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사귄 전 애인 갑을로 재회하는 썰 13
낭만적인 어른이 되어서
w. 랑데부
66.
"..."
"...강영현"
말해줘, 내가 지금 착각하는 거라고. 너를 너무 몰라서 착각하는 거라고 그런 일 없다고 네 입으로 말해달라고. 차가운 바람이 어깨를 감싸 안고 떨어져 내렸다, 강영현 말 좀 해달라고. ㅇㅇ는 영현이 입을 뗄 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할 지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고 싶어.
"어"
"...야"
"너 좋아해"
ㅇㅇ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걸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니까. 당장 힘이 없어 쓰러질 거 같았지만 걸어가야 했다. 네가 거짓말을 안 했잖아. 대로변에 차가 순식간에 지나다녔다. 그렇게 ㅇㅇ는 영현을 등지고 걸어갔다. 우리가 돌아서 만나는 일이 이렇게 만나야 했을까, 영현아.
*
"..어느 집이야"
"어느 집에 초상난 거냐"
아마 내 집 같은데. 영현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니네 집에 났음 ㅇㅇㅇ집에도 났겠네. 이번엔 또 뭐야 둘이 잘 지내나 싶더니만 또.
"말했어"
"좋아한다고"
아. 원필의 손이 영현의 등짝을 강타했다. 등신, 말했어? 친구 한다며 친구끼리 고백하고 지랄났냐? 그래 차라리 때려 시발 나도 좆같으니까. 어쩌자고 말한 거냐고 원필은 영현의 등짝을 아주 두들겨 팼다. 그렇게 맞는 데도 정신이 들지가 않았다. 당장 내일 얼굴을 봐야 하는데, 내가 말해버린 내가 만든 상황인데 앞이 보이지가 않았다.
"대체 뭘 기대하고 이야기한거야?"
"아무것도"
"기대 안 했어"
걸렸어. 내가 그 애를 잘 아는 만큼 그 애도 날 잘 알고 있다는 걸 까먹어서, 간과해서 걸렸어. 애초에 숨길 생각을 한게 잘못한 거 같긴 하지만. 영현은 마른세수를 하고 소주를 깠다. 새끼야 먹지마 먹을 자격도 없어. 원필은 그 잔을 빼앗았다.
"그래서 속이 시원해?"
"무거워 뒤집어지겠다"
"근데 어쩌자고 '그래 맞아' 해버리냐. 누가 행복하라고"
원필은 갑갑했다. 그렇게 아파서 죽을 거 같이 하고 헤어졌으면 완전히 끝난 거 아니야? 그래 끝난 거 아니라고 쳐, 그래서 그걸 다시 하겠다고? 그건 네 생각이고 네 몫이지. ㅇㅇㅇ한테 툭 던져 놓으면 걘 뭘 어떡하라고. 원필의 말이 다 맞았다. 잊지 못한 것도 그렇게 다시, 아니 계속 널 좋아한 것도 나였고 너는 단지 내 욕심에 빨려 들어온 것 뿐이었다.
"호되게 한 번 아팠으면 그만 해 이제"
"...."
"알겠다고 한 번만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
원필은 차마 영현에게 지친다고 말 할수가 없었다. 정말 지쳐 다 놓아버리고 싶은 사람은 영현일 거고 두번째는 ㅇㅇ일 거라는 걸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자신도 조금은 아팠다.
67.
"...으응 여보세요"
- "미안 자고 있었어"
".....아니"
자고 있었던 거 같은데? 아니라구. ㅇㅇ는 졸리운 눈을 비비며 스탠드를 켰다. 안 자써, 안 잤다구.
"보고싶어"
"..나두"
연애하며 가장 오랜 시간 떨어져 있어야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있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흘밖에 안됐는데 이미 보고싶어 안달이 난 걸 보면 말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보다 하고 싶은 말은 보고싶어 였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네가 많이 보고 싶다는 거였다.
