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가 좋아서 오늘은 사진도 두 개여욧. 다들 즐겁게 읽어주셔요~//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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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안 일어나?"
"으으…."
"아 진짜 못생겼어. 빨리 일어나. 찬열이 일어나기 전에."
"열이 일어났어?!"
"아니. 그니까 얼른 샤워하고 나와."
바등바등 일어나 무작정 물을 틀었다.
"앗 차거!"
순식간에 잠이 깨어 버렸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 온도를 맞추고 빠르게 샤워를 했다.
오늘 애들이 계곡 들어간댔는데. 나는 정말 너무너무 들어가기 싫은데 표혜미는 분명히 날 들어가게 할 게 뻔했다.
어차피 나중에 한 번 더 해야겠지? 싶어, 두 번 하는 샴푸를 한 번만 하고 린스를 발라 끝을 쫑쫑 꼬아 한 쪽으로 모았다.
아침에는 비누로 세수를 해야 되는데, 비누가 없네. 안 꺼내왔던 모양이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표혜미 비누를 쓱쓱 물로 헹구고 내 손바닥 안에서 충분히 거품을 냈다.
얼굴도 꼼꼼히 씻고 렌즈도 깨끗이 세척해 끼운 뒤, 머리를 한 번 더 헹구고 수건을 칭칭 감았다.
-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티셔츠에 최대한 딱 달라붙는 반바지를 입었다.
앞머리는 영 사수하기 힘들 것 같아 애초에 핀으로 넘겨 버렸다.
혹시 몰라 핸드폰까지 안에 두고왔지만, 절대 들어가려고 그런 건 아니고.
내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풍덩 빠지게 될 확률이 99%라 그랬다.
표혜미는 무슨 계곡에 들어가는데 다이빙을 하듯 들어가던데.
사지가 길어 온갖 돌들한테 찔리면서도 좋다고 웃는 걸 보니 꼭 저승사자 같았다.
그리고 남자애들은 진작에 우리가 나오기 한 시간도 전에 물에 들어갔고, 그러니까 나만 땅에서… 아.
"아 너네끼리만 들어가 제발. 나 진짜 무서워."
"그래도 여기 왔으면 한 번 쯤 들어와야지?"
"아 진짜 싫다구!"
"너 물에 들어가려고 핸드폰 놓고 온 거 아니었어?"
"아닌데? 그냥 연락할 사람이 없어서, 으악!"
표혜미는 정말 저승사자처럼 빠르게 이리로 와서 내 발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정말… 정말 너무 무서웠다. 내 몸이 붕 위로 떠오르면서 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그 느낌에 가까워진다는 것이.
가차없이 내 몸은 물 속에 빠졌고 시간은 너무나 느리게 갔다.
몇 분은 물 속에 있던 것 같은데, 혜미가 머리를 쑥 잡아빼서 겨우 물에서 나올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안 나와."
"아씨, 나 물 무섭다고…"
정말 울 일은 아니었는데, 너무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팡 터져버렸다.
얘는 맨날 내가 무섭다고 물 안 들어가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맨날 빠뜨릴까?
혜미는 요만큼도 당황하지 않고 나를 자기 등 위에 싣고 조금 더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갔다.
사실 계곡이라기보다는 강에 가까울 만큼 물이 깊기는 했다.
"야, 저기 소금쟁이! 아씨!"
"아 벌레!"
오만 난리를 치며 열이가 있는 곳으로 가자, 그 애들은 막 무섭게 뒤돌아서 내게 물을 퍼주기 시작했다.
나는 숨도 못 쉬고 눈도 못 뜨고 팔만 엑스자로 교차한 채 물을 쫄딱 맞고 있었다.
나는 정말 물이 싫다.
"아 좀 그만하라고!"
"야, 얘 또 울겠다. 그만해."
나는 정말 빠르게 땅으로 나가서 무작정 다리를 끌어안고 앉았다. 물에 요만큼이라도 더 있으면 정말로 울어버릴 것 같았다.
표혜미가 장난스럽게 비꼬자 갑자기 조금 놀란 것 같은 찬열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까 울었어?"
"어. 내가 발목 잡아당겨서 빠뜨렸거든."
