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tic
: an incurable romantic
: 기약없는 로맨티스트
14
열병
남준이의 입에서 나온 비속어는 다른 아이들이 내뱉는 것과 묘하게 다른 느낌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눈쌀이 찌푸려질 언행이었을 텐데, 남준이가 하니까. 뭔가, 정말 어른 같았기 때문이다. 난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개새끼, 개새끼. 그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건, 너무 변태 같잖아.
*
그 날 이후로 알게 모르게 남준이를 피했다. 단 둘이 집에 갈 때나, 집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여럿이 있을 때는 가능하면 옆자리를 피하고, 손 잡는 것도 피했다.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는 건 다 피했다. 솔직히 남준이랑 사귀면서도 특별하게 아주 많이 친한 친구. 그 정도의 느낌이 절반 이상의 지분을 가졌는데, 이제는 그냥 남자친구만 덩그러니 남아버렸다. 단순히 그날의 거친 언행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배우 부모님을 둔 것에 비해, 연기에 소질이 없었다. 남준이는 그걸 잘 알았다. 그렇게 피하기를 몇 날. 기말고사 전날 학원이 일찍 끝난 남준이가 스터디 카페로 나를 데리러 왔다. 남준이의 문자를 늦게 확인한 탓에 남준이가 내 자리까지 와서야 알았지만.
"누구야?"
옆자리 남자애는 스터디 카페에서 몇 번 본 옆 학교 아이였다. 남자애는 내가 푸는 국어 문제집을 보더니, 대뜸 제 문제집을 가져와서는 페이지를 툭 펼치고 말했다. 너 여기 풀었어? 그리고는 내 문제집을 제 마음대로 넘겨보더니, 푼 것을 확인하고는 빈자리에 앉아 말을 이었다. 나 이거 좀 알려주라. 교복 명찰이 3학년의 색깔이었다. 동갑이라서 말을 놓는 건지 원래 그런 성격인 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알려달라는 걸 싫다고 할 이유가 없어서, 문제를 확인하고 조용히 알려주었다. 아이는 곧잘 알아 듣고는 제 주머니에 있는 마이쮸를 꺼내주었다. 그리고는 제 의자를 길게 끌며 일어났다. 나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마이쮸를 바라보며, 받아도 되는 건지. 잠시 고민했다. 마침 입이 심심하기도 했고, 문제를 알려줬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하지만 내가 마이쮸로 손을 뻗기도 전에 방금 전 비워진 옆자리를 익숙한 실루엣이 채웠다. 남준이었다. 누구야? 마이쮸를 집으려던 내 손을 한 손으로 잡은 남준이가 턱끝으로 간식과 남자애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누구야?
"어떻게 왔어?"
" 학원 일찍 끝나서 데리러 간다고 문자했는데."
"아, 못 봤어."
"공부 열심히 하느라 못 본 줄 알았는데, 나쁘다."
"뭐가 나빠."
남준이는 대답 대신 또 한 번 마이쮸를 턱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준 애 누구야? 나는 남준이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답했다. 몰라, 몇 번 본 애인데. 문제 알려주니까 주던데? 여름이기는 하지만 밤이라 제법 서늘할 텐데, 반팔만 딸랑 입고 온 남준이 때문에 또 한 번 눈동자가 갈 곳을 잃었다. 아니... 왜 이렇게 맨날 붙는 옷만 입고 오냐구. 나는 행여나 또 얼굴이 붉어질 새라 부채질을 하며, 남준이의 팔뚝을 힐끔 쳐다봤다.
내 카디건이라도 줄까... 이거 너무, 너무... 학생 답지 못하지 않나.
"이거 먹으려고 했어?"
"주니까 먹지?"
"모르는 사람이 주면 싫다고 해야지."
"내가 애도 아니고."
"그래도."
심통이 난 남준이는 마이쮸를 저 멀리 밀어버리고는 책상 위로 엎어졌다. 나는 끈질기게 따라 붙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가방을 챙겼다. 남준이는 내가 가방을 싸는 걸,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나가자는 내 말에 나 대신 가방을 들고는 손을 내밀었다. 손. 카페 속 아이들은 공부를 하느라 우리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탓에 훌쩍 커진 남준이를 쳐다보는 아이들이 몇몇 있었다. 나는 서둘러 남준이의 손을 잡고, 스터디 카페를 벗어났다. 남준이는 서두르는 내 걸음을 모르는 척하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
"아, 질투난다. 질투 나"
스터디 카페를 나오자마자, 질투가 난다며 잡은 손을 마구 흔드는 아이였다. 나는 걸음을 늦춰, 뒤를 돌아 걸으며 물었다. 뭐가. 그러자 남준이는 제 한쪽 손에 쥐고 있던 마이쮸를 꺼냈다. 이거, 준다고 받은 것도 싫고. 먹으려고 한 것도 싫어. 꾸밈없는 말이 남준이 같았다.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며, 모르는 척 답했다. 주니까 받고, 먹는 거니까 먹지. 아이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요즘 왜 이렇게 고양이 같지?"
"나?"
"응."
"고양이가 뭐야."
"쓰다듬으려고 하면 도망가고, 안으려고 하면 도망가고."
"... 내가 언제 도망갔어."
