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tic
: an incurable romantic
: 기약없는 로맨티스트
배경음악과 함께 듣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daybreak (minhyun & jr)
틀어주세요 :)
15-1
어른이 되는 속도
비가 쏟아진 날을 기점으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는 데서 온 확신 때문이었다.
*
남준이는 기말고사까지 끝나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자는 약속을 지키려, 시험 마지막 날인 오늘 학원을 빼두었다. 하지만 학교가 일찍 끝난 탓에 내리쬐는 태양이 더욱 따가웠고, 남준이와 나는 시내 방향 버스 타기를 포기했다. 더워도 너무 더웠기 때문에.
아이는 편의점에서 산 음료수를 쥐고 있다가, 음료를 감쌌던 두 손으로 내 양 볼을 식혀주기를 반복했다. 그냥 음료수를 볼에 대면 될 일이었지만, 그럼 너무 차가울 것 같다며 굳이 수고스럽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부산스러운 남준이의 다정한 손길을 받으며 말했다.
"너무 더워서 아무 곳도 못 가겠어."
"그러게. 이렇게 더울 줄 몰랐다."
"그냥 집 가서 쉴까?"
남준이는 저도 이렇게 더울 줄 몰랐다고 답하며, 집에 가서 쉬자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준이 역시 많이 더웠는지 얼굴이 붉었다. 평소에 올리고 다니던 머리를 오늘은 내린 탓에 더욱 더워보였다. 아이는 오늘 답지 않게 늦잠을 자서 면도도 하지 못한 채로, 고양이 세수만 딸랑하고는 등교길에 나섰다. 학원 탓에 집에 늦게 들어오고 나보다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는 남준이라 이렇게 내린 남준 - 내 마음대로 덮남준이라고 부르는 - 은 오랜만이었다. 평소보다 흐트러지고 어려보이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우리는 편의점 파라솔에서 쉬기를 끝내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스크림은 반드시 시키자는 말과 그 외 메인 음식은 무엇을 시킬 지. 그런 사소한 대화를 하며 걸었다. 남준이가 식혀준 볼은 다시 익을 새가 없었다. 걷는 중에도 계속해서 음료로 제 손을 식히고, 내 볼을 감싸주는 아이 덕분에. 집에 거의 다 왔을 즘에는 음료마저 시원하지 않았다. 남준이는 끝까지 손부채질을 해주며, 내가 더워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 더운 여름도 남준이의 다정함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
이모는 남준이네 할머니네서 시간을 보내시다가, 저녁 6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셨다. 우리는 이모가 없을 때야 말로 배달음식을 시켜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가방을 벗어 던지고는 바로 배달 책자를 펼쳤다. 아이스크림은 남준이가 좋아하는 맛 두 가지와 내가 좋아하는 맛 두 가지를 채워 시켰다. 민트초코를 싫어하는 아이가 선택한 맛을 보고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민트초코를 포기 못하는 나를 알고는 빠르게 수긍했다. 그대로 시키자. 뭐든지 다 맞춰줄 것만 같은 남준이가 넘지 못하는 선은 우습게도 민트초코였다.
아이스크림과 함께 피자를 시키고는 에어컨 아래 늘어져, 요즘 유행하는 예능을 보았다. 밥을 먹고 씻을 생각이었는데 남준이는 끈적거리는 것과 면도 안 한 제 모습이 싫다며, 씻겠다고 일어섰다. 나는 나도 그냥 지금 씻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생각만으로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남준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남준이는 이미 내 표정을 수상하게 여기며, 제 팔로 가슴팍을 엑스자로 가렸다. 그리고는 까맣고 동그란 눈을 최대한 순수하게 뜨고 말했다. 아직은 안 돼. 나는 남준이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실없는 웃음이 흘러 나왔다.
"뭐래."
"여주야. 아직은 안 돼. 우리는 학생이고..."
"아! 뭐래! 그냥, 면도 해줘도 되냐구 물어보려고 했거든?"
우리는 학생이고 어쩌고 하던 남준이는 면도를 해주고 싶다는 내 말에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면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 본 연인 사이에 면도 해주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 드라마 보니까, 막 여자친구가 남자친구 면도도 해주고! 그러더라구... 남준이는 갈 수록 작아지는 내 목소리에 웃음을 감출 생각도 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있는 내게로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추고 답했다. 연애 버킷리스트가 꽤 있나 보네.
"버킷 리스트까지는 아니구..."
그냥 갑자기 생각이 든 건데, 저렇게 말하니까. 별것도 아닌데 부끄러워지고 평소에도 연애만 생각하는 애가 된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남준이는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만 내 앞으로 제 얼굴을 가까이 붙여왔다. 응? 또 뭐가 하고 싶었을까. 나는 계속 다가오는 아이 때문에 소파 등받이까지 몸이 밀렸다. 조금 전까지 밖에서 나 더울까봐 전전긍긍하던 녀석는 어디가고, 지금은 작정하고 나를 열 오르게 만드려는 아이만 남은걸까. 나는 얼굴이 홧홧해지는 걸 느끼며, 내 앞에 있는 아이에게 그냥 입을 맞췄다. 애인이 앞에서 얼굴을 막 가깝게! 그러는데. 연애하는 사이면 이런 거 하고 그러는 거잖아.