"표혜미가 잘못했네."
종대가 쯧쯧 혀를 차며 혜미 머리를 물 속에 푹 담갔다.
왠지 물 속에서도 욕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혜미가 종대를 푹 들어 물에 빠뜨려버리는 바람에 둘다 골고루 물을 먹었고.
"괜찮아? 먼저 들어갈래?"
열이는 물에 젖은 머리를 하고 이리로 와서 나한테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만 살짝 저었다. 표혜미만 없으면 물에 있는 것도 괜찮아.
"그럼 조금 얕은 데 갈까? 쟤네는 저기 냅두고."
"응. 나 다리 떨려. 손 잡아줘."
찬열이는 내 손을 잡고 물에서, 나는 찬열이 손을 잡고 땅에서 걷기 시작했다.
찬열이 쪽으로 푹 기울어 있었지만 뭐.
내가 생각했던 대로 내 다리는 후들후들거렸고 조그만 돌에도 걸려서 허우적댔다.
"너무 힘들다. 물에 있는 거."
"그 때 어떻게 됐던 건데?"
"응. 그게 그러니까,"
나는 물에 다리만 살짝 담그고 앉았다. 그러자 찬열이도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찬열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우리 아빠가 되게 엄하셨어. 그러니까 나 낳아준 친아빠."
"응."
"그래서, 막, 여자애라도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물에 가두고 나 혼자서 나오게 했어."
"아."
"나 그 때 네 살이었거든. 물에 빠져서 몸은 안 뜨는데 울면서 엄마를 불러도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거야."
"……."
"그래서… 너무 무서웠어. 물에 얼굴까지 다 잠기는 그 느낌이 아직도 너무 무섭고."
"힘들었겠다."
"지금도, 욕조에 물 받으면 너무 무서워서 물 반만 채우고 그래. 좀 트라우마가 된 것 같은데."
"상처가 많네."
찬열이는 내 어깨에 팔을 둘러 감쌌다.
물에 젖은 몸이 마르면서 조금 으슬거리려던 찰나에, 사람의 체온이 닿으니 신기하게 차가우면서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너 물에 들어가도 되는데. 나는 허리까지만 잠겨도 괜찮거든."
"아니, 나 너네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놀았잖아. 그리고 나 어제 잠을 못 자서 좀 피곤해."
"왜 잠을 못 잤어?"
"그냥, 낯선 데라 그런가봐. 원래 수학여행 같은 거 가도 잘 못 자는데."
"그럼 들어가서 좀 잘래?"
고개를 휙 돌려서 눈을 마주쳤는데 생각보다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순간, 어 부끄럽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얼굴에 열이 확 몰려들었다.
찬열이 눈은 진짜 예쁘고 신기하게 생겼는데, 그 눈이 내 얼굴을 슥 내려다보고 있다는 게 참… 설렌다고 해야 할 지 아니면 민망하다고 해야 할 지.
그런데도 눈을 피할 생각도 못 하고 그저 그대로 얼어만 있었고, 찬열이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댔다.
와, 이거 진짜 소설 속 장면 같은데.
소설 속에서는 되게 예쁘고 몽글몽글한 표현들을 많이 쓰던데 나는 '입술을 갖다댔다' 외에는 그것을 무어라 표현하지를 못하겠다.
저 멀리서 혜미랑 종대가 기진맥진한 채 입술이 보라색이 되어 걸어왔고, 나는 찬열이의 볼을 살짝 꼬집고 몸을 일으켰다.
-
점심은 정말 단순 그 자체였다.
엄마들은 우리가 돌아온 걸 보자마자 라면을 십수 개를 끓이셨다.
사실, 놀러와서 라면 먹는 게 제일 맛있기는 하니까 나는 아무 말 없이 먹었다.
이제 세 시 쯤 되자, 엄마들은 또 무슨 이야기를 하며 둥그렇게 앉아 계셨다.
종대는 혜미 무릎 위에 누워서 자고 있었고, 혜미는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계속 종대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찬열이는 저기 구석에서 혼자 기타를 치고 있었는데, 한 눈에 봐도 졸리다고 얼굴에 쓰여 있는 얼굴이었다.