대답 대신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남준이가 눈높이를 맞췄다. 나는 갑자기 가까워진 아이때문에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남준이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단단한 팔뚝으로 내 허리를 잡고 말했다. 봐봐. 도망가려고 했잖아. 순식간에 이상해진 분위기가 어색해서, 어떻게든 풀고 싶었는데. 이런 순간에 어떤 장난을 쳐야 되는 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삐걱댔다. 이런 나를 불쌍하게 여긴 건지,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졌다.
*
집으로 가는 골목에 있는 놀이터 정자로 향했다. 급하게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준이는 가방이라도 뒤집어쓰고 뛰자는 내 말에 안 된다며, 내 손을 잡고 달릴 뿐이었다. 정자에 도착하자마자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고, 남준이는 내 삳태를 살피고는 가방의 물기를 털었다. 자기가 꼭 안고 왔으면서. 누가 보면 자기 가방인 줄 알겠어. 아이는 그렇게 가방의 물기를 다 털어내고는 가방 속 내용물을 살폈다.
"안에는 안 젖었다."
"그렇게 품에 안고 왔는데 젖었겠어?"
"너 이거 책 힘들게 구했는데, 젖으면 안 되니까."
가방 속에는 문제집을 비롯해서, 극작 관련 서적이 들어 있었다. 그 중 한두개는 서점에 재고가 없어서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든 잘 잊는 법이 없는 아이였으니까. 안 추워? 가방이 무사한 걸 확인한 남준이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남준이는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제 티셔츠 끝을 잡고, 빗물을 짜냈다. 그리고는 옷자락을 올려, 머리칼과 턱을 타고 흐르는 비를 대충 닦아주었다. 가슴께까지 올린 탓에 탄탄한 몸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아! 진짜 미쳤나봐. 김남준!
"야, 야! 그 옷 좀."
"감기 들어."
남준이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살피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닦기 바빴다. 이쯤 되니 나를 이렇게 만든 김남준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으로. 얘는 내 앞에서 옷을 이렇게 막 까도 괜찮나?
"... 아니, 그, 너..."
"응?"
"다 보인다고!"
"보면 뭐 어때. 너인데."
"... 나는 부끄러워, 진짜."
"부끄러워?"
솔직하게 말 안 하면, 나만 죽어날 것 같아서. 그냥 두 눈 딱 감고 말했다. 나는 부끄러워, 진짜. 그러자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가 되물었다. 부끄러워?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나는 너가 이렇게 갑자기 어른이 된 것처럼! 어? 이렇게 변해서. 정말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르겠고. 네가 이럴 때마다 그냥 숨고 싶단 말이야!
내 말이 끝나고, 시원한 빗소리만이 우리의 배경음악처럼 이어졌다. 아이가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나도 더 뭔가를 더 할 텐데. 야속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손바닥에 묻은 얼굴을 살며시 들어, 감았던 두 눈을 떴다. 남준이는 밤중에도 보일 정도로 붉은 얼굴을 한 채, 내가 좋아하는 보조개가 쏙 들어가게 웃고 있었다. 머쓱해진 내가 괜히 큰 소리로 뭐야! 하고 외치자, 아이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그랬어."
남준이는 단정하게 깐 머리가 흐트러지는 지도 모르고, 머리를 헝클이며 주저 앉아 말했다. 네가 나를 너무 친구로만 보는 거 같아서. 좀 남자로 봐줬으면 해서. 일부러, 좀. 솔직하게 노렸어.
"... 일부러 그랬다고?"
"응."
남준이는 제 몸을 일으키고는 나를 제 품에 안았다. 얇은 티셔츠 한 장을 넘어서 뜨거운 기운이 전해졌다. 나 너한테 남자친구지, 친구 아니잖아.
"... 그치."
그래서 내가 너 꼬신 거야.
*
남준이가 누구를 꼬시다니. 말도 안 되는 문장이었다. 나는 남준이 못지 않게 뜨거워지는 몸을 느끼며, 남준이를 밀었다. 잠깐만... 하지만 남준이는 떨어질 줄 몰랐고, 되려 내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아, 나 진짜 창피하다.
"아니... 누가 사귀는 사이에도 꼬시냐. 애인을..."
괜히 민망해진 내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누가 사귀는 사이에도 꼬시냐. 애인을. 남준이는 내 손으로 제 뒷통수를 쓸게끔 만들었다. 귀여우면서도 고맙고 온 몸이 저렸다. 남준이는 내 손길을 가만히 느끼며, 얼굴을 묻은 채로 말했다. 목덜미에 남준이의 입술이 자꾸만 달싹였다. 나한테 너는 평생 꼬시고 싶을 만큼, 어렵고... 놓치기 싫은 사람이야. 살갗에 닿은 숨결과 열이 잔뜩 오른 커다란 몸이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남준이는 몇 번의 숨을 고르고 나서야, 내게서 멀어졌다.
이왕 꼬신 거, 더 꼬셔도 돼?
나는 대답 대신 남준이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는 아이의 목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처음 듣는 남준이의 목소리가 나를 달뜨게 만들었다.
도망가면 안 돼. 고양아.
남준이의 말을 끝으로 우리의 입술이 엉키는 소리밖에 남지 않았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소리는 그 순간 없었다. 신기하게도.
어른이 되는 과정 속, 열병을 우리는 함께 앓고 있었다.
*
겨울입니다. 반겨주셔서 감사해요! 이번 회차는 마땅한 배경음악을 찾지 못해서, 편한 음악으로 나눠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