"오늘은 어땠어?"
"..네가 없었어"
"그거 말고"
네 하루말이야. 니가 없었다니까.. ㅇㅇ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 아 야 강영현 잠시만. 너 죽을래?
"영상통화였어?"
"응"
죽고 잡냐. 나 지금 자다 깼다고, 몰꼴이 말이 아니라고 이 배려없는 시키야. 그제서야 얼굴을 막 가린 ㅇㅇ를 보고 영현은 휴대전화 안에서 귀여워 죽을라 했다. ㅇㅇ는 손가락으로 틈을 만들어 화면을 바라 보았다. 밝이 환하다 못해 하얗고 눈밭이었다.
"여기 눈 많이 왔어. 어제보다 더"
"같이 오고 싶은데"
"넌 거기에 있으니까"'
졸릴 거 아는데 그래서 전화했어. 봐봐, 예쁘지. 너 눈 좋아하잖아. 영현이 뽀얗게 쌓인 눈을 보여주었다, 저기 눕고 싶다 폭신폭신할 거 같아. ㅇㅇ는 화면을 가까히 가져갔다. 근데 나는 네 얼굴이 더 보고 싶어. 그래? 응 이제 그만 보여주고 네 얼굴 보여줘.
"오늘은 네가 쓰다만 소설 읽고 어, 알바 갔다 왔어. 오늘 되게 지치게 하는 손님이 있었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키고 아메리카노 달라고 막 십분 동안 뭐라고 했어"
"그랬어?"
"분명히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킨 거야. 내가 두번이나 확인했는데 두번이나 뭐라고 했어"
"기분 엄청 상했겠네, 많이 속상했겠다. 자기가 잘못 시키고 ㅇㅇ한테 뭐라고 하고"
"맞아"
"못 됐네, 그거 먹다 혀나 딱 데였음 좋겠다"
"맞아"
근데 왜 울어. 안 울어. ㅇㅇ가 하루를 이야기하고 그 하루를 함께 들어주는 영현을 보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조금 났다. 옆에서 그런 얘기 해줘, 전화기 말고.
"울지마 응?"
"...안 운다니까"
괜히 울면 너한테 짐 되는 거 아는데 눈물은 나는 걸 어떡해. 영현은 속상했다, 옆에서 들어주고 같이 화도 내줘야하는데 옆에 없어서 미안해. 너무 보고싶은데 이렇게 밖에 못해줘서 미안해. 분명 속상하고 또 눈물도 났을 텐데 열 두시간, 세 시간씩이나 기다려 말을 할 수 있게 해서 그게 가장 미안했다.
"금방 갈게"
"어, 그건 아니야. 부모님 충분히 뵙고 와"
"나 안 보고싶어?"
"보고싶어도 기간은 채우고 돌아와. 불효는 하지마 알았어?'
"알았어"
"..사랑해"
"나도"
내가 보고싶은 것만큼 부모님은 두배 세배이셨을거야, 보고싶어도 내가 참는 건 당연한 거야. ㅇㅇ는 눈물을 닦고 영현을 바라봤다, 근데 왜 거기서도 잘생겼어? 영현의 웃음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흘렀다. 야 웃지마 이거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그렇게 웃으면 내가 뭐가 돼. 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알바를 지각해도 좋다 아 그건 안 될 거 같은데. 여튼 그렇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전화를 했다.
"졸린 거 같은데"
"...아니야아"
"정말?"
"더 할 수 있어"
또 전화 할게 이제 자자. 싫어어. ㅇㅇ는 전화가 끊기고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아야 하는 그 순간이 싫었다, 강영현이 곁에 없다는게 너무 절실하게 느껴졌다. 더 할 수 있어? 영현은 끝내 ㅇㅇ가 잠드는 순간까지 전화기를 놓지 않았다. 결국 졸음에 못이겨 까무룩 잠에 드는 ㅇㅇ를 보고서도 한동안 끊지 못했다. 오늘도, 잘자.
