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 그 불완전한 나이.
09
나한테 예쁘다고 하는 전원우의 말에 괜히 민망해져서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예쁘기는 무슨, 맨날 몬난이 소리 듣고 사는데…. 분명히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척이나 더웠다. 그 말은 곧 내 얼굴이 정말 터져버릴 듯이 빨개졌다는 얘기겠지. 이대로 계속 전원우 옆에 있다간 몸이고 마음이고 진정이 안 될 것 같아서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땐 진짜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경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얼굴이 진짜 무슨 홍당무처럼 새빨개져 있었는데, 정말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으면 미칠 듯이 쪽팔렸을 것 같다. 나는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다가도 식지 않는 얼굴에 물을 틀고 몇 번이고 세수를 했다. 진정해. 진정해라, 김여주. 이런 걸로 너무 좋아하지 말란 말이야!!! 내 감정 하나 주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워 나는 한숨을 크게 쉬어야만 했다.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반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교실 뒷 문에서 어떤 여자아이가 전원우의 손목을 잡고 끌고 나오는 게 보였다. 그 광경에 놀란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 그 둘을 바라보았다. 저 여자는 또 누군가 싶어 얼굴을 보는데 어제 교실로 찾아왔던 그 예쁜아이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여자아이는 조금만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여자아이를 보는 전원우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고 있었고.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너무 궁금해서 이야기를 엿듣고 싶었지만, 내가 그 둘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도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애써 신경을 안 쓰고 뒷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김여주."
전원우가 내 이름을 부르더니 내 손목을 딱, 잡아오는 게 아니던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전개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여자아이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나와 전원우를 번갈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 어?"
"선생님이 아까 너 찾으셨어. 잠깐 교무실로 오라셔."
"에? 나? 왜?"
"그건 나도 모르지. 나도 교무실 가야 할 일이 있으니까 같이 가자."
"어… 어. 그래."
약간 얼떨떨한 상황에 속으로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전원우가 그 여자아이를 보며 말했다.
"난 어제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다 끝난 거 아니었나?"
"…원우야."
"너도 들었겠지만 나 지금 얘랑 갈 데가 있어가지고. 그만 가봐야겠다."
"……."
"다신 안 봤으면 좋겠다."
전원우의 마지막 말에 여자아이는 참고 참았던 눈물을 결국 쏟아내고 말았고, 전원우는 미련 없이 그 여자아이를 뒤로 하곤 내 손목을 끌고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울기까지 하는 건데…. 대체 무슨 사이인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전원우가 가는 데로 끌려가고 있는데, 전원우가 나를 데리고 온 곳은 교무실이 아닌 빈 음악실이었다.
"…? 여긴 왜 왔어?"
"그냥. 뭐. 일종의 피난처?"
뭔 소리야. 이건….
"아까 선생님이 나 부르셨다며?"
"아. 그거 거짓말인데."
"어?"
"그 상황을 벗어날 게 딱히 없었거든."
그 자리도 너무 불편했고… 할 말도 없었고. 너 끌어들인 건 미안. 전원우는 내가 기분 나빠할까 봐 내 눈치를 보면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나는 아니라고, 기분 전혀 안 나빴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좋다면 좋았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때 그 타이밍에서 화장실을 나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전원우랑 둘이 도망(?) 칠 일도 없었을 거고, 이렇게 빈 음악실에 둘이 있을 기회도 없었을 거고. 오히려 그 여자아이한테 감사하다는 마음까지 든다 해야 하나. ……아. 그 생각까지 미치자 순간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정말 저런 생각까지 할 정도로 전원우를 좋아하고 있구나.
"조금만 여기 있다 가자."
아무 의자에나 앉은 전원우는 제 옆자리로 오라며 자기 옆 의자를 손으로 툭, 툭 쳤다. 그의 옆에 앉은 나는 그 여자아이에 대해 과연 물어봐도 되는 걸까, 속으로 고민을 하면서 전원우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그런 나를 알아차렸는지 전원우는 '왜. 뭐 할 말 있어?'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으…. 모르겠다. 근데 궁금한 걸 어떡해…. 몰라. 그냥 질러.
"아까… 그 여자 애 있잖아…."
"…아. 응."
"무슨… 사이야?"