"나 기타 가르쳐 줘."
"기타?"
"응. 내가 C코드 배웠던 건 기억나는데, 어딜 짚어야 되는 지가 기억이 안 나."
그게 뭐야. 어이없게 웃던 찬열이가 내게 기타를 들려주고 내 뒤로 손을 뻗었다.
자, 이렇게 여기, 여기, 여기 이 줄에 맞춰서 손가락을 짚고, 오른손은 튕기면 돼.
"난 왜 안 되지?"
"그냥 힘을 빼고 쭉 튕겨봐."
"안 되는, 아, 손톱 뜯겼다."
아까 물에서 노느라 달랑거리던 손톱이 쭈욱 뜯겨버렸다.
예뻤는데. 어떡하지. 팔자눈썹을 지으며 고민하자 찬열이가 내게서 기타를 거둬갔다.
"내일 가르쳐줄게. 나 너무 졸려."
나는 고개를 까닥이고 나머지 손톱들도 뜯어냈다.
찬열이는 기타를 케이스에 넣더니, 종대를 깨워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
혜미는 물에서 하도 난리를 치느라 다 뜯겨버린 손톱에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까지 젤을 다 떼어 버리자, 혜미는 다시 해야겠다며 단단하게 결의를 다졌다.
"그럼 나도 같이 해 줘."
"어… 근데 엄마 몰래 갖고 왔는데."
"그냥 엄마들 커피 마실 때 해 준다고 하고 같이 하자. 해 주는 건 좋아하지 않을까?"
"모르겠어. 니가 말해 봐. 내가 말하면 무조건 빠꾸."
혜미는 어딜 갈 때든 시간이 생길 것 같으면 네일 세트를 들고 다녔다.
큐어링 기계? 뭐라고 해야 하지. 하여튼 그 빛 나오면서 손톱 구워지는 거랑.
네일 스톤, 도트펜, 프렌치 스티커, 얇은 펜까지.
나 커서 이런 거나 할까? 네일샵?
혜미가 내 엄지에 완전 큰 스톤을 붙이며 그런 말을 할 때, 나는 홀리듯 대답했었다.
어. 너 이거 아니면 먹고 살 길 없을 것 같은데.
"엄마~ 커피 타 줄까? 응?"
"왜. 너 뭐 잃어버렸냐? 문짝 부쉈어?"
"아아니~ 엄마 네일 받으러 가야 되지? 응?"
"엄마가 네일을 왜 해?"
"아니, 엄마 받아야 돼. 응?"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아줌마들 데리고 거실로 나오셔요."
그냥 오랜만에 애교도 부릴 겸 온몸을 베베 꼬며 엄마에게 있는 애교 없는 애교를 다 털어놓자, 엄마는 좋으면서 싫은 척을 했다.
하여간 여사님도 츤데레라니까. 이건 유전인 게 틀림없다.
혜미는 부엌에서 커피믹스 네 개를 뜯어서 물을 붓고 있었고, 거실 테이블에는 젤 네일이 수십 가지 색으로 깔려 있었다.
"어머, 이걸 혜미가 다 한다고?"
"네. 그냥 인터넷 보고 그러면서 하나씩 배운 건데… 별 건 아니구요."
"아줌마도 한 번만 해 줘 봐! 신기하다 이거. 이렇게 불 나오면 되는 거야?"
"네. 이거 샵 가서 받으시면 손톱 한 개당 삼만 원 씩 받는데 제가 특별히 해 드릴게요!"
혜미가 그런 멘트를 치자, 혜미네 엄마께서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셨다.
우리 엄마가 너무 좋아하니까 저걸 혼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행 올 때 저런 걸 바리바리 싸 온 건 또 괘씸하니까.
"어머 혜미야! 너 이 길로 나가면 되겠다. 요즘 젊은 애들 이런 거 많이 하더만!"
"네, 이런 거 자격증 따고 그러면 할 수 있거든요."
"이렇게 잘 하는 거 있으니 얼마나 좋아, 고민할 일도 없고. 그치?"
큐티클을 제거하고 엄마가 고른 베이지핑크 색을 베이스로 깔면서 혜미는 참 착실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런 걸 잘 하지 못해서 그냥 얌전히 내 왼 손에만 이래저래 하고 있었고.
