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륜 ( 不 倫 )
(부제 : 체육 선생님 )
Baby J
# 2.
이제 조금만 있으면 벚꽃 피겠다. 교문에서 그 사람을 마주친 이후로 도통 입맛이 돌지 않았다. 항상 나만 기대하고 나만 잔뜩 부풀어 있고, 나만 아팠다.
이제서야 그것을 깨달은 것일까, 약육강식.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는다. 이제야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항상 내가 약자였고, 그는 강자였다. 그의 와이프 역시.
조금만 더 빨리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업시간 내내 내 귓속으로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그의 생각만이 가득 차올라서.
점심시간 역시 친구들을 뒤로한 채 몇술뜨지 않고 그대로 버리고 급식실을 빠져나왔다. 혼자서 머릿속을 비워볼까, 넓디넓은 학교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40분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인지 본래 눈에 들어오지 않던 벚나무와 푸른 잔디가 눈에 띈다.
한참을 벚나무 아래에 서서 멍울져 있는 꽃봉오리를 보니 이제야 봄이 실감 난다.
벌써 봄이 왔구나, 내 맘은 아직 춥디추운 1월인데.
“왜 대답 안 해?”
“꼭 대답해야 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래도, 대답 안 하면 내가 너무 창피하잖아.”
“난 항상 그랬어요.”
언제 다가온 것인지 나의 시선을 따라 벚나무를 바라보던 그는 해맑게 웃으며 벚꽃이 피겠다는 이야기를 뱉어냈다.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그를 한번 올려다본 후 다시 멍울져있는 벚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려 피어난 벚꽃은 약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을 과시하곤 져버린다.
그 사람에게 나 역시 벚꽃과 같은 존재인가?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다 잠깐동안 재미를 본 후 버려버리는.
너무 깊게 생각해서인지 그에게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불순해져 버렸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듯 차갑게 식어버린 채 행동하는 날 본 그 사람은 멋쩍은 듯 허허하고 웃어넘겨 버렸다.
난 항상 대답을 못 듣고 창피해 왔는데, 난 항상 기다렸는데. 이 짧은 몇 분도 못 기다리는 사람인 건가,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
“아무 일도 없어요.”
“근데 왜 이렇게 오늘따라 삐딱해.”
“그냥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요.”
“어리광부리는 거야?”
내 몸에 손대지 마요. 내 기분은 조금도 생각을 해주지 않는 것인지, 항상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나에게 다가와 흔들어놓고 가버리는 그 사람이 싫었다.
1년이면, 그래. 어느 정도 아팠다. 이제 슬슬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만날 때가 됐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리광 피우는 것이냐며 내 볼을 꼬집는 그의 손을 쳐내며 말하곤 뒤돌아섰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친 듯이 떨리는 날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의 작은 터치와 다정한 말투 하나하나에도 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애타게 그를 사랑하니까.
“뭐야, 진짜 왜 그러는 건데.”
“그냥 그럴 때 있잖아요. 이유 없이 짜증 나고 싫을 때.”
“너 나한테 한 번도 이런 적 없잖아.”
“이제 점점 지치니까, 포기해도 되잖아요.”
“뭘 포기하는데, 뭐가 지치는데.”
“선생님 좋아하는 거요. 선생님 기다리는 거.”
벚꽃길을 등진 채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쪽으로 향하니 그가 다가와 날 붙잡으며 화가 난 듯 물어왔다.
항상 제멋대로에 자기 기분밖에 모르는 그 사람이 내 기분을 알 리가 없다.
인상을 쓰며 나에게 소리 아닌 소리를 지르던 그는 나의 말에 점차 표정이 풀려나갔다. 그와 동시에 팔목을 잡은 손의 힘도. 관계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헌신을 다 하며 날려버린 1년이 아까웠지만, 이제부터라도 확실하게 선을 긋고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자 다짐할, 그런 시간이 나에겐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이 시간부로 그와의 어정쩡한 관계를 정리하고 나만을 위한 삶을 계획해 실행에 옮기도록, 그렇게 그를 깔끔하게 잊고 싶었다.
“선생님은 절 어떻게 생각해요?”
“갑자기 그건 왜”
“어정쩡하잖아. 이 관계, 깨끗하게 정리해야죠.”
“……….”
“대답 못 하시네요. 오늘부로 관계 정리 확실하게 해요. 이제 나한테 연락하지 마요. 나도 안 할게. 4주년 축하해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날 놓아버리는 그 사람을 보곤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난 한낱 장난감에 불과했던 거구나,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끝내서 다행이다.
오직 내 생각은 이것뿐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미련을 남겨서 무엇을 하겠는가, 미련을 남기면 남길수록 힘든 것은 나 하나 뿐일 텐데.
대한민국에 가족이란 단 한 명도 없이 홀로 남겨져서 홀로 잘 커왔으니, 그러니 앞으로도 홀로 잘 버텨나가면 된다.
외국에서 연락도 잘 안 되는 부모님께 폐를 끼치고 싶진 않으니. 어떤 역경이 몰려와도 혼자서 잘 헤쳐나가야 한다.
웬일이야 연락도 잘 안 하던 게. 무작정 학교를 빠져나오니 갈 곳이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이상의 방황은 그만하고자 예전부터 친했던 친구에게 연락해 조금 먼 이곳까지 와버린 것 같다.
학교는 언제 그만둔 것인지 사복을 입곤 머리를 연한 갈색으로 물들인 친구를 보곤 그저 어색하게 웃어버렸다.