*
"야 이거 밥 맞음?"
"그냥 처먹어"
나 지금 예민해. 강영현이 돌아오기까지 아직도 열 두시간이 남았다고, 그러게 내가 밥 먹고 오라고했지. 챙겨줄 기운도 없어 눈도 뻑뻑하단 말이야 하도 휴대폰만 봐서. 원필은 혀를 찼다, 내가 이래서 연애를 안 하는 거야. 못하는 거면서 괜히 갖다 붙인다. 알아도 모르는 척 좀 해 기지배야.
열 두시간이 12일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더한 시간을 보낸 거 같았다.
"..우으 누구세..."
"ㅇㅇ야"
이렇게 오기 있어? 공항으로 가려 했으나 영현이 더 먼저 ㅇㅇ를 찾아 왔다. 곧바로 ㅇㅇ에게 왔다,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 강영현이 서 있었을 때 그만은 시간을 보냈으나 그 순간을 절대로 잊지 못했다.
"...흐으"
"왜 울어"
ㅇㅇ는 눈물을 뚝뚝 떨어 뜨리며 영현에게 비척비척 걸어가 폭 안겼다. 너무 오랜만이잖아. 근데 왜 울어. 보고싶었다구, 영현은 ㅇㅇ를 크게 껴안았다. 내가 더 많이 보고 싶었어. 영현의 모든 것이 그제야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현관에서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찬바람 들어온다고 문을 닫으려 했다가 그것도 제지하고 안기는 ㅇㅇ에 영현은 미소가 귀에 걸려 내려올 생각을 안했다. 나 할 말 많은데.
"들어가자, 감기 걸리겠다"
"..웅"
"왜 없는 새에 살이 빠졌어. 밥 제대로 챙겨 먹었어? 김원필이 또 괴롭혔지, 알바는 괜찮았어? 어제 갔다 왔지"
영현은 캐리어를 거실 한 켠에 잠시 밀어두고 ㅇㅇ를 안아 들고 침실로 가는 내내 물었다. 하나씩 물어봐. 알겠어. 나도 할 말 많거든, ㅇㅇ는 영현의 앞머리를 넘겨주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지금 앞에 있는 거 맞지? 막 눈 감았다 뜨면 또 핸드폰만 있고 그런 거 아니지? 아니야. 앞에 있는 거 맞아 ㅇㅇ야.
"으아"
"아직 새벽이니까 조금 자고 이야기 해도 돼"
"싫어어.."
ㅇㅇ가 영현의 목을 끌어 안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피곤할텐데, 침대에 눕혀 놓긴 했으나 영현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물론 영현도 마찬가지였으나 많이도 그리워했던 ㅇㅇ였기에 ㅇㅇ의 작은 손은 영현의 볼을 살짝 쥐었다.
"..앞으로 내가 잘 할게"
"응?"
"멀리 가지 마아.."
아. 영현이 ㅇㅇ의 눈을 맞추었다. 절대로 멀리 갈 수 없을 거 같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내가 어떻게 가. 영현은 ㅇㅇ의 머리를 쓸었다. 멀리 갈 때에 우리 같이 가자.
"뽀뽀"
"해줘?"
"응"
오늘 왜 이렇게 귀여울까, 영현은 ㅇㅇ의 볼을 살짝 쥐고 입술을 맞춰 주었다. 둘 모두 웃음이 터졌다, 이주 동안 어떻게 떨어져 있었을까. 동이 막 트여갈쯤 ㅇㅇ는 영현의 손을 쥐고 잠에 들어 버렸다. 피곤할만도 했을텐데 기어코 영현이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듣다 잠에 빠져 영현은 그렇게 잠든 ㅇㅇ가 차버린 이불을 다시끔 덮어주었다.
68.
"야 강영현 너 혹시 ㅇㅇㅇ랑 연락돼?"