아…. 전원우의 표정이 조금씩 안 좋아져 갔다. 아, 바보. 그걸 괜히 물어봐가지고…! 궁금했던 마음이 산더미같이 커서 물어보기는 했지만, 표정이 안 좋아지는 전원우를 보니 질문을 던지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그래. 내가 나댔어. 내가 쟤한테 뭐라고 그런 걸 물어봐? 내가 여자친구도 아니면서…! 아. 망했다. 나 혼자 별의별 생각을 하며 미안하다 사과를 하려는 순간,
"…못 믿겠지만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그냥 오해가 좀 있었는데…. 그 오해가 조금 늦게, 안 좋게 풀렸어."
"아… 그렇구나."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긴장했던 나를 알아챈 건지 전원우는 픽 웃어보였다.
다행이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서.
"아. 맞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너는 왜 이거 신청했어?"
"응? 뭐?"
"문학. 이과 애가 보충 수업으로 문학 듣는 것도 좀 생소하고…. 그리고 너 이과 탑이라며."
그러면 뭔가 문학은 껌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 내 말에 전원우는 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과탐으로 화학이랑 생물을 해서 그거 둘 중에 하나 들으려고 했었어. 근데 그날 컴퓨터에 렉이 걸려가지고…."
"헐. 진짜? 나도 그때 렉 걸렸었는데!"
"아, 그래? 너는 이거 원해서 들어온 거 아니야?"
"아니야. 원래 이거 안 들으려고 했었어."
"그럼 뭐 들으려고 했었는데?"
"아. 나는 배드…."
아. 나는 배드민턴이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다른 과목도 아니고 배드민턴에 실패해서 문학을 들으러 왔다고 하면 전원우가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고3이 다른 과목도 아니고 배드민턴에 실패해서 그거 대신으로 문학을 선택했다고 하면…. 어우. 내가 생각해도 진짜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사문 들으려고 했다가 렉이 걸려서…. 그래서 문학 들었어."
"그랬구나…."
"근데 이것도 겨우 들어온 거야. 딱 신청하고 나서 바로 마감 뜨더라고."
"어. 뭔가 너 전에 신청한 사람이 나 같은데? 내가 신청하고 나서 한 자리 밖에 안 남았었거든."
"헐. 대박."
별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게 너무 신기해서 서로 계속 웃었다. 아. 그래도 좋은 점은 있네. 전원우의 말에 내가 물었다.
"어떤 거?"
"사실 문학 선택하고 나서 수업 듣고 싶은 마음 별로 없었는데."
"응."
"너 만났잖아. 이 수업 덕분에."
잘 선택한 거 같아. 그러면서 씨익 웃는데, 와…. 나 지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거니?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전원우에 나는 또 다시 굳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얘는 진짜 뭐하는 애야. 사람 마음을 아주…. 아. 진짜 지금 이 상황에서 심장마비로 죽어버려도 나는 할 말이 없을 것만 같다.
"근데."
"어, 어?"
"그거 어떻게 알았어? 그…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뭐하지만. 이과 탑이라는 거."
"아. 그거 민규가 말해줬어!"
"…김민규?"
"응. 너 되게 유명하댔어. 이과 탑이라서."
"아… 김민규가 그렇게 얘기해?"
어. 너 김민규랑 아는 사이야? 내 말에 전원우는 음… 하면서 뜸을 들이더니 '조금?' 이라 말했다. 우와-. 둘이 아는 사이였어? 뭔가 신기하다 가도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인사 한 번 안 하던 게 생각이 나 나는 물었다.
"근데 왜 서로 아는 척 안해?"
"…그냥 고2때 같은 반이었어.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아…. 그랬구나."
"…넌 언제부터 걔랑 친구였는데?"
"음… 10살 때부터? 9년동안 봐왔지. 김민규를."
으. 지긋지긋하다. 순간 떠오르는 김민규의 얼굴에 나는 피식 웃었다.
"9년이면… 되게 친하겠다."
"그럼. 많이 친하지. 사실 말은 뭐 지긋지긋하다, 이렇게 해도 내가 김민규만큼 의지하는 사람은 없거든."
"좀 질투나는데."
"어?"