서로 눈빛만 봐도 어떤 상태인지 알아챘기 때문일까,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내게 그 아이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막대사탕 하나를 입에 물려줬다.
그 아이의 처지와 나의 처지가 같았기에 더욱 편했을지도 모른다. 다들 좋은 부모를 만나 부유한 생활을 한 반면, 나와 그 아이는 조금 많이 달랐으니까.
어릴 적부터 할머니 손에 맡겨져 키워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열 셋부터 혼자 살았던 나와, 어릴 적 부터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종인.
그래서인지 그 아이와 난 더욱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종인아, 우리 그냥 같이 살까?”
“뭐?”
“이렇게 혼자 쓸쓸히 지내는 것보단 같이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냥 심각한 게 아니라 제대로 심각하네.”
“많이 심각해?”
“어. 엄청나게.”
“혼자 있던 게 너무 오래돼서 이젠 혼자 지내기 싫어.”
“집에서 가만히 기다려, 짐 챙겨서 내일이나 모레쯤에 갈게.”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현실성 없는 이런저런 말을 혼자 내뱉었다.
막대사탕을 쥐고 허공을 바라본 채 얘기하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종인이는 한숨을 푹 쉬며 내 머리를 푹 누른 채 일어서 버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것 같았다. 계속해서 홀로 지내다 보면 그를 향한 마음이 커지고 커져 날 찌르고 달아나버릴 것만 같았다.
첫사랑은 유난히 독하고 아프다던데, 그 말이 틀린 말만은 아닌 것 같다.
내게 온 첫사랑은 변백현, 그 사람이니.
지금 나의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팠다.
미안, 급한 일 생겨서 못 데려다 주겠다. 조금이나마 내 기분을 풀어주려 애쓰던 종인이는 나와 함께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어둑어둑해진 상태에서 급한 전화를 받고 가버렸다.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종인이가 그저 귀엽기만 했다. 나를 이리도 깊게 생각해주는 친구는 일생일대에 종인이 뿐이라고 항상 믿어왔고, 앞으로도 믿어갈 예정이다.
내가 믿을 사람은 오직 김종인 하나뿐이라고. 변백현, 그 사람은 나에게 상처만 지독히 남기고 사라져버린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결 마음이 가볍고 편해지니.
-
버스에서 내린 후부터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버스를 처음 탈 때부터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가 굉장히 거슬렸다.
이어폰을 귀에 깊숙이 꽂은 채 노래를 작게 틀어놓곤 그 남자를 계속해서 신경 써야 했다.
교복 치마 사이로 보이는 다리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혼자서 피실피실 웃고, 버스에서 내리자 따라내리고.
처음엔 그저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해왔는데, 점차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집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놓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 사람이 날 따라오는지, 아니면 자기 갈 길을 가는지 확인을 수차례 해보았다.
확인을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나에게 더욱더 가깝게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뇌리를 스치는 담임의 말이 생각났다.
요즘 들어 성폭행 사건이 자주 일어나며 며칠 전엔 우리 지역에서 동일범의 소행으로 밝혀지는 사건이 터졌었다고.
점점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울음이 목젖까지 치닫는 게 느껴져 왔다.
“저기요.”
“……….”
“죄송한데 길 좀 물을게요.”
“ㅈ,죄송한데 저도 이쪽 길을 잘 몰라서요.”
“아 씨ㅂ….”
걸음을 늦췄다가 빨리했다가, 그 사람의 동태를 살피던 것도 잠시였다.
순식간의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하는 그 사람에 의해 다리에 힘이 풀렸던 걸 간신히 붙잡은 것 같다.
어깨를 잡은 손에는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곳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미련하게도 난 이런 무서운 상황에서도 가장 믿고 있는 종인이가 아닌 그가 보고 싶었다. 그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할 것 같았다.
머리를 숙여 그 사람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곤 그 사람이 나에게 다가온 반대방향으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손에 들려져 있던 핸드폰으론 그에게 전화를 걸며.
“……….”
‘여보세요?’
“……….”
‘무슨 일이야?’
“나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너무 무서워, 누가 자꾸 따라와.”
‘…어디야.”
“몰라, 그냥 막 도망쳤는데 여기 아무것도 없고 깜깜해요.”
‘주변에 건물 없어? 슈퍼나 편의점은.’
“편의점 하나 있어요.”
‘편의점으로 빨리 뛰어가서 알바 바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들어오자 알바생은 굉장히 놀란 듯 날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고,
내가 건네는 핸드폰을 받아들어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누구든 날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내가 손을 내민 사람은 변백현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알바생이 건넨 따뜻한 커피를 손에 들곤 그대로 그 사람이 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혹시, 저 사람이 쫓아온 거에요? 가만히 떨리는 몸을 웅크린 채 앉아있자, 알바생이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건드리며 창밖에 서 있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그 사람을 보고선 마치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버스에서부터 날 쫓아온 사람임이 틀림없었고, 편의점 밖에서 날 향해 씩, 웃는 그 미소가 날 더욱 죄어오고 있었다.
겨우 그쳤던 눈물을 또다시 봇물 터지듯 흘러나와버렸고, 알바생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집어들어 경찰에게 연락을 취하는 듯 해 보였다.
“○○○.”
Baby J |
다들 기다려주셔서 감사하고 죄송해요. 이번 작품은 절대 연중 없도록 하겠습니다. 암호닉은 다시 받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해요 많이 많이. 그리고 감사해요 말로 표현할수 없을만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