"징어야. 너는 나중에 뭘 할 거니?"
"어, 그냥. 사회복지 이런 거 생각하고 있었는데. 꼭 복지 아니어도 다른 사람 도울 수 있는 거?"
"음…."
엄마는 혜미가 촘촘하게 그리는 장미꽃 무늬를 쳐다보았다.
"내가 봐 온 너는 그렇게 남에게 관심이 많지 않았는데. 사회복지는 정말 남을 돕는 걸 좋아해야 행복하게 할 수 있어."
"모르겠어. 그냥 생각만."
"박봉인 건 그렇다쳐도, 심리적 압박이 좀 강할 수도 있고. 어쨌든 너는 문과 계열로 갈 거지?"
"응. 그래야지."
"문과는 정말 그 중에서 최고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 이과에 비해서 취업하기가 너무 힘들거든."
"……."
"네가 좋아하는 걸 하는 건 좋지만, 네가 정말 감당할 수 있는 걸 했으면 좋겠단 얘기야."
고개를 끄덕였다. 집게로 스톤을 집고 차분히 엄지손톱 위에 올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혜미가 엄마의 손톱을 마무리하자, 종대네 엄마가 입을 여셨다.
"혜미야. 종대랑은 잘 지내고 있니?"
"네. 이러다 결혼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 중이에요."
능청스러운 말투에 금세 분위기가 풀어졌다.
종대네 엄마는 착하셨고, 혜미의 애교를 웃으며 받으셨다.
"우리 종대가 좀 까탈스럽지. 맨날 물어보면 헤어졌어, 하다가 다시 사겨. 하다가."
"음, 둘 다 너무 즉흥적이잖아요."
"그래도 사이 좋아 보이니 다행이다. 사실 난 너네가 여기 와서 싸우면 어쩌지 걱정했거든."
"에이, 별 걱정을요."
혜미는 다시 하얀색 베이스 컬러를 종대 엄마께 발라드리고 있었다.
엄마는 혜미가 시킨 대로 마른 헝겊으로 손톱을 한 번 쓸어내고 햇빛에 비춰 보더니, 또 내 이름을 불렀다.
"징어야. 물론 나도 정님이랑 사돈 맺으면 좋지. 찬열이 멋있구, 공부 잘 하고, 싹싹하고. 뭐가 빠져."
"응."
"그런데, 엄마가 걱정하는 거는, 너네가 만약에 너무 깊게 파고들었다가 헤어졌을 때야."
"에이."
"너네는 헤어져도 모른 척하고 지낼 수 없잖아. 엄마는 정님이 아줌마랑 평생 친해왔는데."
"응."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너네가 평생 사이 좋게 사귀는 것도 아니고, 참…. 이왕 헤어질 거면 좀 좋게 헤어지고."
"아이, 엄마는 무슨 내가 헤어지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냥. 말이 그렇단 거지. 엄마도 안 헤어지고 오래오래 가서 결혼도 하고 그럼 좋지."
나는 아닌 듯 웃으면서 그 말들을 다 받아쳤지만, 솔직히 마음 속에 담아두었다.
솔직히 고딩 연애가 얼마나 가겠어. 이제 문과 이과 나뉘고 수험생이 되고 그러면 또 서먹해지고 헤어지게 되겠지.
그러면 우리는 정말 어떡하지?
분위기가 착 가라앉자, 혜미가 종대 어머니께 예쁜 딥 프렌치를 넣고는 예쁘게 잘했냐며 애교를 부렸다.
잘했다며 웃어주신 덕분에 분위기는 풀렸지만 나는 영 속이 편하지를 않았다.
오른손에도 혜미한테 부탁 받아서 좀 이것저것 꾸미고 싶었는데.
더는 앉아있고 싶지 않아 대충 손톱을 마무리 짓고 졸려서 좀 자겠다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방은 후텁지근했고, 답답했다.
나는 맨 바닥에 베개만 끌고 와 반쯤 기대 누웠다.
-
조금 뒤, 혜미가 다시 방에 들어왔다.
