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 w. 채셔
한참을 꿈에서 헤맨 뒤에 깨어났을 때는, 하얀 형광등이 아른거리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나는 편지를 찾았고…, 옆에 있던 간호사는 내 손을 잡아주며 같이 온 남학생에게 있다고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같이 온 남학생은 아마 정국이었을 테다. 정국이도… 맞아서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니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밑에 보이는 실내화에 발을 끼워맞췄다. 일어나시면 안 돼요, 아직 몸이…. 간호사의 말이 울리듯이 귀에 웅웅거렸다.
"정국이, 어디 있어요?"
'…환자분 몸 상태가 아직."
"어디, 있어요?"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아서, 내 팔을 잡아오는 간호사의 팔을 뿌리치고 병실을 나왔다. 어지러웠지만 그것쯤은 이겨낼 수 있었다. 정국이가 편지를 봤으면 어쩌지, 아니, 그보다 애들이 그 편지를 봤으면 어쩌지…. 편지 내용을 다 읽지 않아서 더 초조해졌다. 첫 문장만 보고 쓰러졌으니까, 할아버지 얘기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 거다. 애들이… 내 비밀을 알게 되면 어떡하지.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허겁지겁 응급실을 찾았다. 고통에 신음하는 여러 사람들 사이로, 가지런히 누워있는 정국이 보였다. 금방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이끌고 휘청휘청, 정국의 얼굴 하나만을 보고 다가섰다.
"정국아…."
"……너 괜찮아?"
"나, 편지…."
정국이 말을 건네왔는데도,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이내 초조한 내 시야 속으로 정국의 베개 옆에 고스란히 놓인 하얀 편지가 들어찼고, 그것을 황급히 낚아채 뒤로 숨겼다. 정국은 천천히 내 행동을 눈으로 쫓았다. 정국아, 잠깐만…. 슬픈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정국을 내버려둔 채, 편지를 꽉 쥐고 응급실을 나왔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편지를 빠르게 펼쳐내렸다. 정갈한 글씨체. 세경이, 세경이란 이름을 보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녕, 여주야. 나 세경이야. 잘 지내니? 나는 잘 지내. 나는… 서연대학교 병원에 있어. 단도직입적으로, 너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으니까 조심해. 아프게 하는 사람은 믿지 말고, 도망 쳐. 내가 너에게 이런 편지를 주는 건…,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야. 놓고, 놓치고, 죽이고, 버려. 꼭 그래야 해.
버리라는 말. 소중히 여기는 사람. 아프게 하는 사람. 조심. 해치려는 사람…. 내용을 알 수 없는 편지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예전 일을 떠올릴 수 있는 문구는없으니. 그렇게 느끼곤 익숙하게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괴물이다, 이제. 세경이가 할아버지에게 당하는 악몽은 밤마다 계속되었고, 그 일에 그렇게 죄책감을 느꼈으면서도…. 세경이가 다가온 지금, 죄책감보다도 아이들에게 가면이 벗겨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취해 있으니. 망가졌다. 정말, 손쓸 수 없이 망가진 기분이다. 이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정도로.
"요즘 몸이 약하네. 픽픽 쓰러지는 거 보면."
들려오는 목소리에 편지를 황급히 접었다. 민윤기. 아침에 봤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검은 수트가 아니라,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수트를 입지 않은 민윤기는 처음이다. 신발은 같았다. 간호화. 마치 병원에 계속 있었던 사람처럼. 민윤기는 천천히 내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가 편지로 그 시선을 옮겼다. 무언가를 탐구하려는 눈빛에 나는 황급히 편지를 뒤로 숨겼다. 민윤기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관찰했다.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민윤기가 나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서 숨이 턱 막혔다. 왜 세경이는 이런 편지를 보낸 걸까. 그것도 뜻을 알 수도, 심지어 짐작할 수도 없는 편지를. 편지를 꾹 쥐었더니 여기저기 접혀 보기 흉해졌다.
"러브 레터라도 되나보지?"
"아니예요…."
"너 요즘 한눈 자주 판다?"
민윤기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 난 여자친구 잡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런 식으로 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다. 눈을 오래동안 감았다가 떠도, 세상은 계속 돌기만 했다. …너무 무리를 했나. 또 쓰러질 것만 같아서 민윤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민윤기가 움찔하고 굳는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치워. 너랑 나 이렇게 다정한 사이 아니잖아? 매정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민윤기의 말대로는 해 줄 수가 없었다. 잠깐만, 잠깐만요…. 민윤기의 셔츠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다 엉망진창이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무섭기만 하다.