걔 어디간거야, 어제부터 연락 안 되는데. 영현은 단순히 자신의 연락을 피한다고 생각했다. 회사로 출근했나, 그렇게 월요일을 넘겼으나 원필의 전화에 무언가 뒤틀렸음을 알았다. 전화를 안 받아, 윤대리가 휴가 썼다고 했는데 걔 휴가 쓸 날이냐 지금이? 너한테 안 갔어? 왔으면 내가 지금 차 끌고 여기저기 찾으러 다니고 있겠어? 영현은 거칠게 핸들을 잡았다. 신호음만 갈 뿐이었다, 몇 분에 한 번씩 카톡을 확인했으나 쌓인 1들은 사라질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야 우선 너 때문 아니니까 너 들어가 있어"
"알아"
"알면 좀 들어가. 연락 오겠지"
말도 없이 어딜 갈 애가 아니잖아. 영현이 머리를 헝클였다, 미안 너한테 화 내려고 한 건 아니야. 영현이 올라왔던 화를 억눌렀다. 집엔 확실히 없었고 어느새 전화는 꺼졌다 켜졌다했다. 물론 글은 놓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싸워서 꽁꽁 숨어버리면 그걸 또 어디에 갔을지 눈에 하나씩 보여서 화가 풀릴쯤 데리러 가곤 했는데 너 너무 멀리 간 거 같아. 어딨어 대체.
원필 역시 미친듯이 전화를 했다. 기지배야 쌍으로 걱정시키네 이것들이 진짜 내 손에 죽으려고. 그러나 의외의 곳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알아서 갈테니까 강영현한테 말 하지 말라고, 근데 걸려온 번호가 ㅇㅇ의 것이 아니었다.
"..같이 있어?"
"...데려다 줬어"
"강영현이 지금 걱정하는 거, 아니다. 너 당장 돌아와 그리고 걔 빨리 바꿔"
아주 엇갈리려고 작정을 하는 구나, 원필은 ㅇㅇ의 목소리를 듣고 주저 앉았다. 야 ㅁㅁㅁ 당장 안 데려와? 원필은 으름장을 놓았다, 우선 데려와. 그리고 알아서 해. ㅇㅇ는 이미 ㅁㅁㅁ에게 가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강영현이 밀어버린 걸까. 뭐가 되었건 너 우선 할 말이 많아 당장 와.
*
"야 ㅇㅇㅇ"
"잠깐만, ㅇㅇ씨 우선..."
"너도 할 말 없어, 넌 연락 왜 씹어? 너 가. ㅇㅇㅇ랑 할 말이야"
"..그러니까"
"시발 너 우선 가라고!"
연락해요. ㅇㅇ는 고개를 끄덕이고 ㅁㅁ이 떠났다. 원필은 날카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냥 데려다 준 건 맞는 거 같은데. 사람 피말리게 진짜,
"뭐하냐?"
"뭘"
"싫음 싫다고 강영현한테 가서 얘기해. 왜 잠수타고 사람 걱정 시키냐고, 네가 애야?"
소리는 지르지 마, 나도 지금 힘드니까. 네가 뭐가 힘든데. 싸우자고 한 건 아닌데 나 지금 되게 힘들거든. ㅇㅇ는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원필을 바라 보았다.
"김원필"
"왜"
"..나는 돌아가기 싫어"
근데 내가 강영현을 피하고 생각해 봤는데.
ㅇㅇ는 원필의 앞에 주저 앉았다. 그 애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했을 때 심장이 철렁했어, 근데 그게 아프지가 않았어. 나는 강영현이 너무 미운데 그렇게 미워할 거였는데. 걔가 나한테 깊숙하게 침투해. 끝까지 도망가도 끝까지 쫒아와, 나는 걔를 미워하면서,
"...보고싶어 했어"
ㅇㅇ가 울음을 터뜨렸다. 맞아, 나 강영현 못 잊었어. 그걸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어. 근데 못 잊었어, 그래도 돌아가기 싫어 그때로. 내 마음 가는데로 강영현한테 갔다가 다시 그만큼 아프면 그때는 정말 힘들 거 같아. 그래서 인정하기가 싫어, 내가 그 애를 못 잊었다는 걸. 원필은 주저 앉아 엉엉 우는 ㅇㅇ의 등을 토닥였다. 섣부르게 화내서 미안.
