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tic
: an incurable romantic
: 기약없는 로맨티스트
13
한정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학교는 김남준 때문에 두 번 들썩였다. 첫번째로는 가채점을 했는데 전 과목에서 하나도 틀리지 않아서. 두번째로는 아래 학년과 섞어서 보는 시험 교실에서 쉬는 시간에 고백을 받아서. 전자는 전교생의 부러움을 샀고, 후자는 남자 아이들의 질투를 불렀다. 학교에서 가장 예쁘다고 소문난 아이였기 때문이다. 남준이는 교실로 돌아와서 가방을 챙기는 내내, 아이들의 어떻게 할 거냐는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뭘 어쩌냐고 되물었다. 나는 내가 비밀 연애를 하자고 조른 그 지난 날을 후회했다. 나는 괜히 김남준이 들을까봐 한숨도 삼키며, 서랍 속 프린트만 챙겨서 가방에 마구잡이로 집어 넣었다. 그러다가 프린트 옆 스테인플러에 찝혀, 손가락 끝에 살짝 피가 맺혔다. 씨, 되는 일이 없으니까. 나는 프린트에 아무렇게나 옅은 피를 닦고, 가방을 들었다. 김남준은 여전히 남자아이들 틈에 묻혀서, 사람 좋은 웃음만 짓고 있었다. 대박. 짜증남.
남준이랑 연극을 보고 온 날을 기점으로 연극에 관심이 생긴 나는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극작과를 찾아보았다. 옛날부터 공부를 할 때면 무조건 나를 데리고 했던 녀석때문인지,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중상보다 조금 위? 최상은 아니지만. 선생님은 진로 상담때 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 내 말에 기뻐하며, 내가 갈 수 있는 대학교 목록을 뽑아주었다. 상향이 많기는 했지만, 기왕 할 거면 잘 하는 게 나으니까. 그렇게 현실적인 목표가 생기고 나니, 남준이한테 뒤쳐지는 사람은 되지 않겠구나 싶어서 진짜 좋았는데. 가채점 만점에 학교에서 최고 예쁜 아이한테 고백이라니. 내가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는데, 얘는 벌써 전국체전에 나간 것 같았다.
나는 발에 채이는 걸 무성의하게 툭툭차며, 집으로 향했다. 왕재수탱 김남준. 김남준은 이런 내 마음의 소리를 들었는지 어쨌는지, 저 뒤에서 나를 불렀다. 같이 가! 나는 그 소리가 안 들린다는 듯, 계속 발에 채이는 걸 찼다. 짜증나, 짜증나. 나는 그렇게 부러 걸음을 늦췄다. 어쩌면 처음부터 길가에 있는 걸 의미없이 찬 게, 김남준이 잡아주길 바라서였을 수도 있고. 남준이는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내 가방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내 앞을 막아서고는 대뜸 손을 살폈다.
남준이는 잘 보이지도 않는 아까 그 상처. 상처라고 부르기도 뭐 한. 아기 고양이 이빨 두개에 물린 것 같은 작은 동그라미 두개를 찾았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파? 하고 물었다. 나는 그닥 대꾸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라 고개만 저었다. 그러자 남준이는 제 바지 주머니에서 반쯤 구겨진 데일밴드를 꺼내, 내 손가락 끝에 붙였다.
"그 정도는 아닌데."
"피 났잖아."
"... 봤으면서 얘들이랑 웃고나 있고."
"네가 학교에서 티내지 말라고 해서."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그리고 우리 원래 친했어서 그런 거 별 의심 안 하거든?"
진짜 여지껏 본 김남준 중에 오늘 김남준이 제일 짜증난다.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냐고. 내가 연애 숨기자고 할 때는 못 숨겨서 안달이었으면서. 이제는 내가 별로 안 좋다. 이거잖아. 나는 김남준에게 잡힌 손을 신경질적으로 빼내며, 한참 큰 녀석을 째려보았다. 재수없어. 재수없어. 김남준은 그런 내가 어이가 없는지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답했다.
"의심, 하던데."
김남준 친구들에게 골목에서 우리가 손 잡은 걸 들킨 뒤로, 비밀 연애는 글렀구나 싶었는데. 남자 아이들은 별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걔네한테 중요한 건 우리의 연애보다 게임 레벨, 축구팀 그런 게 중요해서. 우리한테 줄 관심이 없었던 거다. 그런데 누가 의심을 해? 나는 의심을 한다는 남준이의 말에 누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김남준은 내 손을 잡으며 다시 걸음을 뗐다. 어... 그, 오늘 나한테 고백한 애가 있는데.
"좋디?"
"아니. 한 개도 안 좋았어."
"근데 그 얘기는 왜 또 해!"
"아니... 그거 고백 거절했는데."
"당연히 해야지."
"왜 자기가 싫냐길래."
"와, 걔도 웃긴다."
"그... 여자친구 있다고 했는데."
"대박, 잘했ㄷ, 야. 나라고는 안 했지?"
"..."
"했어?"
"아니, 그. 안 하기는 했는데."
"근데?"
남준이는 슬며시 내 손을 놓고는 운동화 끈을 고쳐 묶었다.
그. 너라고는 안 했는데... 그... 내 지갑에 있는 너 민증사진. 그거, 보여줬어.
"야!"
"아! 몰라! 너가 말만 하지 말라며! 그건 말 아니잖아!"
"죽을래?"
"이제 나도 몰라! 우리 헤어지지도 않을 거고! 굳이 왜 숨겨야 돼!"
"아! 김남준!"
"몰라! 사랑해!"
