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은 별. 이 별.
편하게 빚쟁이라고 부르자.
이름 탓인지는 몰라도 너는 한 곳에 정착할 수가 없는 운명이었어.
기억에도 없는 어릴 적 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그 때부터 생겨난 듯한 신기한 능력
어느 날 갑자기 문을 열면 처음 보는 곳으로 뚝 떨어지고 마는 거지.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시작된 여행을 하면서 너빚쟁은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세계 곳곳에 하나씩 늘어났어.
물론 다시 찾아가볼 수는 없었지만 말이야
헤어짐은 언제나처럼 갑작스럽게.
아침에 일어나서 방문을 열었다가도, 화장실을 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가도, 배가 고파 가게 문을 열었다가도
그렇게 늘 예고 없이 헤어짐은 찾아왔어
전 세계 어디서나 인터넷이 잘 터지는 것도 아니고 전화가 안 터지는 곳도 많아서
너빚쟁이 기억하는 친구들은 정말 어렸을 적에 같이 소꿉놀이 하던 동네 친구들 밖에 없는 것 같아
물론 기억만 하고 있어. 더 이상 연락할 방법도, 연락할 자신도 없었거든
너빚쟁은 삼년 동안 한 남자를 찾아서 여행을 해오고 있어
삼년 전, 이제 겨우 집이라고 마음 붙일 수 있는 곳에서 마음 놓고 문을 열었던 그 순간 너빚쟁은 또다시 어디론가로 떨어졌지
마트 가는 길이라 그래도 옷은 입고 있어서 다행이지 하는 것도 잠시
눈 앞에 펼쳐진 별 천지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어.
회장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화려한 런웨이. 그리고 그 위를 당당하게 걷고 있는 동양인 남자.
바로 뉴욕패션위크 현장이었어.
길 한복판보다 더 당황스러운 곳에 떨어져서 그런지 너빚쟁은 모든게 막막하기만 했어.
여기는 또 뭐야. 여기서는 이제 어떻게 다니지, 그냥 다시 문을 열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쇼는 끝나가고 너빚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덩그라니 서있었어
그렇게 어버버하면서 서있는데 경호원이 너빚쟁에게 다가와서 막 뭘 묻기 시작했어.
너빚쟁이 이상한 사람 같아서 온 것 같은데 이걸 어떡해, 뭐라고 설명해.
그렇게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는데 옆에 한 남자가 다가와서 섰어.
나 오늘 여기서 무대섰던 모델 정택운이라고 하는데, 얘는 내 사촌동생이고 쇼 끝나고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영어를 잘 못해서 헤맨 것 같다. 내가 데려갈게
너빚쟁은 구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뭐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했어.
그런데 주머니에 넣었더니 나오는 돈이 유로야.
오늘 마트가려고 나왔다는 걸 그 때 깨달아서 옷차림을 봤더니 완전 후줄근 한거야.
왜 경호원이 너빚쟁에게 왔는지 알만큼.
그래서 뻘쭘해하고 있는데 그 남자가 자기가 아는 카페가 있다고 그리로 잠깐 가자고 해
근데 약간 거리가 있는데 차 운전하기는 좀 곤란해서 걸어가는 것도 괜찮냐고 물어.
너빚쟁은 어차피 버스탈 돈도 없는데 상관없다고 같이 카페로 향했어
그 남자는 자기 소개를 다시 하면서 올해 스무살이라고 그랬어.
한국인이고 모델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어. 그러면서 너빚쟁에 대해서 물어왔어
"내 이름은 이 별이고..."
까지 설명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설명하기가 좀 막막했어
워낙 한 곳에 있지 못해서 달력도 못 보고 사니까 나이도 약간 가물가물 한 것 같고
그리고 너빚쟁이 어떤 사람인지도 소개하기가 너무 막막한거야
그래서 일단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정택운이라는 맞은 편 이 남자는 9월 12일이라고 그랬어. 몇 년도이냐고도 물었더니 2009년이래
너빚쟁은 너무 놀랐어. 아무리 달력을 안보고 살았어도 분명히 2009년은 아닐건데, 그건 진짜 아닌데 하면서 놀라다가 모르고 커피를 쏟았어
휴지로 닦아도 수습이 안되길래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갔어
대충 물로 닦고 휴지로 물기를 없애고 그렇게 어떻게 수습을 하고 다시 화장실 문을 여는데
또 다른 곳이야.
그리고 이번에는.
"한국이네..."
연락도 없이 사라져서 혼자 기다리고 있을 그 사람 생각이 났지만
뭐 어째. 방법이 없는데.
그리고 지금이 2009년이라는게 더 놀라운 걸.
눈 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오늘이 몇 월 며칠이냐고 물어봤어
"9월 12일이요"
"아~ 그러면 몇 년도예요?"
몇 년이냐고도 물어보니까 알바생이 이 병신은 뭐지 하고 쳐다보면서 2012년이라고 말해줬어
아까 들은 2009년보다는 훨씬 그럴싸해보여
내가 그래도 태어난지 20년은 된 것 같은데 2009년은 좀 에바였지. 하면서 꾸벅 인사를 하고
편의점 문을 열면 또 다른 곳이 나와
"여기는 또 어디야"
너빚쟁은 허탈하게 웃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