살금살금 와서 내 옆에 그대로 누워버리는 걸 보고 혜미를 향해 살짝 돌아누웠다.
안그래도 지금 딱 묻고 싶었던 게 있었다.
"왜 그랬어, 어제? 왜 갑자기 숲에서 그냥 돌아가자고 한 거야?"
"어제?"
"응. 어제 그 꼭대기까지 올라가자고 했었잖아."
혜미는 핸드폰을 몇 번 의미없이 딸깍대다 이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니. 그냥, 이렇게 힘들게 올라갔는데. 계곡이 시작되는 데는 완전 초라하고 작을 거 아니야."
"…어?"
"너무 많이 기대를 하고 온 것 같았어. 나는 괜히 올라갔다가 실망하고 싶지는 않았고."
영 표혜미가 평상시 할 법한 생각은 아니었다.
얘는 이렇게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는 애가 아니었는데.
"너 무슨 어디서 책 읽었지."
"응."
병사가 공주랑 결혼하려고 청혼을 했대.
그런데 공주는 신분 차이 때문에 거절하고, 대신 백일을 이 테라스 앞에서 기다리면 결혼해주겠다고 했다는 거야.
그래서 병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배가 고파도 물을 마시고 싶어도 꾹 참고 정말 그 자리에서 공주가 있는 궁전만 쳐다보면서 기다렸어.
그리고 99일 째, 하루만 더 기다리면 이제 공주와 결혼할 수 있는데, 병사는 99일 째 되던 날 밤에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갔다는 거야.
"왜 그랬을까."
"난 병사가 또라이가 아닐까 생각해."
"존나 깨네. 아니, 진지하게 좀."
"나는 몰라."
책에서 그러더라고. 병사는 만약에 공주가 자기를 배신했을 때를 상상도 하기 싫었던 거라고.
공주가 만약 자기랑 결혼을 안 해주면 자기는 정말 슬플 거 아니야. 그래서 공주가 자기를 기다렸단 환상을 품고 떠나간 거래.
"글쎄, 만약에 공주가 정말 병사를 좋아했던 것이고, 병사가 백일을 채워주기를 기다렸다면?"
"그럼 반대로 생각해 봐. 공주한테 병사는 수도 없이 많고, 앞으로 살면서 수도 없이 청혼을 받을 수 있지. 하지만 병사는?"
"……."
"병사한테 공주님은 한 명 뿐이지. 그리고 백 일이나 기다려가며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몇이나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끝도 없지 않을까?"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가끔 나는 종대를 보면서 내가 병사고 그 애가 공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어?"
"걔는 솔직히, 노래도 잘 하고 꽤 귀염상에 성격도 착하잖아. 얘 수정이 진리랑 같은 소속사인 건 알지. 그런데 얘가 가수가 되면 나는?"
"……."
"얘한테는 돈도 많고 예쁜 사람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널렸겠지? 그럼 나는? 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깊은 생각을 했더라.
바보 같이 드는 생각은 그게 다였다.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감성적이었지?
혜미는 금방이라도 울 듯 눈이 새빨개졌다가, 이내 베개를 얼굴 위로 올려버렸다.
나는 뭐라고 더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가만히 천장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두 가지는 확실했다.
첫번째는, 혜미가 내 생각보다 종대를 많이 좋아하고 있단 거.
그리고 두번째는, 혜미는 이미 나를 넘어서서 어른이 되어 있었다는 거.
-
저녁을 먹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고 밥을 먹었다.
티비를 좀 보다가 샤워를 했고, 방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몇 시지.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밤 열 시 반이었다.
혜미를 쿡쿡 찔러 데리고 종대랑 찬열이가 있는 방으로 갔다.
똑똑, 노크를 한 뒤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빼꼼 열자 누워있던 애들과 눈이 마주쳤다.
혜미는 곧바로 종대 옆에 누워버렸고, 둘은 또 시덥잖은 얘기를 했다.
얘네 둘이 사귄대. 아 진짜? 또? 걔네 소설 쓰냐? 이런 얘기.
나는 찬열이한테 긴 팔 옷을 챙기라고 하고, 살짝 손을 까닥여서 내 뒤로 따라오라는 신호를 주었다.