남준이는 내 뽀뽀에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저를 멀뚱히 바라보는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끝이야? 하고 물었으니. 당황은 무슨. 나는 그럼 끝이지 뭐가 더 있겠냐며 괜히 큰 소리를 냈고, 남준이는 보조개가 들어가는 웃음을 짓고는 그대로 내게 입을 맞췄다. 조금 전의 입맞춤하고는 여러모로 다른... 그런 입맞춤이었다. 나는 거의 내 쪽으로 쏠린 아이의 무게를 고스란히 받으며, 비 오는 날의 스킨쉽을 떠올렸다. 우리 그때 밖에서 이런 걸 한 거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남준이는 다른 생각을 하는 나를 눈치챘는지, 내게서 멀어지며 말했다. 집중해야지. 나는 남준이의 말에 더욱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이는 제 검지손가락으로 내 코를 무심하게 툭, 치고는 말했다.
기다려, 면도 할 거 가져올게.
*
쉐이빙 크림을 바르는 것만 십 분이 걸렸다. 폭신폭신한 촉감이 좋아 장난 좀 치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남준이는 이러다 크림이 마르겠다며, 내 손에 묻은 크림을 닦아준 후 면도기를 들려줬다. 나는 손에 쥐어진 일회용 면도기를 보고 물었다. 너 원래 이거 써? 그러자 남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처음부터 이걸로 써서 그런가, 이게 편해. 나는 남준이가 당연히 전기 면도기를 쓸 줄 알았는데. 파란색의 일회용 면도기는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묶음으로 파는 것이었다. 전기 면도기가 더 편하지 않나. 근데 얘는 언제부터 면도를 했지? 생각해보니 언제부터 면도를 했는 지도 모르겠다. 의식한 적이 없어서. 남자아이들은 당연히 하는 걸 텐데. 그게 절로 되는 것도 아닐 텐데. 나는 왜 궁금해 한 적이 없었을까. 나는 이럴 때마다 남준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한웅큼씩 들었다. 남준이는 바쁜 우리 부모님의 부재를 너무나도 잘 채워줬는데, 나는 그렇게 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남준이는 이렇게 아빠가 알려줬어야 할 일들도 혼자서 뚝딱뚝딱 잘 해냈다. 나는 그래서 모르고 넘어가는 시간들이 많았고, 그 시간들이 남준이에게 외로움이었으면 어쩌지. 하고 늘 뒤늦게 속앓이 했다. 파란색의 일회용 면도기는 너무 가볍고 투박해서, 아이의 외로움을 달래주기에 턱 없이 부족했다.
내가 가만히 면도기만 내려보고 있자, 남준이는 내 손 위에 제 손을 올려서 방법을 알려주었다. 위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면 돼. 밑에는 위에서부터 살살. 할 수 있겠어? 나는 아이의 물음에 오히려 되묻고 싶어졌다. 너는 그런 거 누가 알려줬어? 처음에 다치지는 않았고? 무섭지는 않았어? 남준이 성격에 이모한테 말해서 도움을 받았을 것 같지 않아서, 자꾸만 울 것 같았다.
나는 많은 질문을 속으로 삼키며, 남준이가 알려준 대로 조심스럽게 면도기를 움직였다. 마음대로 휘어지지도 않아서 계속해서 쉐이빙 크림을 덧바르며, 면도를 이어갔다. 드라마에서는 엄청 로맨틱하던데. 나는 지금 그냥 남준이가 너무,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면도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나는 와앙하고 울어버렸다. 지금 면도 해주는 나도 네가 다칠까봐 무서운데. 나보다 더 어렸을 때의 너는 얼마나 무서웠겠어. 나는 입 밖으로 뱉지 못하는 말들을 울음으로 쏟아냈다. 남준이는 느닷없이 우는 나를 힘 주어 안았다. 그리고는 내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등을 토닥여주었다.
시킨 음식이 온 건지 초인종이 울렸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한참동안 안고 있었다. 몇 분 지나자 대문 밖에서는 두고 갑니다! 하는 배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남준이는 쉐이빙 크림을 수건으로 대충 닦고는 내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면도에 소질이 있더라고. 내가."
"..."
"그래서 별로 안 다치고 잘 했어."
"..."
"원래는 용돈 모아서 전기 면도기 사려고 했는데."
"..."
"계속 이거 쓰다보니까, 이게 편해서 쓰는 거야."
"..."
나는 결코 너를 이길 수 없겠구나. 따듯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가 조금의 거짓도 없어서 마음이 놓였다. 남준이는 제게 안겨 있느라 쉐이빙 크림이 묻은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니까, 쓸 데 없는 상상하지 말라고. 수건으로 머리칼을 닦고, 귀 뒤로 넘겨준 아이가 말했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안녕하세요. 겨울입니다.
현생으로 인해 업데이트가 자꾸 늦네요 ㅠㅠ 죄송한 마음이에요.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다들 더위 조심하시고 건강에 더욱 유의하시며 지내셔야 해요. 늘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