"나는 그 애가 미웠으면 좋겠어, 끅, 그렇게 우리 진짜 끝났으면 좋겠는데 흐으.."
"내가 놓질 못하고 있잖아, 흐끅"
나 진짜 왜 이래야 해. 나 강영현 왜 못 잊어서 이렇게 다시 아파야 해? ㅇㅇ의 시간은 영현이 진심을 이야기 한 그 순간에 멈추어 있었다. 더 앞으로 뒤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진심을 외면하고 있었다.
"헤어지자"
"영현아"
나는 다시 그 애한테 상처를 줄 수가 없어.
ㅇㅇ가 잊지 못한 시간의 끝을 #ㅇㅇ은 자신의 탓,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외면하고 미워했으나 영현에게 상처를 준 것도 그렇게 우리가 헤어진 것도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강영현을,"
"더는 좋아하지 않게 더 잊을 수 있게 노력할테니까, 끅"
"...네가 제발 좀 도와줘"
69.
휴가를 냈다. 당장 너를 볼 자신이 없어 모아둔 휴가를 쓰고 어디로든 네가 없는 곳으로 멀리멀리 가야했다. ㅁㅁㅁ씨의 차를 어찌하다보니 그 차를 타고, 그 사람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줄게요, 생각나면 말해요. 무심코 그 사람의 다정함이 다시 강영현을 불러 왔다. 지금까지 싫어했는데 갑자기 강영현의 고백 한 순간에 그 애가 좋아졌다고, 말도 안 된다. 그냥 아주 짧은 착각이겠지.
"...."
여수까지 왔다. ㅁㅁㅁ씨는 정말 나를 내려주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고, 그곳에 나는 혼자였다. 호텔에서 책을 읽고 밤에는 찬 바닷바람이 부는 곳으로 밤산책을 갔다.
"...해"
"응? 뭐라고?"
"사랑한다구"
바닷가에서 나는 너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네가 있었다, 웃으며 나를 보고 있는 강영현이. 걔를 나는 올려다보고 있었다. 따라오지마, 이런 거도 다 착각이야. 나는 강영현이 밉다고, 미워야한다고.
"사랑해"
그만 말해. 네가 사랑하던 나는 이제 없어졌다고, 그러니까 그만 좀 괴롭혀. ㅇㅇ는 백사장에 주저 앉았다. 영현을 다시 만났을 때부터 과하게 영현을 신경 썼다, 그건 모두 미움의 잔상이라고 생각했지만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냥 잊지 못한 거였다. 아니 사실 너를 잊을 생각도 안 했다, 삶에서 멀어지며 그냥 너를 미뤄둔 것일 뿐이었다. 애초에 잊을 생각 대신 미워할 생각을 했다. 그렇게 헤어지고도 매번 너를 생각했던 거다.
"안 돼. 가야지"
"...치"
"싫어?"
"싫어"
예정보다 돌아오는 시간이 늦은 것도 결국 영현 때문이었다. 기차역 앞에서 문득문득 밀려오는 네 생각에 나는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동시에 이제는 정말로 인정해야 할 거 같았다. 너를 잊지 못했다고. 하지만 다시 돌아갈 생각은 하기 싫었다, 다시 너를 사랑하고 어쩌면 그렇게 헤어지면 나는 다신 일어날 수가 없을 거 같아.
결국엔 그 사람이 다시 나에게 왔다. 못나고 못한 나에게, 전화 한 통에 다시 여수까지.
