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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운시점)
흰 눈이 살랑살랑 내리던 어느날 우리는..1
지금이 몇신지도 몰랐다. 정신이 어느정도 차려졌지만 눈은 떠지지 않는 상황이었고 목은 심하게 갈증이 났으며 속은 뒤집어질듯이 아팠다.
겨우 눈을뜨고 찬바닥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가서 생수통째로 입에다 대고 들이켰다.
냉수가 들어가자 조금 나아지는 느낌에 한숨을 쉬며 푹 주저앉았다.
어제 들어온 시간이 한.. 7시 쯤 됬으니까. 술마시고, 자고, 거실의 유리창으로 비쳐진 실눈으로 본 하늘은 어제 집에 들어왔을때와 마찬가지로 까맣게 물들어있었다.
시계의 시침은 9를 가리키고 있었고 눈을 다 뜨자 무언가가 내 눈위에 떠다니는것같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이마가 간질간질해서 만져보니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있었다.
김원식이 쓰고간듯해 보이는 포스트잇을 구기며 주위를 둘러보니 그제서야 나와같이 뒹군 술캔들과 소주병이 보이기 시작했고,
내 집에와서 이렇게 어지럽히고 간 두마리 개들을 씹으며 술병을 들었다.
술병한개를 쓰레기봉투에 담고선 뭔가 잊은것 같단생각에 구겼던 김원식의 포스트잇을 다시 펼쳐보니 너에대한 얘기가 눈에 들어왔다.
술병들을 뒤로 제쳐두고 휴대폰을 꺼내확인을 해보니 부재중전화 20통에 문자도 꽤나 많이 와있었다. 전부 다 같은번호. 너였다.
'형 전화안받네요. 나한테 삐진거 아니죠? 삐졌으면 풀어줄테니깐 전화하면 받아요. 나 촬영들어가요'
오후 여섯시에 마지막으로 끊긴 너의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생전 처음이었다. 물론 세 통이상 안오는 전화는 안받는다란 남의눈에 박힌 내 성격처럼 전화기를 원래 붙잡고 사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그렇게 전화가 많이 오지도 않았다.
오는사람이어봤자 김원식. 아니면 김원식을 찾는 이홍빈. 집에계신 부모님이나 아주가끔 누나들 뿐.
언젠지 기억은 안나지만 아주 옛날부터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게 거추장스러워 가만히 내 길을 걷다보니 지금의 여기까지 오롯한 마이웨이로 살았다.
누군가와 연락할 욕심조차. 아니 어쩌면 마음조차 없는게 사실이었는데 오늘 너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들을 보니 생전처음 사람관계에서의 욕심이란게 생겼다.
이렇게 속으로 아둥바둥 하고싶지도 않갔고, 너와 대화하고 싶었고 만나고싶었다.
23년정도를 이렇게 살았으면 이제 좀 표현을 해도 괜찮겠지.. 어떻게 보면.. 나는 지금까지 너무 외로웠으니까. 내가 만든 상황이긴 해도 지금의 나는 외롭다고 느끼니까.. 지금부터 바뀐성격을 갖고 살아도 누가 뭐라고 하진 않겠지..
이제 조금씩 조금씩 욕심을 내보기로 결정하고 전화버튼을 누르기전 심호흡을 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너도. 양반은 못되는 모양이구나.
"여.. 여보세요?"
'아, 형 왜이렇게 전화 안받아요. 나한테 삐진줄 알았잖아.'
"아..음"
'뭐하고 있었어요?'
"자..자고 있었는데?"
'아.. 난 이제 촬영 다 끝났는데. 형. 우리 그럼 어제 못했던 말할까요?'
"응?"
'어제 할말있어서 부른거 아니었어요? 진짜 그럼 사진만 찍을려고 그랬던거야? 섭섭하네.'
너도 나와 다른 이유에서지만 섭섭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구나.
너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직도 널보면 어떤말을 해야할지 어떻게 인사할지 조차 당황스럽게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를 만나고 싶었다.
"아냐아냐, 너 어디서 촬영했어? 내가 거기로 갈까?"
'헐.. 형'
"응?"
'형 내가 본것중에 말 제일 예쁘게 잘한거 같아요'
너의 말 한마디에 괜히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너무 확 달라졌나.. 조금 창피하긴 하지만 너와 계속 전화기를 붙잡고 있으려면 말을 해야하니까. 어쩔 수 없다.
'형형. 그럼. 형 스튜디오 앞에서 봐요. 나 거기서 가까운데 있어요.'
"그래. 천천히 와"
'응. 형도요. 나 화장 지우고 옷 갈아입으려면 좀 걸려요. 천천히 와요'
"응."
얼른 준비를 마치고 스튜디오로 나갔다. 근처라더니 오래걸리는건가.. 10분정도를 기다리다가 포장마차에서 먼저 주문을 시켜놓는게 괜찮을것 같아 자리를 옮기면서 너에게 문자를 했다.
'나 먼저 포장마차 가있을게. 저번에 우리갔던 그집. 어묵탕 시켜놓을게.'
추우니까 와서 바로 어묵탕 먹으면 따뜻하겠지..포장마차에 들어가서 어묵탕과 소주를 세팅해놓고 기다리길 10분쯤 했을까,
너는 뛰어왔는지 볼이 꽁꽁얼은채로 날 보며 웃으면서 얼른 들어왔다.
"미안해요. 갑자기 매니저형이 잡아서"
"별로 안기다렸어. 춥다. 국물마셔"
"넵"
속을 좀 데운 너는 곧바로 소주병을 따기 시작했다.
"역시 남자들끼리 대화하면 술만큼 좋은 것도 없죠?"
"..."
"뭐야. 아까 전화할때까지만해도 말 잘하더니, 그럼 나 저기 저 테이블에 앉아서 전화로 할까요?"
말을 안한건 생각때문이었다. 내가 무슨말을 뱉을지도 모르는데 과연 저 술들을 내 입으로 털어넣어도 괜찮을까. 술 못마신다 그럴까, 아냐아냐 너무 뻔한 거짓말인데.. 어떡하지...
"형형, 형 무슨 일 있어요?"
걱정스레 묻는 너의 모습을 보고 그래. 설마 무슨일이 있겠냐 싶어서 에라모르겠다 하곤 그냥 소주잔을 내 입에 털어넣었다.
두번째 잔마저 털어넣으려는데
"어어. 이 형 술을 왜이렇게 급하게 마셔? 누가 안뺏어가요. 짠. 이거하고 먹어야 술이 더 맛나지"
너는 내가 바로 마시려던 잔을 저지하고, 자신의 잔에 꼴꼴꼴 술을 따라붓더니 잔을 쥔 내 손목을 들어올려 쨍 하고 마주쳤다.
그렇게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너는 갑자기 소주잔을 탁 내리치고 술만마시니까 재미가 없다면서 얘기를 하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