"나 힘들어요."
"……."
"이렇게 선생님 좋아하다 보면, 무너질 것 같아요."
"……."
"그러니까 나, 정국이한테 갈래요."
말 끝에 여운이 길게 남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빛이 희미해지는 끄트머리에 섰을 때, 나는 아주 서투른 손길을 느꼈다. 내 머리와 볼을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는, 뜨거운 손길을. 눈을 감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 손이 민윤기의 하얗고 기다란 손이라는 것을.
그렇게 민윤기의 어깨에 기대고 나서는 기억이 뚝, 끊어져 사라졌다. 일어났을 때 생각나는 건 민윤기의 서툰 손길 밖에는 없었고, 침대 옆 의자에는 정국이 앉아 있었다. 이마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입술에는 익숙한 피딱지가 내려앉아 있는 정국의 모습은 이미 예전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저 무심했던, 혹은 무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백색의 얼굴에서 이제는… 한없이 침전되고 있는 무거운 얼굴. 정국을 세상 밖에서 안으로 이끌어왔지만, 그것이 정국에게는 아주 버거운 일이었을 거다…. 특히 내 세상으로 끌어온 이상. 조금씩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정국의 애정만 받으면 금방 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이제는. 무언가 바뀌었다. 비단 정국만의 변화는 아니었다. 언제 버려져도 어느 때에든 애정을 충족시킬 수 있던 존재로만 생각했던 정국은, 이제 내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세경의 편지가 온 이런 깜깜한 상황에서는.
"미안해, 정국아…."
정국은 손을 뻗어 내 볼을 쓸어주었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손길에는, 따뜻한 정국의 체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다음부터는 맞고만 있지마. 너도, 너 때리는 애들 때려…. 정국의 손길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마치 거짓말처럼… 처음 정국이 내게 마음을 열었을 때처럼, 정국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정국은, 세상을 통달한 사람처럼 웃었다. 긴가민가했지만, 확실히 정국이는 어른이 맞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기대고 싶을 수가 없으니까. 볼을 조심스레 쓸다 힘없이 떨어지는 정국의 손을 꽉 붙잡았다. 정국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말해줄래? 정국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내 고민하던 눈동자는 확신을 담아가기 시작했다. 정국의 길고 긴 상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열 다섯살 때…."
중학교에 입학하고, 쭉 왕따를 당했어.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일진 놈 여자친구가 나를 좋아한다고 한 이후부터 다들 떠나더라, 내 옆에서. 날 때리길래 나도 쳤는데, 수십 명이 몰려와서 나를 때리는 거야. 그 이후로, 아,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죽어 지냈는데. 그래도 걔네 심심풀이는 나더라. 돈 없다고 기분 안 좋아서 때리고, 여친이랑 헤어졌다고 때리고. 그냥 하루종일 맞고 다녔어. 한 번 보복이라도 하면 수십 명이 떼로 와서 때리니까 보복도 못하고. 근데, 어느 날부터 어떤 애가 나랑 다니더라. 싫다는데도 계속 쫓아오고. 그렇게 같이 다니게 됐는데, 일진 새끼들이 걔까지 괴롭히는 거야. 빡쳐서 그 새끼 반 죽여놨는데, 그 친구들이 와서 나 묶어두고, 걔를 때리는 거야. 발로 차고, 주먹 날리고. 그래서 걔가 죽었어. 그렇게 때려서. 근데 걔네는 벌도 안 받더라. 걔네 부모님이 돈을 이리저리 뿌리고 다녔나봐. 걔가 그렇게 살려달라고 했는데…. 나랑 안 놀겠다고 무릎 꿇고 빌었는데. 망할 새끼들…. 악마 같은 새끼들….
정국의 목소리는 간간히 떨렸고, 그럴 때마다 나는 정국의 손을 꽉 쥐었다. 마지막 말에는 원망이 그대로 서려있었다. 악마 같은 새끼들이라며 눈물이 가득 고여서 욕을 내뱉는 정국을 안았다. 정국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눈 앞에서 그 영상이 되풀이되고 있는 걸까.
"괜찮아, 정국아…."
"걔처럼 굴지 마. …너는 다치지 마."
"정국아, 나 괜찮아…. 응?"
정국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른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처럼 될까봐 정국이는 제 안의 정국이 죽는지도 모른 채로 자신을 숨겨오기에 급급했던 거다. 나는 이렇게 나를 지키려고 망가졌는데, 정국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망가졌다. 정국을 꼭 안고 아기 다루듯 등을 토닥였다. 정국의 모습이 마치 상처입은 천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국아, 그러니까 네가 천사라면, 네가 정말 천사라면 나를 구원해줘….