몰래 살짝 뒤뜰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투박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진짜 성격 답게.
뒤뜰의 그네가 보이자마자 어린애처럼 달려가 앉았다.
열이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앞머리를 털며 웃고 있었다.
"나 그네 타고 싶었어. 밀어주면 안 돼?"
평상시엔 생각도 못 할 땡깡이었지만, 일단 무작정 피우고 봤다.
그러자 찬열이는 아무 말도 없이 내 뒤로 와서 등을 살짝 밀어 주었다.
원래 나는 그네를 굉장히 잘 탔다. 거의 그네를 180도를 넘겨가며 광범위하게 탔으니.
그네 위에 서서도, 앉아서도 잘 탔고 시합을 하면 언제나 가장 먼저 가장 높이 올라갔다.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찬열이한테 살살 밀어달라고 하는 것이 나조차도 좀 이상했다.
왜 이러고 있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른 거지.
스스로도 정리가 안 되어서 머리가 복잡했다.
한참을 삐걱, 삐걱… 의미 없이 그네가 오갔다.
엄마가 했던 말들, 혜미가 했던 말들이 스쳐지나갔다. 찬열이랑 나의 관계,라던가 하는 것들.
정말 나중에 그렇게 될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은데.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거는. 우리가 시간이 지나서 헤어지더라도, 꼭 좋게 헤어지자?
아닌데.
우리는 꼭 영원할거야?
아니, 이건 더욱더 아니다.
그리고 이윽고 나는 발로 바닥을 쓱 끌어서 그네를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꺾었다.
"녀라. 일루 와 봐."
"왜?"
"내 앞으로. 얼른."
찬열이는 영문을 모르겠단 듯 내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허리를 숙여서 찬열이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고, 그저 어떻게든 내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넘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에 체온이 닿는 것만큼 효과적인 건 없으니까.
"어, 그러니까."
"응."
"오늘, 되게 여러 생각을 했어."
"……."
"사실 내가 뭐라고 해야될 지는 잘 모르겠는데, 음. 이 말로 내 마음이 표현될 지도 모르겠어."
"……."
"나는, 나는 너를…"
어느 샌가 또 울고 있었나 보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언젠데 오늘 두 번째 우네.
살짝 고개를 들어 눈물을 손으로 찍어내자, 찬열이가 달래듯 볼에 뽀뽀를 했다.
깨어나듯 놀란 내가 파드득 고개를 들자, 찬열이는 천천히 말하란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용기를 얻어 다시 말을 이었다.
"어, 그러니까. 나는, 널, 너랑 헤어진다고 해도."
"응."
"널 기억할게."
"……."
"너도, 그럴거지?"
찬열이는 답하듯 아주 느리게 내 입술에 다가왔다.
나는 숨듯이 눈을 꾹 감아버렸고, 곧이어 우리에게 허락된 최대한의 솔직함이 내게로 넘어왔다.
아, 얘는 진짜 하는 모든 행동들이 설레서 어떡하지. 심장이 몸 밖으로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사실 중력이 거꾸로 가해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균형 감각을 잃어버렸다.
지구가 지금의 한 60배의 속도로 핑핑 돌아가는 것 같이 어지러웠다.
그 와중에도 계속 눈물은 방정맞게도 흐르고 있었다.
나는 널 기억할게. 널, 너를, 찬열아. 너를. 기억할게.
찬열이의 손이 내 얼굴 위로 올라와 눈물 줄기를 훑고 나서야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모든 것이 소용 없었다. 이미 내 앞의 찬열이 앞에서는.
☆★☆★☆★
베브입니다.
아 쓰면서 너무너무 힘들었고 매일매일 썼는데도 일주일도 넘게 걸렸지만..
정말로 자기를 대입해서 자기 얼굴을 넣으시고 상상하시면 읽을 때 묘하게 행복해지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하하.
왜이렇게 올리기가 무섭지.. 너무 공들여서 썼나봐요ㅠㅠ. 막 올리기 아쉽고..
사실 이번 편에는 유난히 어두운 장면이 많았는데여. 허허. 서사에 진전을 두기 위한... 본의아닌 오글거림...
어찌 되었든 둘의 첫 키스를 축하하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XD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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