"물 조금씩 마셔요, ..탈수 올 거 같은데"
"있잖아요"
"응?"
"...노력해볼게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던 그 사람처럼
"받아줄게요"
"...노력해볼게요"
70.
어느새 인터뷰가 한 차례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ㅇㅇ는 영현의 오피스텔로 출근하는 일을 관두었고 영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으나 그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원필은 자신을 붙잡고 울었던 ㅇㅇ를, 그 ㅇㅇ를 미친듯이 걱정하던 영현을 두 사람 모두를 도울 수가 없었다.
- 얼굴 한 번 보자
- 대답 들으려고 안 할게
- 연락줘
영현의 메시지가 휴대폰 위로 쌓여 갔다. 아직은 너를 볼 자신이 없어, 조금만 기다려. ㅇㅇ는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았다. 퇴근 후에는 지쳐 쓰러지듯 잠에 들었고 아침은 전쟁같이 부리나케 출근을 했다. 그 바쁜 나날 사이사이 영현이 있었다, ㅇㅇ의 가방 속 원고르르 ㅇㅇ는 놓지 못했다. 자꾸만 꺼내 피드백을 적고 또 적어 내려갔다.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외근을 나갔다와 종아리가 퉁퉁 부었고 지칠대로 지친 금요일이었다. 아 가서 딱 맥주 한 캔만 하고 자야지.
"ㅇㅇㅇ"
오피스텔 현관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고 있을 쯤이었다. 절대 뒤돌아 보면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 휴대폰 어딨지. ㅇㅇ는 급하게 휴대폰을 열어 ㅁㅁㅁ과 주고 받은 메시지창을 켰다.
"ㅇㅇ야"
그렇게 부르지 마, 너 그렇게 부르면 안돼. 나는 아직 자신이 없단 말이야. 영현의 따뜻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ㅇㅇ를 두드렸다. 잠깐만 이야기 하자, 영현은 ㅇㅇ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ㅇㅇ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급하게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냈다.
"ㅇㅇ야"
"얼굴 한 번만 봐주라"
다정하게 부르지 좀 마. ㅇㅇ는 돌아서 영현을 올려다 보았다, 영현은 고스란히 ㅇㅇ를 걱정했다. 내 욕심 때문에 너는 다시 아프네,
"..네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이제 알겠는데"
"나 너한테 못 가겠어. 나 진짜 어떻게 해야 돼?"
나한테 그만 와. ㅇㅇ는 영현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나는 네가 싫어. 물론 그 싫다는 말의 모순적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내가 널 찾아면서 여기까지 올 줄, 이렇게 아플줄 알면서 내가 벌린 일 같아.
"..울지마"
영현이 ㅇㅇ를 내려다 보았다. 영현의 표정 또한 충분히 아파보였다.
"네가 오고 싶을 때,"
"그때 와도 돼"
"..안 갈 거야"
"...그래도 돼"
*
그 후로 정말 영현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노력해보겠다는 말을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또 강영현이랑 겹쳐 보이는 그 모습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괜찮아요?"
"..아니요"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문득문득 끼쳐 오는 옛날의 우리가 미웠다. 강영현이랑 너무 많은 곳을 다녔고, 너무 많은 것을 나눠버렸다. ㅁㅁ은 ㅇㅇ에게 휴지를 건넸다.
"화장 지워지겠다"
"화장 지워지겠다"
"그래도 울고 싶으면 참지 말고 울어요"
"참지 말고 울어, 그래야 속이 시원해지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릴게요"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릴게, 응?"
영화관에서 두어시간이나 눈물을 닦았으나 ㅁ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휴지가 모두 젖어갈쯤 새 휴지를 뽑아 건넸고, 중간중간 물을 내밀었다.