야누스
"할아버지가 여기에 왜 왔어요."
"…여주, 너."
"나가요, 여기서."
정국과 도란도란 얘기를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병실에 들이닥쳤다. 할아버지의 등장에 잔뜩 굳어지는 나를 보던 정국은 친숙하게 내 손을 잡아왔다. 할아버지는 정국의 위 아래를 훑어보았다. 남자친구, 라고 생각하겠지. 정국은 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미국에서 건너왔다."
"나 잘 살아있으니까 다시 미국으로 가요, 할아버지."
역정을 내려던 할아버지가 입을 꾹 다물고 정국을 노려보았다. 너 때문에 할 말을 못하고 있다는 불만 담긴 표정. 정국은 시선을 바닥에다 깔았다가, 허락을 구하듯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에게 물어볼 것도 있으니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정국은 내 머리를 한 번 따뜻하게 쓸어주고는 병실을 나갔다. 휑해진 공간에 할아버지와 나만 남았다. 잔뜩 굳어오는 몸이 미웠다. 할아버지를 공격하란 말야. 할아버지를 상처주고 싶은데, 할아버지의 얼굴만 보면 굳어버리는 몸은 이미 고질병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이 할애비를 용서 못한 거냐."
"…용서할 수나 있어요?"
"……."
"세경이 그렇게 만든 건 할아버지였어요."
지금 누구한테 용서를 구하고 말고 하는 거예요. 절로 차가운 말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할아버지의 표정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놀란 표정에서 절망적인 표정, 그리고 걱정하는 표정. 일의 시작은 할아버지였는데, 그런 표정 지을 권리도 없는데. 그래도 피는 피라고, 나는 그 얼굴에 잠시 심장이 툭하고 내려앉았다. 할아버지는 서서히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제가 한 죗값을 이겨낼 수 없다는 듯이.
"할아버지, 하나만 물어볼게요."
"…그래."
"민윤기…라고 알아요?"
"………."
이제껏 생각하고 있던 질문. 민윤기의 실체가 뭔지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민윤기는 어떻게 우리 학교에 들어오게 된 건지, 그리고 민윤기는 지금 왜 병원에 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베일에 쌓여있던 민윤기의 비밀을 풀어줄 사람은 애석하게도 내 앞의 할아버지 뿐이니까. 뼛속까지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사실 나는 할아버지가 민윤기를 모르길 바랐던 것도 같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민윤기는 나의 첫사랑이었고, 그런 민윤기에게 비밀 따위는 숨어있지 않았으면 했다. 그저 나쁜 놈이 차라리 나았다.
"윤기를… 네가 어떻게 알지?"
정말 그러질 않길 바랬는데.
덧붙임
안녕하세요, 채셔입니다.
많은 분들이 여쭤봐주셨고, 그때마다 해명해드렸지만
사실 글에서는 제 블로그나 홈을 말씀드리는 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글에서 정확히 짚어드리지 않고, 최대한 돌려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 더 공지 드려야 될 것 같아 말씀 드립니다.
이 글은, 제 개인 블로그에서 다른 필명으로, 그리고 타 그룹의 글로 연재된 적 있는 글이구요!
이 글이 제 글이라는 인증이 필요할 것 같아 사진 올립니다.
이 글에서 혹시라도 주소를 유추할 수 있는 요소들은 다 지웠구요,
보시면 Edit이라는 버튼들과 포스트 쓰기 / 관리, 통계라는 버튼이 나타나는 걸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이 버튼들은 제 블로그에서만 나타나는 버튼이구요, 이 버튼으로 인증할 수 있을 것 같아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저 밑에 휴지통이라는 것도 제가 임의로 만들어놓은 카테고리라 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곳이구요.
(펑)
제가 로맨스의 윤리학 시리즈로 정말 꿈같았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지라,
또 이 글을 아껴주셨던 분들도 있었던지라 제가 미리 공지를 확실히 했어야 하는데 T-T
착오 일으킨 점 죄송합니다.
블로그에서는 개인 사정으로 글을 업데이트하지 않은지 오래고, 야누스라는 글 또한 현재 블로그에서는 내려져 있는 글입니다.
이 인증사진은 독자분들이 다 보신 것 같다면 지우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필요하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바로 올려드리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또 죄송해요.
사랑합니다, 이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