순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에 나는 전원우의 말을 듣지 못하고 다시 되물어야 했다. 방금 뭐라 그랬어? 내 말에 전원우는 별말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음… 그래? 그럼 이제 가자! 전원우와 단 둘이 있던 시간이 끝이 나자 좀 아쉬웠지만, 그래도 오늘 이만큼 둘이 얘기해 본 적은 처음이니까! 나름 그거에 위안을 삼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전원우가 내 손목을 잡고는 다시 나를 자리에 앉혔다.
"…? 왜?"
"우리 땡땡이 칠래?"
"어?"
"너랑 더 놀고 싶어서."
가지 말자. 응? 내 눈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을 하겠니…. 그래. 좋아. 나는 홀리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아, 얘는 핸드폰도 놓고 대체 어딜 간거야…."
수업 시작하기 전에 잠깐 들렸을 때도 없더니, 1교시 쉬는 시간이 되어서도 애가 없다. 책상 서랍 안에 핸드폰을 고이 놓고 사라진 여주에 민규가 할 수 있는 건 여주의 교실 앞에서 계속 서성거리는 것 밖에 없었다. 얘가 막 이렇게 땡땡이를 칠 위인은 아닌데…. 여주가 사라진 것도 사라진 거지만, 그것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옆자리인 전원우도 같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아. 진짜 어디 간 거야!!!!"
"그만 가지. 이제 좀 있으면 종 치는데."
"야. 순영아. 얘 어디 갔을까? 핸드폰도 놓고?"
"아. 무슨 걔가 애야? 집에 갈 때쯤엔 오겠지! 가방 챙기러."
대체 아침부터 몇 번을 들락날락하는 거야. 어휴, 저 답답한 새끼. 순영은 답답하다는 듯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창가에 비친 햇살 때문인지 그의 노란머리는 한층 더 밝게 빛났다. 너 계속 여기 있을 거면 있고. 난 간다. 미련 없이 제게서 등을 돌리는 순영에 민규는 아, 같이 가! 하며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진짜 수업 끝나고 왔을 때는 있겠지?"
"아. 그렇겠지! 한 번만 더 그 얘기해봐라. 아주 입을 꼬메버릴테니까."
"살벌한 새끼…. 아니 전원우는 왜 같이 사라진 거냐고. 더 신경 쓰이게."
"아오. 그냥 좋아하면 고백을 해. 이 병신아!"
순영의 말에 민규는 걸음을 멈춰 서고 그를 쳐다보았다. 뭐? 고백? 누가. 내가? 민규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묻자 순영은 말했다.
"너 그러다 뺏겨서 후회하지 말고, 좋아하면 고백을 하라고."
"뭘 뺏겨?"
"으이구. 저 호구새끼."
순영은 혀를 쯧쯧 차면서 다시 앞을 향해 걸었고, 민규는 제자리에 서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야, 권순영! 같이 가자니까! 하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
신은 야속하게도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주지 않는다.
내가 어떤 선택을 했든 간에,
마치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라는 듯
그저 그 선택에 대한 결과를 지켜보며
가만히 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이번에도 그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철저한 방관자일 뿐이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줬었더라면,
하찮은 인간이 뭘 모르고 선택한 그 험난한 길을
조금만 아량을 베풀어 쉬운 길로 인도해
결과를 조금이라도 바꿔줬었다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비참한 피해자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신은 야속하게도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주지 않는다.
그는 그저 '방관자' 일 뿐이었다.
작가의 말 |
안녕하세요!!!! 진짜 오랜만이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 진짜 독자님들 너무 너무 찾아뵙고 싶었어요ㅠㅠㅠㅠㅠ 그래서 11월에 오겠다고 말은 했었지만 일이 끝나는대로 이렇게 빨리 왔습니닿ㅎㅎㅎ 핳 저 잘했나요?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봤자 이틀 빨리 온 거지만요...ㅎ... 설마 저 잊으신 거 아니죠...?ㅋㅋㅋㅋㅋㅋ 기다려주신다고 했는데... 설마... 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다려주신다는 댓글 보고 정말 많이 감동받았었어요ㅠㅠㅠㅠ 그래서 더 빨리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구요ㅠㅠㅠㅠㅠㅠ 앞으로도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암호닉 : 일공공사님, 찐빵님, 여남님, 자두님, 다이제님, 지유님, 치킨님.
그리고 댓글 달아주시고 읽어주신 독자님들 제가 정말 사랑합니닿ㅎㅎㅎ 하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