장실 창문만 계속 바라보면서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아까 전 원장님이 책을 던지시는 바람에 아직도 볼이 따끔거린다. 에구. 원장님은 우리가 쓰레기이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하신다. 나는, 나는 언제부터 쓰레기였을까?
2001년 2월 14일 날씨 하얗고 보드라움
고아원이 하루종일 왁자지껄했다. 원장님은 나와 호원이에게 예쁜 옷을 입혀주시고 갑자기 마구마구 친한 척을 하셨다. 손님들이 오기로 하셨다며 이상한 말을 꺼내면 죽여버릴 테니 입도 뻥긋하지 말라고 하셔서 예쁜 옷을 차려입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새 옷을 차려 입은 호원이는 너무너무 멋있었다. 그래서 호원이에게 멋있다고 해 줬더니 호원이는 내가 더 멋있다며 손사레를 쳤다. 헤헤. 아무튼 오늘은 원장님이 하루종일 손님들과 얘기를 하시느라 우리를 원장실로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일주일 만에 호원이와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였다. 나는 하얀 겨울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너무 감사해서 기분이 좋았지만 호원이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리곤 언젠가는 꼭 원장을 죽여 버리고 싶다며 내게 무표정으로 말했다. 난 조금 무서웠지만 호원이의 손을 꼭 잡았다. 호원이의 손은 늘 따뜻하다.
2001년 3월 1일 날씨 바람이 외로움
저번 달에 보았던 손님들이 또 오셨다. 이번에는 어린 남자아이 하나가 손님들의 손을 잡고 왔다. 원장님은 귀한 집 아드님이기 때문에 우리같은 쓰레기들은 말도 걸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말을 걸지 않고 호원이랑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 갑자기 그 아이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더니 우리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반가워서 같이 놀자며 그 아이의 손을 잡았지만 호원이는 그 아이가 싫다고 했다. 나는 착하고 잘 생겨서 무지무지 좋았는데…. 그 아이는 나중에 헤어지면서 내게 초콜릿을 주었다. 나중에 또 보자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새 친구가 생겨서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지만, 우리는 그 아이 때문에 밤에 원장님한테서 또 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 귀한 분이랑 놀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 머리를 마구마구 때리시는데 많이 아팠다. 심지어 호원이는 그 아이랑 놀지도 않았는데 계속해서 맞고 또 맞았다. 나중에 내가 약을 발라 주고 후후 불어 주었지만 호원이 머리에 상처가 쉽게 나을 것 같지는 않다.
2001년 3월 14일 봄기운이 그득함
원장님이 이상하다. 갑자기 나를 호원이랑 떼어 놓으려고 하신다. 나는 그게 너무너무 싫어서 호원이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지만 원장님이 이제 나는 호원이같은 아이랑 놀아선 안 된다고 하셨다. 그 말이 서러워서 나는 영문도 모르고 울며 또 울었다. 오늘 낮에는 원장님이 나만 두고 호원이를 원장실로 데리고 가셨다. 한참이 흘러서야 호원이는 원장실에서 나왔는데, 온 몸에 멍이 들어 있었고 피도 흘리고 있었다. 차라리 나도 때리지.. 왜 자꾸 호원이만 미워하고 나한테는 이렇게 구는 지 모르겠다. 호원이는 이게 다 나를 위한 일이라고 한다. 이게 왜 나를 위한 일일까? 나는 호원이가 맞는 게 너무나도 싫다. 호원이는 나고 나는 호원이인데 왜 자꾸 떼어 놓으려고 하는 거야!
2001년 4월 1일 날씨 햇살이 반가움
그 남자 아이를 또다시 만났다. 이번에도 그 아이는 손님들과 함께 오셨는데, 갑자기 원장님은 날 손님들과 그 아이 앞에 세워 두고 인사를 시켰다. 다들 푸근하게 생기셔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원장실에서 손님들께 뭐라뭐라 말씀하시는 원장님 옆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까 자꾸 호원이 생각이 났다. 그 아이는 내가 심심하단 것을 눈치챈 모양인지 나를 데리고 원장실을 나와 나를 놀이터 벤치에 앉혔다. 자기는 김명수라고 한다고, 잘 부탁한다고 하길래 내 이름은 동우라고 했다. 그 아이랑 놀다가 나는 저녁이 다 되서야 고아원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방에 혼자 앉아 있는 호원이에게 다가갔다. 호원이는 어딘가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그랬더니 뭐가 미안하냐며 호원이는 내게 뽀뽀를 해 주었다. 나도 호원이의 입술에 다시 뽀뽀를 해 주었다. 호원이의 얼굴에 상처가 더 는 것 같았다.