이제 옥상 바람이 차가워졌다. 아 좀 따뜻하게 하고 올 껄, 숨 돌릴 틈이 생겨 건물 옥상 정원으로 김원필을 불렀다. 커피 한 잔 하자, 니가 타와. 여튼 시키는 걸 제일 잘해. 원필은 ㅇㅇ의 몫까지 타 내밀었다. 세상 얼굴 보는 거 징그럽긴 하다 그치? 응 알면 빨리 말해. 참 좋은 우정이다, 우리. 닥치고 말해 추워 기지배야.
"강영현 말이야"
"..걘 나 없어도 괜찮겠지?"
"당사자한테 물어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정리하려고. 원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잠깐만 뭐라고?
"...이제"
"놓으려고"
*
아 늦었다, ㅇㅇ는 구두를 구겨 신고 달려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하 버스는 갔다 오늘까지도 늦게 일어나냐 으유 등신. ㅇㅇ는 택시를 잡아 타고 블라우스와 치마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아주 공들인 화장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한 번 더 뒤로 넘겼다.
"왔어?"
"응"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영현이 서있었다. 너 그렇게 입은 거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 알아? 그래? 셔츠에 슬랙스, 이렇게 보니까 또 새롭네. 들어가자. ㅇㅇ는 영현의 옆에서 함께 전시회장으로 들어갔다. 사실 작품을 볼 줄은 몰랐다, 연애를 할 때 영현이 매번 데려갔지만 저는 별로 감흥이 없는 건지 이해를 못하는 건지 영현만 졸졸 쫓아 다니곤 했다.
"이제 좀 볼 만해?"
"아니, 사실 아직도 모르겠어"
"그럴 수 있지"
영현이 ㅇㅇ의 머리를 헝클였다. 그래 난 이런 데랑 안 맞나봐. 하지만 두 사람은 가장 오랫동안 전시회장에서 머물러 있었다, 영현의 느린 걸음을 ㅇㅇ는 고스란히 맞춰 주었다. 이것저것 물어가며 하나씩 대화를 이어나가며 한 시간이면 볼 전시회장에서 세시간이나 머물러 있었다. 정말로 그림의 끝, 결말부에 왔을 때 그제서야 ㅇㅇ는 영현의 팔목을 잡았다.
"더이상 아프게 하지 말자"
"우리 악수하고 어른답게 돌아서자"
ㅇㅇ가 먼저 엷은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이제 정말로 남인 거야,
"친구 같은 거, 그런 희망고문은 이제 정말 끝내자"
"내가 울어도 넌 그냥 계속 가. 달래주지 않아도 돼"
"정말 그래도 돼"
영현은 ㅇㅇ가 내민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ㅇㅇ의 손을 잡아 내렸다. 끝인 거 아는데 미안 악수는 못하겠다.
"잘가"
"..잘가"
ㅇㅇ는 끝내 영현에게 미소를 보이고 돌아서 걸었다. 아, 입가에 경련이 올 거 같았다. 전시회장에 또각거리는 구두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다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영현은 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영현의 어깨가 미약하게 떨렸다, 그 마지막 그림의 앞에서 영현은 그렇게 소리 없이 울었다.
"네, 저 그 사거리에 있을게요"
- "금방 갈게요"
ㅇㅇ는 전화를 끊고 전시회장 뒷편에 기대 섰다 이내 주저 앉았다. 울음이 멎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주 혹여 울음이 새어 나갈까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 입을 막았으나 틈새를 파고 들어 나올 것만 같았다. 안돼, 아직 여기를 떠나지 않았잖아.
그렇게 두 사람은 다른 장소에 서 한참을, 정말 한참을 울었다.
그 누구에게도 받아 보지 못할 사랑을 받았어. 앞으로도 그런 사랑은 절대 못 받을 거야, 그 감사한 사랑을 네가 나에게 줬어. 고마워 영현아, 넌 나에게 큰 위안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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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습니다, 끝까지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항상 좋은 말들을 남겨주셔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해 하며 글을 쓰겠습니다. 두 사람이 언젠가 다시 만나길 바라며,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