김남준은 긴 다리로 어느새 골목 끝까지 도망 가서는 목을 길게 빼고, 소리만 고래고래 질렀다. 혼날 짓 할 건 아니보네. 멀리서도 이글거리는 내 눈빛은 느껴졌는지, 전봇대 뒤로 숨은 남준이가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며 말했다. 몰라! 사랑해! 저걸 죽여 살려. 나는 분명 짜증이 나는데, 웃음이 스멀스멀 자꾸만. 그러니까 자꾸만 살갗 위로 구름이 맞닿은 것처럼. 느껴본 적 없는 그런 경험으로 비유할 정도로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하자는 건 다 해주면서도, 가끔은 제 멋대로 구는 저 커다란 녀석의 멋대로는 내가 말하지 못한 진심을 읽은 멋대로라는 걸.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었다.
난 전봇대에 가려지지 않는 녀석의 다부진 덩치와 단단한 마음이,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
고3의 1학기는 그 어느때보다 바빴다.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기말고사가 코 앞이었고, 남준이는 경찰대학교를 준비하는 탓에 관련 공부와 체력시험 준비로 더욱 바빠졌다. 나는 극작 관련 학과를 알아보며, 필요한 서적과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에 급급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늦은 만큼, 철저해야 했다. 담임 선생님은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수시를 준비해야 하니, 학교별 자기소개서와 면접 일정 등을 기록해서 수시 상담을 오라고 말했다. 대학에 가는 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왜 필요한 지, 왜 적합한 지. 그걸 설명하고 보여줘야 했다. 나는 대학교에 가는 게 힘든 건지, 어른이 되는 게 힘든 건지. 어른이 되면 매 순간 나를 증명 받아야 하는 건지. 피하고 싶은 궁금증만 잔뜩 달아둔 채로, 해야 할 것들을 하며 바쁜 날을 흘려보냈다.
우리의 연애는 이 바쁜 고3 교실에 작은 흥미거리에 불과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행이었고. 남준이는 체력시험 준비때문인지 나날이 몸이 커져가는 것 같았고, 몇몇 단순한 남자아이들은 그냥 나도 운동이나 할까 - 하며. 남준에게 무슨 운동을 하는 지 루틴을 물었다. 여자 아이들도 알게 모르게 남준을 쳐다보며, 귀를 붉혔다.
요즘의 남준이는 키도 자랐지만 덩치가 더욱 커진 탓에 하복 와이셔츠가 맞지 않아, 검은색 무지티를 입고 다녔다. 그리고 모의면접때마다 하고 다니던 완벽하게 깐 머리를 이제는 맨날 하고 다녔다. 하고 다니다보니 이게 편하고, 면접때도 익숙할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 녀석은 어쩐지 우리보다 더 어른 같았다. 나도 그걸 인정하면서도 내 걸 공유하는 기분이라 영 별로였다. 하지만 기분이 영 별로여도 괜찮았다. 그 검은색 무지티의 시선의 끝은 매번 나였고, 두툼하지만 기다란 손가락은 언제나 내 머리칼만 넘겨주고 내 손만 잡아줬으니까.
"기말고사 끝나고 놀러갈까?"
풀던 문제집을 다 푼 건지, 이번 쉬는 시간에는 남준이가 내 앞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나는 책을 읽으며 대답했다. 바쁜데, 무슨. 그러자 아이는 내 옆자리로 옮겨와서, 내 시선에 맞춰 책장을 넘겨주며 말했다. 그 전까지 내가 이렇게 너 바쁜 거 다 끝낼 수 있게 도와줘도, 그래도 안 돼? 응?
"뭐하냐."
아니, 김여주 책 넘겨주려고 운동했냐? 그 덩치로 그런 거 해도 되는 거야? 졸지에 제 자리를 빼앗긴 김우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남준이는 그쪽에는 시선도 두지 않은 채로, 자꾸만 나를 채근했다. 응? 가자. 나도 숨 쉴 구석이 필요해. 남준이는 내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히죽 웃었다. 가자, 응?
"알았어."
단언컨대 저런 얼굴 저런 몸 저런 눈빛 그리고 저런 목소리로 내가 숨 쉴 구석이라는 사람한테, 안 넘어가는 사람은 없을거다. 정말로. 김우석은 보조개까지 움푹 들어가게 웃는 김남준이 드디어 공부에 미쳤구나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쪽으로 다가와 귓속말로 '니 대형견 드디어 미쳤어?' 하고 물었다. 그리고 내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정말 김남준에게 물렸다. 귓속말을 하기 위해 가져댄 오른손을 김남준에게 잡혀서. 앙. 하고.
"아!"
"그러게 왜 남의 여자한테 귓속말을 해."
"이거 진짜 미친놈 아닌가?"
"그런가."
"그렇다고 사람을 물어?"
"나 이제 진짜 여주빼고 다 물 수 있을 거 같아."
"너 진짜 얘들이 대형견 대형견 하니까, 진짜 개새끼가 된 거야?"
"이런 게 개새끼면 개새끼 하지 뭐"
남준이는 내 손 하나를 제 두 손으로 잡고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남준이는 어른 같아지면서, 더욱 더 유치해졌다. 나는 혀를 차는 김우석을 안타까워하며,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남준이의 입에서 나온 개새끼라는 말이,
얼굴이 홧홧해질 정도로 좋았다.
*
겨울입니다. 오랜만이야 우리의 로맨틱아! 이번 회차는 오랜만이라고 무겁게 돌아오면, 거부감이 드실까봐. 고등학생 아이들의 풋풋함으로... (사심 가득) 여친 한정 멍멍이 모범생 반장 남자친구... 온갖 로맨틱은 다 때려 넣었슴다... ㅎㅎ 오래 기다려주셔서 감사하고, 잊지 않고 찾아와주셔서 감사해요! 밤바람이 좋네요. 시국이 얼른 나아지기를. 좋은 밤 되셔요!
오래 기다려주신 독자님들 더욱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