2001년 4월 3일 날씨 맑지만 내 마음은 탁함
원장님은 내게도 엄마 아빠가 생길 거라고 하셨다. 나는 한 번도 부모님이란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기분이 정말정말 좋았다. 원장님은 내가 복 받은 거라고 계속 말씀하시면서 내게 거기 가서도 꼭 기죽지 말라고 하셨다. 단 한 번도 이렇게 살가운 말을 하신 적이 없었는데.. 조금 민망했지만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원이랑 같이 가는 거냐고 그랬더니 나만 가야 한단다. 그럼 호원이랑 헤어져야 하는 거야?..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2001년 4월 5일 날씨 나비를 심었다
호원이의 손을 잡고 공원으로 나왔다. 처음엔 호원이가 없으면 안 가겠다고 떼를 썼지만 원장님은 니가 죽고 싶은 거냐며 내 꿈인 의사 노릇을 하고 싶으면 군말 말고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 호원이랑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슬퍼서 나는 공원에서 호원이 품에 안겨 넋놓아 울었다. 호원이는 무표정으로 가만히 날 쳐다보더니 갑자기 하얀 나비 한 마리를 잡아 왔다. 오늘은 식목일이니까 나무 대신 하얀 나비를 심자고 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원이는 나비의 날개를 마구마구 태우곤 날개를 발로 밟아 짓이겨 버렸다. 까맣게 변해버린 나비가 너무도 무서워서 눈을 꼭 감았다. 짐을 모두 싸고 고아원을 나왔다. 마지막 기로로 향하는 도로 앞에서, 호원이는 내게 가지 말라고 했다. 나도 호원이가 없는 곳은 정말정말 싫었지만 그 아이와의 약속을 위해 결국 호원이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호원이는 내게 뽀뽀하고 손을 꾹 잡았다. 늘 따뜻했던 손이 오늘은 차갑다. 마지막으로 호원이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서럽게 울었다. 호원이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호원이가 우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지만 나는 대답해 주지 못했다. 나는, 나는 호원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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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4월 5일자로 그렇게 일기장은 끝이 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 페이지를 넘겨 보지만, 역시나 하얀 종이만이 저를 반기고 있을 뿐. 하긴 그 날 이후로 주인이 떠나갔으니 일기장이 쓰여질 리 없지. 쓴 웃음을 짓는다.
호원은 일기장을 덮었다. 2012년 4월 1일-정확히 10년 하고도 361일이 흐른 오늘. 이번 식목일도 분명 혼자 보낼 것임이 분명했지만, 호원은 내심 4월의 첫 날을 맞이하면서 지난 10년 간 그래왔듯 또다시 일말의 기대를 걸어 본다. 언젠가는 함께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다 문득 이제 다시는 기대따위 걸지 말자 굳게 다짐했었던 작년의 식목일이 떠올라 미간을 찡그렸다.
언제쯤이면 이 빛바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을런지, 나란한 봄기운 때문인지 늘 이맘때 쯤이면 병신마냥 핀트가 나가 버리는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보스ㅡ.
문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호원은 말없이 제 책상을 두어 번 탁탁 두드렸다. 들어 오라는 무언의 표식. 이윽고 문이 열리며 아랫놈 하나가 노란 파일 하나를 끼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분명 제게 들어온 일처리는 오전 내로 모두 끝냈던 것 같은데, 또 무슨 사건이 생긴 건가. 일단은 제게 내미는 파일을 받아들곤 표지를 열었다.
"뭐고." "그때 보스께서 따로 부탁하셨던 자료입니다. 펠렛 담당 의사의 신변이랑, 각종 정보…" "아아."
첫 페이지의 반 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사내의 사진 하나. 그리고 그 밑에 적혀 있는 세 글자. 장동우, 스물 일곱.
"… 장동우라." "보스가 찾으시던 그 분이 얼추 맞는 것 같습니다."
호원은 두드리던 책상을 두어번 더 두드렸다. 손톱과 차가운 유리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텅 빈 사무실을 메웠다. 펠렛 소속, 보스 담당 의사. 조직에 몸담근 의사. 꽤 흥미로운 스토리가 전개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펠렛으로 저격수 셋 보내고 조직 내에 전부 공격 지시해."
호원은 굳게 다물었던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